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페미니스트 지도자로 여성들의 출산(재생산) 건강을 교육하고 낙태 기법을 전수하며 클리닉 위민스 헬스 센터를 만든 캐롤 다우너가 지난 13일(현지시간)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에서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일간 뉴욕 타임스(NYT)가 26일 보도했다. 고인은 우리에게 낯선 얘기지만 대 요거트 음모론에 연루돼 기소되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녀가 효모 감염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요거트를 제공한 것을 면허 없이 약품을 제조한 혐의로 기소했다.
딸 안젤라 부스가 고인의 사망을 확인했는데 몇 주 전 심장마비를 일으켜 입원한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고 했다.
다우너는 전업 주부로 여섯 자녀를 기른 뒤 1960년대 말 여성 운동에 합류했다. 전국여성 조직(NOW)의 지방 조직 낙태위원회에서 일했다. 그 몇 년 전에 불법 낙태를 한 경험이 있어서 다른 이들이 그런 고통을 겪게 해선 안된다고 마음먹었다. 하비 카먼이란 심리학자가 자궁을 섹션(진공 흡입)하는 수동 주사 기법을 만들어냈다. 이 방법은 종전 낙태술보다 안전하고 더 빠르며 고통이 덜하다며 조기 낙태를 시행하는 데 이용하면서 의사들에게 전수했다.
다우너와 다른 사람들도 그 기법이 너무 간단해 의학적 훈련이 없어도 시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독학으로 익혔다. NOW의 다른 회원 로레인 로스먼은 카먼의 장비를 킷으로 만들어 'Del-Em'이란 이름으로 특허를 출원하며 변형이 되는 튜브, 실린더, 병 형태로 출시했다. 의료진은 진공 흡입 기법으로 불렀다. 여성들은 월경 흡입이라고 했다. 월경 흐름을 주기적으로 만든다는 뜻에서 일종의 언어 순화로 그렇게 불렀다.
다우너는 베니스 비치의 페미니스트 서점에서 여성들에게 낙태 기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본인이 회고한 대로 그녀가 이 일을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귀기울여 듣지 않으려 한다고 느꼈다. 여성들은 겁을 냈다. 당시는 여성이 뒷방에서 낙태를 하다 안전하지 않은 절차 탓에 죽어가던 시절이다. 그녀는 이 방법이 훨씬 미심쩍은 기법으로 보인다는 점을 알아챘다.
그래서 전술을 바꿨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누워 치마를 걷어올린 뒤 음부에 반사경을 집어넣어 청중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대화는 스스로 하는 낙태법에서 해부학 수업으로 바뀌었다.
여성이 자신의 음부 안을 들여다 본 적이 없었다. 그 시절에는 남자 산부인과 의사도 환자들에게 가르치려고 자신을 해부하지 않았다. 다우너는 “아하” 깨닫는 순간이었다. 다른 지역의 많은 여성들처럼, 특히 보스턴 위민스 헬스 북 콜렉티브의 여성들이 경전으로 떠받들다시피 한 '우리 몸이 우리 자신'(Our Bodies, Ourselves)을 출간하자 그녀는 출산 건강에 대해 여성들을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다우너와 로스먼은 전국을 돌며 경부 검사(cervical exam)들과 월경 주입법을 강의했다. 둘은 저명한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를 감화시켜 그녀는 20세기 가장 독창적인 아이디어의 하나로 선언했다.
다우너는 로스먼이 세상을 떠난 2007년 LA 타임스 인터뷰를 통해 “여성들이 스스로 출산을 통제할 수 있다는 발상은 근본적인 것이었다. 여성들의 정치적 상황에 정수를 건드린 것"이라면서 “우리 둘 다 전체를 확 뒤집고 싶었다. 우리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첫 클리닉을 1971년 LA에 열었다. 이듬해 경찰이 급습해 압수수색했는데 압수품 가운데 딸기 요거트 통이 있었다. 클리닉 활동가가 “당신들 그거 가져가면 안돼. 내 점심이라고” 항변했다. 다우너와 캐롤 윌슨이 면허 없이 약품을 제조한 혐의로 기소됐다. 다우너의 범죄는 요거트 치료법이었고,윌슨은 한 여성에게 횡경막을 달아줬다는 것과 월경 흡입법과 임신 테스트, 골반 검사(pelvic exam)를 했다는 것이었다. 윌슨은 횡경막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 벌금형과 보호관찰 처분을 받았다.
다우너는 요거트 혐의에 대해 맞서기로 했다. 변호인들은 효모 감염을 치료하기 위해 요거트를 쓰는 것은 전통적인 치료였으며, 어떤 경우에도 효모 감염은 너무 일반적이어서 의사의 진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배심원단도 동의해 주디스 A 훅 판사도 무죄라고 판결했다. 훅 판사는 젠더 및 여성학 교수가 됐는데 지난해 “반사경으로 들여다 본, 여성 건강 운동을 검사하다"에다 다우너에게 남자 사환을 보내 감사 쪽지를 보낸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쪽지에 “캐롤, 당신은 진정제(downer)가 아니라 진짜 각성제(upper)!”라면서 “행운을!”이라고 적었다.
