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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 구한 두 가지 일
잠 30:7-14
7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10 너는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
11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12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도 자기의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13 눈이 심히 높으며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
14 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가 있느니라
잠 30:7-14 / 하나님. 제가 두 가지를 여쭈어 보겠습니다. 제가 살아 있는 동안 이 두 가지를 꼭 이루어 주소서. 8) 우선은 이웃을 속이거나 그들에게 거짓말하지 않게 하여 주소서. 그리고 가난하게 살지도 않게 하여 주시고 재산 많은 부자로 살지도 않게하여 주소서. 그저 하루세 때 굶지 않고 먹고 살 수 있게만 하여 주소서. 9) 너무 가진 것이 많아 `여호와가 정말 누구란 말이냐' 하면서 주님을 모른 체 하지나 않을까 걱정됩니다. 또 제가 너무 가난해서 먹을 것조차 궁하여 남의 것 훔쳐 내어 내가 모시고 사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나 않을까 염려됩니다. 10) 주인에게 그가 데리고 있는 종을 헐뜯지 말아라. 그 종이 너를 저주할 경우 그 뒷감당을 어찌 다 할 수 있겠느냐! 11) 아비를 우습게 여겨 욕이나 해대고 어미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세대. 12) 더럽게 살면서도 더러운 것 닦아낼 줄 모르고 혼자서만 깨끗한 체하며 살아가는 세대. 13)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눈꼬리 거만하게 치뜨며 남들을 우습게 여기며 사는 세대. 14) 그 이빨은 날이 선 칼이요, 그 턱은 날카로운 칼날이라. 아, 이놈의 세상! 이 땅에 사는 가난한 민중들 착취하기에 바쁘고 헐벗은 빈민들 쥐어짜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세상.
아굴은 마음의 정직함과 풍성함을 갖기 원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하여 경고합니다.
내가 죽기 전에 거절하지 마시옵소서(7-9) 잠언에 나오는 유일한 기도문입니다. 아굴은 주께 마음의 정직함과 그 안에서 풍성함을 가질 수 있도록 구합니다. 너무 가지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있고 너무 곤궁하게 되면 게으른 자처럼 살고 싶다는 유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일을 구합니다. 첫째 간청은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굴이 거짓말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거짓말하고 속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한 기도일 것입니다. 둘째 간청은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마 6:7). 아굴은 재물이 사람에게 어떤 존재인지 그 부정적 요소를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배부르면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과 상관없다 할 것이며, 가난하면 도둑이 되고, 내가 믿는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 있다는 염려와 두려움을 말합니다.
무리가 있느니라(10-14)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여 말하는 것을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종의 생계를 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네 가지 형태의 패역한 무리가 등장합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11), 가정에서 부모를 축복하지 아니하면서 밖에 나가서는 존경 받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부도덕함을 인정하지 않는 자(12), 다른 사람의 더러운 것을 보고 지적하고 책망하면서 막상 자기 자신의 더러운 것을 씻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만한 자(13), 자신은 성공했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볼 때 눈을 밑으로 깔고 보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자를 약탈하는 자(14), 앞니가 긴 칼과 같고 어금니가 군사용 칼인 맹수 같은 사람으로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가난한 자의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정죄하는 공통된 구절은 ‘무리가 있느니라’입니다. 특정한 죄악이 온 사회나 시대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적용: 하나님의 진리를 찾고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축복의 길로 끝까지 믿고 가야 합니다.
거짓말은 속이는 사람의 내면에서 평안을 빼앗고 속임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해를 입힙니다. 거짓말의 썩게 만드는 힘은 마음을 굳게 하고 영혼을 파괴합니다. 거짓말은 진리와 함께 걸을 때에만 얻을 수 있는 기쁨과 자유를 파괴합니다. 의로운 길로 행하는 정직한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합니다. 견고한 바위가 요새가 되며 양식이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합니다.
< 설 교 >
평생의 소원 두 가지
잠 30:7-9 / 홍문수 목사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소원을 갖고 살아갑니다. 잘 보면, 그 소원의 내용이 곧 그 사람의 인생의 기치관이며 수준입니다. 옛날 우리가 가난해서 먹을 게 궁하던 시절을 회고해 보면 당시 사람들의 소원은 아주 소박했습니다. 예를 들어 쇠고깃국에 하얀 쌀밥 실컷 먹고 싶다는 식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수준이었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7개 장기를 동시에 이식한 7세 소녀 은서의 기사를 봤습니다. 은서는 태어날 때부터 소화 흡수가 안 되는 선천성 희귀병을 앓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적은 양의 식사만 하면서 필요한 영양분의 80%를 영양제 주사에 의존해왔다고 합니다. 그러다 이번에 장기 이식에 성공한 겁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네 소원이 뭐냐? 그러자 은서가 두 가지 소원을 말했습니다. 첫 번째는 ‘마음껏 먹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가수 이승기 오빠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사를 보면서, 얼마나 밥이 먹고 싶었을까 마음이 짠하면서 “역시 천진난만한 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소원이 뭡니까? 노후 자금으로 돈 10억만 있으면 좋겠네요! 승진했으면 좋겠네요! 우리 아이가 아무 대학에 꼭 합격했으면 좋겠네요! 여러 가지 소원을 댈 수 있을 겁니다. 어떤 소원이든, 그것이 곧 우리 인생의 가치관이요 수준입니다. 그리그 그런 소원들이 쌓여지면서 우리 인생이 만들어집니다.
본문을 보니까, 잠언 30장을 쓴 아굴은 두 가지 소원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굴은 당대의 지혜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말했다면 지나가는 식으로 말한 하찮은 소원은 아닐 겁니다. 하나님께서 꼭 이루어 주시라고 간구한 소원입니다. 그래서 이 소원을 흔히 ‘아굴의 기도’라고 부릅니다.
