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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17년 8월 6일 주일오전
성경봉독 : 사12:1-6; 엡4:22-32
본문 : 시37:1-11
제목 : “악인으로 인해 분내지 말라”
주일오전찬송
경배찬송 - 시105편 1,2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146편 2-4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42편 4,5,7
설교 후 찬송 - 시37편 1-3
성찬식 찬송 - 시23편 1,2,3
폐회찬송 - 시18편 8,9,13
악인으로 인해 분내지 말라
제가 소년기를 보낼 때 또래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무협이었습니다. 당시 젊은 성룡이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고 있었고, 중학생 남자 아이들은 학교에 가면 무술교본 같은, 그림으로 자세가 설명된 책 같은 걸 돌려보거나 갖고 있었던 그런 때였습니다. 무협이 인기가 있다 보니 소설류의 책들도 무협지가 인기가 많았습니다. 영웅문 3부작은 사조영웅문,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이렇게 세 가지인데, 유선방송이 시작된 때에 낮에 TV를 틀면 반드시 이 셋 중의 하나는 TV에 하고 있었던 그런 때였습니다.
이런 무협의 세계관을 들여다보면 아주 중요한 토대가 되는 소재가 “복수”입니다. “아버지의 복수”, “스승님의 복수”, “우리 혈족의 복수” 뭐 이런 복수들이 무협 세계의 기본을 깔고 있는 굉장히 중요한 소재입니다. 주인공은 이런 복수들을 위해서 평생을 무공을 연마하는데 힘을 쏟고, 결국에는 최후에 악당을 무찌르고 복수를 완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혹시 이런 무협의 세계에서 “주인공의 복수를 완성하고 난 후”를 한 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생각해 보신 적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과연 복수를 평생의 목표로 살아온 사람에게 있어서, “복수 후의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일곱 살에 아버지를 잃고 삼십 년을 복수를 위해서만 무술을 연마해 오다가, 복수를 마치고 나이가 사십이 되었는데, 그렇게 평생을 치열하게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복수를 추구하며 뼈를 깎는 삶을 살다가, 복수가 끝났다고 과일장수가 되거나 동네 도장 사범으로 나머지 삶을 사는 것도 웃기는 일이 아닙니까?
도대체 이 사람의 삶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책에서 영화에서 재미있게 보기는 했지만, 과연 복수라는 것이, 한 사람이 평생을 다 바쳐서 그렇게 매진할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일까요? 악당은 주인공의 아버지를 죽여 놓고 평생을 호의호식하면서 재밌게 살다가, 죽기 직전에 주인공을 만나서 한 번 싸우고 그렇게 죽는데, 그렇게 치자면 평생 동안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또 고수가 된다는 게 쉬운 일도 아닌지라 온갖 죽을 고생을 다 하면서 내공을 올리고 또 수련을 한 주인공에 비하면, 오히려 이 악당의 삶이 훨씬 더 괜찮은 삶이 아닌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시편 37편 말씀은 여기에서 시작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복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복수란 평생을 그렇게 들여서 모든 것을 다 버릴 만한 값어치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이라곤 사실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복수자의 복수를 위한 평생의 삶 역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매일 매일이 행복한 삶이었을까요, 분노와 증오와 악으로 가득찬 삶이었을까요? 시편 37편의 앞부분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악인에게 분노하며 시기하지 말라.”
악인에 대한 분개의 삶
시편 37편은 우리에게 우리가 통상 잘 생각하지 않는 한 주제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소 이런 궁금증은 자주 가집니다. “왜 악인이 성공하고 의인이 실패하는가?”, “왜 세상에는 악을 행하고도 득세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가?” 이런 생각은 우리가 자주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나름대로 성경적인 대답을 갖고 계신 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질문은 이것과는 약간 다른 것입니다. “악인이 형통하는 이유는 접어두고, 그 때 내가 그 악인을 향해 분을 품는다면, 그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사실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불평과 투기
1)
37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참 고상하게 번역을 했습니다. “불평하여 하지 말며”가 아닙니다. “불평하여”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분노로 타오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본적으로 이 말의 어원은 “불타오르는 것”입니다. “격노”인데, 타오르는 듯한 격노입니다. 그러므로 37편 1절 말씀의 시작은 이것입니다. “악인들 때문에 노를 불같이 타오르게 하지 말라.”
