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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하여
잠 30:1-6
1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 곧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
2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3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4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5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6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잠 30:1-6 / [아굴의 이야기]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야게의 아들 아굴이 하는 잠언이다. 그가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이야기이다. 2)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하면 짐승이나 마찬가지이다. 평범한 사람이 지니고 있는 지각도 없다. 3) 내겐 지혜도 없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도 하나도 없다. 4) 하늘에 올라가 본 사람이 어디 있느냐? 바람을 움켜 쥐어 본 사람이 어디 있느냐? 물을 옷자락에 감싸 본 사람이 있느냐? 땅의 경계를 그은 사람을 찾아보았더냐? 그 사람의 이름이 도대체 무엇이냐? 그이에게서 배우는 제자를 본 일이 있느냐? 네가 알고 있다면 나에게 한번 그것을 알려 주렴. 5)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의심할 것 하나없이 진실하지 않더냐?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대어 사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 어떤 위험도 막아 주신다. 6) 그분이 하시는 말씀에 무엇 하나라도 더 집어 넣어 말하지 말아라. 그렇게 할 경우 그분이 너를 질책하실까 봐 그런다. 네가 거짓말을 하게 될까봐 염려되는구나.
30장은 아굴의 잠언입니다. 아굴은 사람의 지식은 제한되어 있으므로 겸손히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것이 사람에게 어울린다고 합니다.
아굴의 잠언(1) 야게의 아들 아굴은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측근이며 보좌관으로 지혜와 시를 함께 읊었던 현자 중에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의 전통은 그를 지혜의 사람으로 알아왔고 이디엘과 우갈은 그의 제자들입니다.
나는 모르는데 너는 아는가(2-4) 아굴은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지혜를 배우지 못했다고 고백하며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니 짐승 같았다고 고백합니다. 겸허하게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의 계시가 없다면 참된 지혜를 전혀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을 피력합니다.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라는 말은 이 땅을 주관하시는 분, 바람을 운영하시는 분, 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사람으로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굴은 자신이 알지 못함을 먼저 인정했기에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인간의 노력만으로 지혜를 얻을 수 없으며 명철은 거룩하신 분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는 올바른 인생관, 올바른 신관, 올바른 세계관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순전한 말씀(5-6)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겸손한 자가 되어서 고백합니다. 다윗의 말을 인용하여(삼하 22:31; 시 18:30)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다고 했습니다. 흠이나 어떤 실수도 안 보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금이나 은을 용광로에 넣어서 제련하여 불순물이라고는 전혀 없는 백 퍼센트 순금이나 순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더한다는 것은 진리의 기준이신 하나님을 부정한다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는 것을 경고합니다(6). 인간의 지혜는 제한적이고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자신의 무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고,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더할 것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의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방패가 되어주신다는 것은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위험이나 위기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말씀 사랑이 방패입니다.
적 용: 당신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더 추가할 것은 없습니다.
본래 유대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백성들’이라는 뜻을 담은 아름다운 말입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엄청난 영적 특권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아기 때부터 듣고 배우며 자라갑니다. 성전과 회당이 그들의 놀이터였고 종교의식이 완전히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기 전에 모세오경을 다 익히고 신명기 같은 말씀은 거의 통째로 아예 암송을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틀에 갇혀서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를 십자가 처형으로 내몰았습니다.
< 설 교 >
소원이 무엇입니까?
잠언 30:5 / 김철현 목사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무심코 사용하는 말들 중에 비슷하지만 다른 의미를 가진 말들이 많습니다. 완전히 의미가 다른 말에 욕망과 소원이 있습니다. 영어로는“want와 need”로 표현할 수 있겠는데요.“want”가 단순한 욕망을 의미하는 말이라면“need”는 정말로 필요해서 가지는 소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욕망에 살아갑니까? 아니면 현재를 위하여, 그리고 미래를 위하여, 아니 영원한 생을 위하여 진정으로 나에게 필요한, 여한이 없을만한 소원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의 대부분은 눈앞에 나타나고 있는 현실의 문제에 급급합니다. 배부르고 굶주리고, 기쁘고 슬프고, 편안하고 불편하고...., 모두가 현재와 관련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들은 욕망과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원은 다릅니다. 소원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반드시 내가 필요로 하는 가치 있는 것들, 즉, 미래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람됨은 그가 어떤 욕망을 가지고 사느냐가 아니라 그가 지닌 소원이 무엇이냐는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어떻습니까? 그가 지금 부자이면 존경하고, 그가 지금 건강하면 인정받고, 그가 지금 눈에 보이는 능력이 있으면 받들어주는 세상입니다. 정말 중요한 그가 품은 소원이 무엇이냐 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현실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굴이 하나님께 소원을 간구하는 대목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은 스물한 살의 나이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소원을 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 소원이 무엇이었습니까? 지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을 때, 하나님은 그의 꿈속에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 3:5).”그때 솔로몬은 지혜를 구합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듣는 마음, 즉 지혜를 달라는 이 소원이 하나님의 마음에 썩 들었습니다. 장수하게 해달라고 구할 수도 있고, 부자 되기를 구할 수도 있고, 원수의 생명을 멸해달라는 기도도할 수 있었는데 오직 지혜를 구한 솔로몬을 하나님께서 크게 칭찬하시지 않습니까? 즉, 자신의 욕망을 위한 것들을 구할 수도 있었는데 욕망이 아니라 진정한 차원의 소원을 구했더니 하나님께로부터 전무후무한 지혜를 선물로 받습니다.
욕망이 아니라 소원을 구하는 지혜, 이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좋은 일입니다. 우리 또한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원을 구하는 지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아굴이 솔로몬의 이런 지혜를 구하는 기도 못지않은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내가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라는 대목입니다. 이 말에 들어 있는 의미를 유추해보자면 아마도 이것은 그가 평생토록 지녀왔던 소원인 것 같습니다. 즉흥적으로, 우발적으로 품은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는 이런저런 소원을 다 이룰 수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가지고 싶은 것은 다 가지고, 누리고 싶은 대로 다 누려왔지만, 마음 깊은 곳에 어두운 그림자처럼 남아 있던 이루지 못한 소원이 하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이루어 달라고 합니다. 그런 아굴이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번 보십시다.
첫째로 진실을 구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구했던 지혜와 버금가는 소원인 진실을 구하고 있습니다. 8절입니다. “곧 허탄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그랬습니다. <공동번역 성경> 에는 “하나님이여, 허황된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진실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진실이 왜 중요한 것입니까? 사람이 진실하고 정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처음부터 진실함으로 시작을 하면 마지막까지 진실하기도 쉽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거짓말로 시작하면 마지막까지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간혹 보면 참 비밀이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무얼 그리 숨길 게 많은지 모든 것을 쉬쉬합니다. 집안의 대소사, 자식들의 이야기까지 남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도 괜히 숨기고 있습니다. 뭐 그리 큰 죄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숨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실이 체질화 되지 못하고, 숨기는 것이 습관화되어서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숨겨왔기 때문에 이제는 드러내놓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거짓 속에 노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마지막에라도 진실하고 싶은데 진실하기는 틀렸습니다. 이게 불행입니다.