7절 보면, 그 소원은 보통 소원이 아니라 평생의 소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7절.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내가 죽기 전에’라는 표현을 통해 아굴이 지금까지 기도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기도할 것이고, 평생에 기도할 제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구하였사오니’의 ‘구하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샤알’(שׁאל)인데, 단순한 소원 정도가 아니라 졸라대며 애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계속 끈질기게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제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 소원 두 가지가 뭡니까? 어떻게 보면 생뚱맞고 막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대개 생활 속에서 필요한 구체적인 소원을 댈 텐데, 아굴의 소원은 인격과 가치관에 관한 소원입니다. 거짓이 없게 해 달라, 정직한 인격을 소원하는 겁니다. 또 가난하지도 부하지도 않고 생활에 필요한 만큼 적당한 물질을 달라, 주어진 분복에 자족하는 가치관을 소원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아굴은 인생의 근본적인, 내면적인 소원을 말하였습니다. 이것들은 일견 막연해 보이고 대단치 않아 보이지만, 사실은 이룰 수만 있다면 정말로 영원토록 후회가 없고 행복한 인생의 지름길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한 게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소원이 아닌 엉뚱하고 허무맹랑한 소원을 갖고 살다가 낭패를 봅니까? 이루어지지도 않고, 또 설사 이룬다 하더라도 오히려 허망하고 불행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경우는 대개 세상적인 소원들입니다. 단순히 물질만 구하거나 육신적인 일만 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거나, 혹 주신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런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소원보다 아굴이 구한 것처럼 먼저 근본적이고 내면적인 소원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소원의 업그레이드를 하자는 말입니다. 그럴 때 참 행복도 따라 올 줄로 믿습니다. 사람은 육신적인 소원을 이룬다고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이 먼저 충족될 때 행복하고, 더 나아가 육신적인 문제들도 해결되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런 사실을 확신하시고 승리하는 복된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1] 아굴의 첫번째 소원 : 정직한 삶
아굴의 평생 소원 첫 번째는 정직한 삶에 대한 소원입니다. 8절(상).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 ” 아굴은 자신에게서 헛된 것과 거짓말을 제거해 주시라고 간구합니다. 헛된 것은 속임수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부정직한 모든 요소들을 제거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정직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우리가 믿는 성도라도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정말 정직하게 산다는 게 너무 힘듭니다. 악한 마귀가 우리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때로는 유혹을 해 오고, 때로는 핍박을 해 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동하고 타협하고 범죄하도록 유인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에 속삭입니다. 조금만 타협하면 모든 게 잘 될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주변을 보면 그런 사람들이 득실거립니다. 도덕적으로 해이해지고 타락한 모습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렇게 사는 게 마치 정상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는 나 혼자 손해보고 뒤떨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결국 타협하고 대충 거짓을 자행하게 됩니다. 정직과 성결을 지키는 게 불가능해 보입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만 갖고 되질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아굴은 정직한 삶을 위해 날마다 기도한 것입니다.
다윗의 모습을 봐도 정직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정직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방심했을 때 큰 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사무엘하 11장을 보면, 부하들은 전쟁터에 나가 피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왕궁에서 빈둥거리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나중에는 죄악을 은폐하려고 그 남편 우리아를 살해하기까지 합니다. 그러고도 시치미를 뚝 떼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다행히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겨우 회개하는데, 그 때 다윗이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철저히 한탄하며 참회시를 씁니다. 그 중 시51:10 보면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무슨 말인가요? 인간은 죄인인지라 하나님이 붙잡아주지 않으면 정직한 삶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그 영혼을 정직한 영으로 만들어 달라고 간곡히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이 죄성을 가지고 있는지라 잘 하다가도 어느 순간 넘어집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거짓을 행하기시 일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비추어보면서 십자가 보혈을 의지해야 합니다. 나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요일1:7,9 “7 ...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와 같이 깨끗한 양심을 지킬 수 있을 때 무엇보다 영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당당합니다. 그런 당당함이 있을 때 평생 명예로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이 치욕을 당하고 영적인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성경 인물 중 사무엘을 보면, 평생 정직한 삶을 깨끗한 이미지를 보존했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영적 자유가 있었습니다. 삼상12:1~5에 보면, 그가 사사로 오랜 세월 일하다 퇴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백성들 앞에서 담대히 말합니다. 혹시 자신의 재임 중에 부정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누구든지 밝히라고 말합니다. 그 때 백성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정직한 삶을 인정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인생에서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연약해서 적당히 타협하다 이런 저런 부정직과 거짓을 행하면 두고두고 영적인 부담이 됩니다. 뒤탈이 날까봐 두려워집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신상털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어떤 사람을 겨냥하고 인터넷에 있는 흔적들을 일일이 찾아내서 까발립니다. 그렇게 한 사람 매장키는 것은 일도 아닌 시대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아예 인터넷의 흔적을 지워주는 회사가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취직하려고 할 때, 자기도 모르게 인터넷에 부정적인 자료가 남아 있으면 뒷조사를 당할 수 있으니까 대행업체에 의뢰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업체는 인터넷에 있는 나쁜 흔적을 지워주고 반대로 좋은 자료를 만들어 뿌려준다는 겁니다. 이런 서비스를 받기 위해 월 3천불을 지불한다고 하니 재미있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정직한 삶을 추구하고, 연약하기에 십자가를 붙들고 기도하면 이런 염려 전혀 없습니다. 얼마나 영적으로 자유하고 평안하겠습니까? 혹시 그런 가운데 불이익을 당하고 시련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성경 인물 가운데 요셉을 보십시오! 그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바로 왕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일하는데, 그 부인의 유혹을 뿌리치잖아요. 적당히 타협하면 수지맞는 기회였지만 하나님의 눈길을 의식하며 살던 요셉은 절대 그럴 수 없죠. 붙잡고 늘어지는 여인을 뿌리치고자 옷을 벗어 던지고 자리를 피합니다. 여인의 모함으로 감옥에 갔지만 나중에 오히려 감옥에서 만난 관리를 통해 바로 왕을 만나고 일약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니까 결국 승리한 겁니다.
1982년 시카고에서 무서운 사건이 터졌습니다. 존슨앤드존슨의 해열진통제 타이레놀을 복용한 사람이 사망했습니다. 그 후 이틀 동안 7명이나 연달아 죽었습니다. 미국 전체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때 그 회사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신속하게 대응조치를 했습니다. 전국에 있는 전량을 회수했는데 1억 달러어치에 달하는 분량이었습니다. 그리고 전국의 병원과 약국에 50만 통의 협조문을 보냈습니다. 회장은 TV에 직접 나가서 실시간으로 상황을 보고하면서 회사의 장래보다 소비자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자 국민들의 마음이 진정되었고, 그러는 동안 진상이 밝혀졌습니다. 정신병자가 캡슐 안의 약을 꺼내고 그 속에 청산가리를 넣은 후 다시 판매대에 얹어놓았던 겁니다. 소비자는 아무 생각 없이 구입해서 복용했고 사망 사고가 터졌던 겁니다. 그 후 회사의 신뢰도를 급상승했고, 타이레놀은 처방전 없이 판매되는 의약품 중 1위를 차지하는 계기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경영학자들이 윤리경영을 언급할 때마다 모범 사례로 제시하게 됐습니다. 정직하게 기업을 운영할 때 손해보는 것보다 이익을 보는 게 얼마나 많은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정직한 삶을 위해 추구하고 기도하면 반드시 축복해 주신다고 말입니다. 시84: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뿐만 아니라 그 축복이 후손들에게까지 대대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시112:1~2 “1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그래서 영국 속담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루 동안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고, 일주일 동안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고, 한 달 동안 행복하려면 말을 사고, 한 해를 행복하게 지내려면 새 집을 짓고, 평생을 행복하게 지내려면 정직하라.” 정직한 삶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행복해지는 길이요, 두고두고 후회 없이 승리하는 길임을 믿습니다.
