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머지 삶을 음악으로 채운 그들, 국내 요절 가수
삶이 그리 길지 않을 것임을 미리 예견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들은 청춘의 시간 동안 치열하게 음악에 매달렸고, 짧은 시간에도 엄청난 음악의 유산을 우리에게 남겼다. 그리고 홀연히 세상을 떴다. 이들에게 음악을 했던 시간은 행복과 고뇌가 섞인 순간들이었다. 우리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만으로 이들을 기억하곤 한다. 그래서 요절한 가수들은 천재가 되고, 이들의 이야기는 신화가 된다. 이들을 존경하고 추모하는 건 이들이 천재이고, 이들이 신화를 남겼기 때문이 아니다. 청춘의 시간 동안 음악에 고뇌했던, 음악과 삶을 맞바꾼 젊은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네이버 유저들의 관심을 받았던 국내 요절 가수들을 살펴보았다.
글 / 권오경 (음악인)
검색으로 듣는 음악 '국내요절가수' (2011.10.01 ~ 2011.10.31)
근데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다니?
"근데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다니?"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북한군으로 분한 송강호의 대사다. 영화의 맥락에서 스토리를 좌우할 만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명대사로 꼽히고 있다. 이건 김광석의 힘이다. 그의 목소리는 시공간을 초월해 교감의 매개체가 된다. 지난해 말 독일 힙합 그룹 디 오르존스는 김광석을 추모하는 노래를 발표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여 년이 훨씬 지난 시점에서 유럽 대륙의 젊은이들이 왜 "그는 한국의 밥 딜런(Bob Dylan)이었어. 그는 한국의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었어."라고 외치는 것일까.
그는 '위대한' 가수라기보다는 '삶 속에 들어와 있는' 가수였다. 일상을 노래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희로애락이 모두 들어있었다. 좌절과 희망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는 대중을 압도하려 하기보다는 대중 곁에서 위로하는 법을 택했다. 그의 목소리가 시공간을 초월하는 힘을 지닌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동물원 등 그룹 생활을 거쳐 솔로 활동까지 약 12년의 음악 인생 동안 그는 숱한 명곡을 남겼다. 지난 10월 KBS2 [자유선언 토요일-불후의 명곡 2: 전설을 노래하다]에도 그의 특집이 마련된 바 있다.
1천 회 공연을 끝내고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96년 1월 6일이었다. 우리 나이로 서른셋 되는 때였다. 그해 8월에 나온 실황 앨범 [김광석 인생이야기]에는 그의 조그만 소망이 들어 있다. 7년 뒤 마흔 살이 되면 할리 데이비슨 하나 사 세계여행을 다니겠다고 했다. 이 말을 전하고 그는 바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불렀다. 그리고 바람처럼 떠났다. 그 짧은 시간을 기다리지 못했다. 매년 새해가 시작되는 즈음이면 그가, 그의 목소리가 1월의 차가운 바람처럼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잔인한 11월, 그들이 떠났다
10월의 마지막 밤과 11월의 첫 새벽이 교차하는 시점에 항상 술잔을 기울이곤 한다. 10월의 마지막 밤이라는 상징성 때문이기도 하고, 11월의 첫날 세상을 등진 그들 때문이기도 하다. 11월 1일은 김현식과 유재하의 기일이다. 사랑과 청춘을 노래하다 떠난 그들에게 건배를 제의하며 이날의 술자리를 끝내곤 한다. 이런 지가 벌써 10년이 훨씬 넘었다.
김현식에게 '사랑의 가객'이라는 표현만큼 어울리는 수식어가 있을까. 그는 뜨겁게 사랑을 노래하다 훌쩍 우리 곁을 떠났다. 삶의 굴곡이 많았다. 성공과 좌절을 반복했다. 앨범을 내고 명성을 얻어갈 무렵 대마초 흡연 등 여러 일이 그를 정점에서 끌어내리곤 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사랑했어요' '비처럼 음악처럼' '내 사랑 내 곁에' 등 숱한 명곡을 발표한다. 그는 술과 담배로 자신을 혹사시켰다. 결국, 간경화로 1990년 11월 1일 삶을 마감했다. 병상에서도 그는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다.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했고, 다행히 녹음테이프가 전해져 음반으로 발매되기도 했다.
