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랑한다면.."
#9
“저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어, 현우씨, 오늘 인턴 온 기념으로 회식하려는데~ 회식비 나왔어~”
“아, 저 오늘 쉬어야 될 것 같아서요. 죄송해요”
“현우씨~ 가자, 가자”
“현우 선배, 가요가요~”
“수진아, 네가 말해봐~ 직속 선배잖아”
“서, 선배님.. 같이 가요~”
수줍게 웃으면서 말하는 그녀를 보고, 나는 잠시나마 흔들렸다.
직속선배라는 말에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내가 조금 찔리기도 했다.
“미안해, 오늘은 그냥 가볼게요, 죄송해요!”
나는 어깨에 가방을 걸치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삑 하고 차 문이 덜컹 열렸다. 히터를 틀고는 잠시 몸을 녹였다. 운전대를 잡는데,
“잠시만요!” 하고 누군가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고개를 숙여 얼굴을 보니, 그녀였다.
“선배님, 타도 되나요?”
“어? 회식은..”
“사실 저희 집안이 되게 엄해서요~ 통금시간도 있어요~”
“그렇구나. 집이 어딘데?”
“신도림 역 2번 출구에서 내려주시면 되는데.. 괜찮으세요?”
“어? 나 거기 사는데”
“정말이요?”
“응, 신도림 역 2번 출구 앞에 있는 빵집이랑 편의점 사이 언덕 위로 올라가면 아파트 동네가 있는데, 그 옆에 있는 오피스텔”
“어, 저 그 아파트인데.. 무지개 아파트”
“아~, 무지개”
우린 동시에 얘기했다.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선배님이랑 같은 동네 사니까 너무 좋아요! 앞으로 출, 퇴근도 함께 할 수도 있겠고.. 아, 선배님은 차 타고 다니시니까..”
“나 원래 차 잘 안타고 다녀. 기름값 아끼려고 지하철 타는데, 오늘은 좀 늦게 일어나서”
“그러셨구나~ 그럼 앞으로 신도림 2번 출구 앞에서 만나요!”
“그러자”
“와~신난다”
나는 운전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참 어리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 윤희야, 왜?”
“동생이 오빠한테 전화하는 게 뭐 용건 있어야 하나?”
“그래도 용건 있어야 하면서..”
“크리스마스 때 언니랑 올 거야, 말 거야?”
“그건.. 갑자기 왜?”
“아니, 파티 준비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겨우 이틀 남았다고요, 바보야”
“오빠한테 바보가 뭐냐, 바보가. 아무래도 못 갈 것 같아. 오빠만 갈게~”
“왜, 왜?”
“요즘 정현이가 많이 바쁜 가봐”
“흥, 언니는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일년에 한 번 있는 행사를 못 온대”
“오빠 지금 운전 중이니까 나중에 전화하자”
“알았어~”
수진이가 물었다. “여동생이에요?”
“어, 어, 도착했다.”
때 마침 무지개 아파트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고맙습니다, 선배님”
“그래, 내일 보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왔다.
불이 꺼져있는 캄캄한 집에 홀로였다. 불을 별로 키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 난 어둠을 별로 안 좋아했다.
아니, 어느 순간 무서웠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흔적이 남김없이 사라질까 두려웠다.
그녀가 떠난 지 얼마 안됐을 땐, 더 많이 힘들고, 악몽도 자주 꿨다.
그녀는 떠나고, 나 홀로 남아서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는 꿈이었다. 도저히 난.. 그녀가 없이는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불을 켜고, 어깨에 걸쳐있던 가방과 차 키를 한꺼번에 내려놓았다. 털썩
몸이 소파의 빈 자리를 비집고 들어갔다.
도저히 기운이 나질 않았다.
창 밖을 보니 수진이가 사는 아파트 단지와, 그녀가 살았던 주택가와 그 사이 사이에 네온사인들이 밤을 밝혔다.
집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대답 없는 전화.
“누구세요”
힘 없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끊습니다”
“잘 지내니?”
그녀였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난 아주, 너무 잘 지내서, 너는 잊고 살았다고.
그러는 너는, 날 떠나서 잘 지내는 거냐고.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웬일인지, 입이 얼어붙은 것 마냥,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현우씨, 많이 놀랬구나”
속에서 울분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과음한 사람마냥, 몸이 화끈 달아올랐다.
입은 바짝바짝 말라갔고, 수화기를 집은 손에서 식은 땀이 났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해야 되는데.
“끊습니다”
“저, 잠깐. 현우씨, 얘기 좀 하자”
먼 곳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는지 거리감이 멀어 보였다.
그녀가 현우씨 라고 부르는 순간, 내 마음은 이미 다시 흥분된 상태였다.
다짜고짜 어디냐고, 왜 갔냐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녀가 그런 나의 모습을 별로 환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나는 잘 지내.”
“현우씨는 역시 말이 별로 없구나. 과묵한 남자였지..”
한참 우린 말이 없었다. 그녀가 이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보고 싶어, 현우씨. 보고 싶다..”
수화기를 통해서 그녀의 한숨 소리가 짙게 들려왔다.
“화 많이 났을 것 같았어. 미안했어”
“미안했다는 말로, 쉽게 끝날 사이었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어. 이런 말로 우리 사이를 단순하게 정리 하려 하지 않았음 좋겠다. 이만 끊을게”
전화기를 쾅 하고 내려놓았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직 그녀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내가, 이렇게 모질게 그녀를 대할 수가 있다는 생각에 그만 북받쳐 올랐다.
그녀는 어찌됐건, 난 그녀를 많이 걱정했으니까. 아끼고 사랑했으니까. 어떻게 되든 좋았다.
난 잘 지내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
좀 더 모질게 해야만이 내가 그녀를 향한 마음을 차단하고 싶었다. 다시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나지만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