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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코 복음 3,7-12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예수님의 활동에서 드러나는 치유와 구마의 힘 때문에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오지만, 그분은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십니다. 군중이 자신을 밀치지 않도록 제자들에게 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이르십니다.
예수님은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을 고쳐 주시지만, 그들과 나름 거리를 두십니다.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한 치유임을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앎이 아니라 치유와 구마를 열광적으로 구하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자리를 정하십니다.
너무 바쁘거나 정신 없이 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당신 사랑의 유일한 대상인 것처럼 각자를 만나 주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자세를 배우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 기 도 *
더러운 영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신 예수님,
당신의 힘에 항복할 수밖에 없는 더러운 영들의 증언을 당신은 엄하게 막으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아보지만 당신을 추종하는 삶이 아닌, 당신께 적의를 가지고, 당신의 구원하는 사랑에는 닫혀 있는 존재입니다.
저도 말로만 당신을 이야기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형제들을 섬기기 위해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을 할 수 있는 제자가 되도록, 제 마음을 열어주시고 비추어 주십시오! 아멘!
(가야 분원의 나눔입니다)
1월23일 [연중 제2주간 목요일]
마르코 3,7-12
바다와 같은 주님: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은총을 주시면서도 군중과 거리를 두십니다.
군중들이 당신을 밀치는 일이 일어나게 하지 않으시려고 배를 한 척 마련하신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주님께서 은총을 주시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순종’을 배우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은총을 받는 이가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면 은총이 독이 됩니다.
질서를 알게 하는 차원에서 은총을 받는 이에게 휘둘리면 안 됩니다.
한서진은 ‘SKY 캐슬’에서 사회적 압박과 개인적인 불안에 압도된 부모의 전형을 보여주며,
강예서에게 특히나 약한 어머니로 묘사됩니다. 그녀는 도축장 옆에서 부산물을 팔며 등록금 내서 학교를 졸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딸 둘만 낳아 시어머니에게 인정받지 못한
부잣집 가문 며느립니다.
그녀에게 공부 잘하는 예서는 그녀 자신이 그 가문에서 인정받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과도한 성공 욕구와 건강한 경계를 세우지 못하는 태도는 예서가 특권 의식과 공감 부족을 키우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이렇게 서진은 예서의 인격 형성보다 외형과 사회적 인정을 우선시합니다.
서진은 예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는 너를 위해 모든 걸 다 했다.
넌 꼭 성공해야 해.”
이는 성공이 행복과 가치의 기준이라고 믿는 그녀의 잘못된 생각을 드러내며, 그녀 자신의 해결되지 않은 불안감을 예서에게 투영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서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고 그녀의 잘못을 덮어주는 서진의 태도는 결과가 도덕성보다
중요하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예서는 이를 내면화하고 어머니의 죄책감과 욕망을 이용하는 법을 배우며,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악화됩니다.
서진이 예서의 이기적인 행동에 도전하거나 도덕적 지침을 제공하지 못한 것은 예서가 윤리적이지 않은 행동을 정당화하고, 성공이 모든 잘못을 용서받게 한다고 믿게 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서진이 예서의 왜곡된 가치관 형성에 자신의 책임을 마주하는 장면에서
나타납니다.
강예서는 엄마의 유전자가 자신의 몸속에 있다는 것을 한탄합니다.
그러자 한서진은 고백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니? 널 행복하게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들어버렸구나.” 이 고백은 어머니로서의 그녀의 약점—방임과 잘못된 우선순위—이 예서의 특권 의식과 도덕적 실명을 부채질했음을 강조합니다.
이 사례는 부모와 교육자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경계를 설정하고, 자녀의 성취보다 인격을 우선시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선한 의도라 하더라도 관계가 깨지고 자녀의 성격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교훈을 제공합니다.
겸손을 가르쳤어야 하는데, 오히려 자녀의 꿈에 이용당한 엄마는 그 많은 고생에도 자신을 원망하는 딸만 가질 수 있을 뿐입니다.
자녀에게 존중받지 못하는 부모란 자녀가 부모를 존중할 수 없게 키운 부모입니다.
자녀가 나빠지는 이유는 불안과 교만 때문입니다. 불안은 다정함으로, 교만은 단호함으로 꺾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정하며 동시에 단호할 수 있을까요?
유튜브에 ‘전 세계 화제가 된 리트리버의 새끼 훈육법’이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8주 된 강아지들이 한 방에 모여있습니다.