우리 성도들 중에 (저도 그렇고) 정의로운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악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면 쉽게 불타오릅니다. 격노를 발합니다. 탁자를 쾅! 하고 치면서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이렇게 분을 토합니다. 의롭지 않은 상황, 의롭지 않게 진행되어가는 세상, 이런 것들을 볼 때 분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시편 37편의 시작은 이런 것입니다. “악인들 때문에 그럴 필요 없다.”
2)
그 다음에 나오는 “투기하지 말라”는 성경에서 “질투”를 말하는 대표적인 단어입니다(히. 카나) 보통은 결혼 관계에서 부부 사이에 끼어드는 이를 향하여 생겨나게 되는 질투입니다. 시기심, 질투, 이렇게 번역을 하는데 “투기하지 말라”도 적절한 번역입니다. 보통은 부부 관계에 쓰이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악인에게 “투기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악인에게 투기할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악인에 대해 무엇을 질투한다는 것입니까? 이는 악인이 잘 되는 것에 대한 말입니다. 악을 행하는데 승승장구하더라, 바로 그 때 너는 그 악인을 보면서 질투하지 마라, 1절 뒷부분의 뜻은 이것입니다.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자,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왜 시편은 악인의 악에 대해 불같이 노를 타오르게 하지도 말고, 악인의 승승장구에 대해서 질투하지도 말라고 하였을까요? 이런 분노나 질투는 아주 자연스런 감정이고, 어떤 때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마음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이유를 보시려면 7절과 8절을 읽어보시면 됩니다. 함께 7,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우리가 처음 설교의 서두에서 들었던 “복수자”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평생을 복수에 바친 사람에게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또 그렇게 복수를 위해 칼을 갈았던 이의 평생의 마음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결국 이 사람은 평생을 “자기를 파괴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악을 행했던 이가 보복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스승님을 죽이고, 혈족을 말살시킨 악당이 평온하게 제 생을 다 살다가 가야 한다, 이런 정의의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문제는 일단 저쪽으로 놔두고, 잠시 다른 생각을 해 보자는 것입니다.
복수의 삶을 살 때, 복수의 삶은 그 당사자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것이 그를 어떻게 만드는가? 이것이 우리가 오늘 관심을 가지려는 부분입니다. 그 때 성경이 알려주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복수의 삶은 결국은 자기 자신을 파괴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복수로 상대를 죽여본들 사실상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복수가 끝났을 때 남는 것은 공허뿐이고, 복수를 위해 살아온 삶들은 사실은 헛된 것을 이루기 위해 평생 자기 생을 낭비한 삶일 뿐이게 됩니다.
시편 37편이 말씀하는 요지는 이런 것과 유사합니다.
악인이 심판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요지는 “악인을 보고 격분을 발해본들, 악인 때문에 온갖 질투심을 다 동원하여 그 악인을 미워해 본들, 그것이 결국 나에게는 무엇만을 남기는가?” 8절의 끝부분이 결론입니다.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내가 망가진다는 것입니다.