여러분,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가 좋아지고 군사력이 강해지는 게 최고가 아닙니다. 그건 기본입니다. 이에 앞서 국민들의 도덕성이 높아져야 합니다. 그게 흔히 말하는 국격 아닙니까? 일찍이 백범 김 구 선생이「내가 원하는 나라」에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해 주고 더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거짓은 나의 불구대천지 원수”라며 정직을 생활화하는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한 마디로 ‘정직 코리아!’를 소원한 겁니다. 금년에 총선과 대선이 있는데, 정말 정직한 지도자가 선출되어 국민들에게 정직의 본을 보여주면서 정직한 나라를 이루어가는 모습들이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반드시 축복하시고 세계선교의 선한 도구로 쓰실 줄로 믿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아굴처럼 평생 정직한 삶을 위해 기도하고 힘씀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보증하는 축복의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2] 아굴의 두번째 소원 : 자족하는 삶
아굴의 두번째 소원은 자족하는 삶입니다. 8절(하)~9절. “ ...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이 말씀은 얼른 보면 물질의 분량을 언급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건전한 가치관을 말하는 겁니다. 부하면 부한 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늘 생활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자족하며 감사하며 사는 삶을 소원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삶이 쉬워 보입니까? 사실은 굉장히 힘듭니다. 보통은 어떻습니까? 무조건 많이만 달라고 기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굴은 소유 자체보다 그것을 잘 컨트롤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구한 겁니다. 사람이 연약한 죄인인지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마음이 변하기 십상입니다. 부해지면 자기도 모르게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합니다. 사실은 그것조차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에게 경고했습니다. 신8:12~14 “1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 ” 광야에서 고생하던 시절 하나님이 도와주셨음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안타깝게도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이 경고의 말씀을 잊고 교만해졌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의 부가 오히려 저주가 되고 말았습니다.
도루묵이란 고기가 있죠. 그 이름과 연관된 재미있는 이이갸기 전해져 내려옵니다. 본래 ‘목어’(木魚)라고 불렀는데, 임진왜란 때 선조가 신의주까지 피난 갔을 때의 일입니다. 빈궁한 중에 식사를 거르던 선조가 유성룡이 구해온 생선을 먹고는 생전 그렇게 맛있는 생선은 처음 본다고 감탄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름을 ‘은어’(銀魚)로 바꾸어 부르도록 명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란 후 궁궐로 돌아와 그 때 먹은 은어가 생각나 수라상에 올리게 했는데, 너무 맛이 없었습니다. 임금의 입맛이 변한 겁니다. 좋은 반찬을 만히 먹다보니까 어렵던 시절 맛있게 먹던 은어가 이제는 맛이 없어진 겁니다. 그래서 도로 목러로 부르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도로목어 → 도루목어 → 도루묵’ 이렇게 음의 변이가 일어난 겁니다. 우리 신앙도 이럴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는 하나님께 울며불며 매달 매달리다가 이제 부해지고 편해지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채 멀리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도루묵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환경이나 조건으로 만족을 구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참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진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 절대 만족할 수 없습니다. 전5: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서 신앙으로 마음의 욕심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소유가 많아져도 욕심이 더 크면 불만족스럽습니다. 불행이죠. 소유가 적어도 욕심을 조절하면 만족스럽고 행복해집니다.
여러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need)를 채워주시지 탐욕(greed)을 채워주시지 않습니다. 욕심을 채우려고 하면 절대 불가능하고,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욕심으로 인생을 망가뜨립니다. 성경에서 탐욕을 추구하다 망한 사람의 이야기가 여럿이 있는데, 그 중에 아합 왕을 꼽을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21장을 보면, 그의 탐욕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아쉬울 게 뭐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왕궁 근처 나봇의 포도원에 욕심을 냅니다. 마음에 욕심이 들어가니까 그때부터 스스로 불행해집니다. 밥맛도 없고, 삶의 의욕을 상실합니다. 부인 이세벨의 충동질로 나봇을 살해하고 그 포도원을 차지합니다. 그런데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사건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저주받고 아합 왕가가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러니까 멀쩡하던 사람도 욕심이 들어가면 불행해짐을 알아야 합니다. 약1:14~14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래서 성경은 누누이 말씀합니다. 필요한 만큼 구하라!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중에 매일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는데, 욕심을 내서 거둔 자나 필요한 만큼 거둔 자가 똑같았다고 합니다. 출16: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신기한 일이죠. 그런데 사실은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습니다. 욕심 부려봤자 거기서 거기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아웅다웅하며 분주하게 살지만 밥 세끼 먹고 옷 한 벌 입는 것 마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주기도문 가운데 뭐라고 가르쳐 주셨습니까? 마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말은 욕심 부리지 말고 적당한 소원을 가지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자족의 비결입니다. 딤전6:6~8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갖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석이버섯 채취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석이버섯은 특이하게도 깎아지른 절벽의 바위에 붙어서 서식하는 버섯으로 식용과 약재로 쓰입니다. 고소득을 올릴 수 있어 바위 위에 올라가 채취하는 위험 부담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채취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초보자들과 고수들의 채취법이 다르다는 겁니다. 초보자들은 아래에서부터 무조건 버섯이 보이는 대로 따라가면서 채취합니다. 그러다 보면 너무 멀리 갔다가 돌아오기 힘든 경우가 생깁니다.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반면 고수들은 산등성이 아래서 산을 전체적으로 훑어보고 먼저 목표지점을 선정한다고 합니다. 그 후에 그곳으로 곧바로 올라간 후 거기서부터 훑어내려 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혀 위험한 상황에 빠지지 않고 충분히 안전하게 채취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기가 차지할 수 있는 만큼 정해놓고 사는 게 삶의 지혜라는 말입니다.
