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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코복음 3,1-6
마르코 복음의 2,1~3,6의 말씀을 한묶음으로 보고 읽는 것이 좋습니다. 복음사가는 사람들과 예수님과의 논쟁이라는 한주제를 모아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죄의 용서, 단식, 안식일에 관한 예수님의 태도를 문제 삼습니다.
오늘 복음을 조금 자세히 살펴볼까요?
복음에서 예수님의 시선은 언제나 소외되고 한켠에 밀쳐진 죄인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머뭅니다. 부족함을 채워주려는 시선입니다.
반면에 오늘 복음에서처럼 부족을 찾아내어 고발하고 단죄하려 바라보는 시선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면을 바라보십니다. 우리의 시선은 자주 외면에 멈춥니다.
여기서 자문해 볼까요?
나는 예수님의 시선을 닮아 도와주려는 마음으로 바라보는지 아니면 부족한 것에 집중하여 불평하고 지적하고 고발하며 뒷담화하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사람이 얼마나 경직될수 있는지 볼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4)
예수님의 깨우치는 말씀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5)하십니다.
옳다고,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하고 행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확신할수록, 옳음때문에 사랑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볼일입니다.
성아우구스티노의 말이 생각납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것을 하라"
물론 이 사랑이라는 단어는 이타적인 사랑을 가리카는 '아가페'입니다.
(천 사비나 수녀님)
1월22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마르코 3,1-6
안식일의 의미: "졸지 마! 세상은 호구야!"
오늘 복음도 안식일 법의 의미에 대한 연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안식은 평화입니다.
평화를 주는 이는 부모이고 창조자입니다.
불안을 주는 부모는 자녀를 사회에 부적응하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은 그 평화로서 자녀가 어떻게 세상으로 나아가게 할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안식일에 회당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습니다. 손은 능력입니다.
자신은 능력이 없어서 세상에 나갈 용기도 낼 수 없다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중앙으로 부르십니다.
“네가 주인공이야. 쫄지 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돈 많고 높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법을 어기시는지만 살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들이 호구라는 사실을 보여주셔야 했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들은 이 단순한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용기가 생깁니다.
예수님은 “손을 뻗어라.” 하시고 그는 당당히 어깨를 펴고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십니다.
당신이 먼저 세상을 이기지 못하면 자녀에게 평화를 줄 수 없음을.
죽음을 이기는 자가 되지 못하면 자녀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없습니다.
‘금쪽이’에 은둔형 외톨이가 나옵니다.
엄마가 음주운전 피해자로 사망하자 아들은 잘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말도 안 하고 컴퓨터만 합니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컴퓨터 사용을 제한하자 아들은 울면서 이렇게 소리 지릅니다.
“제가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게 훨씬 쉬울 테니까요! 진짜 너무나도 살기 힘든데….
제 인생에서! 제 가정에서! 진짜 하루빨리 떠나고 싶은 제 가정에서! 인생에서!
(컴퓨터가) 유일하게 살길을 만들어주고 있다고요! 유일하게….”
아빠는 왜 아들에게 용기를 줄 수 없었을까요? 아빠조차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엄마 옷장을 열어놓고 울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애들 좀 지켜줘. 내가 더 열심히 할게. 그리고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갈게….
당신은 못 와도 내가 갈 수 있으니까 갈게. 가서 또 잔소리해 줘. 너무 그립다. 미안해.”
아빠가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인데,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용기가 날 수 있을까요?
부모는 자녀를 위해 먼저 세상을 이겨야 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영화 ‘행복을 찾아서’는 크리스 가드너란 자수성가한 한 인물을 그렸습니다.
그는 1954년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태어나 가난, 가정 폭력, 위탁 양육으로 얼룩진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가드너는 유명 중개 회사에 무급 인턴십을 시작했습니다.
이 기간에 그는 노숙자가 되어 어린 아들과 함께 보호소와 지하철역 공중화장실에서 살면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마침내 가드너의 인내심은 결실을 보았고 결국 Series 7 시험에 합격하여 정규 주식 중개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1987년 자신의 중개 회사인 Gardner Rich & Co.를 설립하여 재정적 독립을 달성했습니다. 수천억을 번 가드너는 자신도 아버지 없이 자랐지만, 엄마도 없는 아이에게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세상을 이겨야 했습니다.
그는 아직 노숙하면서도 자식에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절대로 누군가가 네게 무언가를 할 수 없다고 말하게 두지 마라.
나조차도 마찬가지야. 알겠니?
네게 꿈이 있다면, 그것을 지켜야 해.
사람들은 자기들이 뭔가를 할 수 없으니까 네게도 못한다고 말하고 싶어 해.
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가서 그걸 가져. 끝이야. 가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라도 세상이 주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어야 하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어깨를 감싸며 손을 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에 대한 믿음은 이런 안식의 참 의미를 살게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22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복음: 마르 3,1-6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한국 문학의 치열함과 높은 품격, 우아함과 섬세함을 전 세계 앞에 드러낸 한강 작가의 한림원 강연 중의 한 표현이 지금 오늘 우리 세월을 너무나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작가의 우리 시대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과 예지력에 큰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어찌 그리 몰상식하고 저급한지요?
동시에 폭력적이고 잔인한지요?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리 뻔뻔한지요? 후안무치하고 적반하장인지요?
자신들이 매일 자행하고 있는 일상적 폭력이 얼마나 가증스럽고 반인륜적인 것인지?
