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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칼뱅의 생애와 사상] 서론(3)
수수께끼의 기원
칼뱅이 어떤 역사적 수수께끼를 대표한다고 하면 터무니없는 말처럼 들릴 수 있다. 16세기의 다른 인물들에 비하면 칼뱅에 관해서는 더 많이 알고 있지 않은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칼뱅의 놀라운 이력을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그에 관해서, 특히 그의 초기 생애에 관해서 우리가 원하는 만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의 사상과 이 사상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그의 저술은 그가 서구 문명에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실제로 칼뱅과 레닌의 유사점을 이야기하는 역사가가 많다. 두 사람 다 상당한 수준의 이론적 비전과 더불어 그것을 체계화하는 천재성을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은 혁명 운동의 조직과 방향, 나아가 궁극적 성공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 뒤에 존재하는, 살과 피를 지닌 한 인간으로서의 칼뱅은 여전히 뭐라고 정의하기가 어렵다. 장 칼뱅이 파악하기 어려운 인물이어서가 아니다. 색슨족의 위대한 개혁가 마르틴 루터와 비교해 보면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루터는 중요한 개혁가로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많은 글을 썼다. 덕분에 풍부한 자료가 남아 있다. 종교개혁가로서 마르틴 루터의 경력은 1519년 6-7월에 열린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루터가 면벌부 판매에 항의하여 작성한 95개조를 언급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어서 루터는 이듬해인 1520 년에 개혁을 주장하는 세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520년에 루터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인기 개혁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그러나 개혁가라는 소명 의식의 밑바닥에는 그가 공적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발전시켜 나갔던 일련의 종교 사상이 있었다. 1513년부터 1517년까지 루터는 비텐베르크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그는 결국차후에 일어난 사건들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상들을 붙들고 씨름했다. 이러한 사상의 형성기에 루터가 이런저런 형식으로 남긴 저술 대부분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덕분에 우리는 루터의 기본 종교사상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추적할 수 있다.
그러나 칼뱅의 경우에는 그의 종교 사상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추적하기가 어렵다. 사상 형성기에 칼뱅이 직접 쓴 저술이 거의없다고 할 정도로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가의 경력은1533년 말 또는 1534년 초의 어느 시기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1532년 4월, 칼뱅은 세네카의 <관용에 대하여De clementia》의 주석을 출간했다. 그러나 이 주석에는 인문주의 학자로서의 박식함과 젊은이 특유의 야망을 제외하면, 청년 칼뱅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짐작할 만한 단서가 거의 없다. 그러면 이렇게 자료가 부족한 이유는 뭘까? 그 이유를 파악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1530년대 초, 프랑스군주와 복음주의 활동가들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다. 1534년 10월 18일 일요일 아침, 얼마 전부터 몰려들던 뇌운이 '벽보 사건'과 함께 마침내 뇌우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앙부아즈에 있는 왕의 침실로 통하는 곁방을 포함하여 프랑스 전역에 걸쳐 눈에 잘 띄는 중요한 장소마다 벽보가 붙었다. 가톨릭교회의 종교 관례를 맹렬히 규탄하는 이 벽보를 집필한 인물은 앙투안 마르쿠르(Antoine Marcourt)였다.
이에 잔뜩 화가 난 프랑수아 1세는 오래전부터 경고했던 진압책을 꺼내 들고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복음주의자들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내심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그 사실을 밖으로 드러낼 수 없게 되었다. 장 칼뱅은 1533년 11월에 이미 이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파리대학교에서 신임 총장 니콜라 콥(Nicolas Cop)이 만성절에 선동적인 연설을 한 다음 날, 칼뱅은 파리를 떠나 상대적으로 안전한 앙굴렘으로 몸을 피했다. 복음주의 견해를 옹호하는 것 같은 콥의 연설은 보수 성향이 강한 이들 사이에서 많은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연설문의 실제 작성자로 의심받는 칼뱅은 가능한 한 빨리 파리를 떠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행동의 타당성을 입증해 줄 사건들이 뒤이어 일어났다. 칼뱅의 생애를 기록한 전기 작가들이 강조하는 것처럼 이는 실로 '아슬아슬한 탈출'이었다. 칼뱅이 피신하고 채 몇 시간이 되지 않아 경찰들이 그의 방을 수색하고 개인적인 기록물을 압수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칼뱅의 사상이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를 엿보는 데 아주 유용한 빛이 되어 주었을 개인적인 기록들은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때문에 칼뱅의 사상 형성기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런데 부족한 증거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어떤 이들은 칼뱅의 초년기를 설명할 때 역사적 추론을 역사적 사실로 제시하고픈 유혹에 시달리다가 결국 유혹에 굴복하곤 한다. 