진실(眞實)이라는 말에는 본래“사실”과“참”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무엇이든 사실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입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거짓을 말했으면 그런대로, 죄를 지었으면 죄지은 대로의 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기가 힘듭니다마는 하시라도 빨리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아굴의 기도처럼 허황된 생각, 허황된 꿈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개념으로는 말을 속에 두면 사상이요, 입으로 내뱉으면 말이요, 말이 움직이면 행동입니다. 허황된 말은 곧 허황된 사상을 가리키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굴은 허황된 생각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무슨 거짓말로 벗어날까...뭐라고 꾸며대서 이 위기를 벗어날까...’라는 생각자체를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이웃에, 또 나 자신에게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이게 기본입니다.
어느 교회에 한쪽 다리가 절단되어 없는 사람이 들어와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아주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매번 이 모습을 보면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싱거운 소리를 한마디 합니다.“저렇게 기도한다고 없는 다리가 생겨나나!”어느 날 기도하던 이 사람이 일어나서 조용히 말합니다. “나는 없는 다리를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다리 하나로도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절름발이라고 경멸하는 사람들까지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사지 멀쩡하면서도 성실하지도 진실하지도 못하고 남의 흉허물이나 물어뜯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이 많습니다. 정치가 달라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참으로 많습니다. 다른 사람이 제발 좀 바뀌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대로도 문제가 없습니다. 혹은 내가 더 성장하고 더 능력 있어지고 더 굉장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사실은 지금 이대로도 충분합니다. 더 나아지지 않아도 괜찮고, 더 없어도 괜찮습니다. 다만 오늘 아굴의 이 마지막 기도가 우리의 소원이면 됩니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진실하게 해주십시오.” 이것이면 됩니다. 내가 진실하면 세상이 진실하고, 내가 온전하면 정치도, 다른 사람도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뭐가 더 그리 필요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진실하면 되고, 각자가 성실하면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 진실, 이것이 우리의 소원이기를 바라봅니다.
둘째로, 아굴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있습니다. 역시 8절입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이 말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면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전적으로 자신의 수준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수준을 알고 나의 나됨을 알고, 나의 인격을 알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부자라고 다 악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가 부한 것이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나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경제적인 안정을 얻으면 게을러지는 사람입니다. 돈이 많으면 나쁜 친구를 사귀고 향락을 즐길 사람입니다. 돈이 많으면 권력이 주어질 것이고 권력이 있으면 교만하여 사람을 무시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나란 존재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부하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있으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고 돈으로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돈 때문에 자기본위로 살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갈 것입니다. 나는 이 정도의 인간밖에 안되기에 부자가 되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기가 쉬운 일입니까? 하지만 어쩌면 그게 진실 된 내 모습일 수 있기 때문에 이렇듯 지혜로운 소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어 무신론자가 되고 교만한 사람이 될 것이면 차라리 가난한 게 낫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가하면 반대로 가난한 것도 문제가 됩니다. 나는 찢어지게 가난하여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혹시라도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을 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돌려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럴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내가 압니다. 그래서 소원합니다.“나는 가난하면 죄지을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제발 죄 지을 만큼 너무 가난하지 않게 해주소서.”무엇보다도 연약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자기의 인격을 알기에 아굴은 이렇게 구하고 있습니다. 정말 진실하기 어려운 상황까지도 생각하면서 자신 앞에 진실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 두 가지를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아굴의 지혜입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중도, 혹은 균형이라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도(道)를 넘으면 안 되는 것 여덟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여행입니다. 여행이 지나치면 집나갑니다. 둘째는 친구입니다. 친구도 지나치게 많아도 좋지 않습니다. 셋째는 일입니다. 일 중독자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넷째는 술입니다. 과하면 안 됩니다. 다섯째는 잠입니다. 적당히 자야합니다. 여섯째는 약입니다. 보약도 중독증에 걸립니다. 일곱째는 향료입니다. 향도 지나치면 구역질이 납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여덟째는 바로 돈입니다. 돈이야말로 인격에 맞게 적당히 주어져야 합니다. 지위니 감투니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감투도 머리에 맞아야지 크면 쓸 수가 없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그릇에 맞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아굴의 마지막 기도 “진실하게 하시고,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마옵시고….” 라는 욕망을 벗어버리고 소원을 아뢰는 기도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마지막 소원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둡시다. 그래서 바른 소원을 가지고 그 소원만을 이루어가면서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아굴의 신앙 고백
잠 30:1-6 - 메튜 헨리 주석 인용
아굴은 편집자였으며 수집가였고 다른 사람들이 지은 지혜의 말씀과 관찰을 집성한 자였다(3절).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으나 다른 지혜있는 자와 학식있는 자의 서기 또는 필기자였노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잠 30:3)
이디엘과 우갈이란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다음 중 하나일 것이다.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 곧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잠 30:1)
(1) 그가 가르쳤던 생도의 이름이다. 아마 이들은 바룩이 예례미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받아 기록한 것처럼 그가 구술하는 것을 기록했을 것이다.
(2) 그가 이야기하려는 주제이다. 이디헬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인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의 임마누엘을 변용한 것이다. 우갈은 "전능하신 자"를 의미한다. 즉 우리에게 도움을 베풀어 주시는 분은 전능하신 분이다.
이 예언자는 여기서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1) 자기를 낮추는 것(2~3절) : 아굴은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어리석음과 연약함과 이성의 부족함에 대해서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의 인도와 규제를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다른 사람들은 아굴을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자로 인정했으나 자신은 누구보다도 미련한 자로 생각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우리를 높이 평가한다 하더라도 자신을 낮게 생각하는 것이 온당한 일이다. 아굴은 자신에 대해서 진리와 지혜의 길로 자기를 인도해 줄 계시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자연인이나 자연적인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성령에 관한 일들을 깨달을 수 없으며 받지도 못한다.
2) 예수 그리스도와 안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높이는 것(4절) :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 누구인지. 이 말씀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일은 비교나 측량이 불가능하다. 또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디엘과 우갈이신 그리스도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그와 겨룰 자가 있느냐고 도전하며 찾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아들의 이름도 되기 때문이다.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가? 그는 이 아들을 통하여 이 모든 일을 행하신다. 구약 성도들은 메시야를 "복된 자의 아들"로 고대하였으며 여기서는 아버지와 분명히 구별되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그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다.
