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령 라다크(Ladakh)를 찾는 한국인들이 늘고 있다. 미지의 땅에 대한 호기심이나 샹그릴라에 대한 갈급 때문인 듯하다. 특히 잔스카르(Zanskar)나 카르길(Kargil), 또 수루 계곡(Suru Valley)을 찾는 한국인들의 기행문도 적지 않게 온라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곳이 고대 실크로드의 마지막 장터였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영국 BBC는 실크로드 유물들을 발굴한 가족이 최근 박물관을 열었다고 지난 28일(현지시간) 소개해 눈길을 끈다. 주인공은 무자밀 후사인(Muzzamil Hussain)이다. 라다크의 산악 도시 카르길이 1999년 파키스탄과 인도가 영유권을 다툰, 이른바 카르길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초등학생이었다. 학교 운동장에 폭탄이 떨어지자마자 후사인과 가족은 남쪽의 오지 수루 계곡으로 피란했다.
같은 해 말 인도가 승리를 선포했고 피란 갔던 후사인 가족은 집에 돌아왔다. 후사인은 누워만 지내던 할아버지로부터 카르길의 바자르 근처에 후사인의 증조부가 지은 옛 집이 전쟁 통에 무사한지 보고 왔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들었다. 후사인의 삼촌들이 낡고 녹슨 폐허속으로 들어가 나무문 틈으로 들여다보니 전 세계 도시들의 이름이 도장으로 찍힌 나무상자들이 보였다. 먼지 투성이 바닥에 공간을 만들어 상자를 여니 중국산 비단(실크), 아프가니스탄산 은식기, 페르시아산 러그(깔개), 티베트산 터키옥, 몽골산 말안장, 런던과 뉴욕 그리고 뮌헨에서 온 명품 비누와 고약들이 쏟아져 나왔다.
버려진 보물상자를 연 셈이었는데 곧바로 인도에서 최고의 실크로드 유물로 가득한 가족 컬렉션으로 여겨졌으며 후사인의 인생 여정을 바꿀 수 있는 발견이었다.
25년 전의 일이었다. 카슈미르와 라다크를 이어 실크로드 상인들에게 몇 세기나 결정적이면서도 참혹한 통로를 제공했던 히말라야 산악의 조지 라(Zoji La)는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도로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BBC 트래블의 맷 스턴(Matt Stirn)은 최근 이곳 산악 도로를 달리는 4륜 구동 자동차 안에 앉아 있었는데 손바닥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고 털어놓았다. 창문을 통해 눈높이로는 만년설을, 1000m 아래 계곡 바닥을 내려다 보며 초조해 했다. 얼마나 가까웠는지 아랑곳 않고 코를 창에 댄 채 먼지 나는 도로가 어디에서 끝나는지 알 길 없었다. 공기와 천길 낭떠러지 뿐이었다. 앞 좌석에 앉아 있던 후사인은 두 호텔과 두 박물관, 환경보전 비정부기구(NGO)와 투어 가이드 서비스사 등 가족과 함께 운영하는 사업체 중 하나와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에겐 일상적인 통근이었으며, 가족들이 몇 세기에 용감하게 해 온 일 중 하나였다.
스턴이 후사인을 처음 만난 것은 2023년 라다크 동부의 눈표범을 수색하면서였다. 해발 고도 4265m 눈밭에서 분홍빛 카슈미르 눈 차이를 홀짝거리며 그는 실크로드와 연결된 자신의 특별한 얘기를 스턴에게 들려줬다. 그의 회상은 전쟁으로 시작해 묻힌 보물 자랑을 거쳐 화해 얘기로 끝을 맺었다. 산의 역사에 매료된 인류학자로서 스턴은 배워야 할 것이 많아 2년 뒤 우리처럼 어둠이 내리기 전 카르길의 역사적인 교역 중심지에 닿고 싶어하는 실크로드 상인의 심정으로 조지 라에 서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고 돌아봤다.
라다크의 산악 지대는 인도와 파키스탄, 중국이 국경을 놓고 다투는 히말라야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치솟은 봉우리들과 가파른 빙하 계곡들, 고지대 평원들이 풍광을 지배한다. 인더스 강을 따라 홍수가 휩쓸고 간 평원이 펼쳐지며 눈을 멀게 할 정도로 하얀 사과꽃과 살구꽃이 피어난다. 협곡 위에는 눈표범과 히말라야 갈색곰들이 먹잇감을 노리며 유령처럼 돌아다닌다. 상업과 정복의 교차로에 있는 위치 때문에 현대 라다크는 티베트 불교, 이슬람교와 많은 부족 공동체 문화들이 섞이는 곳이다.
