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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몹시 상했다. 이 여자는 저명한 친구를 상대로 어떻게 자신만만할 수 있을까?
전화를 끊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뭐 괜찮아, 뭐 괜찮아, 승리자는 나다. 일하자.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특수한 직업인 큐레이터를 두 번 등장시킬 수는 없다.
등장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기억에도 없고….
다시 쓰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렸다. 여주인공이 퇴근길에 혼자서 아사부의 작은 레스토랑에 들러 낯익은 셰프에게 일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아니야, 썼던 것 같다. 고개를 들어 벽 쪽의 서가를 보았다. 거기에는 자신의 저서들이 꽂혀 있다. 책등은 대부분 옅은 색이다. 저 중 어딘가에…. 불안감이 점점 커졌다.
아이코는 일어나 서가로 가서 자신의 책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썼다면 최근일 것이다. 큐레이터라는 직업을 알게 된 게 최근이기 때문이다.
책장을 훌훌 넘겼다. 누드 카메라맨과 융통성이 없는 여편집자, 인기 없는 재즈 음악가와 가스미가세키의 여성 공무원, 젊은 천재 셰프와 제멋대로인 여배우…. 인기 없는 화가가 나왔을 때는 ‘혹시나’ 싶어 가슴이 철렁했으나 상대는 스튜어디스였다.
그렇게 최근 것부터 다섯 권 정도를 확인했다. 큐레이터는 나오지 않았다. 괜찮을 거야. 기분 탓이라 생각하고 아이코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대기상태인 컴퓨터의 스위치를 다시 켜고 쓴 부분을 읽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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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어났다. 그보다 더 전에 ‘학예사’라는 호칭으로 등장시켰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책을 들고 아이코는 아뿔싸, 혀를 찼다. 바로 지난달에도 똑같은 불안에 사로잡혀 한밤중에 모든 작품을 확인했다. 그때 리스트를 작성해두었더라면 좋았을걸.
서가 앞에 웅크리고 앉아 책을 뒤에서부터 훑어보며 한 권씩 확인했다. 목차를 보면 대개는 남녀 주인공이 생각나지만, 하나하나 꼼꼼히 살폈다. 삼각관계의 라이벌로 썼을 가능성도 있다.
목이 말라 페트병을 옆에 두고 마시면서 확인했다. 실업 럭비팀의 주장과 홍보과 여직원, 오만한 음악 프로듀서와 차분한 스타일리스트, 정의감 넘치는 신문기자와 미모의 국회의원 비서…. 이번에는 메모했다. 아니나 다를까, 상사에 다니는 엘리트 사원은 세 번쯤 써먹었다. 하지만 뉴욕에 부임 중인 캐릭터는 처음이라 그냥 두기로 했다.
딱 한 권, 거무스레하고 두툼한 양장본은 펼쳐보지 않았다. 연애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시간 걸려 모든 책을 조사했다. 큐레이터는 없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기분 탓이었어. 하지만 리스트를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기분이 나빠졌다. 음식을 잘못 먹은 것처럼 속이 메슥거렸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물을 마시고 배에 힘을 주었다. 다음 주까지 50장을 써야 한다. 아직 시간 여유는 있지만 그 후로도 일정이 있으니 미루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