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만리 7월 9일 화요일 여행 11일 차.
오늘로서 이번 여정의 절반을 넘겼다. 시간 참 빠르다.
오늘은 호퍼 빙하 트레킹이 예정되어있다. 카라코람 산맥에 속한 이 빙하는 현지인 가이드만 대동하면 단순 여행자도 적당한 코스를 골라서 탐사할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인 곳이다.
오늘 따라 쾌청하다. 어제 밤 내린 소나기 때문인지 공기도 맑고 시계(視界)가 좋아 저만큼 7788m의 라카포시봉이 성큼 다가와 보인다. 사실 여기는 비록 청정지역 이라지만 워낙 건조한데다가 바람이 많은 곳이어서 늘 공중에 흙먼지가 섞여있다. 숨쉬기 마저 답답할 정도다. 그런데 간밤 소나기 덕에 숨쉬기도 좋아지고 구경도 잘 할 수 있으니 잠깐 스쳐가는 여행자에게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저 아래 보이는 훈자강을 건너면 '나가르'지역이다. 비록 지척의 거리이지만 이곳 '훈자'와는 생활하는 모습이 조금 다르다. 특히 종교적으로 훨씬 보수적 까닭에 이곳 훈자 지역의 개방성에 대하여 많이 불편해한다. 그로 인해 양편의 지역 감정이 아주 심하여 때론 구체적 충돌까지 일어난다는 곳이다. 오늘은 바로 그곳 나가르에 있는 호퍼빙하를 찾아간다.
예의 구비길을 내려가 훈자강을 건너자마자 또 다른 지류가 우릴 마중한다. 나가르강이다. 이 물줄기의 가장 위에 호퍼빙하가 있고 바로 그 아래에 위치한 호퍼빌리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잠깐 강가에 쉬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훈자강과 나가르 강의 합수처인 이곳의 물살은 더욱 사납다. 깊은 계곡 진회색 탁류가 요동을 치는 가운데 주위의 설봉에 어울어져 눈길 닿는 곳마다 절경이다.
차는 다시 비포장 흙길을 따라 치오르기 시작한다. 길 가 절벽의 바위는 거의가 사력암(砂礫巖)이다. 비록 압도적인 바위라 해도 모래와 자갈이 진흙에 섞인 듯 무르게 보인다. 지금 당장 무너져 내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 위태하다. 계곡 건너편은 진회색의 메마른 거대 절벽이 버텨섰고 눈 아래엔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찔하다. 깜빡했던 안전벨트를 슬그머니 채운다.
한 구비 올라치니 뜻밖에도 포실한 산촌 마을이 나온다. 난데 없는 오아시스다. 이곳이 척박하긴해도 생명수를 내어주는 빙하가 있다. 그 수량이 얼마나 많던지 여기 산간 마을에 풍요를 선물했다. 우쭐대는 미류나무 그늘 아래 풀밭에는 염소와 양이 매어있고 살구나무와 벚나무엔 찢어질 듯 열매가 달렸다. 때마침 피어난 석류꽃이 곱다.
아이들 하교 시간인가보다. 삼삼오오 재잘거리며 재미있어하는 모습은 만국 공통이다. 여학생들은 히잡으로 머리를 가렸다. 훈자지역에서는 보지 못한 것이다. 이곳의 강한 보수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겠다.
또 다시 얼마간, 세상에 다시 없을 길을 달려 오르자 저 멀리 빙하의 단애(斷崖)와 함께 하늘아래 첫 동네가 나타난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 '호퍼빌리지'. 비록 차 안에서 힘들게 견뎌낸 길이었지만 멋진 풍광에 쏙 빠져있다보니 두 시간의 탑승 시간이 잠깐으로 여겨진다.
잠깐 채비를 정돈한 뒤 현지 가이드를 대동하고서 빙하를 간다. 먼저 가까운 언덕에 올라가 빙하 전체의 면모를 살펴보고서 다시 내리막 길을 통하여 빙하의 본체에 접근하기로 한다. 70도 경사의 가파른 길이 여간 미끄러운게 아니다. 미리 스틱을 준비 못했다면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이십 여 분을 내려가 빙하 위에 섰다. 머리 위의 태양은 뜨겁기 그지없는데 얼음 위에서는 서늘한 기운이 돈다. 흥건하던 등줄기 땀이 잠깐 새에 잦아든다. 건조지대라서 어지간한 운동으로는 땀이 흐르지는 못하는데 역시나 가파른 경사길이 많이 힘들었나보다.