대 요거트 음모론은 여성 클리닉의 인기를 높이는 데 도움이 돼 미국 전역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여성 건강 운동에 나서는 많은 이들이 의학 수업에서의 젠더 편견을 제거하기 위해 일했지만 다우너는 가부장적인 기성 질서 탓에 개혁이 쉽지 않다고 느꼈다. 변화가 가능하다고 확신하지 못했다.
그녀는 비영리 단체인 페미니스트 위민스 헬스 센터 연맹을 결성해 여성이 스스로 출산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하지만 많은 페미니스트들과 낙태권 지지자들, 의료 전문가들도 다우너와 로스먼의 가르침을 불편해했다. 보통 사람들이 의료 절차를 익히는 것에 뿌리깊은 반감을 갖고 있었다.
페미니스트 심리학자이며 활동가 겸 저자인 필리스 체슬러는 한 인터뷰를 통해 “캐롤 다우너는 용기와 저항을 아주 무자비한 형태로 보여줬다. 난 의학 수업을 둘러싼 공포를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나 역시 비슷한 불신을 갖고 있었지만, 아마추어 손에 낙태를 맡기는 것이 안전하지도 현명하지도 않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낙태 권리를 합헌으로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례가 확립된 뒤 몇 년은 카먼이 고안한 장비와 진공 흡입 기법이 가장 흔한 수술법이 됐다. 하버드 의대 산부인과 부교수인 루이스 P 킹 박사는 지금도 그렇다면서 의료 전문가가 시행하면 안전한 기술이라고 말했다. 잘못 하면 위험도 있고 합병증도 있지만 제대로 훈련을 받지 않은 경우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녀는 건강과 목숨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이들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며 "전문가들의 도움 없이 사람들이 이런 수단에 눈을 돌릴지 모르고 이런 전문가들에 접근할 기회조차 없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날 슬프게 한다"고 덧붙였다.
1993년 다우너와 낙태 카운셀러 레베카 초커는 낙태를 소비자 권리로 접근한 가이드 북 'A Woman’s Book of Choices: Abortion, Menstrual Extraction, RU-486'를 출간했다. 당시 NYT 서평에 기고한 르 앤 슈라이버는 “정부가 함구령을 내린 시기에 인쇄물 형태의 핫라인”이었을 뿐만아니라 “경고 사인”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소수 의사들이 낙태를 시행하고 몇 안 되는 의과대학에서 그 기술을 가르치며 많은 주정부들이 많은 제약을 강제하던 때 여성들은 다른 이들이 선택이라고 일컫던 위험들을 마지못해 감수하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고인은 1933년 10월 9일 오클라호마주 쇼니에서 캐롤린 아우릴라 체이섬이란 본명으로 태어났다. 부친 미드 체이섬은 가스 회사의 회계사였으며 어머니 닐 스텔 체이섬은 같은 회사의 비서였다. 글렌데일로 이주, 그곳에서 자라났다. 캘리포니아대학 LA 캠퍼스(UCLA)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는데 첫 아이를 임신하는 바람에 1학년을 마치고 자퇴했다. 남편 얼 월리스 브라운은 택시 운전을 하며 계속 대학을 다녀 특수 교사 일을 했는데 결핵에 감염됐다.
가족은 일 년 동안 생활보호를 받았는데 이 때의 경험이 정치에 관심을 갖게 했다고 다우너는 나중에 돌아봤다. 다수의 생활보호 수혜자들과 달리 그녀와 남편은 추가 지원을 받았다. 부모 집을 공짜로 빌려 지냈고, 부모와 동료 교사들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다.
그녀는 2021년 미국의 베테랑 페미니스트들이란 구술사 조사를 통해 “난 차츰 급진적인 정치 의식을 발전시켰다”면서 “난 누구도 일종의 비공식적인 지원 네트워크나 속임(hustle) 없이는 생활보호를 받으며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고 털어놓았다.
그녀는 네 자녀를 낳고 또 임신해 낙태를 결심했을 때 남편과 별거했다. 1962년이었는데 캘리포니아에서 낙태가 합법이 되기 5년 전이었으며,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나오기 11년 전이었다. 그 절차는 숙련된 누군가에 의해 의학적으로 안전하게 행해진 반면, 그녀는 마취를 하지 않아 경찰이 테이블 옆에 아무런 가구가 없는 사무실 같은 곳에 들이닥치면 벌떡 일어나 달아날 수 있었다.
부스 말고도 LA에 살던 다우너는 다른 두 딸 로라 브라운과 셸비 콜먼, 두 아들 데이비드 브라운과 프랭크 다우너 주니어, 여덟 손주, 여럿의 증손주를 남겼다. 둘째 남편 프랭크 다우너와는 1965년 결혼했는데 그는 2012년 세상을 떠났다. 또 한 명의 딸 빅토리아 시겔은 2021년 저하늘로 떠났다.
다우너는 1980년대 말 다시 상아탑으로 돌아가 1991년 캘리포니아주 코스타 메사에 있는 휘티어 법과대학에서 이민과 고용 법을 전공해 학위를 땄다. 훅 박사는 "캐롤 다우너를 시작으로 현재 재생산 권리와 재생산 정의 활동가들이 죽 있어왔다. 그녀의 활동은 여성들이 머리와 손, 가슴을 모두 쓸 수 있는 한 형태를 보여줬다”고 단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