실크로드는 유럽과 극동 아시아까지 잇는 6400km의 도로망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육상교역로의 하나로 여겨진다. 로마 귀족이 1세기에 중국산 실크를 수입해 이 이름이 붙여졌는데 실은 한참 전에 대륙을 연결하는 교역 체계로 만들어졌다. 일단 구축되자 그 망은 이념과 종교, 상품, 화폐가 고대 세계를 누비는 데 도움이 됐다. 유럽과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것은 오스만 제국이 중국을 봉쇄했던 1453년 단절됐는데 라다크와 같은 지역에서는 실크로드의 특정 구간들이 20세기까지도 작동했다.
머리칼 쭈뼛 서는 조지 라를 넘은 며칠 뒤, 후사인과 스턴은 카르길 도심의 작은 카페에 앉아 달 밥에 마살라 차이를 마시고 있었다. 잔스카르 산악 지대에 (이슬람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아잔이 메아리 치고 근처 빵가게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를 때 후사인은 가족이 증조부의 보물을 보호하고 공유하기로 결정을 내린 이유를 설명했다.
처음에 후사인 가족은 고대 유물들로 뭘 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2002년 플로리다 어틀랜틱 대학의 인류학자 자클린 퓨크스(Jacqueline Fewkes)와 나시르 칸은 그 컬렉션에 대한 소문들을 듣고 후사인과 친척들을 만나려고 여행했다. 그 유물들의 중요성을 인정하며 인류학자들은 그 가족이 미래 세대를 위해 이 물품들을 보존해야 한다고 격려했다. 후사인의 두 삼촌을 국장과 큐레이터로 기용해 가족은 카르길 도심에 문쉬 아지즈 바트 박물관(Munshi Aziz Bhat Museum)을 세워 18세기 라다크 양뿔 활부터 19세기 중국산 구리 물 파이프까지 수백 점의 실크로드 유물들을 구경할 수 있도록 했다. 퓨크스에게 이 박물관을 독특하고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이 컬렉션에 대한 개인적인 일화와 가족 관계다.
퓨크스는 스턴에게 "문쉬 아지즈 바트(박물관)는 지역 주민과 글로벌 수용자 둘 다에게 가치없는 각자의 시각을 제공하기 때문에 대영박물관이나 스미소니언이 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면서도 "(여기) 이야기들은 후손들에게 의미있는 정체성에 집중하고 가족과 지방의 역사가 인도나 해외의 더 큰 박물관들에서 볼 수 있는 국가적이나 국제적인 내러티브보다 과거에 대한 대안적인 이해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그의 삼촌들은 박물관에서 매일 매일의 작전을 수행하는 반면, 후사인은 연구에 집중하며 가족사를 다시 들춰 보고 있다. 그는 이 유산이 방문객을 끌어들일 기회를 제공하고 좀 더 중요하게는 그의 공동체를 어려운 과거와 화해시키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고 있다.
후사인의 삼촌 아자즈 문쉬는 "난 모든 사람이 각자의 가족사를 보전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현대화 시대에 우리는 종종 우리의 뿌리에서 벗어나 있으며, 우리는 우리 유산을 온전하게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사인의 증조부 문쉬 아지즈 바트는 1866년 수도 레(Leh)에서 태어나 스카르두(Skardu, 오늘의 파키스탄)에서 학교를 마친 뒤 여행해 카르길에 왔다. 당시에도 카르길은 실크로드의 한 갈래로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카슈미르를 통해 연결하는 트리니티 로드(Treaty Road)의 중요한 허브로 알려져 있다.
후사인은 스턴에게 "카르길은 항상 세계의 많은 부분들과 연결돼 있었다. 그 이름 자체로 (왕국 간의) '멈추는 장소(a place to stop [between kingdoms]'를 뜻한다"고 말했다. 성공한 회계사인 바트는 카르길로 옮겨 그곳에서 작은 교역소를 시작해 1920년에는 일곱 점포, 길손들의 여인숙, 라사와 야르칸트 같은 장소들로부터 석 달 걸려 여행해온 장거리 교역상들이 이용하는 낙타와 말, 야크들의 마굿간으로 늘어났다. 최전성기에 바트의 허브는 중앙아시아, 인도 본토, 중국, 유럽과 아메리카를 이동하는 교역상과 물품으로 가득했다.
