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만리 7월 10일 수요일 여행 12일 차.
오전 6시. 드디어 라카포시봉(7,788m)베이스캠프를 향하여 출발이다. 이번 여정에서 가장 힘든 일정이 될 것이다. 이 산은 세계에서 27번째 높이이며 파키스탄에서는 12번째 봉우리이다. 어제 저녁 미리 출발 준비를 해두었지만 고산에 대한 설램 때문에 그다지 잠이 충분치 못히다.
잘 닦인 도로를 한시간 반을 달려 산행 들머리인 '미나핀' 마을에 도착했다. 사전에 약속되어 있던 산악가이드 '아바스'를 만나 오늘의 고행길을 시작한다. 예상 시간은 원점회귀 아홉시간이다.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산행이 시작된다. 가이드가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하며 즐겁고 안전한 산행을 약속한다. 자기는 프로라면서 자부심을 내보인다. 7시 30분 출발.
시작은 비교적 평이하다. 우선 군사 작전도로로나 쓰임직한 비포장 차도를 따라 들머리를 잡는다. 현재 고도계는 딱 2,000m가 찍혔다. 우리 숙소의 높이가 2,700이었으니 도리어 700미터를 내려온 것이다. 낮아지니 우선 숨 쉬기가 편안 하다.
아직은 이른 시간, 오르막 길이 산그림자 안에 갖혀있어 햇살이 닿지 않아 쾌적하다. 험악한 계곡이 넓은 데다가 가파르기까지 하니 흘러내리는 수량과 유속이 대단하다. 굉음에 대화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다만 가이드에게 소리 높혀 천천히 가자고 전달할 뿐이다.
이내 비탈길이 시작된다. 어림잡아 70도가 넘는 경사면에 제트(Z)자 형상으로 길을 내두었다. 벌써부터 종아리에 힘이 들어간다. 나무 한그루 없는 척박한 자갈 길이다. 이내 등뒤에 땀이 밴다. 허리를 굽힌 채 가이드의 뒤꿈치만 바라보며 걸음을 옮긴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메마른 바닥의 흙은 밀가루보다도 곱다. 신발은 물론 바짓단까지 온통 누렇게 파우더를 뒤집에 쓴 채로 모양 빠진 형상이 되었다.
걸음 옮기기를 사십여 분, 저편 비탈 곁에 작은 흙집이 보인다. 잠깐 쉬어갈 수 있는 휴게실이다. 겨우 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서 주섬주섬, 어제 미리 준비해 둔 짜파티와 만두로 아침을 해결한다. 또한 자리값은 해야하겠기에 진열장에서 비스켓을 골랐다. 현지 특유의 맛살라 향이 제법 입맛을 돋군다. 곁에 우두커니 선 두 소년의 표정이 무료하다. 과자 몇 봉지를 더 집어서 아이들에게 건네니 이내 표정이 살아난다.
다시 출발. 역시나 자갈 먼지길이 이어진다. 이제는 태양도 중천이다. 사나운 햇살에 썬그라스 짙은 색이 아니었다면 아예 눈이 찔렸으리라. 바위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이 제법 맑다. 이제 까지는 단 한번도 이처럼 깨끗해보이는 물을 본 적이 없다. 작은 도랑을 포함해서 모두가 고운 돌가루 섞인 회색의 물만이 눈에 띨 뿐이었다. 입을 대고서 한번 마셔보고 싶었지만 충동적인 행동은 삼가야만 한다. 오름길에 배탈이라도 나면 낭패 중의 낭패다.
이제 비탈진 자갈길이 끝났다. 시냇물이 흐르고 나무가 보이는 초지에는 십여마리 소들이 방목되었다. 흙돌로 지어진 외양간들이 군데군데 여러 채 인 것을 보니 기르는 짐승들의 숫자가 상당하겠다. 해발은 많이 높아지긴 했지만 아직 여기까지는 인간계에 해당한다. 멀리 그림처럼 걸린 폭포수를 바라보면서 걷는 나그네의 길이 하염없다.
