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구수가 기원 375년에 즉위하여 재위하여 재위 10년 동안에 고구려에 대하여는 겨우 1차 평양의 침입만 있었으나 바다를 건너 지나대륙을 경략하여, 선비 모용씨(鮮卑 慕容氏)의 연(燕)과 부씨( 氏)의 진(秦)을 정벌, 금 요서.산동.강소.절강(今 遼西.山東.江蘇.浙江) 등지를 경략하여 광대한 토지를 장만 하였다.
의자왕이 이를 좇아 제장에 명하여 변경을 고수하더니 익년에 과연 당(唐)이 30만 대병을 들어 고구려에 쳐들어와 안시성에서 싸워 누차삭 동안 승부가 나지 않고 신라는 13만 대병을 들어 고구려 남방에 들어 그 후방(後方)에 요란(擾亂)을 도모 하거늘,
왕이 계백에 명하여 신라의 뒤를 襲(襲)하여, 성열(省熱)등 7성을 회복하며, 윤충을 보내어 부사달 등 10여성을 점령하고, 선병(船兵)으로 당(唐)의 강남(江南)을 습(襲)하여 월주(越州) 등지를 점령하여 착착 해외의 척지(拓地)를 경영하다.
'모대'가 또 표를 올려 말하길 신이 행건위장군 광양태수 겸장사인 신 '고달'과 행건위장군 조선태수 겸사마 신 '양무', 행선위장군 겸참군 신 '회만'등 삼인을 사신으로 보
내니 뜻과 행동이 맑고 충성스러움이 분명합니다. '태시'중에 '송조'에 사신으로 가고, 이제 신의 사신으로 험한 바다를 무릅써, 그 지극함으로 찾으니, 마땅히 작위를 내
리시어, 삼가 먼저의 법칙대로 각각 행직을 수여하시옵소서. 또한 현택영휴(?)하여 만리를 가는데도 이에 조정의 입음이 없었습니다. 업드려 원하옵시는 하늘을 살피어
근심을 바로 잡아 주시옵서서 '달'은 일찍이 본받을 만 함이 뚜렸하고, 부지런히 공무에 노력하니, 이제 행용양장군 대방태수를 삼으시고, '무'는 뜻과 행실이 맑고 공무에
그침이 없으니 행건위장군 광을태수로 삼고, '만'은 뜻을 지킴이 두루 그윽하고, 부지런함과 본받을만 함이 있은니 행광무장군 청하태수로 삼으시옵소서 하니, 조서를 내
려 가히 옳다 하고 군호를 내리시고 태수를 제수하였다. 사지절 도독 백제 제군사 진동대장군으로 삼고 부알자인 복사 '손부'에게 명하여 '대'를 죽은 조부 '모도'를 계승
하여 '백제왕'으로 삼았다. 이에 말하길 오호라! 너의 대를 이은 충절을 생각하니 정성이 분명하고 멀리서도 나타나니 바닷길이 맑아졌다. 공물을 받침에 버릴것이 없다.
떳떳한 법을 잘 지키고 나타난 명령을 받들도록 모두 힘쓸지어다. 공경히 아름다운 사업을 지킬 것이니 어찌 삼가할 일이 아니냐 조서를 내려 행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
군 백제왕 '모대'로 하니 이제 '대'는 죽은 조부 모도를 계승하여 백제왕을 삼는다. 자리를 나타내는 글과 인수등과 옥,동,호,죽부 네 개를(뒤는 탈자)보내니 왕은 이것을
절하고 받도록 하라. 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느냐! 했다.
