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모든 드라마는 불법이다 / 허정도
이런 제목을 쓰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내가 쓰고도 당황스럽다. 수년간 드라마 현장에 몸담아왔던 배우로서 씁쓸함을 넘어 자괴감까지 드는 표현이다. 나도 이렇게 불편한데, 너무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이게 과연 지혜로운 일일까. 그냥 방금까지 썼던 평범한 ‘대책 요구’ 글을 끝까지 예의 바른 톤으로 완성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이 글을 쓰고 나면 드라마와는 영영 끝이겠지. 온갖 생각이 머릴 스친다.
하지만 얼마 전 드라마 현장의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을 알리는 글(www.actordo.com)을 쓴 뒤, 지금까지 고민하고 공부해온 결론이 이렇다. 모든 드라마는 수많은 불법 속에서 탄생한다. 슬프지만 사실이다. 여기까지 쓴 것을 보니 아무래도 중간에 그만두진 못할 것 같다. 지울 때 지우더라도 일단 가슴이 시키는 대로 끝까지 한번 써봐야겠다. 이 제목 이대로.
가장 먼저는 ‘최저임금법’ 위반이다. 매우 편한 드라마 제작 현장을 만나 하루 18시간씩 한 달에 24일만 일한다 쳐도 325만원을 받아야 한다. 장담컨대, 이 법을 위반하지 않은 현장은 하나도 없다.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에는 아동·청소년의 노동시간을 제한함과 동시에 계약서에 구체적인 보호조항을 명시하라고 되어 있지만, 이를 지키기는커녕 알고 있는 현장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이외에도 현장의 안전 및 보건을 위한 조치와 관련해선 모두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이며, 방송사와 제작사가 지불해야 할 캐스팅 디렉터의 임금을 조·단역 배우들의 출연료에서 20~30%씩 떼는 것은 ‘직업안정법’ 위반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근로기준법’이 남았다. 나는 연장근로 특례업종을 명시한 근로기준법 제59조 때문에 이 살인적인 무한노동이 합법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이 조항엔 분명 “사용자가 근로자 대표와 서면합의를 한 경우”로 대상을 제한하고 있지만 이를 지킨 현장은 단 한 번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따라서 그동안 이뤄졌던 모든 살인적인 연장근로가 불법이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중간 착취, 휴게, 휴일, 해고, 임금 가산, 근로계약 등 내가 아는 위반 사항만 해도 10개는 족히 된다.
하… 이렇게 쓰고 보니 서글프다 못해 화가 난다. 그러니까 법을 고치거나 새로 만들 필요도 없었다. 물론 근로기준법 59조는 반드시 폐지되어야 하고, 아동·청소년을 위한 보호책은 더 강화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최소한 이미 있는 법들이라도 지켰다면, 아니 근로기준법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지켰다면 우리의 현장이 이렇게까지 비인간적이진 않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과로사로 죽고, 무리한 일정에 교통사고로 죽고, 화재로 죽고, 자괴감과 모욕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모든 억울한 죽음들이 결국 법 하나만 제대로 지켰어도 막을 수 있는 일들이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이제 이 모든 불법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관행’이 되어버렸다는 것, 따라서 이제는 그 누구도 이를 불법이라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지난 12월엔 두 아이의 아버지인 누군가가 촬영장에서 떨어져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고, 그로부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또 한 명의 스태프가 과로로 쓰러져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도대체 얼마나 더 죽고 얼마나 더 다쳐야 우리의 관행은 깨질 것인가. 법보다 높은 대우를 받고 있는 이 관행이란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지 47년이 지난 지금,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제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허정도 배우
등록 2018-01-29 18:07 수정 2018-01-30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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