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행 후기
어제 오후는 창원에서 내가 속한 연구단체에서 정기 모임이 있던 날이었다. 그 자리는 교육장을 역임한 한 선배가 퇴임 인사를 하는 자리를 겸하기도 했다. 모임을 주선하는 후배가 참석 여부를 물어왔을 때 나는 참석이 여의치 못함을 양해 구했다. 젊은 날부터 교류가 있던 한 시인이 울산에서 딸 예식을 올려서다. 그 문인은 교장으로 퇴직해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지내는 분이다.
혼주가 되는 선배 문인은 초등 교단에서는 드물게 아동시가 아닌 시로 두드러진 작품 활동을 했다. 교직에서 은퇴 이후에도 교정시설을 순회하면서 시 창작으로 수형자들의 정서순화에 도움을 주고 있다. 울산 거소는 정리하고 선대 고향인 경북 성주 산골에서 잠시 머물다 지금은 수도권에 살고 있다. 사모님이 먼저 시집보낸 큰 딸 곁에서 외손자를 돌봐야 해서 그쪽으로 올라갔다.
이월 셋째 토요일 오전 오랜만에 울산 걸음을 하게 되었다. 평소 같으면 산자락을 누비거나 들녘을 걸었을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창원에서 나와 절친한 벗도 예식장에 나타나야 되는데 서울로 출장을 가 그곳에서 울산으로 바로 간다고 했다. 창원 벗도 젊은 날부터 혼주가 되는 시인과 오랜 교류가 있어 하객이 되어주어야 했다. 예식은 오후 2시라도 한나절 일정으로 길을 나섰다.
울산시외버스 터미널에 닿아 먼저 창원으로 돌아갈 버스 시각표를 알아두었다. 통보 받은 예식장은 버스터미널에서 멀지 않았다. 나하고 생활권과 다른 곳이라 다수의 하객들은 낯선 분들이었다. 주로 교직에서 은퇴한 칠십대 전후였다. 더 낮은 연령대는 나하고는 어렴풋 얼굴이 연결되는 인연도 있었다. 울산이 광역시로 분리되기 전에는 우리 지역과 같은 인사구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진해와 진주에서 온 시인은 나하고 호형호제하는 사이라 반가웠는데, 나는 그들과도 한동안 교류가 없었다. 그간 무심하게 지낸 나를 이해해 주십사했다. 예식이 늦은 점심시간대에 진행이 되어 신부측 신랑측 가족과 지인을 제외하고는 뷔페에서 식사를 들게 되었다. 나는 진주에 연고를 두고 창원에서 교육 전문직을 재직하는 후배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그간 밀린 안부를 나누었다.
후배와 점심을 든 테이블엔 울산에 사는 시인을 소개받았다. 고향이 삼랑진으로 젊은 날 통영에도 잠시 근무하다 울산에서 교직을 마친 분이었다. 정년 이후에도 시작 활동을 왕성하게 해 작년 말 펴낸 ‘갈대꽃’이라는 시집을 내게 한 권 건네주어 고맙게 받았다. 떠나온 고향 밀양 삼랑진 일대 역사와 전설에 관해 관심이 많아 내가 그곳에 관해 남기는 작품들을 보내드리겠노라고 했다.
후배가 먼저 자리를 뜰 때 창원 벗이 출장을 마치고 KTX를 타고 울산통도사역에 내려 서둘러 예식장을 찾아왔다. 식이 끝나 혼주 내외도 신랑신부와 뷔페에서 식사를 들고 있을 때였다. 나는 어차피 창원 벗과 함께 복귀해야 하기에 동선이 같을 수밖에 없었다. 벗은 운전대를 잡지 않아도 되어 나와 같이 잔을 들어도 되었다. 벗은 맥주잔을 비우고 나는 작은 잔 맑은 술을 비웠다.
마주 앉은 울산 시인 고향이 나와 동행한 창원 벗과 같은 밀양으로 본관도 같고 항렬은 엇걸렸다. 오늘 예식을 올린 혼주와 따님과 얽힌 날들을 회고해 보기도 했다. 시간이 제법 흘렀을 때 지인들과 다음을 기약하는 인사를 나누고 뷔페 홀에서 나왔다. 그즈음 나는 절친하게 지내는 울산 사는 벗을 만나는 틈을 내야 했다. 내가 모처럼 울산 행차를 했기에 그냥 되돌아올 수 없어서다.
벗은 비상대기 중 집에서 베란다 페인트칠을 하다 삼산동 농수산물도매시장으로 달려왔다. 설 무렵 화재가 난 횟집은 야외 임시천막에서 영업을 계속했다. 벗은 싱싱한 활어를 회로 뜨게 해 셋이 잔을 기울였다. 시간이 지나자 지난날 경주 산방에서 만났던 지인 둘이 타나나 자리가 길어졌다. 중년을 넘기면서 일상에서 부대끼는 얘깃거리로 담소를 나누었더니 어느새 밤이 이슥해졌다. 19.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