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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8: 6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 요 18: 11 칼집에 꽂으라.
요 18: 6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
예수께서 하신 이 신적 권위의 대답은 모세가 하나님의 성호를 물을 때 하나님께서 대답한 말과 같은 표현으로 예수를 잡기 위해 온 무리들은 스스로 하나님이 이라고 대답하는 이 말에 순간 물러가 엎드려졌다.
1]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본문은 예수가 '내가 그이다'라고 말하자 나타난 반응을 묘사한 것으로 예수의 신적 권위를 묘사해 주고 있다.
즉 이 말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인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에고 에이미 호온)라는 출 3: 14의 70인 역(LXX)을 연상했기 때문에 적대자들이 두려워 물러서며 엎드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여 예수의 신적 권위가 강조됨은 물론 예수의 승리자 모습으로 죽으셨음이 확인된다.
요 18: 7 누구를 찾느냐 -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
7-9절은 5-6절의 반복해서 물으시고 대답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잡히시는 이 현장이 단순히 끌려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라 스스로 체포되시고 구속 사역을 이루시기 위한 확인이며 스스로 물러나신 것이 아니라 잡히시는 그 장소에서도 그 분위기를 주도하고 계신 분은 예수님이라는 것을 잘 표현해 준다.
1]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4절과 동일한 질문이 반복되고 5절과 똑같은 대답이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독자성, 즉 예수가 다른 사람으로 오인되어 체포된 것이 아님을 거듭 확인해 주고 있으며 동시에 예수의 권위있는 위엄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깔려 있다.
요한은 5절의 '대답하되'를 본 절에서는 '말하되'로 바꾸어 표현했다. 이는 같은 말의 반복을 싫어하는 요한의 습관에 따른 것이다.
요 18: 8 나를 찾거든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제안하심으로 제자들은 피해가 없도록 하셨다.
이것은 막 14: 50과는 대조되지만, 요한은 단순히 제자들이 도망친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보호 속에 이루어진 일임을 말한다.
양 때를 보호하시고,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을 기억하게 한다.
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예수는 적들이 찾고 있는 예수가 자신임을 거듭 확인시키고 대신 자신과 함께 있던 제자들은 자유롭게 갈 수 있도록 하라는 제안을 하고 있다.
즉 자신을 내어놓고 제자들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한다. 이것은 요한의 독특한 자료로 막 14: 50에서 언급되는 제자들의 도주와 대조되고 있다.
* 막 14: 50 -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이것은 요한이 공관복음서 저자와 달리 제자들이 도망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밝혀 제자들을 호의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예수의 이같은 행동은 10: 11에서 예견된 바로서 이는 예수의 자신이 자발적으로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아간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 요 6: 38 -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 요 10: 11 -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8: 9 하나도 잃지 아니하옵나이다 -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
예수께서는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아셨고 제자들이 잡히거나 다치거나 죽게 되지 않기를 원하셨다. 주께서는 과연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아끼셨다.
* 요 13: 1 -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1]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예언의 성취를 나타내는 본문의 어투는 본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문구이다(C.K.Barrett, A.T. Robertson).
여기서 성취된 예언은 17: 12을 가리킨다.
* 요 17: 12 -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특히 17: 12에서 언급된 멸망의 자식이 여기서 언급되지 않는 것은 이미 유다가 악의 세력에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예언의 성취에 관한 언급은 예수 자신의 말을 성경적 권위와 동일시하고 있다.
2. 잘려진 말고의 귀 ( 18: 10 – 11 )
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 18: 10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
이때까지만 해도 베드로는 이 긴급한 상황에서 주를 위해 죽겠다는 자신의 말을(마 26: 33-35) 실행에 옮기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허락도 없이 순간 칼을 빼어 들었고 '말고'라는 대제사장 종의 귀를 베어버렸다.
1]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1) 베드로
본 절에서 베드로의 이름이 히브리식 이름과 함께 쓰이고 있다. 즉 '바요나 시몬'(마 16: 17) 또는 '요한의 아들 시몬'(1: 42. 21: 15)으로 언급되지만 주로 '시몬'이란 말만을 덧붙여 '시몬 베드로'라고 호칭하게 된다.