악에 대해 분개할 때, 혹은 악인의 승리를 질투할 때, 결국 망가지는 것은 자신입니다. 시편에서 “우리”, 즉 신자들은 언제나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복 있는 사람이 자신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멀쩡하게 있으면서도 다른 이 때문에 망가지거나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악인의 승리 때문입니다. 악인이 자기를 건드린 것도 아닌데, 복 있는 사람이 혼자 무너지는 이유가 이런 것입니다. 악인은 악인이 악을 행할 때 분개하지 않습니다. 악인은 악이 자신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그럴 때는 당연히 그렇게 하는 거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악인은 악인의 악에 대해 화나지 않습니다. 의인이기 때문에 악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이고, 의인이기 때문에 악인이 잘 되는 것에 대해 질투하는 것인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의인의 특성 때문에 의인이 망쳐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8절의 결론을 명심하십시오.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악인을 없애버리기 위해 악인이 된 이는 의인입니까 악인입니까? 악인을 처벌하기 위해 칼에 피를 묻힌 사람은 의인입니까 악인입니까? 악인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의인의 특성이지만, 거기에 치우칠 때 결국 의인은 “행악에 치우치게 될 뿐이다.”라는 것이 시편 37편이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주려 하는 이야기의 요지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악인이 세상을 집어삼키든 말든, 악인이 아무리 악을 행하든지 말든지, 거기에 대해 화도 내지 말고, 행악하게 되니까 그저 참으면서, 그렇게 살라는 것일까요? 시편 37편은 그저 세상에 대해 수수방관하면서, 악인의 악들도 그냥 웃어넘기면서 그렇게 사는 삶이 의인의 삶이라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악인에게 분개하는 것이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는 말씀의 진정한 의도는 어디에 있을까요?
1. 그들의 결국
시편 37편을 찬찬히 묵상해보면, 악인에게 분개하는 것이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고 말씀하신 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에게 세상에 관심을 두지 말고 홀로 유유자적하면서 영적 세계에만 탐닉하라고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행악자들의 악에 대해 내가 화를 내고 분해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에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1절에서 분노하지 말라는 이 첫 주제가 나왔었습니다. “행악자를 인하여 격노하여 불타오르지 말아라, 불의를 행하는 자가 승리하는 것에 대해 질투하지 말아라.”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행악자를 인해서 단지 화를 내지 말라는 명령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유가 함께 주어진 것입니다. 그 다음절을 보십시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전 세계적으로 살펴보면 그리스도인들은 민주당 지지자들보다 공화당 지지자들이 많습니다. 이 말은 신자들은 보통의 경우 체제 순응적이라는 뜻입니다. 보통 어느 나라에서나 민주당 진영은 세상을 바꾸자는 쪽이고, 공화당 진영은 세상을 유지하자는 쪽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나라에서건 보통 다 체제를 유지하자는 쪽, 즉 공화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최근 미국 대선을 보아도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데에 미국 교회들이 압도적인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우리들의 경우에서도, 앞에서 “악을 행하는 이들에 대해 분개하는 것을 하지 말아라. 이는 행악에 치우친다.”는 말씀을 들을 때, 기본적으로 정서가 만족되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이들에 대해서 싸우고 분투하는 것보다, 교회는 멀리 물러나 앉아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그렇게 세상에 뛰어들기보다는 성령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일하시기를 간구하면 된다, 이렇게 정서적으로 만족이 되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편 37편의 의도는 “악인이 악을 행하더라도 단순히 반응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악인이 세상에서 어떤 나쁜 짓을 해서 승승장구하더라도, 신자는 저 하늘만 바라보면서, 주님 다시 오실 날만 기다려야 한다, 그것을 말씀하는 데에 이 구절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편 37편은 이런 안연한 삶과 좀 다른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승리를 보고 분개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단지 내 성격이 더러워지기 때문이라기보다, “그들이 곧 풀과 같이 베어 넘어질 것이기 때문에, 채소처럼 쇠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것은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세상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가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와는 전혀 달리, “너희가 그렇게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악인이 세상에서 승리할 때, 그것을 보고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화를 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곧 그들을 쓸어버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입니다. “행악자를 인해 불처럼 타오를 필요가 없다, 승승장구하는 악인을 보고 질투할 필요 없다, 왜냐하면 내가 곧 그들을 풀처럼 베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활개를 치는 악을 보고 분개하지 말아라. 그들의 결국은 멸망이다. 결국 다 스러져 없어져버릴 잠깐의 융성을 보고 그렇게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화를 내어 본들, 결국은 너희들이 악을 행하게 될 뿐이 아니냐, 나는 심판자 여호와요, 악에 대한 징계는 내 손에 있으니, 너희는 나를 의지하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
하나님께서 의인들에게 악인들로 인해 화를 내고 질투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세상은 그냥 포기하고 내버려두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결국 심판하실 것이므로, 우리가 그것 때문에 마음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 백성을 향해 있습니다. 시편에는 악인들이 많이 나옵니다만, 단 한 번도 악인이 주인공인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언제나 자기 백성들을 향해 있습니다. 악인들을 향해서 의인들이 마음을 상하고, 또 그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때로 의분에 차게 될 때에도 하나님의 마음은 자기 백성들을 향해 있습니다.
