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예 목기명장 1호 서태랑 씨. 경기도 고양시 행주외동 행주성당 옆 100평 남짓한 무허가 비닐하우스에서 하루 10시간 이상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서태랑(徐太郞·63)씨. 왼손 하나로 10여개의 칼을 능숙하게 사용하며 나무 제기(祭器)를 깎고 있다.
야트막한 언덕바지에 있는 가건물에는 의당 있어야할 ‘태원목기연구소’라는 간판도 없다. 48년 경력의 서씨는 지난 97년 노동부로부터 ‘목기명장(木器名匠) 1호’로 선정된 목기 제작 분야의 국내 최고 장인(匠人)이다.
외팔로 도전한 전통목기장 인생
그의 어두컴컴한 공장 내부에는 초갈이, 재갈이한 각종 목기들이 하얀 몸체를 드러낸 채 높이 쌓여있다. 작업복에 신문지로 만든 고깔모자를 쓰고 작업에 여념이 없는 서태랑 명장은 이웃집 할아버지의 모습그대로다.
“명장이라고 머리 세울 일도 없고 달라진 것도 없다”는 그는 다만 자신의 위치에서 지금까지 48년간 해오던 일을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묵묵히 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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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기를 깎을 때 생기는 나무부스러기인 칼 밥이 수북이 쌓인 바닥에 발을 묻고 목기의 형태를 만들어가고 있다. 희미한 백열등 불빛 따라 나무가루가 뽀얗게 날리는 공장 정경이 내리는 봄비와 어우러져 조금은 서글픈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서 명장의 모습은 더없이 평온하다. 한길을 반세기 가량 변함없이 걸어온 장인의 거칠 것 없는 일상이다. “사는 방법이야 다양하지만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저는 한 쪽 팔목이 없는 장애자입니다. 남만큼 제대로 살지도 못했는데 뭐 쓸 이야기가 있겠습니까….” 이날 이때까지 나무그릇만 만들어 온 것 외에 내세울 것이 없다며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목공예가 좋다기보다는 먹고 살기 위해 해왔다는 게 솔직한 이야기죠. 신체장애를 딛고 명장이 된 것은 정신적으로 강하다고 할까요, 남들이 한번 할 때 나는 두세 배 노력해야 정상인을 따라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왔지요.”
‘전통목기에 전념하면서 선대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왔고, 명장이 되기까지 가족들이 뒷바라지를 해줘서 더없이 고맙고, 자기 직업에 만족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현실에서 나는 만족보다는 내 신체적 장애를 극복해야한다는 마음으로, 절반가량은 내 다짐대로 헛되이 살지는 않았구나하는 마음’이라는 게 서 명장이 스스로 돌아보는 자신의 삶이다.
서 명장은 목기가 일반 소비자들로부터 인기가 시들했던 탓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일생일업(一生一業)을 변함없이 지켜 나갔다. “자기가 서있는 자리가 어딘가를 살피고, 서있는 자리에서 옳다고 판단되면 집념을 가지고 그대로 살아가면 후회는 없다”는 그의 삶에 대한 자세가 한 분야의 최고 경지라고 하는 명장으로 끌어 올린 것이리라.
서 명장은 비록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과 같은 장애자를 제자로 받아들여 성의껏 가르쳐 독립시킨 일에 보람을 느낀다고 털어 놓는다.그동안 그는 4명의 장애인을 지도해서 독립시켰고, 얼마 전에는 그중 한사람인 최현규(34세)씨도 경기도 양평에 가게를 냈다.
“팔자는 타고난다는 말이 있는데 내가 그랬어요. 나무토막에 목기의 원형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데 장애가진 팔이 나도 모르게 움직여지더라고요.” 재미도 있고 욕심도 생겨 1년 정도 나무 깎는 일 즉, 초갈이를 열심히 하니 비로소 선생님이 본격적으로 기술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다시 1년 반 동안 남들 보다 두 세배 노력을 기울여가며 초갈이와 건조, 재갈이, 8~9번에 걸친 옻칠 등 전 과정의 기술을 연마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가게를 내기에 이르렀다.
성한사람도 3년 이상 공부해야하는 재단작업과 칠 공부를 2년여 만에 마친 서씨는 18세에 독립한 것이다. 그런 그의 소문이 널리 퍼져 대전에까지 불려가서 일을 해주기도 했다.
지난 84년에는 한국 민속촌에 있는 전통공예품 시연장 겸 판매장인 한국공예에서 불러 서울까지 올라왔다. 그곳에서 5년여를 지내다가 89년에 민속촌을 떠나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에 자리를 잡았다.