때로는 인생을 살다가 가난과 시련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이 주신 영적 은혜들을 기억하면서 잘 인내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전의 축복을 주시고 두고두고 보상해 주십니다. 욥을 보십시오! 극한 시련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욥1:21~22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그한 시련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켰던 욥을 하나님이 결국은 회복시치시고 갑절의 축복으로 갚아주셨습니다.
하박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궁핍한 상황 가운데 처음에는 원망과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적으로 구원해 주셨음을 깨닫고 노래합니다. 합3:17~18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그리고 혹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시면 잉여축복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헌신하면 됩니다. 그러면 인생에 영원한 영광이 됩니다. 딤전6:18~19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부해도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고, 가난해도 인내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대로 자족하고 주의 일에 헌신하는 삶! 이게 바로 아굴이 평생 소원하던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저마다 여러 가지 소원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것을 위해 도전하고 노력합니다. 기도도 합니다. 그 소원들이 우리 인생의 내용과 가치를 결정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떤 소원을 갖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본 대로 아굴의 평생 소원 두 가지를 나의 것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평생 행복한 인생, 두고두고 후회 없는 영원히 존귀한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지혜자의 두 가지 소원
잠 30:7-9 / 인명진 목사
구약성경 열왕기 상 3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된 후에 기브온에서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일천번제가 끝날 때 즈음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내 소원이 뭐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언젠가 저에게도 하나님께서 꿈속에서 나타나셔서 “네 소원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솔로몬에게 일어났던 일이 저에게 안 일어나리란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제가 몇 년 전에 천일 새벽기도를 드렸으니까 솔로몬에게처럼 저에게도 하나님이 나타나실 것이라 생각하고 저녁 마다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네 소원이 뭐냐?” 물어보아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물론 아직까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앞으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혹시 하나님이 저에게 나타나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하는 생각을 제 마음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안 타나나시면 할 수 없지만 혹시 나타나셔서 물으신다면 뭔가 대답을 준비하고 있어야지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엉뚱한 대답을 하면 어떻게 할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하나님께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실 때 아무렇게나 대답하지 않으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꿈속에 나타나셔서 네 소원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할지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 일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저녁에라도 여러분에게 찾아와 “네 소원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잘 대답해야 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두메산골에 노인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산비탈을 일구어 밭을 만들고 산골에서 나무를 해다 팔아 필요한 것을 구입하여 살아가는 가난한 부부였습니다. 하루는 이 할아버지가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산신령을 만났습니다. 그 산신령께서 “나는 너처럼 착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주는 요술 방망이를 선물을 주려고 하니 받아라.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는데 소원은 딱 두 개만 말해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할아버지가 이 이야기를 듣고 너무 기뻐서 지고 갔던 지게와 낫을 다 내버리고 헐레벌떡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지게도 낫도 없이 “할멈, 할멈...”부르며 집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를 본 할머니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습니다. “아니, 지게와 낫은 어디에 내버리고 뛰어오는가? 미친 영감이 아닌가? 나무를 해다 장에 가서 팔아야 보리쌀이이라도 팔아 저녁상을 차릴 것이 아닌가?” 하고 할아버지에게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화가 난 할머니는 소리만 질러댔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기가 막혔습니다. 자신은 그래도 할머니와 상의하려고 달려왔는데 이 미련한 할멈이 그까짓 지게와 낫을 놓고 왔다고 삿대질을 하며 무슨 말을 하려고 들으려고 하질 않는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화가 나서 같이 소리를 지르니 할머니도 질세라 더욱 소리를 지릅니다.
참다못한 할아버지가 “이놈의 여편네, 저 주둥이 좀 닥치게 입 좀 비뚤어져라.”하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정말 할머니의 입이 비뚤어져서 잔소리는 그쳤습니다. 더 이상 소란은 나지 않았지만 문제는 할멈의 입이 비뚤어져서 밥을 먹지도 못하고 침만 질질 흘립니다. 화가 나서 그렇게 했지만 평생 자신만 믿고 고생하던 조강지처가 입이 비뚤어져서 말도 못하고 침만 질질 흘리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니 측은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하나 남은 소원으로 입을 바르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중요한 기회를 한 번은 입이 비뚤어지는 데 사용하고 또 한번은 바르게 하는데 사용한 것입니다. 이 할아버지 무엇이든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 기회를 헛되게 버리고 만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어리석기 그지없는 할머니입니다.
여러분에게 요술 방망이가 주어진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돈을 달라, 사업을 잘 되게 해 달라, 명예를 달라, 자식을 위해서, 병이 낫게 해 달라 혹시 여러분이 어디에 사용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한 가지 이야기를 더 드리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40년 전 서울 한 복판에 한 청년이 살았습니다. 이 청년에게도 하루는 꿈속에서 할아버지가 나타나셔서 “네 소원이 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청년은 뭐든 들어주겠다는 말에 이 기회를 어떻게 잘 사용할까 여러 가지를 생각하여 보다가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으니 돈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노인은 아주 간단하다고 필요한 만큼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많은 돈을 주셨습니다. 갑자기 돈이 생긴 이 청년은 마음껏 무엇이든지 다 했습니다. 자본주의에서 돈의 위력은 막강했습니다.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한참을 이렇게 잘 살던 이 청년은 문득 돈 가지고 안 되는 것도 많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돈으로 살 수 없고 흐르는 시간을 돈으로 붙잡을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돈 가지고 하루를 25시간 26시간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돈이 많다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 큰 짐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돈 때문에 괴로운 일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돈을 잃어버릴까 불안하고 초조하고 누구에게 빼앗길까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돈으로 사람을 사서 집을 지키기는 했지만 그래도 도둑이 들까봐 걱정이 되어 밤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돈의 노예가 된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옛날에 나타난 노인이 꿈속에 다시 나타나 “한 가지 소원을 더 말해보아라. 그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청년이 여러 가지 생각할 필요도 없이 대답했습니다. “저를 옛날처럼 가난하게 그러나 마음 편했던 때로 되돌아가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그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합니다.
이 사람도 자신의 인생에 찾아온 소중한 두 번의 기회를 이렇게 사용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질문입니다.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무슨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이 이야기 주인공 청년이라면 무슨 소원을 말할 것입니까?
오늘 본문 잠언 30:7-9에는 지혜자가 간구했던 두 가지 소원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두 가지 소원을 말한 사람이 솔로몬이었을 것으로 해석합니다. 솔로몬은 21살에 왕이 되었습니다. 기브온에서 일천번제를드렸고 하나님께서 소원을 물어보시자 지혜로웠던 솔로몬은 지혜를 달라고 말했고 하나님께서 이를 가상히 여겨 지혜 뿐만이 아니라 명예도 주셨고 재물도 주셨고 권세도 주셨습니다.
