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의 효과 외 2편
임승유
모자안에
황갈색의
작은 고양이는 잠이 들었다
너무 멋진
잠자리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곤란했어.
근시인 남자가
무심코 모자를 썼다.
― 요시유키 준스노케. 「뜻밖의 일」 중에서
친척 집에 다녀와라
가족 중 하나가 그렇게 말해서 여자아이는 집을 나섰다
친척 집에 간다는 건
페도라, 클로슈, 보닛, 그런 모자를 골라 쓰는 일 모자를 쓰고 걸어갈 때 모자 속은 아무도 모르고 모자 속을 생각하면 모자 속에 있는 것만 같다 긁적이며 생쥐가 태어나는 것만 같다 고모와 당고모와 대고모의 발바닥으로 가득한
그런 친척 집이 있는 것만 같다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아이와
아이와
아이를
모자를 벗으면
등 뒤로 걸어 나오는 삼촌이 있고
높은 가지 끝에서 植物의 잠을 자다
너는 자주 들켰다*
사촌이 몸 안으로 들어오면 여긴 모르는 곳 구름과 이불 이불과 구름이 잘못된 발음을 할 때처럼 죄책감이 들어 풀잎과 꽃잎과 풀잎 우린 그만큼 가까운가요? 풀숲의 기분으로 달려도 도착하게 되지 않는다 모자 속에서 나쁜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짓이겨지는 풀잎과 짓이겨지는 꽃잎 중에 뭐가 더 진할까? 피는 물보다 진할까? 친척이 물 한 컵을 줄 때는 숨을 참으면 된다 맛도 안 나고 냄새도 안 난다
웃는 이가 된다
젖은 웃는 이가 된다
친척 집에 간다는 건
페도라, 클로슈, 보닛, 그런 모자를 골라 쓰는 일 그런 모자 속으로 사라지는 일 모자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건 또 모자만 아는 일
*이성복. 「핏줄이 번지듯이」 중에서
어느 육체파 부인의 유언장
모든 육체적·정신적 감각 대신……이 모든 감각의
단순한 소외, 즉 소유라는 감각이 나타났다
― 칼 마르크스. 「사유재산과 공산주의」 중에서
발목은 허공에게
어떤 밤들을 쿵쾅거리고 어떤 밤들은 이어달리기를 할 것이다 달려가는 우주에서 누군가는 자주 어지럽겠지만 한때 나의 소유물이었던 발목에게 가장 어울리는 처분이라 사료됨
동그란 무릎은 계단에게 옥상에게 옥상의 물탱크에게
차올라 있는 느낌으로 오랫동안 고독
귀는 빗방울에게 둥글게 만지는 날씨에게
뽑아서 던진 눈동자는 까마귀에게 캄캄한 밤하늘로 날아가는 우주기 짓고 있는 마지막 표정인 날씨에
구릉, 키가 큰 구름, 눈썹, 무덤, 연필, 식탁보, 그리고
가장 멀리 있던 코는 종려나무에게
이제 와 고백하자면 나는 자주 규슈의 길가에 서 있었다 17번가 모퉁이 카페 시계는 주로 오후 3시에 멈춰 있다
발바닥은 길바닥에게 던져주고
내가 살아서 유일하게 한 질투는 떠나는 자들을 향해 있었지 그런 기분으로 허공에 손바닥을 올려놓는다
입술은 태양에게
이후로 토마토는 익어간다 입맞춤 속에서
손톱은 피아노에게 이 순간에 어울리는 스마일은 필요하고 창문을 타 넘어가는 나의 육체, 안녕
그러나 나는 설탕은 폭력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각설탕을 깨물어 먹고 싶었던 적이 있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읽었던
여자들의 가슴과 사내들의 아랫도리
이건 가학적인 포즈로 읽히기 십상이지
당신에겐 슬리퍼가 필요해요
릴랙스 릴랙스
어제 잡은 물고기, 라테, 빨간색이 사라진
귀여운 당신의 팬티
눈이 내린다
온몸을 던져 만들어내는 흰색들
티스푼으로 몇 날 며칠을 저어도
이상해요
달콤한 당신을 보면
나는 당신의 두 손을 만져보고 싶어져요
혼자 뒤뜰에서 벙그러지는
아름다운 꽃들처럼
속임수는 견딜 수 없게 아름다워요
내 치명적인 약점은 아름다움을 믿지 못한다는 거예요
에이프런을 두른 소녀가
밤새 당신의 창가에서 성냥을 그어대고 있어요
믿을 수 있겠어요?
당신이 우적우적 깨물어 먹고 있는
불빛 불빛 들
*롤랑 바르트. 「카메라 루시」 중에서
― 임승유 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문학과사회 / 2015)
임승유
1973년 충북 괴산 출생. 2011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그 밖의 어떤 것』,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김준성문학상, 현대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