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_오탁번(1943-2023)
거실에서 자정까지 티브이를 보고 나서 잠을 자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침대 위에 스탠드 전등을 켜고 잡지
를 읽는 안경 낀 장모님이 계셨다. 아니 장모님 어쩐 일이십니까
목구멍까지 올라 온 말을 황급히 삼키고 나는 정신을 가다듬었
다 장모님이라니 장모님은 벌써 몇 해 전에 돌아가셔서 지금은
천안공원묘지에 잠들어 계신데 장모님이라니 아뿔싸
잡지를 읽고 있던 아내는 나의 착각이 대수롭잖다는 듯 웃고
말았지만 그날부터 우리집에는 참으로 이상한 평화가 도래했다
아내와 다툴 일도 없고 깨 쏟아질 일도 없게 되었다. 장모님 모
시고 사는 사위의 예절만 있으니까 남편과 아내로서의 비장의
무기도 탄약이 다 떨어졌다.
아내가 스물한 살 처녀일 때 부산까지 가서 당신의 딸과 결혼
하겠다고 말했을 때 아주 난감해 하시던 스물다섯 해 전 장모님
의 모습이 어쩌면 지금 아내의 모습과 이토록 흡사하단 말인가.
우리들의 가난한 사랑을 근심하는 어른들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해운대 해변을 손잡고 거닐던 그 시절의 바닷물결이 어느
날 자정 무렵에 나의 집 안방 침대 위에까지 밀려와서 나를 벌주
는 것인가.
낯모르는 사람끼리 저녁 이슬 내리듯 새벽 안개 걷히듯 이상한
인연으로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 낳아 기르고 울고 웃고 비장의
무기 꺼내어 첩보전 국지전 전면전 치르면서 휴전 종전 항복 탈주
를 밥먹듯 하면서 살아가는 남편과 아내의 사회는 중성자 망원경
으로도 포착되지 않는 전자파들의 폭풍우일까 모든 시간과 공간
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는 블랙홀의 무서운 운명일까.
아내여 장모님이 된 나의 아내여 이제는 흰 뼈로 흔적만 남아 민
들레 씨앗처럼 가벼워진 그 옛날의 장모님이여 오늘 밤 나를 울리
는 미운 아내여.
[1994년 발표 시집 「겨울강」에 수록]
J. 브람스(1833-1897) 헝가리 무곡舞曲(총 21曲) 제4曲 F 단조입니다.
요 曲은 본디 피아노 연탄곡(連彈曲*)으로 작곡됐다가,
이후 피아노 독주곡, 관현악곡 등으로 편곡됐습니다.
(*連彈曲: 한 대의 건반 악기를 두 사람이 함께 치며 연주하기 위해 만든 曲)
Unison Piano Duo 피아노 연주입니다.
https://youtu.be/-kbwVq_nIz4?si=iPYkn1ovvkB2Yr8P
첫댓글 ㅎㅎ
안녕하세요
'장모님' 시와
멋진 연주곡
잘 감상했습니다
저는 엄마랑 헤어스타일이
달라서 ㅎㅎ
헷갈리지 않을 것
같아요 ㅋㅋ
휴일도 행복하세요^^
오탁번 시인의 재치와 유머를 보여주는 詩입니다.
그의 일대기에 의하면 1970년 결혼 당시 시인 27세,
부인(김은자, 1948 ~ )은 22세였더랬습니다.
평안한 하루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