세상에 배신당한 듯이 보일 때 하나님의 백성이 진정 실족하는 것은 세상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편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악인이 융성할 때 왜 의인이 실족합니까? 악인을 융성케 하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내버려두시고 악인들을 잘 되게 놔두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뽑아버릴 테니 화낼 필요 없다. 악인이 융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일 안에서 잠깐 그런 것이니, 하나님의 백성인 너희들은 그 일 때문에 실족할 필요도, 화낼 필요도, 분개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행악자를 인하여 불같이 타오르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질투하지도 말라.”
이것이 1절과 2절에서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악인의 승승장구를 보고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는 무엇이냐? 분개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결국 그들을 뽑아버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바타흐 & 선을 행하라
1)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주의 백성들이 악인으로 인하여 분을 내고 질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주의 백성이 “머물러야 할 곳”도 함께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이 사실이 3절과 4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3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악인으로 인해 분을 내지 않는 대신, 성도가 머물러야 하는 자리는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여호와를 의뢰한다”는 것은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전에 “바타흐”를 배웠는데요, 여기 “의뢰하여”가 “바타흐”입니다.
우리가 예전에 바타흐를 배울 때, 신약의 “믿음”의 구약 번역어가 바타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때 이 바타흐의 뜻을 단순히 “믿음”으로 번역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말 “믿음”이라는 말 안에는 “견고함, 확실성, 흔들리지 않음”이라는 뜻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타흐에는 이런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여기 “의뢰”라고 번역된 이 말의 뜻은 첫째는 “하나님을 믿음”이요, 둘째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흔들리지 않음”입니다. 여호와를 의뢰한다는 것은 “단지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으로 인해 환경이나 상황 속에서 요동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은 1절과 2절을 이해하고 들은 주의 백성들의 태도입니다. 악인들이 승승장구하는 듯이 보일 때 그것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지도, 질투하지도 말라고 할 때, 하나님은 그 이유를 “곧 그들이 풀처럼 베임을 당할 것이며, 채소처럼 쇠잔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우리가 이러한 격노와 질투 가운데 사로잡히지 않을 방법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견고한 것입니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의심하면서 요동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비록 악인들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듯이 보여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풀처럼 베고 뽑아버리실 것이라는 약속은 확실하기 때문에 주의 백성들은 “안심하면서” 그들 때문에 분개하거나 질투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믿음”과 “확고함!” 이 둘이 모두 “여호와 의뢰”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는 악인들의 융성에도 왜 신자가 흔들리지 않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여호와를 향한 단단한 신뢰 위에 기초해있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여러분! 3절 말씀을 보시면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은 이어지는 두 내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3절 문장은 and 두 개로 연결되어 있는 세 문장이 붙어 있는 문장입니다. 이 세 문장은 첫째는 “여호와를 의뢰하라”이고, 둘째는 “땅에 거하여 선을 행하라”이며, 셋째는 “성실을 식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며 사는 삶이 무엇입니까? 악인의 성공에 요동하지 않으며, 그들의 마지막이 풀과 같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사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그 다음에 나오는 “선을 행하라”는 말씀을 볼 때 울컥함을 느꼈습니다. “선을 행하라”는 일반적인 명령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선을 행하라는 명령은 자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 뒤에 나오는 “선을 행하라”가 그렇게 제게 각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보면 “선을 행하라”라는 말씀 뒤에 “땅에서 살라”는 말씀이 붙어 있습니다. 여기 “산다”는 것은 터를 잡고, 정착하여, 거주지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인에게 요동하지 말고 선을 행하는데, “땅에 터를 잡고, 땅에 자리를 펴고 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가 선을 행하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는 “땅에 터를 잡고 삽니다.” 시편 37편은 신자들에게 “선을 행하라”고 하면서, 우리가 선을 행하는 삶이 현실과 아주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터를 잡고 살아가면서 선을 행하는 삶이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고난과 슬픔이 많은 세계, 악인이 융성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오해하고, 때로는 그 일로 말미암아 실족하는 곳, 바로 그곳이 땅입니다. 바로 이 곳에 서 있는 주의 백성들에게, 특히나 이 중에서 승승장구하는 악인들, 자기보다 더 잘되는 악인들을 보면서 화도 나고 질투도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악인에게 실족하는 대신 선을 행하라, 그리고 네가 그렇게 실족대신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할 곳이 바로 이 곳 땅이다. 너는 네 삶이 저기 멀리 하늘에만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오해받고, 상처받고, 슬픔이 있는 곳이 바로 이 땅이며, 그 오해와 상처와 슬픔 가운데 있으면서도 선을 행하는 것이 네가 살아야 할 길이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의 삶의 모습이다.”