끊임없는 노력 타고난 목기장이
이 무렵을 전후해서 그는 목기제작공정을 개량하는 작업에 착수 했다. 먼저 초갈이 목기를 자르는 본을 만들었다. 컴퍼스로 나무에 일일이 원을 그리는 대신 그가 고안한 목기 본을 나무 위에 올려놓고 띠톱에 대면 그 형태대로 나무를 자를 수 있어 편리했다.
두 번째로는 옻칠을 갈아내는 사포질을 기계로 대체했다. 보통 목기는 옻칠을 아홉 번 정도 하는데 한번 칠 할 때마다 갈아내고 새 칠이 잘 붙게 해야 한다. 이 일을 인부가 일일 손으로 사포질을 했던 것을 기계로 하니까 사람 7명가량의 몫을 해냈다. 게다가 기계로 일정하게 돌리니까 사포질도 더 깔끔하게 됐다.
지난 93년에는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초청을 받아 장춘사회복리원에서 조선족 2,3세들에게 13개월에 걸쳐 목공예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97년에 유일무이한 목공예부문에서 목기명장으로 선정된 이후에도 새로운 공정과 디자인 개발을 위해 여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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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해(97년)에는 대통령표창도 받고, 대한민국 신한국인상에 선정되기도 했다. 신한국인상에 선정된 것은 발우(스님이 사용하는 식기)가 큰 몫을 차지했다. 그가 만든 옻칠을 한 발우를 미국에 수출함으로써 처음이자 유일한 목기 수출의 기원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미국 수출가는 1,200달러. 이 그릇은 지름 21.5cm부터 9.2cm 크기의 나무그릇을 일곱 개 포갠 것으로 접시 대용으로도 쓸 수 있고 뚜껑도 달려있다.
그릇 사이의 틈은 1mm로 꼭 맞게 포개져 있다. 이어 99년에는 그의 목기가 중소기업청이 선정한 유망품목에 지정된데 이어 2001년에는 밀레니엄 디자인 어워드 제작 기술인상과 정부산업포장을 받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목공예분야의 대표로서 대외활동을 하기도 했다. 조달청문화상품협의회 이사를 역임했고, 대한민국 명장회운영위원 재임중 이탈리아대사로부터 감사장을 받는 등 각종 매스컴을 통해 우리의 전통 목공예를 알리기도 했다.
‘나무를 깎아 아름다운 그릇이 탄생되는 게 신기했고, 그것을 남들이 사랑해 주는 목공예의 매력에 빠져들어’ 시작한 그의 목공예 인생은 대전을 거쳐 서울 살이 24년을 합해 어언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때로는 너무 힘들었지만 정상인들, 많이 배운 사람들이 한번 노력해 될 거라면 나는 두 배 세배 노력하면 따라갈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견뎌냈다”며 “몸은 장애인이지만 마음은 누구보다도 건강하게 살려고 했다”고 서 명장은 자신의 지난 날들을 더듬었다. 요즘 그는 목기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그 첫번째 작업이 좋은 재료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나무를 이용한 목기제작에 정성을 쏟고 있다. 전통목기에 주로 쓰이는 오리나무와 물푸레나무, 행자목 등은 계속 벌목돼 없어지고 반면, 잣나무, 일본잎갈나무 등 침엽수 위주로 식재되고 있어 시간이 흐를수록 원자재가 부족해지고 있어 걱정이란다.
목기 제작에만 열중하던 그는 목재의 부족원인을 파악한 이후 근 10여 년 동안 나무의 질에 대한 연구와 함께 항상 국산 자재를 이용하기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목기의 성격에 잘 맞는 수종으로 아카시, 플라타너스, 수양버들 등을 찾아내 건조 과정부터 제작공정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노하우를 취득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은행, 박달, 단풍나무를 즐겨 목기재료로 사용하고 있다.
이외에도 국산나무를 이용한 백골(옻칠하기 전 목기)제작으로 원가를 절감하고, 목기용 소형연마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하기도 했다. 또 소형목기용 백골 건조방법을 개발해 불량률을 절반으로 낮춰 재료절감과 원가절감에 기여했다.
“나무는 제각각 성질이 다르고 강도와 무늬가 천차만별이라 그 특색에 맞게 그릇을 만들고 칠을 입히면 다양한 목기가 탄생됩니다. 나무는 잘라내도 생명이 어느 정도 연장되므로 섣불리 토막을 내면 안 되지요. 나무를 2~3개월 잠재우며 진정시킨 후 용도에 따라 잘라서 써야 합니다.”
나무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나무가 물을 빨아들이는 소리와 거품정도도 종류에 따라 다르단다. 흡수력이 좋은 나무는 슉슉하는 소리를 내며 물을 빨아들이고, 어떤 나무는 보글보글 거품을 내며 욕심스레 물을 먹는 나무도 있단다.