이 해에 '위노'가 기병 수십만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가니, '모대'가 장수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를 보내어 '노'군을 공격하여 크게 이를 깨뜨렸다. '건무'이년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려 말하길 신은 옛부터 봉함을 받아 대대로 조정의 영화를 입고, 절과 부인 분에 넘치는 것을 받아 오랑캐를 물리치었습니다. '저근'등이 가서 광택을 입고, 신은 두루 평안합니다. 경오년에 가서 '험윤'이 깨닫지 못하고, 병사를 내어 깊이 쳐들어 오니, 신이 '사법명'등 군사로 토벌하고, 야간에 번개같이 엄습하니 '흉'의 이장이 두려워 하고 무너저 바다로 쓸어버렸다. 달아나는 것을 베어 죽은 시체가 들을 붉게 물들였다. 이로말미암아 그 예기를 꺽으니, 흉폭함을 잡았다. 이제 나라가 조용해지니 실로 '명'등의 다스림이니, 그 공훈을 생각하여 칭찬함이 마땅하다. 이제 '사법명'을 행정로장군 매라왕으로 삼고, '?수류'는 행안국장군 벽중왕으로 삼고, '해례곤'은 행무위장군 불중후, '목간나'는 전의 무공이 있고 또한 대방을 빼앗으니 행광위장군 면중왕으로 삼으소서. 업드려 원하니 하늘의 은혜로 청을 들어 주옵소소 하였다. 또 표에 말하길, 신이 행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인 신 '모유', 행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인 신 '왕무', 겸 참군이고 행진무장군 조선태수 인 신 '장색', 행양무장군 '진명'은 관직에 있어 사사로움을 버리고, 오직 공무에만 힘쓰며, 위급함에 명을 받들어 어려움을 물리치고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스니다. 이제 신이 사신으로 보내어, 험한 물결을 무릅쓰고 나아가니 정성이 지극합니다. 실로 작위를 내림이 마땅하니 각각 베풀어 주십시오. 업드려 올바른 제수가 있기를 원하옵니다 하니 조서를 내려 옳다 하고 군호를 내리었다.
'수' '개황' 초에 '여창'이 또 방물을 밭치고 '상개부 대방군공 백제왕'을 하사받았다. '진'을 평정한 해에, 전선이 떠돌다 바다동쪽의 '모라국'에 이르렀다. 그배가 돌아 왔는데, '백제'를 경위하자, '창'이 두터훈 재물을 보내고, 아울러 사신을 보내어 '진'을 평정함을 경축하는 표를 받들었다. '문제' 이를 선히 여기어 조서를 내려 말하길, 너의 나라는 멀어 오고 감에 어려움이 있으니 이후로는 마땅히 공물을 받침에 해마다 하지 않아도 된다. 하니 사자가 춤을 추며, 떠났다. 십팔년 '여창'이 사신 장사 '왕변나'를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요동'에서 전투가 일어나자, 표를 받들어 보내길, 군사를 이끌수 있도록 청하자, 제가 조서를 내려, 후이, 그 그렇게 하라 하니 이에 보냈다. '고려'가 이 사실을 알고, 병사로 그 지경을 침범하였다. '여창'이 죽자, '아들 여장'이 섰다. '대업' 삼년 '여장'이 사신 '연문진'을 보내어 조공하고, 그해 도 '왕효린'을 보내어, 헌납하며 '고려'를 치길 청하였다. '양제'가 이를 허락하고, 명하여 '고려'의 동정을 엿 보았다. 그리하여 '여경'이 안으로 '고려'와 화통하면서, 그 사이에서 거짓말 하며 중국을 엿보았다. 칠년, 제가 친히 '고려'를 정벌하자, '여장'이 신하 '국지모'를 보내어 군사를 보내기를 약속하자, 제가 크게 기뻐하며, 후하게 상을 하사하고, 상서기부랑 '석률'을 보내어 '백제'에 이르르자, 서로 무리됨을 알았다. 다음해, 여섯군대가 '요'를 건너고, '여장' 역시 병사가 지경에 이르러 군사를 돕는다 맹세하니 실로 양단에서 지켜야 했다. 평소 '신라'와는 틈이 있어, 매양 전쟁하였다. 십년 다시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후에 중국이 어지러워지자, 사신이 끊어졌다.
'백제'의 그 먼저는 동이로 세 개의 '한국'이 있었다. 하나는 '마한'이요, 둘은 '진한'이요, 셋은 '변한'이다. '변한''진한'은 각기 십이국이요 '마한'은 오십사국이 있다. 큰 나라는 만여가 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가로 총 십여만호이다. '백제'는 곧 그 하나이다. 후에 점점 강대해지더니, 여러 소국을 겸하였다. 그나라는 본래 '구려'와 함께 '요동'의 천여리에 있었느느데, '진'때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다스리자, '백제' 역시 '요서''진평' 이군의 땅에 거하여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등등의 사서에서 백제의 대륙 경영을 전하고 있습니다.
정사의 기록을 쉽게 정리해 보자면,
북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그 나라의 동쪽 끝에는 신라가 있으며,북으로는 고구려와 접해있다. 서남쪽에는 큰 바다에 닿았고 작은 바다와 남쪽에 처해 있다.』
서남쪽에 큰 바다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흔히 말하는 남지나 해역일것인가?