3) 하나님의 진리를 말씀을 확신시키고 권면하는 것(5,6절) : 아굴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일로 그가 가르침을 주기를 기대했다. 아굴은 말한다. "나는 도저히 당신들을 훈계할 능력이 없으니 하나님의 말씀에게로 가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오. 그 안에는 거짓이나 부패한 것이 조금도 들어 있지 않소." 말씀 속에 계신 하나님, 약속 가운데 계신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가 되어 주시며, 확실한 보호자가 되어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충분하다. 그러므로 그 말씀에 더해서는 안 된다(6절). 우리는 하나님이 알맞다고 생각하셔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에 만족해야 하며 그 이상으로 지혜롭게 되려고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성경본문 및 주해] _ 잠 30:1~6(옥스포드 주석을 중심으로)
저자로 소개되고 있는 ‘아굴’ 즉 ‘아구르’는 ‘모으는 자’, ‘소집하는 자’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본장에만 등장하는 이름으로 이 인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그리고 아굴의 아버지로 언급되고 있는 ‘야게’ 즉 ‘야케’는 ‘경건한’, ‘완전한’, ‘순종적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 역시 본장에만 나타나는 이름으로 그에 대해서도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이들은 이스라엘인이 아니거나 혹은 본서 편집자들이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로 여겨지기도 한다(Murphy).
또한 이 이름을 일반 명사로 이해하여 본문을 ‘경건한 자의 아들 편집자의 말씀'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추측일 뿐이다(Garrett).
또한 유대학자들과 초대교부들은 ‘아굴’은 ‘솔로몬’이고 ‘야게’는 ‘다윗’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2,3,8,9절 등의 내용은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보기에는 부적절한 측면이 있다.
본장과 제31장이 본서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여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본장의 저자인 아굴은 솔로몬 시대나 그 이후 이스라엘 백성 중의 한 현인으 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Deane).
1.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 곧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
한글개역 성경과 개역개정 성경은 1절의 "그가 이디엘 곧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를 교훈의 일차 대상을 밝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볼 경우 이 둘은 아굴의 제자들이거나 아들 혹은 동료일 수 있다.
그리고 ‘이디엘과’에 해당하는 ‘레이티엘’의 원형 ‘이티엘’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의미이며, ‘우갈에게’에 해당하는 ‘웨우칼’의 원형 ‘우칼’은 ‘삼키운’이라는 의미이다.
한편 ‘이디엘과’에 해당하는 ‘레이티엘’은 어느 쪽으로 읽어도 동일하게 되어 있는 회문(回文, palindrome)일 뿐만 아니라 원문으로 보면 본문에서 두 번 반복되고 있다. 한글개역 성경에서처럼 이를 고유명사로 볼 경우 이디엘이란 이름이 반복되는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보고 이 부분을 띄어쓰기를 하고 모음을 다시 붙여서 본문을 다르게 이해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어 왔다.
그 중 BHS 비평 각주의 한 견해에 따라서 본문의 ‘레이티엘’을 ‘라이티 엘’로 읽는 NEB는 ‘내가 지쳤나이다 하나님이시여 내가 지쳤나이다. 나는 소진되었나이다(NEB, 1 am weary, 0 God, 1 am weary and worn out)'라는 의미로 번역한다.
또한 토레이(Torrey)는 본문의 단어를 아람어로 전제하고 그에 따라서 해석하였다. 이러한 견해를 따르는 NAB는 ‘나는 신이 아니다. 나는 신이 아니다. 나는 극복해야 한다(I am not God ; 1 am not God, that 1 should prevaiD’라는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녹초가 되었다(McKane · Anchor Bible, There is no God, there is no God and 1 am exhausted)’,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NEV, God is not with me and 1 am helpless) 등의 의미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
이어지는 2-9절까지의 내용을 감안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이성적 추구의 실패를 고백하고 한탄하는 내용으로 본문을 이해할 수 있으며 따라서 BHS 비평 각주에 근거한 NEB의 해석이 셜득력을 보인다고 볼 수도 있다(Garrett). 즉 본장의 저자 아굴의 이러한 한탄은 이어지는 2,3절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성적 추구의 실패를 드러내는 무지에 대한 고백으로, 그리고 인간의 미미함을 드러내는 절의 수사적 질문으로 이어지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많은 번역본들은 한글 개역 성경과 마찬가지로 이디엘과 우갈을 인명으로 본다(KJV, NASB, NIV). 그리고 ‘이디엘’이란 이름이 2회 반복된 것은 아굴이 본장의 일차 독자로 직접 의도한 대상이 ‘이디엘’임을 밝히기 위해서일 것이며 이어 이 교훈이 ‘우갈’에게도 필요하다고 여겨 ‘우갈’의 이름을 ‘이디엘’의 이름과 더불어 다시 한번 주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즉 본문은 ‘그 사람의 말은 이디엘을 위한 것이며, 이디엘과 우갈을 위한 것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2.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2~4절까지는 인간의 보편적 무지와 무능력을 드러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 2절과 3절은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는 것을 통해서 인간의 무지를 드러내며, 4절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수사적 질문을 통해서 인간 존재의 보잘것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혹자는 이러한 내용의 본단락을 아굴의 본심이나 진심의 반영이 아니라 비웃고 조롱하고 비꼬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BuzzelD. 즉 지식을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체하며 거만한 자들을 풍자적인 표현을 통해서 반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흑자는 교만한 부자의 진술로서 겸손한 성도의 말과(5-14절)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Deane).
이러한 견해들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본단락을 아굴의 솔직한 고백으로서 인간적 지식과 지혜의 한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한다<Ringgren, Murphy).
즉 아굴은 자신의 인간적 수준에서의 지혜 추구의 실패를 고백함으로써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결코 얻을 수 없음과(전 7:23,24 ; 바룩서 3:9-37), 인간은 하나님 앞에 철저히 겸손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유일한 진리 탐구의 방법인 하나님의 말씀(5.6절)에 순종하여 따라야 한다는 결론으로 유도되며 말씀의 절대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는 ‘진실로 나는 모든 사람들보다 더욱 우매하다(NASB, Surely 1 am more stupid than any man)’ 혹은 ‘참으로 나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매하다(NRSV, Surely 1 am too stupid to be human)’로 번역될 수 있다.
