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6일 토요일. 여행 8일 차.
기분 좋게 잠에서 깨어났다. 고도는 2,500m. 이제 이 정도 높이에서는 고소 느낌이 없다. 새벽 5시가 안됐는데도 창밖이 밝았다.
호텔 앞 강가에 나가니 넓은 강폭에 비해 수량이 소박하다. 흐르는 물들은 모두 빙하와 설봉의 눈이 녹은 물이다. 척박한 지형이기에 토사(土沙)가 함께 쓸려 내려와 물빛이 검다. '카라코름 하이웨이'의 '카라'가 검은 색을 뜻한다는데 이름 붙은 연유를 알겠다. 고인 물에 비친 거대 암벽의 반영이 아름답다. 때 마침 일출이 시작되어 찬란한 햇살이 산등성이에 업혔다. 날이 밝은지 오래이지만 주위의 높은 산들 때문에 태양이 보이지 않다가 이제야 나타난 것이다. 여명의 시간이 엄청나게 길다. 청정지역의 해돋이는 남다르다. 찌를 듯 다가오는 태양의 빛살에 눈이 움찔한다.
조용한 아침시간. 한가롭게 벤취에 앉아 주위의 풍광을 바라보면서 여행기나 적어대는 내 모습이 좋다. 바쁠게 없다. 천천히 가자. 본전 뽑는답시고 너무 많은 것을 하려들지 말자. 모양 빠지는 짓 말자. 어짜피 이제는 빼기인생 아니런가. 가끔은 자아도취(自我陶醉)도 좋겠다. 괄낭(括囊)이면 무구(無咎)라 했으니 되도록이면 입은 닫는게 좋겠다.
간단히 차려진 아침 상. 비록 구운 식빵에 파라타(짜파티의 구운 버전) 몇장이지만 이곳 특산 살구잼의 풍미가 보태어져 기분 좋은 식사가 되었다. 특별히 마련된 쌀죽은 별미로 대접받기에 손색 없겠다.
식사를 마치니 태양은 벌써 중천이다. 오늘은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파수빙하'를 답사하기로 했다. 이 곳은 두시간 정도의 간단한 산행으로써 이후 예정된 본격적 트래킹을 위한 워밍업인 셈이다.
트레킹 코스의 들머리는 호텔에서 멀지않다. 가는 길에 몇군데 뷰 포인트를 들러보기로한다. 여러 경관지 가운데 이른 바 '복만이 뷰 포인트'라고 하는 자리는 그야말로 절경이다. 앞뒤가 툭 트인 채로 둘러 선 고봉들과 대협곡이 어우러져서 장쾌함의 끝판왕이 되었다. '복만이'는 이번 여행의 안내를 맡은 파키스탄 현지 교민이다.그는 거의 20년째 파키스탄에 거주 중인데 여기 파수에 와서 이 자리를 발견한 뒤 스스로 이름을 붙였고 종국에는 여기에 자기 이름을 걸고서 카페를 차릴 꿈을 기지고있단다. 현재 투자자를 물색 중인데 절대 망할 이유가 없다고 호언장담이다. 슬쩍 투자를 권유하며 촬영 써비스를 한다. 덕분에 젊은이들 흉내 내며 쩜프샷까지 시도 해본다. 아직은 무릅이 살아있었다. 다행이다.
메인도로를 벗어나니 비포장 도로가 시작된다. 제트(Z)자로 이루어진 가파른 경사길을 힘들게 올라 트레킹 들머리에 도착. 머리 위에서는 구름 한점 없이 태양이 작열한다. 하필 올 들어 가장 뜨거운 날이란다. 다만 습도가 높지 않아서 견딜만 하다. 썬그라스는 기본이고 얼굴을 가린 두건에 목수건까지, 미리 대비한 옷차림은 전신을 가렸다.
트레킹 초입은 짧은 비탈길이다. 잠깐 새에 올라서니 벌써 빙하의 혀(氷舌)가 눈에 들어온다. 그 위로 빙하의 본 줄기가 설봉 사이로 하늘 닿게 이어졌다. 하얀 끝에 이어진 푸른 하늘이 유난히 돋보인다. 일행 여섯이 약속이나 한 듯 함께 감탄사를 뱉어낸다. 멋지다. 다들 장관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에 진심이 된다.
이어지는 고난의 오르막길. 군데군데 뷰 포인트가 있지만 사진이고 뭐고 뜨거운 날씨에 귀찮기 그지없다. 그저 앉아서 다리 쉼 하는게 우선이다. 특히 마지막 구간 삼십분은 사십도 경사도를 가진 준 너덜지대의 미끄러운 길이다. 결국 일햄중 두명은 중도 포기, 네명 만이 오늘의 목적지에 닿았다.