심지어 칼뱅의 이력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연대상의 수수께끼"에 해당한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바른말을 하던 에밀 두메르그Émile Doumergue 마저도 칼뱅의 역사적 권위에 대한 추론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려 하기보다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다음으로 루터는 자전적 성격의 글을 유난히 잘 썼다. 그가 남긴 저술 곳곳에서 그런 글귀를 간간이 발견할 수 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글이 작고하기 한 해 전인 1545년에 쓴 <자전적 단편 Autobiographisches Fragment>이다. 이 글은 루터의 저술을 한데 묶은 전집의 초판 서문으로 활용되었다. 이 서문에서 루터는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러면서 자신이 어떤 배경에서 성장했고, 종교 사상은 어떻게 발전해 왔으며, 결국은 루터식 종교개혁으로 이어진 당시의 위기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었는지 제법 자세히 서술한다. 노인들이 지난날을 회상하며 늘어놓는 추억담은 신뢰하기 어렵다는 게 중론이지만, 진위를 확인한 결과 루터의 역사적 기억은 꽤 정확한 편이다. 루터는 종교개혁 프로그램의 토대가 된 자신의 사상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직접 설명한다. 따라서 루터의 사상이 형성되고 발전한 시기에 그가 쓴 저술들과 이 글을 대조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칼뱅은 저술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소개하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을 삼갔다. 복음주의를 대변하는 한 남자와 중세 교회의 결별을 설명한 《사돌레토에게 보내는 답신 Responsio ad Sadoleum》(1539)의 한 구절을 자전적 서술로 볼 수는있다. 그러나 실제로 칼뱅이 그렇게 주장한 적은 없다. 1557년에출간한 <시편 주석>의 서문 가운데 명확히 자전적 성격을 띠는 부분은 감질날 정도로 짧고, 해석하기도 쉽지 않다. 설교할 때는 대개일인칭으로 말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많이 드러냈는가 하면 꼭그렇지도 않았다. 겸손한 성품 탓에 훗날의 역사적 재구성에 영향을 끼치는 자기 성찰과 회상을 일부러 억제한 것으로 보인다.
칼뱅의 복잡한 성격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은 개혁가 칼뱅을 몹시도 적대적으로 묘사하는 저술들에 가로막혀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만다. 이런 적대적 묘사는 제롬 에르메 볼섹(JeromeHermes Bolsec)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그는 1551년에 칼뱅과 논쟁을 벌였던 인물이다. 이 일로 기분이 상한 볼섹은 1577년 6월, 리옹에서 《칼뱅의 생애vie de Calvin》라는 책을 출간했다. 볼섹의 주장에 따르면, 칼뱅은 구제 불능일 정도로 지루하고 심술궂고 살벌하고 욕구불만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고 자신을 하나님처럼 떠받들었다. 동성애 경향에 자주 사로잡혔을 뿐만 아니라 가까이 있는 여성들과의 성관계에 탐닉하는 습관이 있었다. 또한 칼뱅이 누아용에서 성직을 사임한 이유는 동성애 행각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볼섹이쓴 전기가 테오도르 드 베즈 Théodore de Bèze 나 니콜라 콜라동 NicolasColladon 이 쓴 전기보다 재미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볼섹이 쓴 칼뱅의 전기는 대부분 익명으로 제보한 근거 없는 이야기에 의존하고있다. 볼섹은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라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자들의 눈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그런데도 개혁가칼뱅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현대 작가들은 그의 삶과 행실을 묘사할때 볼섹이 재구성한 칼뱅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그 결과 사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선이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다. 칼뱅에 관한 다른 여러 신화와 마찬가지로 볼섹이 만들어 낸 신화는무비판적으로 소비되면서 하나의 성스러운 전통으로 여전히 살아숨 쉰다. 역사적 근거가 없음이 명백한 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칼뱅이 특별히 매력적인 사람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칼뱅에게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루터를 즐겁게해 줄 만한 위트와 유머 감각과 따스함이 없었다. 마치 그의 저술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칼뱅의 페르소나는 조금은 냉정하고 무심한인물이었다. 건강이 나빠지면서부터는 성미 급하고 화를 잘 내는성향이 점점 더 심해졌다. 또한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에대해서 주로 그들의 사상을 논박하기보다 모욕적인 인신공격을 하기 일쑤였다. 사망한 해인 1564년에 칼뱅은 몽펠리에의 의사들에게 자신의 건강을 크게 악화시킨 질병의 주된 증상을 설명하는 편지를 썼다. 의미심장하게도, 그중 일부는 편두통이나 과민대장증후군 증상과 일치한다. 둘 다 스트레스 증상으로 알려진 질병이다. 당시에, 특히 1550년대 초반에, 칼뱅이 스트레스가 매우 심한 상황에직면했고 이런 상황이 건강에 영향을 미친 것인지, 아니면 고유한성격적 특성 때문에 유독 스트레스에 취약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칼뱅은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길 꺼렸다. 