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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0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동래분원 나눔입니다
✠ 마르코 복음 2,18-22
유다 사회는 단식을, 기도, 자선과 더불어 하느님을 만나는 일상의 당연한 도리로 여겼습니다. 단식을 하지 않는 것은 사회적 당위에 대한 도전이자 저항으로 비쳤을 테고, 예수님의 공동체는 기존 사회에 이질적인 무리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은 명확합니다. 신랑과는 기쁨을 나누어야 하고, 기쁨 속에 단식할 수 없다.! 이러한 예수님의 논리에 우리의 일상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합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아야 하지만, 기쁘게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거나 기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증을 일으켜는 안 됩니다. 기쁨은 신랑과 함께 하는 기쁨이지 저 혼자만의 만족감에 따른 결과물이 아닙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안정적으로 보관되어 기쁨은 주는 것이지, 포도주나 가죽 부대 자체가 기쁨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갈수록 개인주의화되는 우리 시대에 개인적 수련을 통한 행복이나 기쁨의 수여 여부로 신앙을 평가할 때가 많습니다. 잔잔한 호수 같은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속이 불편하고 어지러움을 간직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히려 마음속이 불편하고 어지러울 때가 많은 것이 신앙입니다. 낯선 것이 내 마음속에 포탄처럼 터져 속앓이를 할 경우가 많은 것이 신앙입니다. 일상 속 이미 익숙해져 버린 것들에 저당 잡혀 새롭게 시작한 세상의 흐름을 읽어 내지 못하고, 익숙한 것이 좋다며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신앙에 가장 위험한 일입니다.
신랑을 얻어 새로운 집에 머물 기쁨을 잊은 채, 혼인 전 제집을 고집하는 신부는 없을 테지요. 새 술을 새부대에 담는 것은 개인적 수련이 아닌 사회적 수련을 통하여 공동체의 내일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서로 함께 머무는 자리는 꽤나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새 포도주를 마셔야 하고, 새 포도주를 마시려면 우리의 세상을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출처-대구황금성당
마르코 2,18-22
미사는 제사일까, 축제일까?
오늘 복음은 소위 ‘단식 논쟁’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생각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으려고 하는 시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구약과 신약 예배의 차이에 관한
말씀입니다.
구약은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바라는 제사 형식이었지만, 신약은 신랑을 맞이하는 축제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사실 신약에 와서도 구약의 예배 형식대로 돌아가려는 분위기가 많았습니다.
특히 중세 시대에 성체성사는 깊은 경외심으로 접근되어야 했습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정의된 ‘실체 변화’ 교리는 축성된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가 실재적으로 현존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성체성사에 대한 헌신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동시에 영성체를 모독죄로 연결시키며 성체를 합당하지 않게 받을 경우 큰 죄를 범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러한 성사의 신학적 강조는 신자들 사이에서 자신이 합당하지 않다고 여기는 지나친 양심의 가책을 유발했던 것입니다.
많은 평신도는 성체를 연 1회, 특히 부활 시기에만 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엄격한 참회의 요구 조건은 많은 이들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느끼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모독할 위험을 피하고자 차라리 영성체를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지나친 신중함과 성체성사에 대한 망설임은 지속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영성체를 멀리함으로써 많은 신자는 교회의 성사적 삶과의 중요한 연결을 잃어버렸습니다.
16세기에 등장한 종교개혁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이러한 불균형에 대한 반응 중 하나였습니다.
마르틴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가들은 교회가 두려움과 법주의를 조장하고, 그리스도의 해방적 은총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실체 변화와 같은 특정 가톨릭 성사적 관행에 대한 개신교의 거부는 이러한 역사적 긴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지금까지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부담만 느껴야 한다면 멀어지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체성사는 제사가 아니라 혼인 잔치여야 합니다.
마치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처럼 울고 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기쁨으로 그분을 붙들려고 하는 순간과 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당신 안에 계신 아기 예수님의 활동을 깨닫고는 기쁨의 마니피캇을 부르신 모습과 같아져야 합니다.