(2) 칼을 가졌는데
여기서 베드로가 칼을 사용하여 적들에게 대항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공관복음서에서는 칼을 사용한 자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 마 26: 51 -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 막 14: 47 -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 눅 22: 50 -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아마도 공관복음서는 칼을 사용한 자의 신분에 해가 돌아가지 않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보다 훨씬 후대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이름을 밝혀도 본인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하여 베드로의 이름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 눅 22: 36-38 – 36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38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본 절에 따르면 예수가 제자들에게 검을 휴대하도록 지시하였고 제자 중에서 검 두 자루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공격용으로 준비된 것으로 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눅 22:36-38 주석 참조).
왜냐하면 칼 두 자루로 무력에 해당한다는 것은 상식 밖이기 때문이다.
당시 유월절에는 무기를 휴대할 수 없도록 규제되었으므로(C. K. Barrett, Robertson) 베드로가 무기를 소지한 것은 불법이었다. 그렇다고 이 사실이 베드로가 열심당원이었다고 할 증거는 될 수 없다. 이 칼은 아마도 위험한 순간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감지한 베드로가 호신용으로 준비해 둔 단검으로 보인다.
2]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마태와 마가는 어느 쪽 귀인지 언급하지 않지만 누가와 요한은 동일하게 오른쪽 귀를 잘랐다고 언급한다.
누가는 역사가로서 당시의 정황을 정확하게 기술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통해 '오른편'이란 형용사를 사용했으며 요한은 귀를 자른 장본인으로 '시몬 베드로'라는 이름을 밝힌 것처럼 잊을 수 없는 그 밤의 사건을 세밀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 형용사를 사용했던 것 같다.
본서에서는 '베어버리니'가 '아페콰센'(*)으로 언급됐지만 공관복음서에서는 '아페일렌'(*)으로 기록되었다. 이 차이는 요한이 공관복음서에서 그의 사용되지 않는 독특한 용어를 종종 언급하는 데서 발생한 것이므로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
아무튼 눅 22: 49에서는 한 제자가 예수에게 칼을 사용해도 되느냐고 물었던 것으로 진술되고 있으나 본서에서의 베드로의 행동은 예수의 의사와 무관하게 갑자기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 눅 22: 49 -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3]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귀가 잘려 나간 대제사장의 종을 가리키는 이름인데 공관복음서에서는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본서에만 언급되고 있다.
이것도 역시 사건 현장을 사실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신뢰성을 높이고 당시의 정황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요 18: 11 칼집에 꽂으라 -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
베드로의 돌발적인 행동에 제재를 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인데 칼을 놓으라는 명령은 공관복음에서 마태 26: 52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며, 눅 22: 51에는 이 말씀대신 예수께서 치료해 주시는 장면이 나온다.
누가는 예수께서 원수를 치료하시는 사랑의 실천을 보여주고 있다.
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시몬 베드로는 검을 빼어 말고라는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렸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보다 좀 더 용기가 있었다. 칼을 사용한 베드로에게 보인 예수의 반응은 칼을 놓으라는 명령인데 공관복음서에서는 마태복음만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 마 26: 52 -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마태복음에 보면, 그는 또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약 72,000명]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이 표현 대신 누가는 잘려진 귀를 만져 낫게 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 눅 22: 51 -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악인들의 악행에 대해 악으로 보복해서는 안 된다고 교훈하셨다.
* 마 5: 39-40 –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그가 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특히 마태복음은 칼을 사용한 사실에 대해 훈계하는 장면을 관심 깊게 묘사하고 있는 데 반해 누가복음은 원수를 치료하고 싸매는 모습을 통해 사랑과 화해의 실천자로서의 예수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본서는 메시야적 사역에 깊은 의미를 두었으므로 칼 사용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는다.
2]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1) 아버지께서 주신 잔
본서에서 '잔'이라는 말이 본 절에서만 나타나고 있으며 공관복음서에서 언급된 잔의 의미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 막 10: 38-39 –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 막 14: 36 -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특히 본서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공관복음서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행해졌던 예수의 기도가 본 절에서 함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 눅 22: 42 -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여기서 잔이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가 겪어야 할 수난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수난의 잔이 우연히 발생 된 것이 아니라 죄악 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임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는 '아버지께서 주신'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공관복음서에 비해 하나님의 예정을 매우 강조하는데 여기서도 그리스도의 운명이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2)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본문은 공관복음서의 겟세마네 기도 내용을 함축한 듯하다. 즉 아버지의 뜻이라면 잔을 마시겠다고 하는 예수의 결단을 좀 더 담담하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 마 26: 42 -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 막 14: 36 –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 눅 22: 42 –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이미 예수는 이 수난의 길이 필연적으로 걸어가야 할 자신의 길임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어 순종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예수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칼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길을 막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준다.