유재하는 김현식보다 정확히 3년 먼저 1987년 11월 1일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한양대 작곡과 재학 시절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등에서 건반을 연주했던 그는 클래식 음악과 재즈의 요소를 우리 가요에 녹이고자 노력했다. 이런 실험은 1987년 그의 데뷔 앨범에서 결실을 맺는 듯했지만, 발표 3개월 뒤 교통사고로 삶을 마감했다. 데뷔 앨범이 유작이 됐다. 하지만 이 한 장의 음반은 우리 대중음악사의 패러다임을 바꿀 만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적 발라드의 첫 시작이었던 것이다.
11월은 잔인한 달이다. 김현식과 유재하뿐 아니라 김정호, 김성재, 배호 등이 모두 11월에 우리 곁을 떠났다. 김정호는 우리 대중음악계가 꼭 기억해야 할 싱어송라이터다. 국악 명가에서 태어났던 그는 어린 시절 병치레를 자주 했던 탓에 음악을 친구 삼아 외롭게 성장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음악엔 처절한 외로움이 깊이 배어 있다. '이름 모를 소녀' '하얀 나비' '님' 등의 곡을 관통하는 정서는 외로움이다. 결핵으로 죽음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도 그는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다. 가족의 음악이었던 국악에도 몰두해 '님' 같은 곡을 남기기도 했다.
김성재는 이현도와 '듀스'를 결성해 우리나라에 힙합의 씨앗을 뿌린 이다. 1995년 11월 20일 숙소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이었다. 그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첫 솔로 앨범이자 유작이 돼버린 [...말하자면]에 실린 '봄을 기다리며'에서의 봄은 과연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돌아가는 삼각지'를 부른 배호는 1971년 11월 7일 우리 나이 서른에 세상을 등졌다. 올해 11월 7일은 그의 40주기 기일이다. 활동기간은 5년이 안 됐지만 20여 장의 앨범에 300여 곡을 발표했다. 반면 부활의 보컬이었던 김재기는 '사랑할수록' 한 곡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스스로를 포기했던 그들
서지원은 스무 살 성년이 되던 첫날 스스로 청춘을 포기했다. 1996년 1월 1일이었다. 김광석이 떠나기 5일 전이었다. 2집 발매를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어떤 삶의 무게가 어린 그를 짓누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유작 앨범에 실린 '내 눈물 모아'는 그를 추억하는 쓰린 단서다. 채동하는 올해 5월 세상을 떠났다. SG워너비 활동으로 많은 사랑을 받다 솔로로 전향, 새로운 음악 세계를 펼치려던 그였기에 주위의 안타까움은 더욱 컸다. SG워너비 활동 전 솔로 데뷔곡이 'Gloomy Sunday'였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8위에 오른 장덕은 80년대 대표적인 여성 싱어송라이터였다. 친오빠인 장현과 함께 '현이와 덕이'라는 팀으로 활동했다. 귀여운 외모로 많은 인기를 누렸다. 당시 그녀가 쓰고 불렀던 곡들의 면면을 보면 지금도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이은하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도 그녀가 쓰고 노랫말을 붙인 곡이다. 장현이 설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면서 그녀는 오빠의 병간호를 맡아 했다. 그러다 불면증에 걸리게 되고 결국 수면제를 과다 복용해 사망했다. 그녀가 떠나고 6개월 뒤 장현도 세상을 떠났다.
삶과 음악의 가치 비교
찰리 파커(Charlie Parker)는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재즈 뮤지션이다. 또한, 대표적인 요절한 천재로 꼽힌다. 짧은 시간 속에서도 그는 재즈의 패러다임을 바꿀 만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술, 마약에 찌들어 살다 35살의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그가 죽었을 때 검시관은 그의 나이를 65세로 추정했다. 스스로 삶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만약 더 많은 시간을 살았다면 음악의 역사가 수십 년은 앞당겨졌을 것이다. 대중의 사랑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는 가수라면 스스로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사랑을 보내준 팬들에 대한 보답이기 때문이다. 또한, 대중들은 요절한 천재보다도 그들과 함께 오래 호흡할 수 있는 가수를 더 많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삶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