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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의 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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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k.daum.net/qna/view.html?qid=2fcms&category_id=QQO013&q=%B5%BF%C7%D0%B6%F5%B1%E2%B7%CF
근대사회가 들어서면서 과학지식과 그것을 바탕으로한 기계문화로 무장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교훈을 동학운동을 통하여 얻을 수 있으며 동학운동의 핵심이 된 동학세력이 나중에 천도교로 발전하여 이른바 애국개몽운동, 교육사업에 참여한 것은 적절한 일이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힘은 최제우선생이 세우시고,최시형선생이 널리 펼친 동학입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는 전봉준이고...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까닭은...동학 교도들의 집회가 농민 봉기로 번진 것은 전라도 고부 군수의 횡포를 참다 못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고부 농민들은 군수를 몰아 내자고 외치며 관아를 점령하고, 관아의 창고를 열어 굶주린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동학군은 개혁안을 만들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였으나, 조정은 군대를 파견하여 이들을 진압하려 하였다. 농민의 봉기가 오래 계속되자, 중국과 일본도 동학 농민군 진압에 가담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은 지도자였던 전봉준이 체포되어 처형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당시 공주는 농민군 진압에 동원된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 거점이었다. 농민군은 공주 외곽의 이인·효포·우금치 등지에서 약 20일간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공방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견디지 못한 채 논산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 논산전투에서도 농민군은 다시 패퇴했고, 금구·태인 전투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핵심부대는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으나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황해도·경상도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저항했으나, 양반·부호·관료·이서층이 조직한 민보군에 의해 철저히 괴멸되었다. 민보군·수성군들은 도주한 농민군의 집에 방화하고, 귀순한 동학도들까지도 체포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하는 등 농민군세력을 초토화했다.
전봉준은 1893년 12월, 60여 명의 고부농민을 거느리고 새로 온 고부군수 이은용에게 고부군의 폐정을 시정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군아의 뜰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여기에 하나의 요인이 되었던 것은 바로 안핵사의 폭압이었다. 안핵사 이용태는 사후처리를 빌미로, 요호부민들을 잡아다 난의 주모자로 몰고 봉기한 농민들을 모두 동학폭도로 몰아 처벌하는 등 도리어 사태를 악화시켰다.
[역사적 의의]
1894년 갑오농민전쟁은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봉건제도의 모순과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반대한 대규모의 반제·반봉건투쟁이었으며, 그러한 지향은 일련의 투쟁과정을 통하여 혁명의 방향으로 다듬어지고 발전해갔다. 탐관오리의 제거, 민씨정권의 타도와 봉건적 폐단의 시정, 봉건제도의 폐지, 친일정권의 타도와 식민지화의 저지로 운동과 사상을 단계적으로 발전시켜나갔다. 특히 제2차 농민전쟁을 통하여 일본 침략세력을 몰아내려는 반제·반봉건 민족운동을 전개했으나, 당시 갑오정권과 일본세력 및 보수유생들에 의해 철저히 압살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농민전쟁은 투쟁과정을 통하여 농민대중에게 봉건지배층과 일본 침략세력의 본질을 알게 했으며, 그들을 민족적·계급적으로 더욱 각성시키는 한편 광범한 대중을 반제·반봉건 투쟁세력으로 강화시켰다.
..... 그러나 외세를 배척하고자 했던 투쟁이 오히려 외세를 불러들여 이 나라의 마지막 주권과 존엄을 빼앗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리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죽창을 들고 시작하였던 이 가난한 항쟁이, 청일전쟁을 동반하며 동아시아의 운명을 결정짓게 하는 도화선이 되리라는 것도 알 수 없었다.....
http://k.daum.net/qna/view.html?qid=3ZfVy&category_id=QQO013&q=%C3%D6%C1%A6%BF%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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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내용 많이 읽어 지식의 살을 얻어 어디서나 남에게 이야기 자료가 되기를 바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