후자는 인간이 본래 가질 수 있었으며 또한 반드시 가져야 하는 참된 지식의 부재를 고백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Delitzsch). 즉 타락한 인간으로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 의 고백은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것으로서 독자들이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전자의 의미로 본다할지라도 문맥상 그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아굴은 본절에서 자신의 무지함을 독자들에게 인정하면서 4절의 질문을 통해서 독자들도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무지함을 가진 무능한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전자의 의미로 이해할 경우 아굴은 자신이 모든 사람보다 못함을 인정한 다음, 자신보다 나은 독자들 역시 참된 지식을 가지지 못함을 지적함으로써 독자들의 의표를 통렬하게 찌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어느 쪽으로 이해하든 아굴은 본단락에서 자신의 무지를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독자들의 참된 지식의 부재를 깨닫게 하고 있다.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는 자신의 지식의 부재를 고백함과 더불어 독자들의 무지를 지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본절의 내용은 결국 하나님만이 참된 지혜의 원천이 되심에 대한 겸손한 고백이라 할 수 있으며(Garrett), 타락한 인간의 이성적 지식의 한계도 보여주고 있다(Ringgren).
3.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라는 표현은 인간의 이성적 추구가 진리의 획득 수단이 되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참된 지혜의 부재를 고백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아굴은 욥 28:3,4에서처럼 자신이 참된 지혜 추구에 성공하지 못했음을 거듭 반복하여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의 ‘거룩하신 자’에 해당하는 ‘케도쉼’은 ‘거룩한’(출 19:6 ; 레 6:16)이라는 뜻을 지닌 ‘카도쉬’의 복수형이다. ‘거룩한 자’라는 말은 민 24:15-19에서 발람이 거룩한 자를 아는 지식이 있다고 말하는 용례에서와 같이 ‘하나님’을 뜻하기도 하고 욥 5:1; 15:15에서와 같이 ‘천사’를 의미하기도 한다. 본문에서는 전자의 의미로서 완전한 능력과 영광을 가지신 하나님 의 탁월함과 위대함을 표현하는 장엄 복수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인간 존재의 미미함을 암묵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4.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본절은 참된 지식에 대한 다섯 개의 질문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 마지막 질문을 제외한 네 질문은 누구라도 쉽게 즉각적으로 하나님이라는 대답을 하도록 하는 질문이다. 이는 인간으로 자신의 연약함과 미약함을 깨닫고 창 조주이시며 인간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이끄는 것이다.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 : 이러한 수사적 질문 중 본문에 언급된 첫째 질문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절대적 통치권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하늘'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하늘, 즉 천체의 하늘 뿐만 아니라 언간 세상을 초월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나님만이 온 우주 만물과 천상의 세계를 자유로이 왕래하시며 통치하시고 섭리하신다 는 것이다. 또한 고대 근동에서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왔다는 표현은 불멸성, 초인간적 지식, 지혜, 힘 같은 하나님만이 지니신 특별한 속성들을 상기시켜 준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분리시켜 둘 사이의 커다란 간격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다(Van Leeuwen).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본문은 결국 인간 존재가 위대하신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복해야 함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 : 하나님께서 바람을 일으키고 또한 이를 잠잠케 하시는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다(암 4:13). 바람을 볼 수도 없으며, 그 일부를 잡는 것조차도 할 수 없는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게 될 때에 자신이 극히 미미한 존재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을 옷에 싼 자" : 본문에서 아굴은 하나님께서 바람을 통제하심을 ‘손’을 소재로 하여 표현한 후 하늘에 구름을 두시고 비를 내리게 하심을 ‘옷'을 소재로 하여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물’은 ‘빗물’을 의미하며, ‘옷’은 ‘외투’라는 의미로서 빗물을 머금고 있는 구름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은유적 표현이다. 하늘의 구름이 그 많은 빗물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고대인들에게는 기이한 자연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홍수의 빗물이라 할지라도 구름은 조금이라도 찢어지거나 새지 않고 그 빗물을 다 머금고 있는 것이다(욥 26:8; 38:37). 저자는 이러한 자연 현상을 주관하시는 능하신 분이 다른 이가 아닌 하나님이심을 제시함으로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었다.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 : 여기서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거주지를 세우신 분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본문의 ‘정한 자’는 ‘세우다’, ‘확립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땅’은 인간과 모든 동물이 존재하는 거주지를 의미하며 ‘모든 끝’은 그 거주지의 구석구석 끝까지 모든 지경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본문은 하나님이 인간과 동물이 거주하는 모든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심을 나타내준다. 특히 ‘땅’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가장 확고부동한 실체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를 감안할 때 하나님이 온 땅을 창조하시고 그 끝까지 정하셨다는 본문의 표현은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의 존재의 터를 마련하신 분이란 사실을 부각시켜 줌과 동시에 참으로 하나님만이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분이란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 앞선 네 개의 질문이 ‘누구인가’라는 의미의 표현인데 반해 본문은 ‘무엇인가’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본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앞선 네 개의 질문과 달리 답변을 하기에 어려운 것이다. 고대 근동에서 이름은 호칭을 위한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인격 자체를 대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대상의 인격과 그 인격이 가진 속성을 파악한다는 의미 또는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었다(출 33:12). 결국 본문은 하나님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를 알고 있느냐는 질문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신 하나님의 속성과 인격을 파악하였느냐 혹은 엄위하신 그분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느냐는 질문인 것이다. 이는 어떤 인간도 쉽사리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이어지는 질문은 ‘그 아들의 이름’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아들’이 누구를 지칭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이 있다. 삼위일체 중 2위인 성자 예수로 보기도 하며(Clark), 본장의 저자인 아굴로 이해하기도 한다(Skehan). 그 밖에 미드라쉬는 이스라엘로 보며, 하늘의 천사들이나 혹은 인간의 ‘지혜로운 선생’ 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혹자는 본문에서 아들의 이름이라는 말이 왜 포함되었는지 이유가 분명치 않다고 전제하면서 이 아들에 대한 질문은 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앞서 네 가지 질문으로 제시된 모든 일들을 할 수 있는 사람의 이름을 요구하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Whybray, Buzzell). 그런데 아무런 전제 없이 본문 그대로를 분석한다면 ‘그 아들의 이름’은 문맥적으로 ‘그 이름’ 즉 ‘하나님의 이름’과 병행을 이루고 있다. 즉 ‘그 아들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이성으로 불가해한 것이며 절대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불가해성과 절대성에 필적하는 존재는 전혀 없으므로 다른 어떤 존재를 상정하기보다는 하나님 자신과 관련한 하나님의 지식 과 지혜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하겠다(8:22). 이러한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는 ‘로고스’의 개념으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겠지만(Deane) 본문에 언급된 ‘아들’의 일차적인 의미는 ‘지혜’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결국 아굴은 하나님의 본성과 그분의 아들로 묘사되는 하나님의 지혜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질문에 능히 안다고 대답할 수 있는 인간은 전혀 없다. 즉 아굴은 인간 존재의 미미함을 보여 주는 네 개의 선행하는 질문과 더불어 어떠한 인간이라도 능히 대답할 수 없는 본문의 질문을 던짐으로써 독자가 자신의 지혜와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께 순복하여 그분의 말씀에 귀기울이도록 이끌고 있는 것이다.