우리가 알고있는 백제의 강역으로서는 백제 서남부에 바다가 있을일은 만무하다.(남쪽이면 모르겠지만.)
그리고 신당서에도 위와 비슷한 기록이 보인다.
『백제는 부여의 또다른 종족이다. 경사(장안을 말하는것으로 보인다.)에서 곧바로 동으로 6천리에 있는 영과 빈의 바다 남쪽에 있다. 서쪽은 월주와 경계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왜가 있고, 북으로는 고구려가 있다. 모두 바다를 건너야 이를 수 있으며, 동으로는 신라가 있다. 왕은 동서의 두 성에 거처한다.』
이 기록에서 영과 빈의 지명을 주목해 보자.
영과 빈은 영현(혹은 영주)과 빈현(혹은 빈주)를 말하는것이 아닐까?
영과 빈은하북성 하간이라 하였다.빈현은 황하 북쪽의 산동성이 있던 곳의 고대지명이라 한다. (믿을만 하지는 못할지도?) 그렇다면 백제의 영토가 산동성과 하북성 일대라는 말이 되는것이다.
남의 왜, 북의 고구려, 동의 신라를 모두 바다를 거쳐야만 갈수있다 하였다.
좁디좁은 반도내의 세국가가 서로 통하려면 바다를 이용해야한다는 말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다는걸 느꼈다.
그렇다면 백제 본토가 반도가 아닌 대륙이었단 말이 될수도 있는것이다.
주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처음 나라를 대방에서 시작하였다.』
수서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그 나라(백제)는 대방의 옛 땅에서 처음 일어났다.』
한서 지리지를 보게되면 낙랑과 대방은 모두 요서군에 속한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 이러한 기록이 있으면서도 낙랑이 한반도 평양이며 대방이 황해도 일대라는것은 쫌...)
그리고 위서의 내용을 보게되면
『백제국의 선조는 부여에서 나왔다. 그 나라는 북쪽으로 가면 고구려가 천여 리에 있으며 작은바다의 남족에 처해 있다.』
작은 바다라 하였다. 여기서 작은 바다란 하북성과 산동성을 끼고 있는 발해만이라는 말이 될수도 있다. 그 바다의 남쪽에 백제가 있다면 황하 남부인 산동성 아래쪽에 백제가 있었다는 말이 될수도 있는것이다.
3. 백제와 북위와의 전쟁
백제와 북위와의 전쟁은 총 5회로,
(1차) 488년
(2차) 489년
(3차) 494년
(4차) 497년, 기병 20만으로 침공
(5차) 498년
로 일어납니다.
전쟁과 관련된 3국(백제, 북위, 남제)의 존속기를 살펴보자면,
(1) 백제(B.C 18년 ~ AD660) : 678년 존속
(2) 북위(AD 386 ~ 534) : 149년 존속
(3) 남제(AD 479 ~ 502) : 24년 존속
이렇게 됩니다. 남제는 고 임승국 교수님의 국회 증언과 같이, 24년 존속의 초미니 소국입니다. 남제는 24년 동안 왕이 일곱 번 바뀌며 호북성 “형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나라입니다.
남제는 힘의 역학 관계에 의하여 잠시 북위와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나 결국 백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백제를 상국으로 모시면서 겨우 나라의 생명을 유지하는 약소국이었던 것으로 추측합니다.
북위와 백제가 전쟁을 했다? 교과서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는 어려운 일입니다.
삼국사기에는
"그 나라(북위)가 동성왕 10년(488년) 백제를 치다가 우리에게 패하였다."
자치통감에는
“북위가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게 패했다.
백제는 진나라때부터 요서진평 2군을 차지하고 있었다.“
[永明六年, 魏遣兵擊百濟. 晉世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也]
[영명육년, 위견병격백제. 진세백제역거유요서진평이군야]
그런데, 북위와의 전쟁이 사서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제가 반도에만 있었다면, 첫째로 북위는 고구리를 거쳐 백제를 쳐야 했을 것이고, 둘째로 해상으로 백제를 쳐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백제가 반도에 있었다면 공격해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고,
고구리를 넘는 모험을 강행해야 합니다. 이 때는 또한 고구리 최고의 전성기에 해당합니다. 기병 위주로 공격을 하였으니, 배를 이용했을 가능성은 적습니다.
488년에 백제 침공에 실패한 북위는 490년 다시금 백제를 침공합니다.