우리의 삶은 “내세만 바라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이가 땅에서 용감히 살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불의로 속상할 때도 있고, 어려움과 슬픔이 있을 때도 있지만, 신자는 여호와를 의뢰하기 때문에 “땅에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의의 융성에도 그로 인하여 낙심하지 마시고, 여호와를 의뢰함으로 이 땅에서 선을 행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서로 격려하는 우리들이 됩시다.
(“성실”은 분량상 생략)
3. 참된 만족으로서의 기쁨
그리고 끝으로 4절 말씀은 “기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기 때문에 땅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여호와를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시편 37편을 읽어보면, 특히 앞부분에서 저는 이런 인상을 받습니다. “평온함”, “만족”, “안달하지 않음”, “평화를 즐김” .......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1절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악인 때문에 의인이 안달하고 힘들어 하는 모양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여호와 의뢰와 땅에서 선을 행하며 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악인이 악의 결과로 심판 가운데 처하게 될 것은 하나님께서 기정사실로 둔 것이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그것으로 안달하지 말고 그냥 묵묵히 자기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이 때 굉장히 중요한 것이 “기쁨”입니다. 4절에 “여호와를 기뻐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주석에 보면 이 “기쁨”을 “주로 진미에 적용되며, 아주 부드럽고, 달콤하고, 맛있고, 즐겁게 먹는 것을 가리킨다.”1)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악인으로 인하여 고통당하지 않는 자가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주는 기가 막힌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편의 의인은 정말 악인으로 인한 고통에서 마음을 끊은 것입니다. 그런 척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의뢰해 버렸기 때문에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정말 끊어진 것입니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그분께서 모든 것을 선하게 이끄실 것을 믿기 때문에, 정말 평온하고 만족스럽게, 행복하게 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성경공부를 할 때에도 성경이 재미있고, 성경공부가 기쁘고 행복하고 즐겁지 않으면 오래 지속할 수가 없듯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일은 우리에게 “노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폭군을 섬기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요, 무엇보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시편은 이것을 “진미에 적용되는 단어, 맛있고 즐겁게 먹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여호와를 즐거워하고,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아주 큰 기쁨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구약의 여호와의 절기가 엄숙한 제사뿐이었던 것이 아니라, 그 엄숙한 제사 뒤에 커다란 기쁨과 축제의 시간이었듯이, 우리가 이 땅에서 악인의 형통을 바라보며 고민하던 자리에서 놓임을 받았을 때, 우리의 참된 기쁨이신 분이 커다랗게 우리 앞에 다가오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맛보고 즐기는 것, 그 하나님을 만끽하는 것! 이것이 악인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들과 정반대되는 의인들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면서 지나치게 불평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삶이 잘 풀리지 않는 것 같다고 투덜대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전 안에서 하나님을 누리는 기쁨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세상에 어디에 있으며, 만군의 주 여호와를 아버지로 갖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쁜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가졌으며 예배마다 맛봅니다. 따라서 우리는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면 됩니다.
정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