첫 번째로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소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살았던 진실한 삶의 모습만이 영원히 사람들의 마음에 남겨지는 것이고 사람들을 감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많은 사람들이 거짓으로라도 명예를 얻고자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엇을 가져보려고 죽을 때까지 욕심을 부립니다. 이제는 그만 깨달을 나이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짓밟고라도 권력에 오르려고 합니다. 추악한 모습입니다. 얼굴에 욕심과 탐욕과 거짓과 술수가 가득합니다. 진실하게 살려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허황된 욕심에 빠져서 죽을 때까지 추악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솔로몬의 마지막 소원은 그 허망한 욕심을 다 버리고 거짓 없는 진실된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그렇게 살았지만 후회스러운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죽기 전에 진실된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 솔로몬의 마지막 소원이었습니다.
사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정치의 중심에 서있던 사람입니다. 형식과 제도의 상징인 기득권자였습니다.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 때로는 권모술수도 썼을 것이고 사람을 속이고 이용하고 죽이고 거짓으로 백성들을 속였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정치도 외교도 성공했고 나라가 부강했고 자신의 자리를 튼튼하게 했지만 마지막에 모든 것이 다 헛되다고 고백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인생의 영원한 가치는 진실입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 앞에서도, 하나님 앞에서도 욕심을 버리고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 죽기 전에 이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했습니다. 이것이 솔로몬의 첫 번째 소원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솔로몬의 소원은 8절 하반절에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입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솔로몬의 이 소원은 우리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소원입니다. 우리들의 소원은 죽을 때까지 어떻게 하든지 더 가지려고 합니다.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하는 말이야 소원이 될 수 있지만 부하게도 마옵시고 가 어떻게 소원이 될 수 있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부자가 되기를 소원하는 것이 우리들 모두의 삶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죽기 전에 부하게 말아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가는 우리에게, 지금 가진 것도 모자라서 죽을 때까지 욕심을 부리는 우리들에게 내 생전에 부자가 되지 말게 해달라는 말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유대인의 삶의 지혜를 담은 탈무드에는 8가지 삼가야 할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여행이 지나치면 안 됩니다. 바깥바람 너무 쏘이지 말고 집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친구가 많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실한 친구 두세 명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일이 많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을 즐겁게 해야지 일에 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빠서 죽겠다는 사람은 인생을 잘못 사는 사람입니다. 다섯 번째 술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이 술을 먹어야지 술이 사람을 먹으면 안 됩니다. 잠도 많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잠도 지나쳐도 안 되고 모자라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명예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에게 알맞은 자리와 이름과 명예가 있습니다. 지나치면 안 됩니다. 제가 때때로 생각하는데 목사가 될 사람이 아닌데 목사가 되면 평생을 고생합니다. 장로와 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권사가 될 만한 사람이 권사가 되어야 자신도 편하고 주변 사람에게도 좋습니다. 자기에게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하면 사양해야 합니다. 약도 지나치면 안 됩니다. 약이 병을 만듭니다.
돈도 쓸 만큼 감당할 만큼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재앙은 돈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 돈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재앙이고 이 사회에 재앙입니다. 돈은 잘 쓸 줄 아는 사람이 가져야 본인에게도 유익하고 세상에도 유익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보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돈이 많아서 인생이 불행해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돈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 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돈 쓸 줄 아는 사람이 돈을 가져야지 돈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 돈을 가지면 재앙입니다. 나는 돈 쓸 줄 모른다면 돈을 내놓아야 합니다.
솔로몬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아는 지혜자였습니다. 돈을 소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첫째로 교만해집니다. 둘째로 늘 돈이 없어질까봐 걱정하고 불안해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돈이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배가 부르니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돈을 버는 것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것이 돈을 잘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모르고 돈만 벌면 돈을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돈 버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돈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돈 가진 사람들이 기도해야 합니다. “나로 하여 하나님이 주신 이 돈을 필요한 때 가장 필요한 곳에 잘 쓰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지혜있는 자의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 때 필요한 것이 있고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필요해서 가지려고 하는 것이 있고 욕심으로 가지려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분명히 알고 명심해야 할 것은 필요한 것을 가지려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심으로 무엇을 가져보려고 하는 사람은 그것을 가짐으로 인생이 불행해지고 고달파집니다. 결국 욕심의 끝은 파멸입니다. 무엇을 가져보려고 할 때 정말로 필요한 것인지 욕심 때문에 가지려고 하는 것인지를 잘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돈으로 약을 살 수 있지만 건강을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친구를 살 수 있지만 진정한 벗을 얻을 수는 없고, 돈으로 향락을 살 수는 있지만 진정한 행복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좋은 음식을 살 수는 있지만 입맛을 살 수 없고, 돈으로 좋은 침대를 살 수는 있지만 단잠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권력을 살 수는 있지만 영원한 기쁨과 생명과 구원을 살수는 없습니다. 돈은 나에게 필요한 만큼만 있을 때, 내가 잘 쓸 수 있는 능력만큼 있을 때 그 돈이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행복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만나를 주셨습니다. 하루치만 주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일 때 행복이 될 수 있지만 이틀이 되고 한달이 되고 일년이 될 때 우리에게 짐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 때 행복이 되고, 그것 이상 욕심으로 가지고 있을 때 우리에게 불행이 된다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자도 아니고 가난하지도 않고 필요한 만큼 가지려는 솔로몬의 지혜는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최고의 지혜입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인생의 최고의 비밀을 깨달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전에 하나님께 이 소원을 꼭 들어달라고 한 것입니다. 가난하게도 마시고 부하게도 마시고 필요한 만큼 달라고 한 것입니다.
제가 제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제 마음속에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면 나머지는 다 나누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원칙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내가 필요한 만큼 하나님이 주시면 감사한 일이고 더 이상 주시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쓰고 안 주셔도 그만입니다. 안 주시면 안 쓰면 됩니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헛된 욕심이 없는 진실된 삶, 가난하지도 부하지도 않고 필요한 것만 가지는 삶, 여러분 이것이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솔로몬이 누구입니까? 최고의 지혜자입니다. 이 사람이 깨달은 인생의 지혜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무슨 소원을 간구하시겠습니까? 지혜자 솔로몬이 간구했던 이 두 가지 소원이 여러분의 소원이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큰 행복이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재물이 주는 든든함과 희열을 경계하라!
