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만리. 7월 8일 월요일. 여행 10일 차.
희뿌옇게 동창이 밝아온다. 침대에 누운채로 통유리을 통해 거대 설산을 본다. 신기하다. 창밖으로 손닿을 듯 솟은 뾰족산은 '레이디 핑거(6,000m)'다. 이름 그대로 가늘고 긴 모양이 이제 막 손톱 손질을 마친 미인의 손가락을 닮았다. 바로 곁 오른편에는 뭉텅하게 로보트 주먹 같은 봉우리가 짝을 이뤘다. 다분히 남성적이다. 공교롭게도 두 개 봉우리의 음양이 잘 맞아보인다. 마치 다정한 연인 둘이 편안한 시선으로 훈자나가르(마을)를 내려다 보는 듯 한 형상이다. 여기 이 마을이 세계적인 길지(吉地)가 된 까닭이 다 이 때문이 아닌가싶다.
시선 아래 넓은 계곡 따라 멀리 보이는 '라카포시봉(7,788m)'의 꼭데기에 이제 막 아침 햇살이 닿았다. 흰 구름을 이고서 하얗게 빛나는 설봉의 위용이 대단하다.
호텔 바로 아래 훈자계곡의 전모와 주변의 산군(山群)을 함께 조망할 수 있는 명소가 있다. 이름하여 '이글스 네스트 포인트'. 풀포기 하나 없는 자그마한 민둥 바위산이다. 뒷짐을 지고 천천히 오른다. 얼마나 많이 밟혔던지 길바닥 흙들이 곱디 곱게 파우더가 되었다. 밟아가는 걸음마다 먼지가 폴폴거리는 통에 빨리 걸을 수가 없다.다. 물론 먼지도 고려 대상이지만 여기에서 빠른 걸음은 이롭지 못하다. 조금만 서둘렀다하면 금방 숨이 차오른다.
멀지 않은 길이기에 곧 정상에 닿았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드니 온 세상을 옹위하듯 병풍처럼 둘러선 설봉들이 성큼 다가선다. 역시나 압권은 '라카포쉬봉'이다. 이 산은 히말라야 산맥의 일부인 카라코름 산맥의 주봉 중 하나로써 세계에서 27번째로 높은 봉우리이다. 파키스탄의 여인들에게는 저 산이 신앙의 대상이며 경배의 대상인가보다. 하늘로 솟구쳐 하얗게 빛나는 봉우리를 향해 단정한 자세로 무릅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 사뭇 경건하다. 때마침 들이친 햇살이 서광(瑞光)이 된다.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 나를 위해 빌어준 간절함에 의하여 지금 건강과 행복을 누린다고 여기자. 내가 나 아닌 타인을 위해 기도했듯이.
세수를 해보니 얼굴이 매끈매끈하다. 소위 '훈자워터'의 효능인가보다. 이곳의 물은 모두 눈이 녹고 빙하수가 섞인 세계 최고의 건강수로 알려져있다. 여기가 장수촌이 된 이유 중에 첫번째를 꼽으라면 단연 '훈자워터'가 그 자리를 차지하리라.
아침식사는 호텔의 뷔페식이다. 역시나 커리 맛이 훌륭하다. 음식은 먼저 눈으로 먹는다는데 예쁜 노랑으로 조리된 닭고기 커리가 입맛을 사로잡는다.
구절양장(九絶羊腸)이라 함은 '무척이나 험한 길이 마치 양의 창자처럼 굽었다.'는 말이다. 바로 여기의 비탈길이 그렇다. 저 아래 이 지역의 중심지인 '카리마바드'로 내려가는 길, 모두 몇 번 꺽이는지를 세다가 그만 포기했다. 승용차 두대가 비켜가기도 어려운 좁은 길을 아슬아슬 잘도 내려간다. 어제 올라올 때는 잘 몰랐던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고나니 심장이 다 쫄깃거린다.
집에서 여행 준비를 할 때 게으른 마음에 출발 하루 전 저녁이 되어서야 짐을 꾸렸다. 챙긴다고 챙겼는데 이래저래 빠진게 많다. 본래 많은 짐을 챙기는 스타일이 아니지만 긴팔 셔츠 하나 쯤은 챙겨와야했다. 팔 토시도 빠뜨렸다. 덕택에 무방비로 노출된 팔이 점점 새카매 진다. 대책이 필요하다. 기웃기웃 옷가게를 찾아가 마춤한 자주색 남방셔츠를 구입하고 나니 흡족하다.
다리 쉼을 하느라 카페에서 차 한 잔 하고 나오는데 가까운 봉우리에 구름이 걸리는가 싶더니 이내 소나기가 되어 내린다. 미처 우산도 챙기지 못했다. 낭패다. 먼지가 잕아드는 효과가 있긴 하나 비 맞고 돌아다님은 그야말로 청승이다. 과감히 '발티드 포트'를 가기로 한 이후 계획을 접어두고 그냥 점심이나 먹기로 한다.
한국 식당 한번 가보자고 의견 맞춰 찾아간, 소위 맛집으로 알려진 '카리마바드 인 한식 맛집'. 정말이지 이제까지 가장 비싸면서 가장 맛없는 김치볶음밥을 먹어봤다.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여행길에 한식당은 로우퀄리티에 하이프라이스, 대부분은 돈과 입맛을 함께 버리는 바보같은 짓이다.
호텔로 돌아와 잠시 쉬었자니 인근에 개업 집이 있다하여 축하 차 찾아갔다. 복만이의 지인이라는데 이번에 식당을 차렸단다. 예전에 복만이는 여기 훈자에 삼년 간 살았단다. 그래서 지인이 많다. 오가면서 건네받는 수많은 인삿말들, '훈자의 왕자'를 자처했던 것이 허언이 아니었다. 우리 일행이 주빈으로 초대되었다. 쑥스러워 하는 복만이가 등떠밀려 개업식 테이프커팅을 한다. 식탁에는 소박한대로 다과와 차(茶)가 준비되었다. 부디 번성하여 돈 많이 벌기를 빈다. 내일 저녁 식사는 여기서 다 함께 하기로 의견을 맞췄다.
침대에 누워 하늘을 올려보자니 세상 부러운 게 없다. 여행길이 돌아다니는 것 만이 능사가 아니다. 가끔은 멈추고 쉬고 놀아야만 보이고 느끼는 것이 생기는 법이다. 내일을 위해서 푹 쉬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