비탈길 마지막에서 한걸음 더 올린 순간 갑자기 드러난 파수빙하. 하늘 땅으로 이어진 얼음 줄기가 장관이다. 아까 저 아래서 올려다 보며 감탄했던 광경은 되려 소박한 것이었다. 신은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좋은 것을 감추어 두었다더니 과연 그렇다. 작열하는 땡볕 아래라도 좋다. 넷이 서로 어울려 온 사방을 배경으로 촬영에 진심이 된다. 그래도 남는 것은 사진 뿐이라더라. 이제 더 세월이 흘러 사진을 찍어도 보여줄 사람이 없게 되면 어이할꼬.... 그저 '있을 때 잘하고 살자'를 되뇌일 따름이다.
하산 시작.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꽃들이 이제는 눈에 들어온다. 특히 우리네 해당화를 닮은 가시나무가 군데군데 널렸다. 때마침 개화기여서 피어난 꽃망울이 소담하다. 메마른 땅이어서 비록 꽃의 크기가 작다고 해도 강인한 생명력 만큼은 인정해야한다.
천천히 가까운 빙하와 멀리 대협곡을 감상하며 하산한다. 빙하수가 모여 이룬 호수가 푸른 빛으로 보석처럼 박혔다. 이처럼 거칠고 메마른 산악지대에서 오아시스에 다름 아니다. 아름답다. 호수가 레스토랑에서 역시 전통 커리로 약간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커리 맛은 인도 보다는 파키스탄이 훨씬 나은 듯 하다. 이전에 세 차례 인도 여행을 하면서도 별반 맛난 커리를 만나지 못했는데 여기 와서는 먹을 때 마다 모두 그 맛이 훌륭하다. 듣자하니 '고기 요리는 인도 보다는 파키스탄이 낫다.'함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란다.
점심 후 잠깐 호수 가에 내려왔다. 원래 빙하호수에서 수영을 해 볼 요량으로 수영복을 미리 챙겨서 나왔는데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그을릴 정도로 빛이 강하기도 하려니와 괜히 홀로 오버하지 말자 싶다. 좀 피곤해서 그런지 물에서 나온 뒤 뒷 수습이 심난하다. 곁에 있던 젊은이의 손을 빌어 사진 몇장 찍어두고 주변을 둘러 본 뒤 숙소로 귀환. 오는 길에 닭 사육 농가에 들러 오리지날 토종닭을구매. 오늘 저녁의 식탁을 위하여 네마리의 계공(鷄公)이 그만 외로운 넋이 되고말았다.
숙소에 돌아와 씻고서 한숨 자고나니 해는 벌써 서산에 지고 여분의 햇빛만 반대편 설봉(雪峰) 끝에 살짝 얹혔다. 이내 어둡기 시작한다. 여행길 벗들이 모두 나와 각자의 방식으로 땅거미를 즐긴다. 테라스 의자에 걸터앉아 여행기에 몰두한 내 자신도 편안하다.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지만 세상에 이런 호강이 없다.
만찬시간. 트래킹에서 돌아온 복만이가 혼자 애 많이 썼다. 도움도 필요 없이 굳이 혼자해야 편하단다.
백숙의 부재료는 중국을 떠나올 때 카스카르에서 미리 사두었다. 국제버스를 탈 때 복만이가 나에게 부탁했던 짐 꾸러미가 바로 그거였던가 보다.
식탁이 풍성하다. 먼저 나온 닭죽이 속을 편안케한다. 국경을 넘어온 식재료들이 제대로 어우러져 맛을 냈다. 이어 나온 쟁반 위의 백숙된 닭이 푸짐하다. 이역 만리 타국에서 한국식 닭백숙이라니!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이 요리가 마련된 과정을생각하니 그야말로 천금 값에 해당한다. 역시나 좋은 안주감. 하지만 오늘 역시 뽕술의 유혹을 잘 견뎌냈다. 여행길 금주를 잘 이어가고 있는 스스로가 대견하다.
일기예보에 내일 새벽부터 비 소식이다. 널어두었던 빨래는 거의 말랐다. 건조한 날씨에 바람까지 있으니 세탁에 불편이 없어 여행길이 한결 편안하다.
뜰에 나와 올려다보니 어제는 잘 보이던 북두칠성이 희미하다. 비소식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