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0일 아침. 마라톤 대회 출발선 앞에 서면 처음 마라톤에 도전한 그날처럼 가슴이 설레인다.
올해로 3년째 참가하는 에어텔 델리 하프 마라톤 !
예년보다 대회가 2개월 당겨지면서 7월 중순부터 시작한 달리기 연습은 다름아닌 더위와의 싸움이었다.
“인도의 마라톤 대회는 보통 11월에서 1월 사이에 열리는데 9월이라니….. 대회를 기획한 사람이 도대체 마라톤을 한번이라도 뛰어본 사람인가?”
7,8월의 이른 아침이라 하지만 35도를 넘는 기온과 우기의 높은 습도로 아파트 몇 바퀴만 뛰면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고 몸 안에서 발산하는 열이 나갈 곳이 없어 머리 뚜껑이 열릴 듯했다.
주3회 달리기 연습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나 하나 갖고, 제인(아내의 달리기 닉네임) 하나 주고 그리고 같은 아파트에 사는, 첫 하프 마라톤에 도전하는 초보 달림이 인도 아줌마 베누에게 하나 주면서
열심히 해서 모두 목표를 달성해 보자고 결의를 했다.
이렇게 올해도 대회를 앞두고 달리기 연습은 시작되었다. (대회가 끝나면서 운동을 접는 것이 문제지만)
예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인도 아줌마가 가세한 것.
제인도 지금까지 인도 아줌마 친구가 없었는데 운동을 같이 하다 보니 금새 친해져서 평상시에도 많은 도움을 받게 되어 좋다고 했다.
뛰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혼자 뛰는 것보다 여럿이 같이 뛰면 훨씬 힘이 덜 들고 지루하지 않다.
이렇게 같이 뛰다 보니 이른 아침에 산책을 하는 많은 사람들과 자연스레 친해지게 되었다.
아파트를 돌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굿모닝~” 인사를 하면, 처음 보는 사람들도 모두들 반가이 답례를 해준다. 경비들도 처음에는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이 쳐다보았지만 지금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경례 인사를 한다.
아마도 인도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거의 반라의(???) 원색적인 옷을 걸치고 동네를 뛰어다니는 나와 제인의 모습이 이상하게 비추어 졌을지 모르겠지만(상스러운 불가촉천민???)
그들도 나중에는 우리를 친밀하게 바라보게 되었고 우리는 동네에서 유명인 아닌 유명인이 되었다.
어느 늦은 저녁, 처제와 통화를 하던 제인의 목소리가 떨리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갑자기 날아온 장모님 소식에 우리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했다.
그렇게 건강하고 자상하시던 장모님이 어떻게…..
파란만장한 인생 – 어린 나이에 시집오자 마자 장인이 군에 입대하면서 7년 동안 떨어져 계셨고, 젊어서는 중장비 운전을 하느라 전국을 떠도는 장인과 대부분의 시간을 떨어져서 1남 3녀를 키우셨고
중년에는 십여년간 중동에서 일하시는 장인과 떨어져 사시면서 외로움, 생활고와 싸우셨고,
노년에는 새벽에 일 나가시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시면서 크게 다쳐
삶의 의욕조차 잃어버리고 심한 우울증에 나날을 보내시다가
몇 년 전부터 겨우 삶의 의욕을 찾게 되어 학당에서 한글도 배우시고 이제 남은 삶을 당신의 방식대로 즐기실 거라고 하셨었는데…
그리고, 올해 가을에는 사위와 큰 딸내미 사는 것 보러 인도에 한번 놀러 오시겠다고 하셨는데…
그분은 평생 어려운 환경에서 사셨지만 본인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주변 사람들에게 내어주고 오로지 섬기면서 사셨다.
남편을, 자식을, 시댁 식구들을, 사돈, 친구 조차도… 아낌없이 다 내어주시고… 남들에게 베푸는 것을 너무 좋아하셨다.