잠 30:7-9 / 이삼규 목사
어떤 사람이 교통을 마비시킬 목적으로 하룻밤 사이에 고속도로의 표지판을 모두 제거하여 버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그 다음 날 아침에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이 속출할 것입니다. 위험한 곳을 알려 주는 표지판이 사라졌으니 사상자가 무수히 발생할 것입니다.
위험한 표지판이 있으면 굳이 그 위험한 곳까지 갔다가 다시 유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표지판이 있는 도로에서는 굳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운전할 필요가 없는데 위험한 곳을 쉽게 인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평소에 다니는 길은 긴장을 하지 않고 운전합니다. 어디에 가면 뭐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보지 않은 길을 갈 때는 항상 긴장해야 하고 표지판을 잘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위험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고속도로에 있는 표지판을 제거하거나 무시하면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험과 피해를 안겨주게 됩니다. 남들 앞에서 ‘나는 성경을 믿습니다.’라고 공언하지만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성경의 교훈을 무시하는 사람은 불신앙의 공공연한 천명보다 더 교묘하게 말씀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죄는 우리 모두가 쉽게 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죄에 빠지지 않게 지혜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성경의 교훈을 무시할 의도가 없는 사람조차도 그런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잘못은 그리스도인이 가는 길에 놓여 있는 위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인생의 고속도로에 있는 표지판을 치워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번영이 가져오는 자기 합리화
인류의 역사, 국가의 역사 그리고 교회의 역사를 연구해보면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납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람들은 다른 믿을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을 정확히 꿰뚫어보아야 합니다. 현실을 조작하거나 왜곡하지 말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다른 믿을 것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보다 그것을 향해 가면서 입술로는 “나는 하나님을 믿지 다른 것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말은 그럴 듯하지만 사실은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번영을 주셨을 때 그 번영은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신 32:17-20 /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 너희의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것들이로다 18)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 1)9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보시고 미워하셨으니 그 자녀가 그를 격노하게 한 까닭이로다 20)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임이로다
여기서 ‘패역한’이라는 말은 수치를 모르고 뻔뻔하고 놋쇠처럼 목이 곧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진실함이 없는 자녀’였습니다. 그들은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럴듯한 말을 했을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그런 합리화를 위해 잡지에 글을 쓰고 이런저런 위원회를 만들어냈을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이다.”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새로운 신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신앙의 퇴보에 빠지게 되는 부자(富者)
그렇다면 신약시대에는 어떠했을까요? 무슨 변화가 생겼을까요? 대략 주전 1450년부터 주후 50년까지의 기간 동안 인류가 변했을까요? 그동안 그리스도께서 오시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사 다시 하늘의 아버지께로 올라가시고 성령을 보내시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 엄청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변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께 받아 라오디게아 교회에 써 보낸 말씀을 읽어봅시다.
계 3:14-18 /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여러분은 이 말씀이 가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19-20)라는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교회는 영적으로 볼 때 라오디게아교회와 또 같습니다. 말세의 부자교회는 재정적으로 넉넉해지고 멋진 교회 건물을 짓지만 구주께서는 밖에 서서 안으로 들어오려고 애를 쓰십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담임목사님이 노숙자로 변신하여 교회 예배에 참석하였답니다. 그런데 안내 위원들이 노숙자인 목사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성도들을 안내해주는 것처럼 안내해 주지 않고 무관하거나 심지어는 경멸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때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가시니 성도들이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지금도 주님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데 문을 열어 주지 않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어떤 어리석은 부자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눅 12:18-20 / (한 부자가)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성경의 교훈에 따르면, 아무리 정당하게 얻은 재물이라 할지라도 재물에는 위험이 따른다는 교훈을 줍니다. 요즘 주일 오후에 김미진 간사님의 재정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들은 강의 내용 가운데 중요한 세 가지를 꼭 기억해야 합니다. 1)재물의 노예가 되지 말고 재물을 노예로 삼자! 2)재물을 보물로 삼지 말고 관리를 잘 하자! 3)장막훈련을 하자-단순한 생활을 하자! 오늘 오후에 네 번째 강의를 들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재물을 노예로 삼을 것인지를 배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재물이 주는 위험입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물질이 주는 악순환에 빠지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교회가 비대해지면 자연적으로 들어오는 헌금도 많아지고 그렇게 될 때 돈을 의지하게 됩니다. 돈을 의지하게 되면 즉시 영성과 검소함과 근면과 정직과 선함을 잃어버리고 신앙의 퇴보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나라 문제가 있는 대형교회들을 보면 언제나 재정과 관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악순환입니다. 지난 주간에 교회갱신협회에서 수련회를 했는데 서울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님께서 목사님들에게 대형교회 목회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대형교회는 성도들이 교회 사정을 다 모르고 우민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정 비리도 생기고 시험에 빠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면 검소하고 절약하고 정직하고 근면하고 진실해지기 때문에 부자가 되지만, 부자가 되면 신앙의 퇴보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것이 일종의 악순환입니다.
존 웨슬리는 그런 악순환에 빠지지 않았는데 그의 지혜를 들어봅시다.
“나는 해결 방법을 찾았다. 정직하고 경건하고 근면하고 검소하라. 그렇게 해서 최대한 많이 모아라. 그런 다음 그것을 전부 다른 사람이나 단체에 기부하라. 그러면 신앙이 퇴보되지 않을 것이다. 최대한 많이 벌어라. 최대한 많이 저축하라. 그리고 최대한 많이 베풀어라.”
웨슬리는 자기 말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의 평생 동안 잉글랜드 사람들은 그의 집회에 많은 헌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었을 때 남긴 돈은 당시 영국 화폐로 28파운드였습니다. 달러로 환산하면 130달러 정도였습니다. 83년을 이 땅에서 살다가 그가 남긴 것이 고작 130달러였습니다. 그는 유언장을 작성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130달러는 그의 장례비용으로도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많은 재물이 주어지면 매우 위험합니다. 졸지에 부자가 된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어떻게 생활합니까? 좋은 집을 사겠지요, 그리고 새 차를 뽑겠지요. 그리고 여행을 다니거나 유흥을 즐기겠지요.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점차 신앙생활이 퇴보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을 사용해야 하니까 여행도 해야 하고 유흥도 즐겨야 하다 보니까 시간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배를 한 번 두 번 빠지게 되고 그러다가 점차 신앙이 퇴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물질의 축복은 그에게 축복이 되지 못하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번영의 덫에 걸리지 않으려면?
