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논단
밸류업 프로그램과 한국 자본시장의 과제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54호(2024.05.15)
김우진
경제89-96
모교 경영대·경전원 교수
모두에게 똑같은 N분의 1원칙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결 방법
약 10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기업현장과 자본시장을 연결해서 생각하는 경향은 별로 없었다. 기업 경영은 오롯이 회사 내부 경영진의 몫이고, 투자자는 장기 성과보다는 단기 수익에만 관심이 있으며, 기업지배구조 문제는 대규모기업집단(재벌)의 순환출자 등 공정거래법상 문제이고, 자본시장 활성화는 주로 각종 연기금을 동원한 주가 부양 대책을 의미하는 등 양자는 관계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지난 대선을 거치면서 이러한 인식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천만 동학개미들이 한국 자본시장의 고질적인 문제인 소위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주요 정책 의제로 제시하면서, 거대 양당이 이를 실제 공약으로 반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기업지배구조(Corporate governance) 문제는 공정거래법 문제가 아니고, 자본시장, 상장기업의 문제이며, 궁극적인 목표는 투자자 보호이고, 이게 한국에서 제대로 안 되기 때문에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지속되고 있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정점에 최근 정부가 내놓은 밸류업 프로그램이 있다. 현재 이 정책에 대해서는 시장의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고 있다. 이번 기회를 통해 그동안 국내 증시를 짓눌러 온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해소되어 주가가 부양될 것으로 기대하는 의견이 있는 반면, 정책의 내용이 밋밋함을 지적하며,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부정론도 제기된다. 기업 입장에서는 또 다른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내심 우려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런데, 밸류업은 기업가치, 즉 시가총액을 올리자는 말인데, 기업의 목표가 기업가치 극대화라는 재무관리 교과서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을 상기해 보면, 이는 기업의 목표를 다시 한번 재강조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 기업들은 밸류업을 꺼림칙해 할까? 이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지배권 승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승계가 완료되지 않은 기업에서는 주가가 오르면 상속세 부담이 증가하기 때문에 반갑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기업거버넌스의 핵심 문제는 이해충돌에 따른 대리인 문제이다. 미국과 같이 소유분산이 일반적인 경우 분산된 주주들과 지분이 거의 없는 전문경영인 간 이해충돌이 문제가 되는 반면, 우리나라처럼 대부분의 상장기업에 지배주주가 존재하는 경우에는 지배주주와 일반주주 간 이해충돌이 문제가 된다. 흔히들 상장기업의 지배주주를 오너라고 부르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관행이다. 비상장기업이면 모르되, 상장기업의 경우는 기업이 창출하는 이익에 대한 지배주주의 권리(현금흐름권)는 많아야 20%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국내 상장기업의 지배주주들은 많은 경우 해당 상장기업과 별도의 개인회사를 보유하고 있다. 그 이유는 상장기업의 이익을 배당으로 환원하면, 80%를 차지하는 일반주주들과 이익을 공유해야 하는 반면, 개인회사를 세워서 일감을 몰아주면 상장기업의 이익을 본인 지분율 20%보다 훨씬 더 많이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상장기업의 이익이 개인회사로 이전되면, 지배주주에게는 이익이지만, 주가 또는 시가총액이 줄어들기 때문에 일반주주에게는 손해다. 이게 바로 지배주주와 일반주주 간 상장기업의 이익 배분에 대한 이해충돌인 것이다. 이해충돌을 넘어, 가히 이해상반인 상황이다.
밸류업 프로그램이 성공하려면, 근본적으로 상장기업에서 최종적인 의사결정 주체가 주가 상승을 원해야 한다. 물론 회사법상으로는 이사회가 의사결정에 법적인 책임을 지는 주체이나, 국내 기업 소유지배구조의 현실을 고려할 때 사실상 최종 의사결정 주체는 지배주주 일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주가가 저평가될수록 지배주주 일가에 도움이 되는 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는 요원하고, 따라서 밸류업 프로그램도 성공하기 어렵다.
지배주주 일가가 주가 상승을 원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는, 일가의 현금흐름이 상장기업에 대한 지분비율에 비례하도록 해야 한다. 그동안 공정거래법이 이러한 사익편취행위들을 행정법으로 나름 규율해왔으나, 이는 본질적으로 주주 간 부의 이전 문제이며, 회사법 이슈이다. 즉, 일반주주들이 사익 편취를 통해 입은 손해를 민사법원에서 용이하게 보전받을 수 있어야 모든 주주 간 지분에 비례한 N분의 1원칙이 확립되고,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근원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거버넌스 개선의 목표는 창업주 일가를 몰아내고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배주주 일가의 인센티브를 일반주주와 동일하게 맞추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고, 밸류업의 가장 기본인 것이다.
이제 한국의 국격은 G7을 넘볼 만큼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다.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 실렸던 김구 선생의 문화 강국론이 바야흐로 현실이 되었다. 그런데, 기업거버넌스 분야는 아쉽게도 그 수준이 국격에 훨씬 못 미친다. 한 외국계 펀드의 최근 한국 자본시장에 대한 보고서 제목이 “Enough is enough”라고 하니, 민망한 수준이다. 이번 밸류업 프로그램의 성공적인 정착을 통해 한국 자본시장이 국격에 걸맞은 수준으로 한 단계 더 발전하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