확실한 사실은 그가 침울해 보이는 남자였다는 점이다. 현대 독자들이 그런 그와 공감대를 이루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그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칼뱅이 그토록 자신을 드러내길 꺼렸던 이유는 뭘까? 칼뱅의 복잡한 성격을 풀 열쇠는 칼뱅이 자신의 소명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은 드문 순간에, 칼뱅은 하나님이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자신을 따로 구별해 놓으셨음을 굳게 확신하노라고 명확히 밝혔다. 칼뱅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다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달았다.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신을 인도하셨다고 믿었다. 내게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데도, 하나님은 나를 부르셨고 나의 인생행로를 바꾸셨으며 나를 제네바로 보내셨고 내게 사제와 복음전도자라는 직무를 맡기셨다'라고 칼뱅은 생각했다" 자신이 가진 권위가 무엇이든, 그것은 타고난 재능과 능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이해했다. 칼뱅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일 뿐이었다. 루터주의에서는 이신칭의 교리를 말하고, 개혁주의에서는 '공로를 세우기 전에 이루어지는 선택의 교리를 말했다. 이 점에서 종교개혁은 타락한 인간의 죄성과 무가치함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칼뱅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칼뱅을 선택하신 행위는 하나님 자신의 자비로우심과 너그러우심을 드러내는 행위였다. 칼뱅이 갖추고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자질이나 앞으로 세울지도 모르는 어떤 공로 때문에 칼뱅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셨다고 굳게 확신하는 칼뱅의 소명 의식을 두고 칼뱅이 얼마나 오만한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증거라고 주장하는 건 종교개혁의 영성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우리는 칼뱅의 성격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대신에 칼뱅이 자신의 소명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명확히 알고 있다.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칼뱅에게는 비타협적 태도에 가까운 용기가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좌절될 위험이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는 어떠한 타협도 거부할 수 있었다. 칼뱅은 개인적으로 받는 조롱은 기꺼이 감수했지만(그 결과 깊은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자신에게 향하던 조롱이 자신이 믿는 대의와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께 향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칼뱅은 자신이 그저 하나님께 쓰임받는 도구이자 하나님의 대변자일 뿐이라고 확신했다. 칼뱅은 자신의 성격을 하나님의 행하심을 가로막는 잠재적 걸림돌로 보았다. 그래서 겸손한 품성을 기르려 애쓴 것 같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칼뱅의 이력과 성격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데는 여러 어려움이 따른다는 점을 처음부터 명심하고,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지만) 칼뱅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려는 자연스러운 성향을 경계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는 당시 칼뱅이 살았고 뒤에 그가 바꾸었던 세상, 그 세상을 형성했던 종교 세력과 사회 세력, 정치세력, 지식인 세력에 관하여 최대한 그럴듯한 그림을 그려 내기 위해 후기 르네상스 시대 역사가들이 쓰던 자원들을 사용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에는 큰 공백이 있다. 칼뱅은 유독 자기 얘기를 안 하는 사람이었다. 역사가들은 칼뱅의 이력 가운데 어둠 속에 묻혀 있는 부분들을 명확히 밝히려 했으나, 칼뱅은 자신의 삶이 역사가들의 소재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따라서 칼뱅이 뭔가 좀 재미없는 인물로 생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칼뱅은우리에게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태도와 야심을 좀체 드러내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단색의 스케치에 불과하다.이에 만족하지 못한 일부 역사가들은 간결한 역사에 살을 덧붙이고싶은 유혹에 넘어가기도 했다. 이런 태도를 이해하지 못할 것은 없지만, 그 위험성에 대해서만큼은 즉각 인정해야 한다. 미리 어떤 견해를 정해 놓고 주제에 접근하는 역사가들의 서술에는 그들이 속에감추고 있는 추정이 반영되게 마련이다. 결국 이들이 끼고 있는 색안경은 우리가 역사 속에 실존했던 칼뱅에게 접근하는 것을 방해한다.
인류 역사에서 칼뱅이 차지하는 위치는 주로 그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을 통해 단순히 칼뱅의 사상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의 사상을 빚어 낸 지적 전통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이어지는 두 개의 장에서는 이러한 지적 전통을 확인하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칼뱅이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해 의지했던 문헌과 방법론과 사상 들을 함께 살펴볼 생각이다. 그러려면 파리, 오를레앙, 부르주, 이 세 도시와 이들 도시에 자리 잡은 대학들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