5.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 앞선 2-4절에서는 인생의 보편적 무지와 인간 존재의 미미함을 수사적 표현을 통하여 보여주었다. 이어지는 5~6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성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데, 이는 앞선 단락과 연결되어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결국 저자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지혜를 추구하는 것은 실패를 야기할 뿐임을 지적하고 그같은 깨달음에 근거해 인간 존재와 절대적 간극을 가지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는 모든 독자는 마땅히 5~6절에서 제시되는 완전하신 하나님이 베푸시는 말씀 앞에 겸손히 마음의 무릎을 꿇어 순종해야 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한편 ‘순전하며’는 ‘정련하다’, ‘제하다’(25:4)라는 의미로 금속을 정련시켜 찌끼를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잘못된 것이나 오염된 사상이 섞여 있지 않고 절대적으로 무오함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러한 무오함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적용되고 있다. 즉 아굴은 ‘모든’이라는 말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말씀(NASB, Every word of God)이 무오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를 통해 본장의 저자인 아굴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모든 말씀 앞에 철저히 순종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 상반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무오성 즉 완전성을 제시한 아굴은 그 말씀의 원천이신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가를 ‘방패'라는 소재를 사용하여 은유적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의지하는 자의’는 ‘의지하는 자들에게(NASB, to those who take refuge)’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와 잘 어울리는 표현인 ‘방패’는 손에 들 수 있거나 어깨에 맬 수 있는 둥글거나 타원형으로 된 보호를 위한 장비를 말한다. 이는 적의 공격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보호 수단으로 생명과 직결되는 전투 무구였다. 이렇게 전쟁에 사용되는 방패를 통해 묘사된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생생한 비유는 상반절에 제시된 하나님의 말씀의 무오성과 더불어 그 말씀에 착념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나타내주고 있다.
이처럼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완전한 보호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Deane).
6.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인간이 자의적으로 어떠한 것을 덧붙여 추가하지 말아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무오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게 하는 패역한 범죄이기에 신 4:2; 13:1 ; 고전 4:6에서도 강하게 경고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계시록에서는 이처럼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예언의 책에 말씀하신 모든 재앙을 더할 것이란 경고 곧 패망과 파멸에 던질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계 22: 18).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 본문은 상반절에서 제시된 명령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본문 전체를 이끌고 있는 ‘두려우니라’는 ‘~하지 않도록(lest)’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상반절의 명령을 어길 경우 본문에서 제시되는 내용이 적용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는 한글 개역 성경의 ‘될까 두려우니라’라는 표현이 주는 뉘앙스 즉 그럴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상반절의 명령을 반드시 지켜야 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를 적극적으로 살린 일부 영역본은 ‘그렇지 않으면 그는 너를 꾸짖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NASB, or He will reprove you, and you will be proved a liar)’란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상반절의 명령을 지켜야 될 이유는 본문에서 두 가지로 제시되고 있는데 그중 첫번째는 한글 개역 성경에서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사법적 의미의 정죄와 심판, 그리고 그를 통한 양육과 훈계를 의미한다(BuchseD. 즉 단순한 꾸지람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한 공식적인 심판과 징계를 내포하는 표현으로서 매우 엄중한 징계로 교정함을 의미한다.
앞선 5절에서 하나님의 인격은 ‘방패’라는 은유를 통해 매우 자비하신 분으로 묘사된 바 있지만 여기서는 말씀에 무엇을 덧붙이려고 하는 자들을 결 코 용납하시지 않고 매우 엄중하게 다루시는 분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는 ‘속이다(made deceptive)’ 즉 ‘거짓말쟁이임을 보여주다(be proved a liar)’라는 의미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더하여 추가하는 행위는 그 목적이 무엇이든 한낱 거짓에 지나지 않는 죄악일 뿐임을 단언하고 었다.
아굴의 두 가지 간구
잠언 30:1-9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두 가지만 구하라고 하시면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사람들마다 계산하느라 분주할 것입니다. 어느 것을 택하고 어느 것을 버려야 하는지 생각하고 구하게 될 것인데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지지 않고 구하는 한 가지는 돈의 넉넉함일 것입니다. 우리들 삶의 다툼과 요란들의 대부분이 돈에 대한 문제입니다. 돈이 있으면 해결되는 문제들로 연일 분주합니다. 그 돈이 곧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활동들이 힘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로 모여서 기도를 하는 것도 사실은 힘을 빼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힘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교회가 힘이 있으려면 사람이 많이 모여야 합니다. 힘을 위한 전도는 전도가 아니라 천국 문을 가로막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거부 못하며 달려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시면 아굴이 두 가지를 구하는데 세부적으로 보면 네 가지인데 둘씩 하나로 묶으면 두 가지가 됩니다. 그 내용은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말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여달라고 합니다. 혹 내가 배가 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고 할 까 두렵고 혹 가난하여 도둑질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렵다고 합니다. 이 기도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 여호와 경외가 목적임을 보게 됩니다. 내가 부요하고 가난하고 하는 문제보다 하나님 우선입니다.
그러면 이 아굴은 어떻게 이런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까? 1절을 봅니다.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라고 합니다. 잠언(箴言)서는 지혜를 말합니다. 참된 지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경배하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굴의 잠언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가 담긴 것입니다. 그 지혜로 말미암아 기도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지혜가 없이 기도하면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것 외에 달리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기 전에 먼저 아굴이 어떤 지혜를 받았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2-3절입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에 비하면 짐승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총명이 자기에게 없다고 합니다.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지혜란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입니다. 또한 그 거룩하신 분을 경외하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그런데 아굴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단지 겸손해서 하는 말이 아니겠지요! 하나님을 만나고 난 사람의 표현입니다. 직접 하나님을 만나면 죽지만 하나님의 영광에 접촉만 되어도 나오는 고백들이 이런 모습입니다. 두렵고 떨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는 고백,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런 고백들이 주님을 만난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세상에 지혜와 지식을 가진 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과연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묻습니다.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고 묻습니다.
아굴의 시대나 오늘이나 간에 과연 이런 질문들이 우리들의 관심을 끌기는 하겠습니까?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하신 분의 이름이 무엇인지, 땅의 끝을 정하신 분이시라면 그 땅의 모든 것들의 끝도 다 정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특이하게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묻고 있습니다. 이런 질문들이 우리가 평소에 하고 삽니까? 그 근원에 대한 질문들을 하지 않고 삽니다. 거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인양 세상의 것을 누가 더 많이 소유하는가에 대한 싸움만 하고 있습니다. 이런 황당한 질문을 욥기에서도 보게 됩니다.
