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8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마르코 2,13-17
자신들이 죄인인 줄 아는 공동체에 머물라
어제 복음은 네 명의 믿음이 있는 공동체 안에 머무른 병자가 죄도 용서받고 병도 치유 받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리 레위가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는 내용입니다.
내용이 전혀 상관없는 것 같지만 마르코는 여기서 레위가 어떤 공동체에 머물렀는지를 알게 합니다.
바로 ‘죄인이며 병자임을 깨닫게 하는 공동체’에 머문 것입니다.
반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며 병자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속한 공동체는 무엇이 죄인지 알게 할 수 있는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이끼’(2010)는 한 타락한 형사가 사람들을 따르게 만드는 힘이 있는 목사와 협력하여서 한 시골 마을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 형사는 큰 죄를 지은 이들을 자기 마을에 살게 하며 자신은 이장으로 권력을 누립니다.
그러나 깐깐한 목사가 눈엣가시입니다.
목사가 죽자 그들에게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들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그 마을에서는 그들에게 벌을 내릴 아무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들과 어울리며 자신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을 몰아내면 그만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 공동체는 모두가 다 자신들이 죄인임에도 그것을 감추고 의인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누가 들어와도 다 의인처럼 자신을 여깁니다.
그러면 죄를 용서해 주러 오신 분이 필요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미리내 천주성삼 수도회 임언기 신부가 임종 직전 한 냉담자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갔었습니다.
본인이 청한 것은 아니고 주위 신자들이 청했던 것입니다.
병자는 이미 배에 복수가 차 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는 죽음을 목전에 둔 간암 말기
환자였습니다.
사실 당사자는 오랜 냉담을 하고도 병자성사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은 말을 할 수 없는 처지인 줄 알고 일일이 십계명을 읊어주며 해당하는 것에 고개만 끄떡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병자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신부님은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확신하고 방을 나섰습니다.
그때 신부님의 뒤에서 환자가 크게 외쳤습니다.
“나 죄 없어!”
물론 외적으로는 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공동체에 머물 줄 몰랐습니다.
구원을 위해 자신들이 죄인임을 아는 공동체가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모두가 눈 하나만으로 생활하는 마을에서는 오히려 눈 두 개를 사용하는 사람이 병든 것입니다.
눈을 고치려면 두 눈으로 정상적으로 사는 마을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라고 하십니다.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게 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란 영화 제목이 있었습니다.
조직 보스인 형을 죽인 한 킬러를 동생 킬러가 복수하기 위해 쫓는다는 내용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황정민, 이정재는 모두 킬러입니다.
황정민은 이정재의 형을 죽였고 이정재는 그래서 황정민에게 복수하기 위해 쫓습니다.
여기서는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떤 악에서 구해달란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다 죄인이지만 서로 남의 탓을 하며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황정민이 자신의 딸을 만났을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자신이 살아온 삶이 어린 딸의 순수한 눈에 죄인으로 비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주는 트렌스젠더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죄인으로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황정민은 그에게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은 면을 발견합니다.
내가 그보다 나을 것이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결국, 황정민은 딸을 위해 희생하고 그에게 딸을 맡깁니다.
죄로 물든 이 세상 공동체 안에서는 내가 죄인인 줄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서로 자신들의 죄를 눈감아주고 타인을 죄인이라 여기며 살기에 누가 들어가도 그곳에서는 의인이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공동체는 모든 이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공동체입니다.
그 안에 들어와 혼자 의인인 체할 수 없습니다.
나로 사는 이상 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리서는 “완덕의 길은 십자가를 거쳐 가는 길이다.
자아 포기와 영적 싸움 없이는 성덕도 있을 수 없다.”(2015)라고 하고, “예수님께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자아’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2745)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버리는 길은 ‘기도’이기 때문에
“기도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분리될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같은 사랑의 문제이며,
그 사랑에 따른 자아 부정과 관련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2745)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죄인 줄 알아야 ‘자아 부정’이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은 선이시고, 선을 받아들이려면 악인 나는 죽어야 합니다.
이 진리를 품은 공동체에 머물러야만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나’가 죄이고 ‘그리스도’만이 선인 줄 모르는 공동체에 머물면 결국, 내가 의인인 줄 착각하고 살다가 그 공동체와 같은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18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복음: 마르 2,13-17
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사가로 추정되는 세리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는 광경이 참으로 파격적이고 경이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를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선발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72 제자단의 하나로 뽑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가장 핵심 제자단이라고 할수 있는 12사도 가운데 하나로 선택하셨습니다.
