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는 카라코람 산맥의 한 자락에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 K2가 해발 고도 8611m로 우뚝 솟아 있다. 보통 '야만의 산'으로 불린다. 봉우리는 흰 눈으로 덮인 피라미드처럼 보여 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 느낌을 준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50m)보다 더 오르기 힘든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영국 BBC 팟캐스트 Extreme의 시즌 2 'Peak Danger' 진행을 맡은 역사학자 나탈리아 메흘먼 페트르젤라는 신혼 부부로 2008년 K2 등정에 나섰다가 이틀 만에 신랑 롤 프 배(Rolf Bae)를 비롯해 11명이 목숨을 잃는 것을 지켜본 세실 스콕(Cecilie Skog)의 여정을 따라가는데 27일(현지시간) 예고 기사를 내보냈다.
스콕은 어린 시절부터 산에 매혹됐다. 태어난 곳부터 정복하기 힘든 것처럼 보이는 봉우리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어렸을 때 벌써 그녀는 고산과 높은 지대에서 놀았다. 많은 산악인들처럼 그녀는 산을 오르겠다고 달려가는 것이 "중독성 있었다"고 돌아봤다.
스콕의 말이다. "난 노르웨이 서쪽 해안의 작은 마을 알레순드에서 자라났다. 이 작은 마을 주변 어디를 가나 산들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이 산들은 마땅히 그랬어야 했는데 일종의 경고 '이거 중독성 강한데'를 내보내고 있었다."
세계의 산들을 오르며 스콕은 사랑을 만나 등반가 롤프 배와 결혼했다. 몇 년에 걸쳐 등반 기술을 익힌 뒤 둘은 신혼여행으로 아시아를 돌아보고 K2를 등정하는 것이 완벽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파키스탄 발토로 빙하에서 여정을 시작했는데 여섯 봉우리가 7900m를 넘긴 곳이었다. 손때가 묻지 않아 아름다운 곳이라 이끌렸는데 높은 고도의 가파른 벼랑, 숨이 턱 막히는 상승, 그리고 속임수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유령이 상존한다는 전율이 함께 했다.
페트르젤라는 "만약 K2를 접수할 생각이라면, 당신과의 게임을 이겨내야 한다. 그것이 등반계에선 '산악인의 산'으로 알려진 이유"라고 말한다. 명성이란 스콕과 배가 잘 인지하고 있는 어떤 것인데 삶이냐 죽음이냐를 가르는 비상 상황에 맞닥뜨릴 수 있다. 스콕은 팟캐스트에 나와 "가장 중요한 것은 정상일 수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서 집에 돌아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카라코람 지역에 닿자마자 스콕과 배는 30명정도의 희망에 차고 낙관적인 등반가들에 합류했다. 세르비아를 비롯해 아일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한국까지 국적도 다양한 산악인들이 네팔과 파키스탄 포터(짐꾼)들을 동반했다. 숙련된 이들이었고 제반 여건, 위험들과 날씨 변수 등에 아는 것도 많았다. 산사태, 낙석, 눈폭풍에 대해 들어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는데 뜻하지 않게 접한 경고도 있었는데 바로 여정을 시작할 때 이전 K2에 오르려다 목숨을 잃은 이들을 추모하는 것이었다.
페트르젤라는 "도착했을때 여러분은 갈색의 커다란 돌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오방색 깃발들이 펄럭이고 그 아래 죽은 등반가들의 사진들이 놓여 있다"고 말한다.
추모의 시간이 등반가들의 발목을 붙잡을 만큼 충분하지 않으며 저산소와 추운 날씨를 막아주는 것도 아니다.
함께 오르던 에릭 메이어 박사는 "내가 경험한 것은 '내가 왜 여기 있지… 내가 적당한 곳에 있는 거야?'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었다. 난 그곳에 있게 된 내 동기를 묻고 있었다"면서 "그 때쯤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 거냐고 생각하기 시작한다"고 털어놓았다.
용감무쌍한 길손들이 스스로를 시련에 밀어넣고 K2에 맞서게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페트르젤라는 산의 정상을 발 아래 뒀다고 말할 수 있는 소수에 들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편의와 생필품을 제공하는 가내공업( cottage industry)을 거론한다. 하지만 상업화는 산악인들의 안전에 대한 우려와 함께 의심할 여지 없이 아주 위험한 트렉에 거의 자유방임으로 접근하게 만든다.
페트르젤라는 "산 등반의 룰 북이 없다. 어떤 국제 연맹도 여러분에게 어떤 산을 어떻게 올라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 등반을 큰 사업으로 만들더라도 제지할 수가 없다. 요즘 적당한 가격만 치르면 8000m 봉우리의 슬로프에 당신을 데려다 줄 수 있다"고 말한다. 모든 산악인들을 감독할 협회도 없는 반면, 국제산악연맹(UIAA)은 "헬멧과 하네스와 크램폰을 비롯한 25종의 안전 장비 기준을 개발했다"고 한다.
그녀가 속한 그룹이 장비를 잃어버리는 등 예상하지 않은 시련에 맞닥뜨렸을 때 스콕은 돌아설까 하는 마음이 살짝 들기 시작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정상에 여전히 이끌리고 있었다. "미친 짓이니까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위쪽을 바라보자 정상이 거기 있었다. 아주 가까웠다. 정상에 가까울수록 돌아서기가 힘들었다. 일종의 강박, 그들을 더 나아가게, 산 위로 올라가게 끌어당기는 불가항력 같은 것이었다."
나중에 2008 K2 재앙으로 알려진 일은 1986년 다섯 명이 스러진 비극과 너무도 닮은 꼴이었는데 엄청난 눈사태 덩이가 이 산에서도 가장 험난한 보틀넥 구간에서 로프로 연결돼 이동 중이던 등반가들을 휩쓸어 간 것이었다. 스콕의 신랑 배도 당시 10명의 산악인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운좋게 K2 정상을 밟은 이들도 동상과 부상으로 힘겨워했다. 페트르젤라는 생존자들도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처럼 전쟁신경증(포탄 쇼크)을 느낀다"고 했다.
기록을 찾아보니 당시 스콕 커플과 함께 K2에 오른 한국인들은 김재수 대장이 이끄는 경남산악연맹 등반대였다. 이듬해 낭가 파르밧에서 운명한 고미영도 함께 올랐는데 하산 길에 황동진 대장과 박경효 대원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 자세한 사고 상황은 지난해 6월 월간 산의 아래 기사를 참조했으면 한다.
스러진 산악인 명단이 베이스캠프에 마련된 임시 추모지 명단에 추가됐다. 이 사고는 "히말라야 역사에 최악의 비극 중 하나"로 보도됐다.
그래도 스콕은 모험을 계속했다. 그녀는 부분적으로나마 남편과 경이로운 감정을 공유하는 것처럼 느낀다고 했다. 그녀는 그린란드를 함께 트레킹할 친구들을 모았고 뒤에 남극을 지원 없이 횡단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히말라야도 다시 찾았는데 시각은 완전히 달라져 정상 열병(summit fever) 같은 것은 떨쳐냈다고 했다. "그곳에서도 같은 느낌을 갖지 않았다. 난 이런 감정은 더 이상 내게 남아있지 않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