욥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립니다. 자신의 죄도 아닙니다. 얼마나 거룩하게 의롭게 살았는지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영문도 모른 채 모든 재산이 다 날아가고, 자식들이 다 죽어버리고, 마누라는 그렇게 순전하게 섬긴 하나님을 욕이라도 하고 죽으라고 하고 도망가 버립니다. 심지어 자기 몸에 심한 종기가 나서 기왓장으로 긁고 있으면서도 그 입으로 범죄 하지 않고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라고 그래서 하나님이 경배를 하나님이 받으셔야 된다고 합니다.
그때 욥을 위로한다고 온 세 친구가 돌아가면서 공격을 합니다. 네가 이렇게 된 것은 죄를 지어서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온갖 인과율과 자신들의 지혜를 가지고 욥을 공격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겠느냐고 합니다.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겠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에도 욥은 수긍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이렇게 당할 만한 죄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따지고 싶다고 합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욥38:4-6절입니다.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계속 되는 하나님의 질문들을 보면 사람들이 평소에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궁극적인 것들과 전혀 관심조차 없던 일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들이 41장까지 계속됩니다.
타조에 대하여 생각 해 보셨습니까? 39:13-18절입니다. “봉독” 평소에 이런 타조에 대한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내가 동물학자도 아니고 왜 이런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그러면 까마귀 새끼가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찾을 때에 그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분이 누구신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욥이 아무리 의롭다고 하여도 평소에 생각지도 아니한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여긴 일들에 대한 질문 앞에 할 말이 없습니다. 네가 의롭다고 나를 악하다고 하겠느냐고 합니다.
이때 욥의 답변을 봅니다. 40:4절입니다. “4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42:5-6절입니다.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욥은 회개할 뿐입니다. 왜 재산이 하루아침에 날아가고 자식이 한꺼번에 죽고 마누라는 도망가고 자신의 몸이 병든 지에 대한 질문조차 하지 못하고 입을 가리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합니다.
욥을 본 이유는 욥이 회개하는 모습과 아굴의 모습이 비슷합니다. 자신은 다른 사람에 비하면 짐승이라고 합니다.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신 내용과 같은 것을 간단하게 요약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4절입니다. 욥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아굴이 사람들에게 말하는 형식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이런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을 합니다.
4절을 다시 봅니다. 두 곳의 말씀만 봅니다.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 온자가 누구입니까? 요한복음 3:12-13절입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율법 선생이라는 니고데모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 아굴의 질문의 답변은 예수님입니다. 또한 그 아들의 이름이 또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예수님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세워지지 아니하면 욥처럼 자기 의로움을 가지고 하나님이 틀렸다고 나서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욥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러합니다. 욥만큼 의롭지도 못한 주제에 정말 어설픈 몇 가지의 자기 의를 가지고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이웃을 원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우리가 어디에서 입을 막고 티끌 가운데서 회개하게 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만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어떻게 여기고 있습니까?
누가복음 12:13-21절을 봅니다. “봉독” 어떤 사람이 유산문제로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러 왔습니다. 형이 아버지의 유산을 동생에게 나누어주지 않았기에 자기 형에게 명하여 유산을 나누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때 예수님의 대답이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하시면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다고 하시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질문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거저 내 재산이나 챙겨주는 분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주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그래도 관심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게 됩니다. 잠언 30:5-6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방패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 하는 자가 될까 두렵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는 것이 거짓말 하는 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한다는 것은 요한 계시록의 말씀에서 더하거나 빼지 말라는 말씀이 생각이 날 것입니다. 단지 계시록의 말씀만이 아니라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요5:39)에서 더하거나 빼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그 안에 기도가 나오면 그 기도의 내용을 내가 이루고 싶은 욕망을 담아서 기도하여 응답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난 자들은 자기의 억울함조차 입을 닫고 오히려 회개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도대체 욥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그렇게 티끌가운데 회개하였을까요? 자신은 의롭다고 하였지만 정말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그의 거룩하신 말씀 앞에서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아굴도 자기 평생에 기도하려는 내용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 기도의 내용을 봅시다.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겠는데 죽기 전에 거절하지 말고 주시기를 구합니다. 우리가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일들이 참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난 아굴의 기도는 너무나 소박합니다.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여 달라고 합니다. 우리가 목숨 걸고 달려가는 길이 사실 헛된 것이지 않습니까? 내가 지금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일이 헛되지 아니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헛되지 않다고 자꾸 거짓말을 하고 믿게 만듭니다. 마귀가 이렇게 유혹하는 것입니다. 자꾸만 의미를 새롭게 둡니다. 내가 하는 일은, 우리가 하는 일은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 것에서 멀리하여 달랍니다.
두 번째는 너무 부하게도 마시고 가난하게도 말고 거저 필요한 양식으로 먹여 달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명백합니다.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두렵고 가난하여 도둑질 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까 두렵다고 합니다. 아굴에게 두려운 것은 하나님 여호와를 모르게 되는 것과 그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생에 이루고 싶은 기도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이런 기도가 나옵니까? 이런 기도가 아니라 잠언 30:15절의 거머리의 두 딸처럼 달라고, 달라고만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드려지는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앞에서 무엇을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아굴의 기도
잠 30:1-9
오늘은 아굴의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는 “성경에는 축복받은 야베스의 기도도 있고, 치유 받은 히스기야의 기도도 있고,엘리야의 기도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아굴의 기도입니까?”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게실지 모르겠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라든지, 히스기야의 기도라든지, 엘리야의 기도라든지 얼마나 놀랍고 다이내믹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굴의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에 나오는 아굴의 기도를 살펴보면 그의 기도에 대해서 응답해 주셨다는 말씀은 언급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굴의 기도가 참으로 보배롭고 귀한 교훈을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되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를 드린다고 하면서 세속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동기에서 기도하는 것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한 것이 솔직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아굴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아는 것이 있다면 본문 1절에서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굴은 야게의 아들이며, 이 잠언의 말씀을 이디엘과 우갈라는 사람에게 전했다’라는 밖에 모릅니다. 물론 학자들은 그가 솔로몬 왕이나 욥이 아니었나 생각하기도 하고, 또는 솔로몬 시대의 시인이나 위대한 도덕가 중의 한사람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굴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아굴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고, 또한 그것을 평생 동안 소원하면서 기도하였던 한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평생 두 가지 기도 제목만을 가지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 말은 아굴에게는 기도의 제목이 두 가지 밖에 없었다라고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이 기도 제목들이 응답되기를 원했던 것처럼 그의 삶 자체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원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세상 사람들은 대화 몇 마디만 나누어 보면 그 사람의 수준이나 그의 인격의 정도를 대충은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늘 돈을 생각하는 사람은 입만 열면 돈, 돈, 하게 됩니다. 음란한 것이 속에 가득한 사람은 입만 열면 음탕한 말을 내뱉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충만하면 사랑의 언어가 나오게 되고, 마음이 강퍅한 사람은 입만 열면 쌩쌩 찬바람이 나와 사람들의 분위기를 얼어붙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의 경우도 하나님께 드리는 그의 기도가 어떤 내용인가를 알게 되면 그의 신앙의 수준과 신앙인격을 대개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아굴은 어떤 자세를 가지고 기도했으며, 그 기도의 내용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아굴은 자기를 낮추면서 아주 겸손하게 기도했습니다.(2,3절)
본문 2-3절에서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굴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낮추면서 아주 겸손하게 기도했습니다.