번영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부 가난하게 살아야 할까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하다면 해외 나가 있는 선교사님들을 누가 후원하겠습니까? 기독교 방송이나 기관들을 누가 후원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모두 가난한 것은 그분의 뜻이 아닙니다. 그분의 백성이 번영을 누리면서도 번영의 덫에 걸리지 않는 것이 그분의 뜻입니다. 번영을 잘 관리할 수 있는 방법 세 가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첫째,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라!
월급이 오르거나 수입이 늘어나면 반드시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물질의 복이 모든 선한 선물의 근원이신 ‘빛의 아버지’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나누고 베푸는 삶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물질을 노예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오후에 배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이 녹슬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삶을 실천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영혼이 녹슬고 부식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여러분의 양심이 편해지려면 너그럽게 베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입은 늘어나지만 영혼을 쪼그라들 것입니다.
셋째, 조심스럽게 행하라!
수입이 늘어날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너그럽게 베풀어야 할 뿐만 아니라 조심성을 발휘해야 합니다.
눅 21:34 /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주님의 이 말씀은 번영의 때에 닥칠 수 있는 위험에 대한 경고입니다. ‘방탕함’은 과식에, ‘술취함’은 음주와 연관이 있습니다. ‘생활의 염려’는 수입이 적을수록 근심이 적어지고 수입이 늘어날수록 근심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날이 덫과 같이 임할 것입니다.
눅 21:35-36 /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주님의 말씀은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이어질 수 있는 번영에 취하여 주님의 날에 대비하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라는 절박한 경고입니다. 그분의 경고를 무시하는 사람에게 그분의 날이 마치 불쌍한 동물을 꼼짝 못하게 하는 덫처럼 임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번영의 위험을 피하고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역경의 위험에서 벗어나라!
번영의 위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경의 위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잠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잠 30:8-9 /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실제적 교훈을 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역경이란 것은 재정적으로 궁핍해지거나 육체적 질병에 시달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금전적 곤경은 번영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지만 우리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특히, 번영 다음에 찾아오는 재정적 역경은 더욱 그렇습니다. 돈이 없었던 사람은 더 나빠질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번영을 누리다가 상황이 나빠진 사람들에게는 금전적 궁핍이 더욱 위험한데 번영이 그를 유약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김미진 간사의 간증을 들으셨지요. 그래서 극단적인 선택까지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 존슨은 “가난해지지 않도록 노력하라. 최대한 절약하며 살라. 가난은 인간의 행복을 해치고 자유를 파괴하는 적이다. 가난 때문에 어떤 미덕들은 실행에 옮길 수 없게 되고 또 어떤 미덕들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너무 가난하면 우리는 낙심하고 병들고 약해지고 일찍 늙어버립니다. 번영을 누리다가 갑자가 몰락한 사람들을 보면 분노를 폭발시키기 쉬운데 유약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잘 나가면 사람은 유약해지는 법입니다.
번영과 역경의 사자를 피하는 방법
번영은 살찐 사자요, 역경은 굶주려 야윈 사자입니다. 살이 쪘든 야위었든 사자는 사자입니다. 두 사자 모두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위험한 사자를 피할 수 있는 네 가지 지혜를 살펴봅시다.
1)세상의 물질에 완전히 초연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재물의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장막훈련이 필요합니다. 단순한 생활을 연습해야 합니다.
2)세상 철학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라!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면 안 됩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사로잡히지 말고 하나님의 가치관을 붙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신다면 그 밖의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주어질지라도 해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분을 무시하면 그 어떤 것이라도 여러분에게 해가 될 것입니다.
3)우리는 순례자라는 것을 인정하라!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잠시 왔다가 돌아가야 하는 나그네 즉 순례자입니다. 새로 비유하자면 우리는 철새와 같습니다. 무한한 창공에서 철새의 비행을 인도하시는 분이 우리의 순례의 길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인도를 잘 받는 사람은 그분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가 넘치는 땅에 도착할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물질적으로 넉넉함을 누리고 계십니까? 아니면 궁핍과 역경을 당하고 계십니까? 재물이 주는 든든함과 희열을 맛보고 계십니까? 아니면 재물이 없어 곤란을 당하고 계십니까? 잠언 기자의 간구가 여러분의 간구가 되시기 바랍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현대인의 우상 - 물질
잠 30;7-9, 막 10:17-22 / 이정익 목사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10월은 종교개혁의 달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10월 한 달 동안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바로잡고 영적 불순물들을 제거하는 기간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살면서 싸우고 투쟁하여야 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여기서의 투쟁은 싸우기 위한 투쟁이 아니고 바로잡기 위한 투쟁입니다. 잘못된 습관, 잘못된 관행들을 고치려는 투쟁입니다. 종교개혁은 개혁을 위한 개혁이 아니고 잃은 길을 회복하고 바로잡자는 개혁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한 달 동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야 할 일들에 대해서 말씀드리려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우리 앞에 놓여있는 최대의 우상과 싸우는 일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대의 가장 큰 우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 앞에는 우리들이 감당하기 어렵고 모든 사람들의 정신을 빼 놓을 만큼 큰 우상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검은 것을 희게 하고 추한 것을 아름답게 하고 늙은 것을 젊게 하는 힘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또한 “늙은 과부에게 젊은 청혼자들이 모여들게 하는 힘을 가진 것”이라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돈입니다.