몇일 전 파수에서는 산길 따라 오르내리며 능선에 서서 멀리 빙하를 관망할 뿐이었지 오늘 처럼 직접 밟아보진 못했다. 이제 직접 빙하의 본체에 올라서 얼음을 밟으니 첫 경험에 색다른 감회가 인다. 역시 남는 것은 사진 뿐이라하니 이러저런 포즈로 사진을 찍어둔다. 푸른 하늘 아래 거대한 빙하를 배경으로 두팔을 펼쳐드니 호연지기가 절로 인다.
되돌아 오르는 길, 수직에 가까운 절벽에 지그재그로 낸 길이 내려올 때 보다도 더욱 아찔하다. '눈은 게으르고 발은 부지런하다.'했다. 천천히 한 걸음씩 옮기면 결국은 닿으리라.
비탈 길을 기다시피 오른 뒤 다시 전망대에 섰다. 자리를 지키던 현지인이 순박한 표정으로 맞아준다. 다소곳이 앉았던 소년의 표정이 수줍다. 동그란 쟁반에 미리 준비된 한잔의 물맛이 달다.
오늘 트레킹 가이드를 맡은 후세인은 스물 두살의 젊은이. 숨차하는 우리와 달리 그는 일상 그 자체다. 신발도 가볍게 신었다. 빙하를 등지고서 눈앞에 펼쳐진 연봉들을 설명하는데 들어도 돌아서면 잊게된다. 다만 평소 인지하고 있던 '골든피크'만 기억한다. 아침 햇살에 황금빛으로 변하기에 이런 이름을 얻었단다. 여기서는 조금 눈에 들었다하면 모두가 7,000m급이다.
점심이 준비되었다. 퍽퍽하기만 한 닭 튀김이 별 맛이 없다. 그래도 한솥에 끓여 내온 한국 라면이 입맛을 다시게한다. 더불어 짜빠티 몇 조각으로 요기할 따름이다. 식후 내온 야생 허브 '투무로 차'가 향기롭다. 부근의 산지에서 채취했다는데 그 맛이 로즈마리의 약한 버전같다.
훈자마을로 원점회귀. 갔던 길을 되짚어 내려온다. 역시나 아슬아슬 눈 뗄 겨를이 없다. 저만큼 아래 까마귀 떼의 비행은 한가로운데 우리의 몸은 굽이굽이 험한 길 위에서 정신 없이 흔들린다.
다리 건너 훈자 지역에 들어서니 드디어 전화기에 신호가 뜨기 시작한다. 신선계에서 인간계로 건너온 것이다. 통신이 되느냐 마느냐가 문명의 척도가 된 세상이다.
어제 소나기를 핑계로 미뤄두었던 숙제를 하러간다. '발티드 포트'는 훈자나가르의 랜드마크 중 하나다. 7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곳은 예전 훈자왕국의 왕궁 겸 요새로서 이 지역 어디에서나 보이는 중심 축의 높은 곳에 지어졌다. 비탈길을 걸어올라 성 안에 들어서니 고색이 창연하다. 옥상에서 내다본 주변의 경치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가깝게는, 왕국이 통치했던 모든 지역이 사방으로 한눈에 드는 것은 물론이요 멀리는 카라코람 산맥의 절경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특히 스테인그라스 창문을 통해 내려다본 훈자강의 풍경은 마치 여러 장의 산수화를 액자에 끼워 전시한 듯 멋드러졌다. 이방 저방 살피며 돌아다니는 사이 만나는 젊은이 마다 함께 사진 찍자고 성화다. 그들 눈에는 드물게 보여지는 이방인의 모습이 신기한가보다. 눈빛과 말짓에 호감과 선의가 담겼다.
내일은 멀리 눈으로만 보았던 라카포시봉의 베이스캠프를 찾아갈 것이다. 열시간 가까이 만만찮은 산행이 되리니 우선 마음 준비를 단단히 한다. 긴 시간 트레킹을 하려면 새벽 일찍 나서야하니 아침 먹을 시간도 없을 것이다. 미리 두 끼니 음식을 준비하여 도시락을 만들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