그렇게 두시간을 걸었다. 어느 순간 가파른 고개길이 끝나고 한 걸음을 올라서니 뜻밖에 너른 잔디밭이 나타난다. 한쪽편으로 줄지어 쳐진 텐트들. 캠핑싸이트인 '어퍼 하파쿤'이다. 풍광좋고 선선한 이곳은 여름철 최고의 피서 휴양지 중 하나다. 현지인들은 통상 오후에 여기로 올라와 하루를 묵고서 라카포시 빙하와 주봉을 보러간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이 바쁜 여행자. 더욱 많은 여유를 갖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다. 찻잔을 들고서 잠시나마 한가롭게 둘러보는 경치가 수려하다. 멀리 눈을 인 봉우리들이 아스라한 중에 가까이 황톳빛 민둥산은 산사태로 인하여 크게 생채기가 생겨났다. 삼각형으로 흘러내린 엄청난 토사 더미로 인해 산 허리에 놓인 두 줄기 길이 매몰되고 말았다. 심각하다. 복구하기가 쉽지 않겠다. 민둥진 절벽의 형상이 지금 당장 다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하다. 아니나 다를까 눈 앞에서 추가 붕괴를 본다. 순식간에 먼지가 일더니 이내 온 계곡이 황사로 인해 누렇다.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았는데도 이내 목이 칼칼하고 눈알이 뻑뻑하다. 청정지역이라는 이곳의 하늘이 도리어 맑지 못한 증거를 이제 막 보았다. 파키스탄으로 넘어온 뒤 밤마다 올려다본 별빛이 밝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찻잔을 내려두고 다시 출발이다. 아직까지도 라카포시 주봉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은데 목적지인 베이스캠프 까지는 두시간 여를 더 가야만한다. 작은 초지를 지나니 다시 비탈길이다. 키 큰 전나무들이 우쭐대는가 싶더니 이내 관목 지대로 변한다. 키 작은 나무에 어울려 곳곳에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었다. 가이드는 일일이 짚어가며 꽃 이름을 알려주지만 이제 숨쉬기도 힘든 판이라 아무 말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 해발은 이미 삼천을 넘겼다. 이제서야 겨우 능선길 모퉁이 뒤로 라카포시가 살며시 얼굴을 내밀었다.
잠깐의 다리쉼에 다시 힘이 모인다. 어쨌든지 머리 위로 길게 비탈진 능선길에 올라 서야만 한다. 그래야 라카포시봉과 그 아래로 흘러내린 빙하의 전모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서로간 약간의 대화 뒤에 나의 나이를 알게된 가이드가 놀라며 짐짓 사양하는 나의 등짐을 뺏어 매었다. 파키스탄에서는 나의 나이면 모두가 집에 있거나 잠만 잔다며 엄지 손을 쳐든다. 자기는 올해 스물 일곱살이며 프로패셔날 가이드이니 이 정도 짐은 대신 맡아 줄 수 있다며 다시 한번 자부심을 내보인다. 또한 건너편의 7,000m 급의 설산을 가리키며 작년에 정상을 밟은 곳이라며 자랑이다.
드디어 능선길에 올았다. 허벅지가 떨려올 무렵 눈 앞에 펼쳐진 빙하와 설산이 장관이다. 서로 다른 여럿이 어우러진, 조화의 힘이 이렇게나 크다. 이제까지 보아온 그것들은 각자 따로따로여서 감흥이 덜했다. 이제 설산괴 빙하 두 존재가 한곳에서 어울리니 곧바로 신선계에 다름 아니다. 어울림이란 얼마나 달콤한 것이런가. 피곤이 한 순간에 날아갔다. 한몫에 크게 보상을 받은 것이다.
이제 여기서 오늘의 목적지인 라카포시 베이스캠프까지는 이십 여 분 거리다. 압도적 풍경의 빙하를 뒤로하고서 지천으로 피어난 야생의 꽃들이 자태를 뽐낸다. 한걸음 두걸음 발길을 옮기다보니 저 만큼 벼랑길 끝에 돌집이 나타났다. 바로 그 곳이 베이스캠프다. 천천히 걸으면 보이는게 많다. 다가갈 수록 걸음에 여유가 생긴다.