나는, 아니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시장 생선가게 아줌마도 중국집 아저씨도, 토큰집 아줌마도 그런 장모님을 잊을 수가 없었다.
8월 마지막 일요일, 처음에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 3~4 km 쯤 뛰었을 때쯤 비가 억수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비를 맞으며 아파트 안에서 10 km 를 뛰고 밖으로 나갔다. 그 날은 장거리 주를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에도 비는 계속 몰아쳐 길 바닥은 금새 물바다가 되었다. (인도에 사는 분들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이다)
비를 맞고 뛰는 것은 더울 때 뛰는 것보다 오히려 편할 뿐 아니라 내리는 비가 얼굴과 온몸을 간지럽혀 기분을 좋게 해 주기 때문에 나는 우중주를 좋아한다.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고 뛰면서, 옛날 대학 1학년때 여름 소낙비를 맞으면 관악구청 고갯길을 걸어서 넘어 등교하던 생각도 났다.
그런데, 뛰다 보니 길 바닥에 고여 있거나 흐르는 물이 이제는 발목 위까지 잠겨 발을 옮기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발을 앞으로 차는 대신 발을 위로 올리면서 껑충껑충 뛰는 자세로 나머지 12 km를 마저 달렸다.
인도가 아니면 어디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작년 대회 때는 A 그룹(하프 마라톤 2시간 이하 완주자) 참가자가 많지 않았는데
올해는 전체 참가자가 많이 늘어 출발선 쪽으로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나와 제인은 B 그룹 사람들과 같이 출발했다.
제인에게 “파이팅!!!” 잘 뛰라고 격려하면서도, 날이 더우니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나는 제인과 헤어졌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뛰기도 전에 얼굴과 등에서는 벌써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래 오늘은 완주가 목표다. 즐기자. 맘껏 즐기자. 덥지만 화창한 날씨를, 잘 정리된 주로를, 주로에 나와 응원하는 시민들을, 고막을 찢을 듯한 밴드들의 음악을,
수많은 달림이들과 함께 이 에너지를, 이 공간을, 이 분위기를 즐기자”
오늘 내가 생각하고 있는 페이스 전략은 초반 5 km는 조금 천천히, 그리고 중반 5 ~ 15 km는 5분 15초 페이스로,
나머지 구간은 중반 페이스를 유지하거나 힘이 있으면 치고 나가는, 전반적으로는 네거티브 전략을 쓰기로 했다.
왜냐하면 날씨도 날씨지만 연습량이 절대 부족한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인디아 게이트 부근 아직 10 km도 가지 않았는데, 케냐, 이디오피아 등에서 온 엘리트 선수들은 벌써 17 km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들의 다리는 뛰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근육 말고는 아무 것도 붙어 있지 않은 것 처럼, 기린의 다리처럼 길고 가늘었지만 다리를 쭉쭉 피면서 시원하게 달리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힘이 나면서 자꾸 페이스가 빨라지고 있었다.
조금 지나자 반대편 주로에서 베누가 손을 흔들면서 힘을 내라고 한다. 나도 소리쳤다. “파이팅, 힘” 엄지 손가락을 한껏 위로 쳐올리면서…
그렇지만 제인은 모습은 통 보이지 않는다. 잘 뛰고 있겠지…
15 km 지점에서 급수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달리는 것을 멈추었다. 햇살이 너무 뜨거워 뛸 수가 없었다.
1분도 안되는 짧은 시간 걸으면서 천천히 물을 들이켰다.
그러나 아뿔싸, 다시 뛰려 하니 다리가 잘 안 움직인다.
벌써 나의 뇌는 걷은 것의 편안함을 기억하고 있었고 다음 순간 뛰지 말고 천천히 걸으라는 지령을 동시에 내리고 있다. 달리는 것은 관성이다. 달리는 것을 멈추는 순간 다시 달리기가 어려워 진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달리기 베테랑 아닌가?
자~ 다리와 몸에 힘을 빼고, 보폭을 줄이고 대신 발걸음을 빨리하는 것으로 몸의 시동을 걸자.