잠시 후, 어미견 로잘리가 들어옵니다.
강아지들은 어미를 향해 달려듭니다.
하지만 어미는 오늘 아이들에게 ‘배려하는 것’을 가르쳐줄 참입니다.
젖을 떼야 할 때인 것입니다.
어미는 으르렁대며 단호하게 아이들을 떼어냅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겁을 먹습니다.
이제 어미는 새끼들을 다시 핥아줍니다.
그리고 훈육은 끝났습니다.
이것을 보면 느껴지는 것은 ‘다정하지만, 단호하다.’입니다.
자연 안에서 이것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바다’일 것입니다. 바다는 다정합니다.
해변에서 놀도록 얕은 파도를 보내주고, 배가 고프면 맛보라고 맛있는 물고기도 줍니다.
그러나 물고기를 새끼까지 깡그리 잡아가면 어떻게 될까요? 바다 생태계가 파괴되면 지구 온도 조절이 안 돼서 인간도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바다는 단호할 때도 있습니다.
커다란 파도와 해일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만듭니다.
무한한 보물을 가지고 언제든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지만, 인간에 의해 휘둘리지 않기 위해 단호할 땐 단호해집니다.
인간은 바다 앞에서 경외감을 느끼고 그래서 바닷사람들은 바다에 나가기 전 각자가 믿는 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것입니다.
바다는 우리에게 말하는듯합니다.
“어, 와서 놀아! 얼마든지 내어줄게. 근데 까불면 죽는다~!”
하느님도 우리 안에서 이와 같으십니다.
무한한 바다와 같은 사랑을 지니셨지만, 동시에 인간과의 거리를 유지합니다.
이는 인간을 위해서입니다.
인간이 바다에 빠지면 살 수 없는 것처럼, 바다를 무시하지 않게 해야 할 책임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많은 은총을 주시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그런 교만이 생기면 손해는 인간이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과 거리를 두시는 것입니다.
‘이빨 보이던 댕댕이가 한순간 얌전해진 까닭’이라는 유튜브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발 닦는 것을 싫어하는 댕댕이는 주인이 발을 닦아줄 때 으르렁거립니다.
주인은 몇 번을 참아주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립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조용해지고 심지어 웃는 표정까지 짓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개에게 계속 은혜만 주면 그 은혜가 개를 망칠 뿐입니다.
다정함과 함께 단호함은 꼭 필요합니다.
다정하지만, 단호하게! 이것이 은총을 주는 이의 자세입니다.
사제가 그래야 하고 부모가 자녀에게 그래야 합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이들은 자기 안에 바다를 품고 있으므로 그것을 보며 다정하지 않을 수 없고 단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하느님을 바라봅시다.
그러면 어떻게 이웃을 대해야 하는지를 저절로 알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23일 [연중 제2주간 목요일]
복음: 마르 3,7-12
우리 교회는 힘겹게 살아가는 양들에게 위로와 기쁨과 희망을 주고 있는지?
피정 오신 자매님들 통해서 요즘 대세인 몇몇 트로트 가수들에 대한 소식을 듣습니다.
가수들께서 이런저런 고통과 상처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시는 분들에게 존재 자체로 위로와 희망이 되어주신다니, 참으로 감사한 동시에 부끄러움도 느낍니다.
교회가 주지 못하는 위로와 기쁨을 그분들이 대신 주고 계시니...
막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행적을 묵상해보니, 요즘 대세 트로트 가수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셨습니다.
요즘 봉독되는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 공동체의 신명나는 활약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구세사의 주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군중들은 크게 환호했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그 자체로 위로요 구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밀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유다 지방 사람들뿐만 아니 예루살렘 도시 사람들, 이두매아 사람들, 요르단 강 건너편 사람들, 북서쪽에 위치한 티로와 시돈 지방 사람들까지 몰려들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군중이 한꺼번에 밀려들었습니다.
군중의 특징이 무질서하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차례가 올 것인데, 조금이라도 빨리 치유의 은혜를 입고자 새치기를 하고, 뒤에서 밀고 난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전장치 겸 군중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십니다.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구해보라고 이르십니다.
거룻배에 타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밀어 육지에서 약간 떨어트려 놓으십니다.
그리고 분위기를 좀 가라앉힌 상태에서 차분하게 말씀을 선포하시고 치유 활동을 재개하십니다.
군중이 예수님께로 몰려드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치유의 은총을 입기 위해서 왔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와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이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들려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겸손하신 하느님, 우리 인간을 향한 극진한 사랑과 자비의 표현인 예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교통수단이라고는 특별히 없었던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먼 길을 걸어서 왔습니다.