마침내 당도했다. 여기는 해발 3,350m 지점의 '라카포쉬봉 베이스캠프'. 해발 2,000에서 출발하여 쉬엄쉬엄 컨디션을 조절해가며 전천히 다섯시간을 올라 여기에 왔다. 작년 여름 한달 간의 중앙아시아 여행 중에 키르키즈스탄의 '레닌봉' 베이스캠프에 올랐던 일과 '알리아라샨'의 '카라쿨피크' 등정과 함께 이번에도 인생샷을 건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내 나이가 어때서?" 새삼스래 으쓱, 자부심이 일면서 아주 뿌뜻하다.
이곳에 상주하는 캠프 지킴이들에게 점심을 주문했다. 비록 배낭 속에 미리 준비된 음식이 있긴 하지만 기념 삼아 이곳의 음식을 먹어보기로했다. 이곳의 메뉴는 간단하다. 기본으로 밀가루떡인 짜파티를 굽고 야채스프를 끓여내는 정도. 평지에서와는 달리 무려 한시간이 걸러 준비된 음식에 그런대로 정성이 담겼다. 고산지역에서는 낮은 기압 때문에 물의 비등점이 낮다. 백도에 햔참 못미치는 온도에서 끓어버리는 까닭에 음식이 잘 익지 않으니 오래 걸리는 것이다.
음식이 조리되기를 기다리는 사이에 캠프 곁 언덕 위에 올라 기념촬영을 해두기로 한다. 정말 멋지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장관이다. 무슨 말로도 이곳의 풍광을 제대로 표현해 낼 수 없겠다. 이런 광경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감사하다. 가이드 역시 사진에 진심이다. 경험에서 우러난 촬영 솜씨를 뽐내면서 온갖 포즈를 요구한다. 덕분에 좋은 사진 많이 건졌다.
이제는 내려가야 할 시간. 두고 가기가 아까워 자꾸만 뒤돌본다.
'역천자는 망하고 순천자는 흥한다.'했던가. 오전에 하늘을 거슬러 치받아 오를 때는 아주 죽을 맛이더니 이제 내림길에 중력의 도움을 받으니 그리도 편할 수가 없다. 올라올 때 무거운 걸음으로 두시간 반이 걸렸던 길이 내려오는데 걸린 시간은 한시간 남짓이다. 아까의 캠프싸이트까지 가파른 길을 미끄러지듯 가볍게 내려온 것이다.
잠시 휴식 후 다시 이어지는 하산길. 올라올 때 멀리 보아두었던 폭포에 들렀다. 위에서 본 풍광에 비하면 소박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다가갈 수록 폭포수의 굉음은 전해온다. 마춤한 바위에 걸터앉아 기념사진 몇장 남기고서 다시 내려가기 시작한다. 길에서 친구를 만난 가이드가 염소 젖을 써비스로 내왔다. 그 고소함이 우유와는 사뭇 다르다. 바로 짜낸 젖을 길쭉한 나무 통에 넣고서 계속 휘젓는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그 새 발효가 되었던지 살짝 시큼해진 맛이 풍미를 더한다.
우리가 이렇게 많이 걸었는지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하산길. 슬슬 체력이 떨어지는지 다리가 무겁다. 물도 다 떨어졌다. 목이 마르다. 오름길에 봐두었던 석간수(石澗水)에 입을 댄다. 혀 끝이 쎄하고 흙냄새가 나며 미세한 모래가 느껴진다. 익숙해하는 현지인 가이드에게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나에게는 배탈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다. 참자.
드디어 원점 회귀 하산 완료. 오후 다섯시 반이 되었으니 모두 열 시간의 산행이 되었다. 뜻 하지않게 점심식사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예상보다 한시간 길어졌지만 이왕에 나선 길이니 오래 머무를 수록 좋다. 이곳은 별유천지(別有天地), 두고가기가 얼마나 아까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