이것이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 예배방식입니다.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신경섬유종증으로 외모가 심각하게 훼손된 비니치오 리바(53)를
따뜻한 포옹과 키스로 감싸 안아주는 모습이 사진에 담겼습니다.
리바는 이달 초 바티칸의 세인트 피터스 광장을 방문했다가 교황의 따뜻한 포옹을 받았습니다.
리바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꼭 천국에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오직 사랑이었고 세상이 바뀌는 순간을 체험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리바는 당시 교황과의 만남을 생생히 기억했다. 그는 “내가 먼저 교황의 손에 키스했고, 교황의 다른 손은 나의 머리와 상처를 어루만졌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교황은 내 얼굴에 키스하면서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나의 머리는 그의 가슴 앞에 있었고, 그의 손은 나를 감싸 안았다.”라며 당시를 떠올렸습니다.
그러면서 “교황의 어루만짐은 1분가량 이어졌지만, 나에게 그것은 영원 같았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리바는 “교황은 완전히 침묵했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가끔은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라며 “당시 내 심장은 밖으로 튀어나올 것같이 강하게 뛰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이것이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의
기분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느끼기 전까지는 그 기쁨이 그리워 단식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마더 데레사 성녀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기쁨은 영혼을 잡는 사랑의 그물이다.”라고 자주 말했습니다.
그녀의 기쁨은 신랑이신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은 우울한 형식주의 예배에 참여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기쁨을 지향하는 신앙입니다.
그 기쁨을 절실히 바라기 때문에 단식하는 신앙입니다. 성체성사의 혼인의 의미가 올바로
회복되지 않으면 가톨릭교회는 점점 위기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20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복음: 마르 2,18-22
지금 우리는 분명 의미있는 고통, 가치있는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어울려서 운동하기를 참 좋아했습니다.
휴일이면 오후 내내 운동하는 것도 부족해서, 밤늦게까지 축구를 하고 농구를 했습니다.
다른 수도회 형제들과 시합이라도 있으면 내기를 걸었습니다.
이기면 삼겹살 무한 리필, 지면 수도원 돌아가서 라면에 찬밥. 형제들은 목숨을 걸고 공을 찼습니다.
이기고 지고를 반복하던 라이벌 팀에 시원하게 대승을 거둔 저녁이었습니다.
배도 고프겠다, 고기 뷔페집에 들어가서 원 없이 삼겹살을 구워 먹었습니다.
어찌 그뿐이겠습니까?
소맥도 제조해 마시고, 거기다 마무리로 철판 볶음밥까지 만들어 먹었습니다.
돌아오는 길 승합차 안에서 끝 기도도 바치고 묵주기도도 바치기로 했었는데, 죽었다 깨어나도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정신도 오락가락 혼미해지고, 우선 배가 너무 불러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한 가지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결핍이 필요하다는 진리. 사실 제대로 된 단식은 인간을 기도로 안내합니다.
단식을 제대로 하게 되면 정신이 맑아집니다.
단식은 인간을 약하게도 만들지만 강하게도 만듭니다.
참된 단식을 통해 인간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들과 본능을 스스로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됩니다.
자연스레 인간의 마음과 영혼, 감각과 오감들이 하느님을 향하게 됩니다.
이렇게 단식을 통해 기도할 분위기가 자연스레 조성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문화 안에서 단식과 기도는 언제나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단식하는 날은 곧 기도하는 날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단식하고 있다면 ‘지금 기도하고 있구나!’ 생각하고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단식할 때가 있다면, 단식을 그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활동하시던 그 순간을 혼인 잔치에 비유하셨습니다.
혼인 잔치는 기쁨의 잔치요 축제의 잔치입니다.
예수님의 강생과 육화로 인해 시작된 공생활 기간은 일반 혼인 잔치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성대한 기쁨과 구원의 축제였습니다.
구원과 은총의 시기에 단식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 순간 필요한 것은 만끽하고 즐기는 것입니다.