* 마 16: 21-23 –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3] 아버지께서 주신 잔 (요 18: 1-11)
예수님이 잡히신 곳은 기드론 시내 저편에 자리잡은 동산이다. 이 동산은 감람산이라고도 불리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예수님이 습관을 따라 기도하러 다니셨던 곳이며, 마지막 밤에 자신이 마실 잔을 옮겨 주십사고 아버지께 기도하셨던 산이기도 하다.
그곳은 다른 사람이 찾아오기 힘든 그런 은밀한 장소였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자기 스승과 함께 몇 번인가 가 본 일이 있으므로 관속들을 거느리고 쉽게 찾아올 수 있었다. 이때 예수님은 그가 당하실 일을 이미 다 아셨다고 했다.
(1) 가룟 유다의 배신
12제자 중 하나로 주님을 따르다가 그 주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영원한 교훈을 주고 있다.
* 히 6: 4-6 –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이 말씀은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들을 두고 주신 경종이다.
우리가 성경에서 가룟 유다에 대한 기사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돈을 사랑한 사람이요, 어떤 때는 돈주머니에서 돈을 훔친 도둑이요, 그가 거짓에 능한 이중인격자 임을 알 수 있다.
* 요 12: 4-6 –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중생하지 못한 가룟 유다는 언제나 세상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신령한 영적인 일에 반감을 가졌다. 마귀는 이러한 가룟 유다를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다. 마귀는 먼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어 주었다.
* 요 13: 2, 27 –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먼저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어 준 마귀는 다음에는 자신이 직접 그 마음에 들어가 그 일을 진행해 나갔다.
(2)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유다를 앞세우고 군대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아랫사람들이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주님에게로 가까이 오고 있었다.
① 예수님은 자신의 때를 아셨다.
이제는 십자가를 지셔야 할 때를 아시고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다. 예수님은 이때가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피하기도 하셨으며 자신을 숨기기도 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하실 때가 아님을 아시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신 것이다.
②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누구를 찾느냐는 예수님의 물으심에 그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대답했다. 아직 날이 새지 않아 어두울 때라 그들은 주님을 잘 분별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내로라”라고 자신을 나타내시면서 너희가 찾고자 하는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 하셨다.
③ 예수님은 끝까지 그의 제자들을 사랑하셨다.
예수님은 칼과 몽치를 가지고 자신을 잡으러 온 그들에게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하셨다. 십자가를 지실 일은 주님이 하실 일이지 제자들의 일은 아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이 어려운 형편에서 구해 주실 것을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피할 길을 열어 주셨다.
(3) 아버지께서 주신 잔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어려운 국면에서 그 처신을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때 베드로가 큰 용기를 내어 가지고 있던 검을 뽑았다. 베드로는 그 검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편 귀를 베어 버렸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즉각적인 책망을 듣게 되었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셨다. 이때까지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의 힘으로 쟁취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 같은 베드로의 행동은 만용에 속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검으로 쟁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
①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아버지의 사명을 잔, 또는 세례란 표현으로 나타내셨다. 잔이라고 나타낸 ‘포태리온’은 무엇을 담는 그릇으로 이것이 주님이 받으실 고난의 잔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그가 받으신 사명을 내게 주신 잔이라고 표현하셨다.
②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이 잔을 마시기 위해서였다.
이 잔은 참으로 마시기 어려운 잔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잔을 자신에게서 떠나게 하시기 위해 피가 나는 기도를 하셨다.
* 눅 22: 41-46 –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성도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 있다. 물론 이 잔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잔은 아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 잔을 마시기에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있다.
하나님이 이런 잔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는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잔을 마심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무한한 축복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우리에게 지워 주신 이 잔을 마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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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하는 일마다 기쁨이 되고 숨쉬는 순간 순간 마다
즐거움과 사랑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