이런 광경을 목격한 둘러서 있던 사람들, 특히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동시에 쯧쯧 하고 혀를 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단은 희망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세리라는 신분에 대한 이미지는 최악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직무상 벌어들이는 수입은 짭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매국노, 로마 앞잡이, 수전노, 인간 말종...이런 레위를 핵심 제자 가운데 하나로 뽑으시는 예수님의 처신을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자신 같은 죄많은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신 예수님의 크신 자비에 크게 감사하며, 그는 예수님을 위한 성대한 저녁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동료 세리들과는 송별회를 겸한 잔치였습니다.
자연스레 그 잔치 자리에는 당대 뒷골목을 주름잡던 유명 인사들이 줄줄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들 가운데 앉으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포도주 잔을 부딪치며 건배도 하시고, 맛나게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스캔들이 다시 또 없었습니다.
가슴에는 성경과 율법서를 간직하고, 얼굴은 짐짓 거룩한 표정을 짓고, 늘 가방끈 긴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절대 상종하지 말아야 할 세리나 죄인들과 태연하게 어울리는 예수님의 모습에 그들은 화가 단단히 나 제자들에게 따졌습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귀 밝기가 보통이 아니셨던 예수님은 그들의 세상 구려 터진 생각과 마음들을 즉시 파악하셨습니다.
그들을 향해 귀가 번쩍 뜨이는 은총의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당대 잘 나가는 고관대작들이나 주류 세력들이 아니라 어딜 가나 인간 대접 못 받던 세리,
죄인들과 마주 앉아 허심탄회하게 담소를 나누시던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주간 토요일 강론>
(2025. 1. 18. 토)(마르 2,13-17)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똑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3-17)”
1)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마태오 사도’입니다(마태 9,9).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사도로 뽑으신 것은, 세리였기 때문이 아니라, 또는 죄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도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 그들의 과거나 직업 같은 것은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사도로 뽑으신 일에 대해서,
죄인을 사도로 뽑으셨다고 표현하거나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뽑으셨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 당시의 사회적인 편견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옳지 않은 일이고, ‘세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뽑으셨다고 표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옳습니다.
당시의 세리들이 사회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다고 해서 오늘날의 우리까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직업만 보면서 모든 세리들이 다 도둑이었고,
죄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나쁜 편견입니다.
세리들 가운데에는 죄인이 아닌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꾸짖으신 말씀이 많이 있지만, 모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전부 다 위선자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타나엘’은 율법학자였는데,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라고 그를 칭찬하셨습니다(요한 1,47).
또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였는데, 우리는 그가 위선자가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처럼 세리들이 전부 다 죄인이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나를 따라라.”는, “나의 제자가 되어라.”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마태오를 보자마자 부르신 것은 아닐 것이고, 그를 계속 눈여겨보시다가
적당한 때가 되었을 때 부르셨을 것입니다.
마태오 사도 입장에서 생각하면, 어부 출신 사도들처럼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과정이 먼저 있었을 것이고, 제자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또 부르심을 기다리면서,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분의 부르심에, 또는 믿지도 않는 분의 부르심에, 준비되어 있지도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응답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식사를, 루카복음서 저자는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라고 기록했습니다(루카 5,29).
마태오 사도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직업을 버렸을 텐데, 과거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면서, 자기를 불러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기 위해서, 또 동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잔치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 잔치에 참석한 세리들 가운데에는 ‘죄인들’도 있었을 것이고, ‘죄인이었지만 회개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15절의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다.” 라는 말은, 세리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었고, 회개했음을 나타냅니다.
<진심으로 회개했다면 그들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리들 같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예수님을 비난하는 율법학자들의 말은
직업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한 ‘부당한 비난’입니다.
4)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말씀은, “나는 병든 이들과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왔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나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왔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이들과 병든 이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의인과 죄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병든 이들’이고, ‘죄인들’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아입니다.
‘모든 사람’이 전부 다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특정 계층 사람들만 만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들도 만나셨고, 이방인들도 만나셨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만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도 만나셨고, 부유한 자들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에는 “너희는 건강하다고 자처하지만
너희도 ‘병든 이들’이다.
너희는 의인이라고 자처하지만 너희도 죄인들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회개와 구원이 필요한 ‘똑같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가리켜서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고 죄를 짓는 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