잔칫상에 올라온 맛갈진 음식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배불리 먹는 것입니다.
갓 수확한 포도로 만들어 내온 새 포도주를 큰 잔에 콸콸 부어 서로 건배하고 즐기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중요시한 것은 부정한 것에 대한 단호한 기피였습니다.
율법 규정을 목숨처럼 여기며 철저히 준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전통에 따라 그저 단식하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포도주로 오신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외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내적 태도, 영혼의 상태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구원의 때에 합당한 근본적인 회개와 삶의 변화를 중요시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포도주는 언제나 청춘이시며 영원한 새로움이신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은 언제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하고, 오늘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늘 새롭게 탄생해야 마땅합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각자가 들고 있는 부대의 상태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저기 구멍나고 헤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우리 백성은 사상 초유의 대혼란을 겪고 있고, 하루하루 안갯속같이 불투명한 길을 걷고 있지만, 분명 의미 있는 고통, 의미 있는 시련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성숙하고 더 건강한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확신합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겪고 있는 시련을 통해 우리 모두 새로운 존재로 거듭 태어나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합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고통스러운 현실 안에도 분명 우리 가운데 항상 현존하시리가 굳게 믿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주간 월요일 강론>
(2025. 1. 20. 월)(마르 2,18-22)
<예수님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방식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18-22)”
1)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는 단식’이었고,
‘슬퍼하는 단식’이었습니다.
그래서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라는 말씀은, “메시아가 이미 와 있으니,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고 슬퍼하는 단식을 하면 안 된다.” 라는 뜻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오셨으니,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던
‘슬픔의 시대’였지만, 신약시대는 이미 오신
메시아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는 시대입니다.
2)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한 희생이었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는 “죄를 짓고서 예수님을 떠나 있는 시간”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죄를 짓고서 예수님을 떠나 있다가, 회개하고 다시 예수님에게로 돌아갈 때, 그때 회개의 표시로 단식을 할 수 있는데, 그 단식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한다는 점에서는 ‘슬픔의 단식’이 되지만, 용서를 받는다는 점에서는 ‘기쁨의 단식’이 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공적으로 단식을 합니다.
그 단식은, 꼭 슬픔의 단식인 것만은 아니고, 용서와 구원의 기쁨이 들어 있는 기쁨의 단식입니다.>
3) 단식이란, 먹는 것을 중단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원래 단식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입니다.
단식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죄 때문에 얻지 못한다면,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 ‘참회’이고, 육신의 목숨을 버려서 영혼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는 것을 나타내는 ‘믿음과 희망’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가 아니라면, 또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단식은 쓸데없는 헛고생이 될 뿐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어떤 정치적인 주장을 하는 방법으로 단식을 선택하는 경우가 흔히 있는데, 위선인 경우도 많고,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로 그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단식은 아무 의미 없는 일입니다.
4) 21절-22절의 ‘새 천 조각, 새 헝겊,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뜻하고, ‘깁는다.’는 말과 술을 부대에 담는다는 말은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롭고 권위 있는(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가르침”입니다(마르 1,27).
‘새롭다.’는 ‘하늘에서 왔다.’로 해석할 수 있고(묵시 5,9),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가르침’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요한 6,68).
반대로 ‘헌 옷, 헌 가죽 부대’는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생활이고, 생명력 없는 쭉정이 같은 생활입니다(마태 3,12).
5)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방식’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생활이다.”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소원을 빌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에 나오는 어떤 부자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부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잘 지키면 된다고
대답하셨는데(마르 10,19), 십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을 그 자신도 느끼고 있었고(마르 10,20), 예수님께서는 그의 십계명 실천에 부족한 점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재물에 대한 집착과 애착심을 버리고, 능동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신앙생활이 곧 ‘십계명을 완전하게 지키는 생활’이고,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생활’입니다.
만일에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도 않고, 능동적으로 사랑을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십계명을 겉으로만 지킨다면, 그것은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죄를 안 짓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태 7,21).>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