후사인은 "이 지역이 그 시기에 어떻게 진짜로 글로벌로 됐는지 알아낸 것이 흥미로웠다. 이 지역은 당시에도 진짜 코스모폴리탄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바트의 사업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948년에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은 두 나라가 분할됐을 때 봉쇄됐고, 궁극적으로 카르길을 드나드는 모든 장거리 교역을 끝장냈다. 바트는 실크로드의 마지막 섹션 중 하나를 따른 마지막으로 알려진 상인들의 한 명으로 은퇴해 그 해 말 세상을 떠났다. 후사인은 "우리 증조부가 그 건물을 폐쇄했을 때 그 방들은 거의 반 세기 동안 열쇠로 잠긴 채로 있었다"고 말했다.
다음날 무쉬코 계곡(Mushkoh Valley) 위의 능선을 하이킹하며 후사인과 난 바위 더미와 카르길 전쟁이 남긴 모래주머니들을 지나쳤다. 파키스탄과의 사실상 국경으로부터 몇 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 지역은 전쟁이 끝난 뒤 인도인들 사이에서 전쟁으로 찢기고 위험한 곳이란 악명을 다시 얻었다.
후사인은 "전쟁에 영향 받은 카르길과 다른 곳들에서 난 여전히 정체성 위기와 자부심이 결여돼 있다고 생각한다. 난 관광이 도움을 주는 대단한 도구라고 생각하는데 바깥에서 온 이들이 당신 지역에 와서 당신의 유산, 역사와 문화를 알아본다면 당신의 자부심이 돌아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후사인과 그의 형제 타파줄은 2013년 카르길의 자연 문화 유산에 집중하는 여행사 Roots Ladakh를 출범시켰다. 라다크를 찾는 대다수 방문객들은 수도 레 근처에 머무르며 불교 사원들을 구경하고 눈표범을 찾아 나서는 반면, 후사인은 더 많은 이들이 느긋하게 자신의 집을 찾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는 진흙에 눈표범이 방금 전 남긴 발자국을 가리키며 "우리 비전은 전쟁터로 굳어진 우리 지역에 대한 인식을 유산이란 렌즈를 통해 바꾸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난 우리 조상들과 그들이 만났음에 틀림없는 재미있는 사람들에 대해 많이 추억한다. 오늘날 카르길은 과거에도 그랬듯 전환하는 위치이며 난 여행객들과 손님들을 모시면서 그 유업을 잇고 있다고 느낀다."
옛 실크로드를 따라 후사인과 난 수루 계곡을 구비구비 올라 고립된 잔스카르 불교 왕국으로 향했다. 한 고비를 돌자, 난 세 여자 어르신들이 뒤에 건초 더미를 잔뜩 인 채 엄청난 빙하의 혀 아래를 걷는 것을 봤다. 그들은 수km 떨어진 집을 향해 수다를 떨며 걸어가며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후사인이 그들에게 물건들을 옮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여인들이 오를 때 한 여인이 후사인에게 외부 세상 소식 들은 게 있냐고 물었다.
그의 증조부모가 해낸 것과 똑같이 후사인은 걱정스러운 얼굴의 다국적 여행객 무리 쪽으로 돌아서 정치, 교역과 먼나라들에 대한 얘기를 중계하기 시작했다.
Silk Road Kargil
카르길의 실크로드 역사를 설명하는 최선의 방법은 레나 스리나가르(Srinagar)에서 시작하는 고대 교역로를 따라 운전하는 것이다. 카르길의 문쉬 아지즈 바트 박물관(Munshi Aziz Bhat Museum)에 전시된 수백 점의 유물들은 이 루트의 화려한 과거 역사를 상세히 보여준다. 이 마을 바깥에는 5세기에 세워진 그레코-불교 양식의 부처 조각들이 중앙아시아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이 지역의 과거를 보여준다. 깊이 있는 경험을 원한다면 룻츠 라다크(Roots Ladakh)가 스리나가르로부터 조지 라와 카르길을 통해 레까지 열흘 동안 쫓아가는 Silk Road expedition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