그리고 조금씩 보폭을 늘려가면 어느 순간에 뛰는 것의 고통이 사라짐을 느낄 것이다.
내가 마라톤을 좋아하는 이유는 뛰면서 나를 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을 멈추고 온갖 상념을 던져버리고 일상과 떨어져서 오로지
가장 단순한 것 – 뛰는 것 그리고 뛰는 자의 주변에만 집중하다 보면
내 스스로 여유로와짐을 느낄 수 있고 다시 돌아온 일상을 똑바로 주시할 수 있기 때문이리다.
이제 남은 거리는 4 km, 다리가 다시 가벼워 지면서 달리는 쾌감이 아스팔트 바닥으로부터 신발을 타고 내 몸 안으로 전달된다. 짜릿한 전율이 느껴진다.
그리고 마지막 1 km, 남은 힘을 다해 뛰어 보지만 생각같이 빨리 나가지는 않는다.
주변을 보니 다들 마지막 피니쉬를 향해 최선을 다해 뛰는 모습들이 보인다.
그전까지 있었던 고통은 다 잊어버린 듯 어깨를 들썩이며 달려 나간다.
피니쉬라인 50m 전, 이제부터 표정 관리해야 할 시간.
저 앞에 수많은 사진사들이 피니쉬 장면을 찍고 있기 때문에 얼굴에 지친 모습이 나타나지 않도록
한 껏 웃어 주면서 양손에는 V자를 그리며 여유있게 골인해야 한다.
우리의 기억은 잠시이지만 사진은 영원히 남는 것이므로…
피니쉬 라인을 통과하면서 시계를 눌렀다. 1시간 52분 28초
작년 기록보다는 8분 늦은 기록이지만 장하다, 수고했다, 자찬해 본다. 이처럼 더운날 완주했음으로…
20분 정도 후에 들어올 제인을 기다리면서 피니쉬 라인을 통과하는 수 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바라본다. 너무 재미있다.
다양한 사람들 그리고 다양한 표정들. 대 부분 완주를 했다는 자기만족에 한껏 고양된 표정이다.
제인은 작년 기록보다 20분 정도 늦은 2시간 15분에 들어왔고 힘들어 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어깨를 부축하며 속삭인다. “여보, 수고했어. 한국의 혹서기보다 더 더운날 완주를 했는데 대단한 거 아니야. 파이팅!”
첫댓글 먼곳의 친우가 이리 살아있음의 안부 알리니
이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무쟈게 반가워~~ 늘 건강해!!
김건수. 타잔 인도에서 고군분투하고 있구나. 너도 이곳이 그립겠지.
나도 네가 그립다.
인도에 있는 동안
여행 많이다니고
좋은 소식 좀 자주 올려주라...
내 블로그로 놀러와
http://blog.daum.net/lancearnstorong/13409281
잊고 있었는데 소식 들으니 반갑네요.
잘 지내시고 열심히 달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한국오면 뵙길 기대해봅니다.
우리 동기 다 모였네....^^
진영이도 잘 계시시요
잊지않고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잘 지내시리라 믿습니다.
이렇게라도 소통할 수 있으니 다행이지요....
무더운 여름!
훈련하기가 그리 쉽지않았을것 같습니다.
대단한 결심과 노력이 눈에 보입니다.
후기 잘 읽었습니다.
완주 축하드립니다. *^^*
이렇게나마 이세상에 존재함을 알수있음에 감사합니다.
타잔, 반가워요!! 그곳에서도 열심히, 잘 살고 있군요.
여유가 한가득 배어있네요. 지금은 인도의 더위도 익숙해졌겠죠??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10년전 글을 지금 읽었는데 눈시울이 붉어지네요... 제가 인도에서 마라톤하는걸 지켜보고있는것처럼 머릿속에서 영상이 지나가네요.수고하셨습니다. 늦었지만 삼가고인에 명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