봄에 베어낸 나무는 목기 재료로 적당치 않다. 봄바람에 갈라지고 트고 수분이 많아 해충이 많이 꾄다. 늦가을에 베어낸 나무가 목기재료로 좋은데, 자연통풍으로 응달에서 말려 써야한다. 지열과 바람과 음지 등 3박자가 맞아야 좋은 목기재료가 되는 것이다.
“토질에 따라 나무의 성질도 달라져요. 충청이남 이나 영동지방의 나무가 가장 좋아요. 강원도산 나무는 성질이 있어 칼 밥도 없고 파삭파삭해요.” 물버들은 섬유질이 많아 발우를 만드는데 좋고, 무늬목인 들미나무는 야구방망이를, 층층나무로는 밥주걱이 적당하다고 이른다.
목기의 핵심은 건조와 옻칠
목기제작에서 디자인과 실용적인 면은 그때마다 바뀌지만, 공정 자체는 변함이 없다. 하나의 목기가 완성되기까지 원목구입, 제재, 초갈이, 재갈이 그리고 다시 공정사이의 충분한 건조까지 약 3개월이 소요된다. 작은 공기의 경우 하루 300개정도 목기갈이가 가능하다.
구입한 자재는 숙성기간을 거쳐 초갈이 이후 실온에서 40~50일 정도 건조시킨 후 재갈이를 거쳐 9번의 생 옻칠을 입히게 된다. 제품에 사용되는 옻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옻 원산지인 강원도 원주에서 직접 구입해 사용하고 있다.
“목기는 나무를 잘 건조시키는 게 제일 중요해요. 나무에 수분이 남아있는 상태로 그릇을 만들어 옻칠을 하면 결국에는 칠이 벗겨지고 갈라지고 해서 못 쓰게 되거든요. 5, 6개월 정도 응달에서 말려 수분이 12~14% 정도 남을 때까지 기다리는 겁니다. 그걸 두고 나무를 ‘잠재운다’고 하지요. 그 다음은 옻칠이 중요해요. 다행히 그동안 완전히 맥이 끊겼던 옻칠을 정수화 선생이 개발해서 제대로 옻칠을 할 수 있게 됐어요.”
그동안은 일본에 원료를 수출하고, 가공된 옻칠을 역수입, 사용해 왔다. 옻칠도 나무자체가 흡수력이 크면 많이 빨아들여 검게 되고, 딱딱한 재질이면 흡수가 안돼 나무 결이 그대로 살아난다. 식기 등의 목기는 뜨거운 것을 담기에 정제옻칠 즉 수분을 제거한 옻칠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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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도전…늘 연구하는 자세
그는 자신의 목기가 명품이 된 이유를 ‘옻칠을 아끼지 않고 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목기는 주로 제기로 쓰이는데, 제기는 한 가문에서 대를 물려가며 쓰는 그릇 이예요. 정성들여 만들어야 합니다.” 옻칠을 아끼지 않아야 피막형성이 잘되고 그래야 대를 물려 써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릇이란 가구와 달리 물과 사람 손이 닿는 것이기에 값싼 옻칠을 하면 칠이 그릇에서 떨어져나간다”며 전통대로 만들면 명품이 되는데 공예인들이 그걸 간과해서 다시는 목기를 쓰지 않게 만든다고 안타까워한다.
지금은 목기의 고장이라고 하는 남원에 가도 손으로 깎는 사람이 몇 없다. 우리나라 전체로 봐도 20명 정도 뿐이라고 한다. 더구나 요즘엔 중국에서 많이 수입하고 있다고. 목기의 쇠퇴원인의 첫째는 산업화에 따라 플라스틱 등 대용제품이 나오는 바람에 목기가 줄어들었고. 둘째는 목공예하는 사람들의 직무유기에서 비롯되었단다.
“빨리 만들어 팔다보니까 칠이 벗겨지고 갈라지고 못 쓰게 되거든요. 우리 스스로 무덤 파는 격밖에 안 되는 거지요.”
2002년 6월, 이웃이 쓰레기를 태우다 불씨가 서씨의 공장으로 옮아 붙어 4억원 가량 손해를 입었다. 지금의 공장은 불타버린 공장 옆에 임시로 세운 것이다.
“46년간 애써 모아놓은 기록과 자료가 다 소실돼 버렸으니까 상당히 막막해요. 이제 일을 접어야 될 나이에 그걸 후학들을 위해 내놔야 되는데 다 잃어버렸으니…….” 하던 것도 정리할 나이에 다시 시작하려니 허망하고 서글프기도 하지만, 나만 쳐다보는 가족과 매장에 물건을 내놓아야한다는 생각에서 다시 일어섰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고 아직은 더 열심히 하자는 욕심이 있어 버틸 수 있단다.