성경에서는 말하는 짐승이란 말의 의미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 배덕한 자 죄인”을 가르칠 때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죄 많은 인간, 짐승처럼 자랑할 것 도 보여줄 것도 없는 존재로 자기 자신을 낮추고 아주 겸손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 자신 은 지혜도 지식도 없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신앙적 죄인이라고 자기를 깎아 내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욕하고 공격해서 기분 이 좋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굴이라는 사람은 자신을 인정 사정할 것 없이 깎아 내리고 있습니다.
한번은 무디 선생이 전도를 하러 다니고 있을 때 무디를 시기하던 사람들 증에 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이 듣는 중에 이런 모욕을 주었습니다. “무디 선생, 당신은 과거에 구두 수선장이었었죠.” 이는 지나간 날의 직업을 들춰내서 모욕을 주자는 심산이었습니다. 갑자기 공격을 받은 무디의 표정을 많은 사람들이 긴장한 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무디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저는 구두 수선쟁이기 전에 구두 방에서 심부름을 했었습니다.”라고 태연하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아굴과 같은 기도 자세를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분명히 인식하면서 아주 겸손해야 합니다. 은혜 받은 성도라면 아굴과 같은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아브라함도 창18:27절에서 자기 자신을 ‘티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약 성경을 2/3을 기록할 만큼 훌륭한 인격이나 신학이나 하나님에 대한 열정은 타인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했던 사도 바울도 그의 서신서에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 [팔삭둥이](고전15:8), [죄인의 괴수](딤전 1:15),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전 15:8에서는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신앙이 깊을수록, 은혜의 밀도가 진할수록 자기의 부족을 강하게 나타내는 고백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큰 자]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이라는 이름보다는, [작은 자]라는 뜻을 가진 헬라식 이름인 [바울]이라는 이름을 더 즐겨 사용했습니다. 물론 바울이 복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증거 하기 위해서는 헬라인에게 익숙한 이름인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작은 자처럼 고백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자의 첫 번째 자세는 겸손함입니다. 우리도 아굴처럼 짐승과 같이 미련하고 약점과 결점을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몸가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비굴한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교만하면 더욱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의 기도는 듣지 아니하시지만 겸손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눅 18:11에서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바리새인처럼 교만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것은 올바른 기도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눅 18:13에서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세리처럼 겸손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올바른 기도자의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아굴처럼 “나는 짐승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혜도 없습니다. 나는 알지 못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굴처럼 이렇게 자기의 부족을 깨닫는 것 그 자체가 무한한 지혜를 얻은 것입니다. 이런 겸손한 자세를 가진 사람이 하늘의 신비한 지혜와 지식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은 아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 겸손한 자 그리고 주님을 높이는 자를 좋아하십니다.
본문 4절에서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굴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면서 기도했습니다.
아굴이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냐 누가 바람과 물 과 지구의 동서남북을 주장할 수 있느냐”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 외에 누가 우주를 통제할 수 있으며 섭리(攝理)할 수 있느냐? 누가 하나님 나라에 올라갔다가 내려 온 자가 있느냐?”라는 뜻입니다.
우리 장로교 교리의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는 데 있습니다. 어떤 교파는 '사람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나머지 “구원(救援)도 자신이 노력 하고 힘쓰기만 하면 얻는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장로교는 하 나님에게 모든 주권. 권세와 영광을 절대적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만이 절대자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다 큰 존재도 없고 비슷한 존재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가정에서 가장되는 사람이 아내나 자녀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하고 멸시받게 되면 그 가정은 뭔가 잘못된 가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발전하려면 목사의 권위가 인정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도층에 있는 분들이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목사나 지도층에 있는 분들이 존경받지 못하고 교회, 그 권위가 인정되지 않는 교회는 흔들리는 교회입니다. 그것은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대통령이 백성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장로교는 하나님의 권위를 흔들어 놓거나 내려놓는 것을 금합니다. 좋은 신앙은 하나님을 절대자로 전능하신 하나님,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어떤 이유로도 흔들리거나 깎아내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3:13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 40:12에서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 22:27에서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을 의지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잠 3:6에서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 나라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기도자의 자세입니다.
본문 5-6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 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굴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으면 신앙이 흔들립니다. 부모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생활 질서가 캐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식으로 취사선택(取捨選擇)하면 그 신앙이 자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쓰거나 달거나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편식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음식을 가리고 투정하는 것이 좋은 습관이 아닌 것처럼 말씀 투정을 하고 가려먹는 것도 좋은 습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 중에 어떤 것은 순수하고 어떤 것은 불순한 것이 아니라 다 순수하고 순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꾀꼬리 소리보다 더 매끄럽고 공자 맹자의 말씀보다 더 훌륭한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인격과 생활을 믿을 수 없을 때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신임을 받아야 그의 말이 신임을 받게 됩니다. 제 아무리 ‘나는 깨끗하다, 청렴(淸廉)결백하다’고 외치고 보도해도 그의 실제 생활이 청렴결백하지를 못하면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주인공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다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아서 아굴은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는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굴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시편 12장 6절에서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다 다른 어떤 것들을 가감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이 시 51:4에서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 결코 선입견(先入見)이나 편견을 가지고 대해서는 아니 되고 고정관념(固定觀念)을 깨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생각이나 철학을 가하거나 감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신4:2에서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계22:18-19에서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 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록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굴과 같은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주님께서 요 15:7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7절에서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굴은 간절한 자세를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아굴은 여러 가지를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두 가지를 기도했는데 이것을 자신이 죽기 전에 응답해 달라고 아주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간절한 기도를 하는 사람은 아주 분명한 기도 제목을 갖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아굴은 정확한 두 가지의 기도제목을 생전에 이루어 달라고 거듭거듭 간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드릴 때 분명한 기도제목 없이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올바른 기도의 자세는 무엇을 기도할 것을 먼저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는 것은 좋은 기도의 습관입니다. “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 나의 필요가 무엇인지? 그것이 나에게 왜 필요한지? 내 마음의 소원은 이것인데 하나님도 그것을 원하시는지?”를 생각하면서 기도한다면 중언부언(重言復言) 기도하지 않고 아굴처럼 아주 분명하게 확실하게 기도하되 더욱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첫째는 아굴은 성결하고 정직한 인간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8절 상)
본문 8절 상반 절에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굴은 성결하고 정직한 인간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굴은 ‘내가 거짓과 허탄으로부터 멀리 떠나겠나이다’라고 기도하지 않고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왜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아굴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인가를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아굴의 고백처럼 우리는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입니다. 선을 행할만한 능력이 전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죄를 짓고 회개할 때는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라고 기도한 놓은 후에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금 그 죄를 거듭해서 짓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는 결코 성결하고 정직하게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아굴은 이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죄악된 생활과 허탄한 생활과 거짓투성이의 모순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신의 노력이나 수양이나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 도우시는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성결하고 정직한 인간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주님의 기도를 통하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를 알고 있고, 이런 기도를 끊임없이 드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시험에 들고 있습니다. 악에 빠져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도 아굴과 같은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나를 구하시는 분, 나로 하여금 악에서 발을 빼게 하시는 분, 나의 피 묻고 더러운 손을 씻어 주시는 분, 깡패를 바꾸어 목사가 되게 하시고 장로가 되게 하시는 분, 강도를 붙잡아서 성도를 삼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여 부패한 늪에서 나를 건져 주옵소서! 타락한 실수로부터 나를 건져 주옵소서!