먼 길을 걸어오느라 무척이나 지쳤을 것입니다.
목마르고 굶주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예수님을 뵙겠다는 일념으로, 새 세상을 열어주실 메시아의 말씀을 듣겠다는 목적으로 그 먼 길을 거의 달려오다시피 했습니다.
교회를 찾는 우리의 발걸음이 그들처럼 가벼웠으면 좋겠습니다.
미사참례 차 성당을 찾는 우리들의 마음이 그들처럼 설레었으면 좋겠습니다.
평생을 기다려왔던 축제에라도 가듯이, 사랑하는 사람 만나러 가듯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듯 그렇게 사람들이 교회로 오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제자들과 함께 구성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활기차고 신명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 교회의 발밑을 한번 내려다봅니다.
그 옛날 초기 교회처럼, 오늘 우리 교회도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해 달려오고 있습니까?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지친 성직자·수도자들은 상습 피로를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비명 속에 양떼들 사이에서 헌신하고 있습니까?
말씀에 굶주린 세상 사람들은 남녀노소 그 누구를 막론하고, 교회가 제공하는 시원한 구원의 청량음료를 원 없이 마시고 있습니까?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주간 목요일 강론>
(2025. 1. 23. 목)(마르 3,7-12)
<거리두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7-12).”
1) 뒤의 5장을 보면,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라는 생각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어서 병이 나았다는 말이 있고(마르 5,25-29), 또 6장에는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에(옷자락 술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들은, ‘예수님의 옷’이 기적을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셔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는 증언입니다.
만일에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고서 예수님의 자비나 예수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옷’이 기적을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또는 예수님은 믿지 않고 예수님의 옷만 믿는다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더욱 놀라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오로를 통하여 비범한 기적들을
일으키셨다.
그의 살갗에 닿았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들에게 대기만 해도, 그들에게서 질병이
사라지고 악령들이 물러갔다(사도 19,11-12).”
만일에 주님은 안 믿고, 바오로 사도의 수건이나 앞치마만 믿는다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군중에 대해서 ‘거리두기’를 실행하셨다는 뜻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밀어내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오는 사람들을 모두 받아 주셨고, 병을 고쳐 달라는 그들의 간청을 모두 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밀려들었고, 너무 질서가 없었습니다.
그 상황은 무척이나 소란스럽고 무질서했고, 남들보다 먼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려고 서로 밀쳐 대는 상황이었습니다.
자기들끼리 서로 밀쳐 대는 것도 문제인데, 그게 지나쳐서 예수님을 밀쳐 대는 일이 생겼다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나타내고, 또 ‘몸의 치유만’ 원하면서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그랬겠지만, 그래도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질서 유지’를 위해서,
또 ‘말씀’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 ‘거리두기’를 하셨습니다.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청하려고 주님을 찾을 때,
우리는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은 버려야 하고,
눈앞의 급한 사정만 생각하면서 영혼의 구원은 외면하는 기복신앙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기심과 집착과 욕심을 버리는 것, 또 기복신앙과 미신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은 우리 스스로 실행해야 할 ‘거리두기’입니다.
그 ‘거리두기’는 잘못된 신심에 빠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일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라는 말의 뜻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아는 척 하지 말라고 마귀들에게 엄하게 명령하셨다.”입니다.
마귀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라고 소리 지른 것은, 결코 신앙고백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려는 나쁜 의도로 한 일입니다.
<마귀들의 말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안 믿는 것들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어떻게든 방해하기만 하는 것들이고, 그것들이 하는 말은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보이는 거짓말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의 입을 아예 막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도 비슷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처로 갈 때에 점 귀신 들린 하녀 하나를 만났는데, 그는 점을 쳐서 주인들에게 큰 돈벌이를 해 주고 있었다.
그 여자가 바오로와 우리를 쫓아오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종으로서 지금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여러 날을 두고 그렇게 하는 바람에 언짢아진
바오로가 돌아서서 그 귀신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에게 명령하니 그 여자에게서 나가라.’ 하고 일렀다.
그러자 그 순간에 귀신이 나갔다(사도 16,16-18).”
이 이야기에 나오는 귀신은 ‘마귀’이고, 그것은 사도들이 하는 일을 방해하려는 나쁜 의도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의도가 악하면, 그 말은 ‘선한 증언’이 아니라
‘악한 말’이 될 뿐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