의지의 신한국인 선정…‘생활목기’ 보급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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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순셋 나이는 단지 숫자일 뿐, 아직은 의욕이 있고 사명감도 젊은이 못지않다. “목기가 생활용기로 사랑 받으려면 전통도 중요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맞게 개발해야 해요.” 목기장이들이 경제적으로 열악해 대충 만들어 팔다보니 대중에게서 외면을 당하고, 홍보부족으로 저변확대가 되지못했다.
“웰빙이 유행을 타면서 더불어 식기, 생활용기, 다기, 수저 등에 자연소재 바람이 불어 목기의 사용이 점차 늘고 있어요.” 자신이 공정단축으로 부가가치를 높여 놓았고, 디자인 개발을 꾸준히 하고 있어, 우리 장인들의 우수한 잠재력을 발휘해 초심으로 돌아가 정성껏 만들면 인정받게 되는 사회구조가 마련되었다고 서명장은 힘주어 말한다.
“세상이 변했다고 해서 전통목기의 맥이 끊기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쉴 새 없이 바뀌는 소비자의 구매의욕에 맞출 수 있는 디자인과 실용성을 생각해 전통도 바꿔가야 하는 거죠.” 장례문화가 매장에서 화장으로 바뀌는 추세에 맞추어 서 명장은 목기 유골함을 개발했다. 은행나무로 제작하여 전통기법 옻칠로 여섯 차례 반복 칠하여 방습 · 방부는 물론 유골함 속에서 생기는 해충은 물론 외부에서 침입하는 해충도 예방한다. 직경 21.5mm, 내경깊이 20mm에 이중으로 밀폐되어 어떠한 기후 변화에도 내용물이 변질되지 않고, 땅속에 매장하여도 썩지 않고 영구보존 되는 유골함은 대한민국특허청 의장등록 제 0221694호로 등록되어있다.
목기 밥그릇에 밥을 담아놓으면 3~4일 동안 변질 되지 않고 원상태를 유지한다든지, 차는 물론 설탕이나 커피, 소금을 담아두어도 습기가 차지 않고 뽀송뽀송한 원리와 같은 이치란다.
“노력한 만큼 대가는 있다는 말이 생각나요. 더 이상 바랄 것 없습니다, 걸음을 빨리하거나 느리게 하거나가 관건이지 명색이 명장인데 하는 정신적 부담 때문에 작품 만들기가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녜요.”
가치 있는 제품으로 소비자에게 다가가려면 앞으로도 끊임없는 연구가 계속돼야 한단다. 대충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점점 더 까다로워지는 소비자들의 안목에 맞추려면 작품의 디자인부터 완성까지 모든 것에 완벽을 기해야 한다.
현재는 밥공기, 반상기, 냉면기, 발우(5합, 7합), 제기, 차통, 찬합, 컵, 호리병(술병), 함지박, 유골함 등 20여종의 목기를 만들어 미국·일본 등지로 수출하고 있으며 서울 인사동에 직영 가게를 두고 있다.
서 명장은 사람이 일일이 붓으로 칠하던 옻칠도 자동화할 수 있도록 개발하는 중이다. 원가절감, 노동절감의 효과를 볼 수 있어 생산가격이 낮아지면 목기가 보편화되고 상품성이 높아질 전망이란다. 공정의 개선과 자동화로 가격을 낮추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라는 서 명장.
명장의 작품이라며 자신이 만든 목기를 다섯 배가량을 붙여 판매하는 중간상인들의 횡포를 막기 위해 직접유통을 하는 등 운영의 묘를 살려야 하는 것도 서 명장의 숙제로 남아있다.
“비가 와서 손자 녀석 학교 데려다 주느라 아침내 바빴다”며 허허 웃는 그의 얼굴에서 노년의 여유가 묻어난다. 험난한 세월이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걸어왔다는 장인의 자부심과 함께-. |
첫댓글 병곡인과 연관이 있으신분 같은데 소개좀 하시지요
원티골에 사시는분인데 전번에 관악산 산행때 오셔서 뵈었어~
아그래 기냥 올리노니깨 궁금했재
병곡에 이렇게 훌륭한 분이있었다니!, 대단하십니다. 등산에 몇번 참석하셨는데 이렇게 훌륭하신분인줄 몰랐네요. 선배님 존경합니다.
참 다양한곳에서 이름을 날리시는 병곡인들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병곡인의 장인 정신이 대단 합니다,,,,정말 존경 스럽습니다,~~~~~~~~~~~~~
대단하신 분입니다. 본받을 점이 많습니다.
정말 훌륭하신 분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 어릴때 뵜던 그대로시네요 옛날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뵙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 몇년전에 누구 결혼식에서 한번 만났었구나 웬지 너무 그대로시다 싶더니..
대단 하시네요 한결 같은 장인 정신 존경 함니다 ....
존경합니다 열심히 살아야 되겠네요!!!!!!!!!!!!
장인의 향기가 풍성하게 풍깁니다.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