(자료: 최진 선생님)
당시 전쟁상황을 요약해보면
(1) 북위는 산서성 대동시에 도읍을 하고 백제를 기병수십만으로 두 번째 침공을 하다
(2) 이에 백제 동성대왕은 사법명 등 장수 4명을 보내어 수십만 기병을 초토화 시키다
(3) 전쟁 승리후 4명의 장수에게 “왕” 등 작위를 수여하고
(4) 태수들의 위치를 이동시키다
북위는 먼저 백제와 우호관계에 있던 남제를 설득하여 자기편으로 만들었는데백제를 침공하기 위한 전략적 차원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초작업하에 북위는 기병수십만으로 백제를 침공하나 백제 동성대왕의 명장 4명에게 참패를 당하고 맙니다.
사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강시단야(僵屍丹野) “북위의 시체가 들에 깔리고 피가 땅을 붉게 물들였다”
북위의 참패를 기록한 것입니다.
(동성대왕은 전쟁 유공자 장수 4명에게 “왕” 등 작위를 하사하다)
(1) 사법명(沙法名)을 정로(征虜)장군 매라(邁羅)왕으로 봉하고
(2) 찬수류(贊首流)를 안국(安國)장군 벽중(辟中)왕으로 봉하고
(3) 해례곤(解禮昆)을 무위(武威)장군 불중후(弗中候)로 봉하고
(4) 목간나(木干那)는 광위(廣威)장군 면중후(面中候)로 봉하다.
북위는 494년 12월 3차 전쟁을 감행합니다.
(백제 동성대왕 16년, 위 효문제孝文帝 태화 18년, 남제 명제 건무 1년)
정남장군 설진도, 대장군 유창, 서주자사 원연, 평남장군 유조를 4방면으로 나누어
(1) 양양襄陽: 호북성 양양
(2) 의양義陽: 하남성 신양시
(3) 종리終離: (한자 정정 원문에는 鍾離로 되어 있음 안휘성 방부)
(4) 남정南鄭: 섬서성 남정
으로 쳐들어가 백제와 남제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북위는 백제/남제 연합군에 또 패하고 말았습니다.
남제군은 영주寧州자사 동만(董巒)을 비롯하여 3천여명이 북위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기세가 오른 위군은 개전 2달만에 위 효문제가 직접 전투지인 “종리”에 까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백제-남제연합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북위군은 문제를 옹위하여 종리에서 쫓겨 달아나고, 북위의 장군 풍탄이 전사하는등, 결국 위군은 총퇴각을 하게됩니다.
태화 21년 6월 (497년, 동성대왕 19년, 남제 건무5년) 또다시 2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남제 연합군을 공격하려다 실패하고, 498년(태화 22년 4월) 또 전쟁을 걸었으나 백제-남제 연합군에게 참패하고 맙니다.
488년부터 498년까지 10년동안 무려 5회에 걸쳐 큰 전쟁을 치룬 위는, 이로써 제남, 회수지방을 완전히 백제-남제에 상실하고 국고가 탕진되어 재정이 파탄에 이르렀으며,
결국 태화 22년7월 왕실과 궁중의 모든 경비를 절반으로 줄이고, 또 근위대의 1/3을 축소했습니다.
그러나 이 백제 / 위 전쟁은 위나라만의 약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랜 외국정복전쟁은, 백제내부에서도 염전사상을 자라게 했습니다.
젊은 영웅 동성대왕은 당대의 중국 최강의 강국 위를 10년동안 5회에 걸쳐 패퇴시키면서 자만감이 싹텄습니다.
그래서 그는 500년(동성대왕 22년)에는 임류각(臨流閣)이라는 호화로운 새로운 궁궐을 지으니 높이가 5길이(丈)가 넘었으며, 또 궁내에 연못을 파고 이상한 새들을 길렀으며, 아름다운 여인들에 취해 지냈습니다.
일이 이렇게되자 곰나루의 토착호족들은 위사좌평衛士佐平겸 가림성주加林城主 백가苩可를 대표로 하여 동성대왕에게 내정內政에 충실할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임류각의 호화로운 생활에 빠져있던 동성대왕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백가는 돌연 칼을 들어 동성대왕을 시해하고 맙니다.
501년 12월의 일입니다.
이로써 중국대륙내에 세력을 확대하던 동북아의 영웅 동성대왕은
나이 불과 37세,
재위 23년만에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4. 삼국사기 최치원전
최치원이 당나라의 태사시중(太史侍中)이라는 벼슬아치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보면 좀 특수합니다.