자신들이 지금 추종하고 맹신하고 있는 대상들이 그릇되고, 얼마나 무모하고 무가치한 것인지?
제발 빨리 깨닫고, 그 끔찍한 죽음의 길에서 돌아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요즘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의 은총을 입고, 오랜 장애로부터 해방된 동료 인간을 향해 축하의 박수를 쳐주고, 함께 기쁨을 나누어도 부족할 텐데...
치유자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오히려 그 잘난 안식일 규정을 들이대며 그분을 고발하려고
안달이 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름 율법을 오래 전공한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머릿 속에 고통을 겪고 있는 이웃에 대한 연민의 마음은 단1도 없었습니다.
그저 율법 규정을 들이대며 예수님을 죽음의 올가미에 옭아매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비인간적인 모습 앞에 분노하신 예수님께서는 노기 띤 표정, 슬픈 얼굴로 외치셨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 3-4)
세상 구리고 사악한 고발자들의 모습과 요즘 우리 모두의 스트레스 지수를 한껏 드높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절묘하게 교차되고 있습니다.
법꾸라지라는 표현이 딱 맞습니다.
법을 공부했다면, 그 법을 정의와 공정한 판결을 위해 사용해야 마땅한데, 어떻게든 자신과 가족의 비리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합니다.
어떻게든 요리조리 피해가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참으로 가련합니다.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이 슬프고 사악한 시대지만 일상은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한강 작가의 표현대로 동시에 이 세계는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금수만도 못한 존재들이 널려있지만, 동시에 존재 자체로 기쁨과 위로를 선사하는 천사 같은 존재들도 수두룩합니다.
이 소중한 조국 우리 대한민국이 다시는 독재자나 폭도들의 먹잇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에,
그 야심한 밤, 그 강추위를 뚫고 국회로 달려가 온몸으로 맞선 꽃같은 사람들, 그분들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존재들이시며 길이길이 감사드려야 할 분들입니다.
끝끝내 분위기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마음이 오그라 들대로 오그라든 사람들 예수님의 오늘 말씀을 마음에 새겨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손을 뻗어라.”(마르 3,5)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주간 수요일>
(2025.1.22. 수) (마르 3,1-6)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마르 3,1-6).”
여기서 “합당하냐?”는, “하느님 뜻에 합당하냐?”이고, 이 말씀의 뜻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겠느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이 안식일에 무엇을 하기를 바라시겠느냐?”이고,
이 질문의 답은 당연히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안식일에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기를 바라신다.”입니다.
선(善)이시고,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평소에도 늘, 안식일에는 더욱더, 좋은 일(선한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기를 바라십니다.
1) 안식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 아니라,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하는 날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 지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에는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고,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고, 남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가르침은 안식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날에 다 해당되고, 종교와 신앙생활 전반에 다 해당됩니다.
이웃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그 이웃에게 관심 갖지 않고, 그 이웃을 도와주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골방에 틀어박혀서 기도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이웃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 기준으로는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2) 주일 미사 참례는 주일을 지키는 일 가운데 일부이지, 전부가 아닙니다.
따라서 주일 미사 참례만으로는 주일을 제대로 지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주일 하루를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휴일을 즐기는 일 자체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휴일을 즐기더라도 신앙인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되고, 그날이 주일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주일 미사가 끝난 뒤에 나머지 시간들을 세속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또 전혀 거룩하지 않은 모습으로, 세속적으로 놀면서 지냈다면, 그것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십계명을 안 지킨 것입니다.
(주일을 안 지킨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모습을 흔하게 봅니다.
이 말에 대해서, “너무 융통성 없고 고지식한 말이다.”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주일을 주일답게 제대로 지키는 것은 고지식한 일이 아니라,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주일은 ‘노는 날’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쉬는 날’이고, ‘좋은 일’(선한 일)을 해야 하는 날이고, 이웃 사랑 실천을 해야 하는 날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물론 신앙인은 주일이 아닌 날에도 꾸준히 선행과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주일에는 특히 더 잘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언제 쉬란 말인가?” 라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음과 정성의 문제입니다.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과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복음 말씀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도 없고, 그렇지만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도 싫고, 그래서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침묵을 지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까?
1) 유대인들은, 특히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라는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한 것입니다.
나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나의 목숨을 바치는 것은 희생이고 헌신입니다.
그러나 나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남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살인죄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무엇이 ‘하느님의 선(善)’인지 생각하지도 않고, 큰 죄를 짓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자신의 신념만을 내세워서 남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살인을 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신념이라면, 그것은 결코 옳은 신념일 수 없습니다.
선(善)이 아닌 신념은, 즉 악한 신념은 신념이 아니라 그냥 악(惡)입니다.
2) 바리사이들은 대부분 “나는 옳다.” 라는 오만과 독선에 빠져 있었습니다.
“나는 옳다.” 라는 독선은 “너는 틀렸다.” 라는 편견과 짝을 이룹니다.
그 독선과 편견 때문에 자기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탄압하고 박해합니다.
바리사이들의 오만과 독선은 예수님에 대한 증오심과 결합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나는 옳다.” 라는 독선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 자기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교회 내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3) 바리사이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을 무조건 싫어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조건 배척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갈릴래아의 시골 출신이고, 목수라는 점 때문에 싫어했는데, 나중에는 그냥 무조건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세상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도교를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해도, 사랑을 베푸는 일을 해도,
그리스도교가 하는 일이라면 다 싫어합니다.
그런 태도는 자기 스스로 하느님을 등지는 것이고,
구원의 길을 버리고 멸망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