헛된 욕망과 욕구불만으로부터 나를 건져주옵소서! 불신앙과 교만의 성곽으로부터 나를 탈출시켜 주옵소서!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서도 아직도 허탄과 거짓말을 멀리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세상에 매여 사는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 요일2:15절-17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허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하면서 아직도 세상의 것들을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좇아난 것들이 아니라 세상으로 좇아 온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굴처럼 허탄한 것을 멀리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의 죄를 늘 회개하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굴처럼 거짓말을 멀리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내 안에 정직한 영을 부어주시사 새로운 창조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 정직한 영을 달라고 기도하는 참으로 복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직한 영을 부어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가 결국 성도답게 살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굴처럼 성결하고 정직한 인간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어주시는 영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아굴은 물질적 시험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8절 하)
아굴은 본문 8절 하반 절에서 “...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물질적 시험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굴의 이러한 기도는 한마디로 훌륭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아굴이 가난하게도 말아 달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기도와 동일합니다. 그러나 부하게도 말라는 것은 우리의 기도와 좀 다르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솔직한 심정으로 말해보십시다. 풍족하게 살기를 원치 않는 분이 계시다면 한 번 손들어 보십시오. 아마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부하게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넉넉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남이 보기에 재산이 많아 보이는 사람도 자기 스스로는 많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가난하게 마옵시고, 부하게 하옵소서!"를 외칩니다. 그런데 진정 무엇을 위해 부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부함으로 말미암아 저지를 죄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자가 되는 것이 나쁜 일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선한 방법으로 노력하고 성실하게 부지런히 일하여 많은 것을 얻어 부하게 사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다섯 달란트로 열 달란트를 만든 종을 칭찬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선한 방법으로 얻을 물질을 나를 위해서만 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수입을 얻었다고 자기만 배불리 먹고 살지 말고 주님의 사업, 선한 사업, 배고픈 자들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합니다. 많이 가진 자 들이 나누는 삶을 산다면 가난한 자들 의 굶주림은 없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 핍절한 사람이 없는 이유는 가진 사람들이 자기의 소유를 팔아 그 값을 사도들 앞에 두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질을 너무 많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떠나 사는 죄를 짓는 부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난은 선한 것이고 부는 악하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유함이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유혹할 때에 많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했지만 재물이 많은 고로 결국 주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이 청년에게는 주님을 따르는데 물질이 방해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자 청년이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함을 보시고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부자이기 때문에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부자로 살면서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하여 어떤 어리석은 부자가 곡간을 헐고 여러 해 쓸 물건을 비축해 놓고 스스로 만족해하면서 “내 영혼아 내가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그렇지만 이 어리석은 부자를 향하여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리하면 네 쌓아 둔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되물으셨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과 재물은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굴은 어째서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말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먹여달라는 것을 평생의 기도로 삼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본문 9절에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두려워 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아굴은 가난하게 되는 것을 소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부자가 되기를 소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아굴은 만약 너무 가난해도 도적질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굴은 너무 부유하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냐 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된 것처럼 교만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알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부하게도 마옵시고, 가난하게도 마옵시고”라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자족하는 삶을 살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유하면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게 되어 결국은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굴은 이러한 환경 즉 하나님 섬기는 일에 방해가 되는 숱한 유혹들의 싹을 잘라낼 수 있도록 위해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가난하게 되면 먹고 살 것 때문에 도적질도 서슴치 않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 것을 그는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아굴의 기도는 세상적인 욕심으로 구하지 않고 그의 평생 하나님 앞에서 바른 인격의 소유자로서 깨끗하게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것을 평생의 기도제목으로 삼은 것입니다.
물질이 너무 없어도, 물질이 너무 많아도 범죄 하기가 쉽습니다. 가난과 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저해요인(沮害要因)이 된다면 그건 죄악임을 알아야 자족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굴처럼 "내 믿음의 그릇만큼 축복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굴처럼 기도하되 주님께서 가르친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마 6:6-9) 특히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는 기본적으로 필요한 양식이 있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으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일용할 양식으로만 어떻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진정으로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것을 쌓아놓고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필요한 양식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게 광야에서 양식을 주셨습니다. 그 양식이 만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 나를 매일 아침마다 주셨습니다. 욕심 을 내어 만나를 많이 거두어 그 이튿날까지 남겨 두었을 때 벌레가 생기 고 냄새가 났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남겨 두었을 경우에만 하나님은 허락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풍성하게 주셔도 더욱 주를 사랑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처럼 부할 때든지 가난할 때든지 일체의 비결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딤전 6:7-10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 게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여! 나의 사업과 나의 직장과 나의 가정을 통하여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나의 건강과 나의 사업과 나의 주머니가 주님을 위하여 쓰여 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여! 나는 주의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를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선한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굴처럼 자신을 낮추고 아주 겸손하게 기도합시다.
아굴처럼 하나님을 주권과 하나님 나라의 주권을 높이면서 기도합시다.
아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기도합시다.
아굴처럼 간절하게 기도합시다.
성결하고 정직한 인간이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
물질적 시험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기도는 단회적으로 기도할 내용이 아니라 우리가 천국에 갈 때까지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사도 바울처럼 어떤 환경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 주신 말씀처럼 우리들도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성결하고 정직한 삶, 범사에 자족할 수 있는 삶을 살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통하여 하나님의 선한 도구들로 온전히 사용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