거기에는 정식으로 "남침오월운운(南侵吳越云云)"하고 "침"자를 썼어요. 이건 정말 희한한 일입니다.
"고구려 백제가 전성했을 때 강병 백만이
남쪽으로 오나라 월나라(상해등지)를 침략하고
북쪽으로 유주, 연나라(북경쪽), 제나라(산둥반도), 노나라(산동반도)
를 쥐고 흔들어 중국의 큰 적이 되었소이다
수양제가 망한 것은 요동(=고구려)을 정벌하려다
그것 때문에 망했소이다 운운"한 것입니다.
최치원의 이 "상태사시중장(上太史侍中狀)"하나만 보아도
백제가 양자강 남쪽까지 세력을 뻗쳤다는 것은 움직일수 없는 사실입니다근구수가 기원 375년에 즉위하여 재위하여 재위 10년 동안에 고구려에 대하여는 겨우 1차 평양의 침입만 있었으나 바다를 건너 지나대륙을 경략하여, 선비 모용씨(鮮卑 慕容氏)의 연(燕)과 부씨( 氏)의 진(秦)을 정벌, 금 요서.산동.강소.절강(今 遼西.山東.江蘇.浙江) 등지를 경략하여 광대한 토지를 장만 하였다.
의자왕이 이를 좇아 제장에 명하여 변경을 고수하더니 익년에 과연 당(唐)이 30만 대병을 들어 고구려에 쳐들어와 안시성에서 싸워 누차삭 동안 승부가 나지 않고 신라는 13만 대병을 들어 고구려 남방에 들어 그 후방(後方)에 요란(擾亂)을 도모 하거늘,
왕이 계백에 명하여 신라의 뒤를 襲(襲)하여, 성열(省熱)등 7성을 회복하며, 윤충을 보내어 부사달 등 10여성을 점령하고, 선병(船兵)으로 당(唐)의 강남(江南)을 습(襲)하여 월주(越州) 등지를 점령하여 착착 해외의 척지(拓地)를 경영하다.
이렇게 글 쓰시면 과연 누가 읽을까 싶네요. 내용을 죽 읽어봤는데,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무엇보다 주장 내용에 비해 불필요할 정도로 양이 많습니다. 여러 글을 올리고 싶으셨다면 '링크' 를 거시면서 필요 부분만 간단히 발췌하면서 여러 글을 편집하여 적절한 양의 글로 분량조정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잠깐 딴지를 걸면, 요서지역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다고 하는데, 제가 알기론 그곳에서 백제의 "군영"에관한 터나 실증유물은 나오지 않은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이는, 요서지역에 실제로 백제의 "정규군"이 주둔하지 않았다는 결과를 나타낸다고 봅니다. 결국, 요서지역과 중국대륙에대한 백제 통치설은, 기실 신라방과 같은 백제인의 "자치구"적 성격의 지역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만약 요서에 백제가 통치하던 지역이 있었다면, 당시, 백제의 최대라이벌인 고구려가 요동을 위협할 수 있는 백제영토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어떤 기록에서도 고구려가 요서를 "백제"때문에 침략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첫댓글 흔히, 남제서의 내용에만 기록이 되었다고 하시는데 그것은 착각입니다. 맨 처음에 소개된 주소창의 내용을 보시면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내용에서는 북사에서도 기록이 되어있다고 나옵니다.
이렇게 글 쓰시면 과연 누가 읽을까 싶네요. 내용을 죽 읽어봤는데,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무엇보다 주장 내용에 비해 불필요할 정도로 양이 많습니다. 여러 글을 올리고 싶으셨다면 '링크' 를 거시면서 필요 부분만 간단히 발췌하면서 여러 글을 편집하여 적절한 양의 글로 분량조정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조언 감사합니다.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딴지를 걸면, 요서지역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다고 하는데, 제가 알기론 그곳에서 백제의 "군영"에관한 터나 실증유물은 나오지 않은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이는, 요서지역에 실제로 백제의 "정규군"이 주둔하지 않았다는 결과를 나타낸다고 봅니다. 결국, 요서지역과 중국대륙에대한 백제 통치설은, 기실 신라방과 같은 백제인의 "자치구"적 성격의 지역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만약 요서에 백제가 통치하던 지역이 있었다면, 당시, 백제의 최대라이벌인 고구려가 요동을 위협할 수 있는 백제영토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어떤 기록에서도 고구려가 요서를 "백제"때문에 침략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