이 돈이 오늘 현대인들의 최대의 우상입니다. 이 돈은 굉장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돈에 사족을 못 씁니다. 목회도 선교도 이 돈이 없으면 어렵습니다. 현재 한국교회의 해외선교사 파송이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인데 그것도 우리나라가 경제발전을 이룬 것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돈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돈이 사람을 압도하기도 합니다. 돈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신처럼 섬기고 떠받들게 만듭니다. 어느 젊은이는 내가 성공하고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벌수만 있으면 마귀에게 내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말했습니다. 아주 섬뜩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그냥 해본 소리가 아닙니다.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부모를 죽이는 일들이 일어나는 이 시대에 누군가에게 그런 제안해 보십시오.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이렇게 오늘은 모두 성공과 돈에 정신을 팔고 살아가는 때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신학에서도 일명 “돈의 신학”이라 불리는 “번영신학“(health and wealth theology)이라는 것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마태는 이 사람을 청년(마19:20)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누가는 어떤 관리(눅18:18)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젊은 사람으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바리새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께 찾아와서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하고 질문하였습니다. 참 좋은 질문입니다. 내용도 주제도 관심도 참 좋습니다. 사람들이 영생에 대해서 관심 갖기가 어려운 법인데 더구나 젊은 사람이 그랬다니 그는 아주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21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그 젊은이에게 관심과 애착을 가지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젊은이에게 계명들을 지키라(19)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젊은이가 “나는 계명들을 이미 다 지켰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젊은이는 범상치 않은 대단한 젊은이 입니다. 젊은이가 절도가 있고 규칙이 있는 엄격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젊은이에게 예수께서 정중하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네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어, 네게는 너무 재물이 많아. 재물이 많으면 영생을 얻기가 어려워, 많은 재물은 영생을 얻는데 장애가 되거든, 그러니 그것을 나누어라, 구제하라, 기부하라(21).” 그랬더니 본문 22절을 보면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그냥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많은 재물은 영적인 삶을 병행하기가 어렵게 만듭니다.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애착을 갖게 하고 이생을 집착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특별히 말씀하셨던 것인데 그 젊은이는 예수님의 염려대로 그 벽을 넘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물질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물질은 영적 생활을 하는데 지대하게 영향을 미칩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욕심을 크게 만들고 집착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영적 생활을 빗나가게 하고 외면하게 하고 영적 목표를 잃어버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물질에 대해서 아주 냉철하게 지적하며 경계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나 교단이나 신앙인들이 이 물질로 인하여 많이 오염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교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도 물질과 재물에 대해서 아주 민감합니다. 그래서 높은 이자를 받으려고 이자 많이 주는 곳으로 몰려갑니다. 오늘 각 교단의 자금 운용 담당자들도 조금이라도 이자를 더 주는 곳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서 상담해 보면 의외로 상담자들이 성경의 원칙에 따른 투자가 좋다고 조언을 해 준다고 합니다. 그러면 투자자들이 반응이 싸늘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카지노 회사에 투자하면 이자가 많다던데, 술 회사 담배회사가 수익성이 높다던데” 하며 은근히 그쪽에 투자하면 어떠냐고 반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모두가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모든 삶의 기준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법칙과 안내와 지침을 따라야 합니다. 돈이 더 벌려도 성경이 제시하는 뜻을 생각해 보고 투자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화를 당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돈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의 주인 하나님
인간은 소유권을 주장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청지기일 뿐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 인생을 맡은 인생의 청지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인생을 주셨습니다. 그 인생을 잘 관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이 올 텐데 그때 하나님은 나에게 “너는 인생을 어떻게 살았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 대답하기 위해서 삶을 살아야 하는 청지기들입니다. 또 우리는 시간을 맡은 청지기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아껴서 사용해야 합니다. 게으름, 허송세월은 죄입니다. 그것은 마치 달란트를 땅에 묻어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물질을 맡은 청지기들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우리에게 잠시 맡겨 놓으시고 그 물질을 선용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그 물질을 마구 사용하고 사치하는 것은 죄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십일조를 바치라고 강조합니다. 모든 것이 내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십일조를 드린 후 나머지 90%는 내 마음대로 사용해도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나쁜 데만 쓰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사용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물질은 하나님이 내게 맡겨 놓으신 것이라는 청지기 정신에 따라야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 부작용이 바로 사치와 과소비입니다. 이 사치와 과소비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사치나 과소비는 인간의 정신과 생활과 의식과 마음과 신앙을 병들게 합니다.
과소비로 인해 병들고 실패한 인생을 산 사람의 대표가 바로 솔로몬입니다. 열왕기상 10장을 보면 솔로몬은 왕궁을 꾸미기 위해서 외국으로부터 사치품들을 무작위로 수입했습니다. 그 사치품들의 품목들이 “향품, 금은보석, 백단목, 상아, 원숭이, 공작, 갑옷, 말, 노새 등등”이었습니다. 또한 나중에는 금을 수입해서 그 금으로 방패를 만들고 무기를 만들었습니다(10:14). 그리고 자기 보좌를 금으로 입혔고 왕궁의 식기들조차도 모두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찌감치 금을 많이 쌓아놓지 말라(신 17:17)고 하셨습니다. 금은 사람들의 마음을 허황되게 만듭니다. 정신을 현혹합니다. 솔로몬은 그 명령을 어겼습니다. 왕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니까 백성들도 따라서 타락하여 온 나라가 사치와 과소비로 물들어 갔던 것입니다. 정신이 병들고 생각이 병들면 사치는 더 과감해집니다. 솔로몬은 마침내 애급에서 말을 수입했습니다. 또한 외국에서 여인들까지 수입해 왔습니다(왕상 17:6-17). 외국에서 여인들을 수입해오면 여인들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그 나라의 우상들도 따라서 들어왔습니다. 그 결과 나라에 우상이 넘쳐나게 되고 영적으로 음란하게 되어 결국 나라 전체가 영적으로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 말기에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한지 겨우 50년 만에 아들 솔로몬이 그 나라를 남북으로 두 쪽으로 갈라놓은 것입니다. 물질 앞에서 청지기적 의식이 서 있지 않으면 이렇게 타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물질에 대해서 아주 무섭게 경고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인생도, 내 생명도, 내 몸도, 내 영혼도, 내게 주어진 물질도, 내 자식도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주신 것을 지키고 선용하도록 부름 받은 청지기들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물질 때문에 시험 들지 않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치하고 과소비하려는 내 인간적 마음과 심각하게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경건한 신앙의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부자되기 원치 않으심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부자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가난에 찌들어 살고 동정 받는 삶을 원치도 않으십니다. 그래서 잠언 30:7-9절을 보면 “우리로 부하게도 마시고 가난하게도 말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부하면 하나님을 부인할까 함이요 너무 가난하면 하나님을 잊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부자 되게 하신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성경구절을 잘못 해석해서 부자 되게 하신다는 오해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성경이 시편 37편의 말씀입니다. 4절을 보면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리하면 네 소원을 이루시리라”고 하십니다. 여기 “네 마음의 소원대로 이루시리라”에서 “마음의 소원대로”는 나로 하여금 성공하고 부자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에 나오는 소원은 “내가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이 내 삶에 임재하시기를 원하는 소원”을 뜻합니다. 본문은 그 소원을 이루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또 역대상 4장 10절을 보면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소위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거기에 보면 “야베스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은 땅을 넓게 하시고 나로 부자가 되게 해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이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또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7장 7절에 보면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구절은 우리들이 하나님께 물질을 구하면 채워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물질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 중에 물질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때로 물질을 주시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물질은 영적인 성장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서 주신다는 것이 물질이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겠다고 약속은 하셨는데 우리에게 부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구절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부자가 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아주 쉽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자가 되게 해 주시면 헌금을 많이 하고 선교헌금도 많이 하면 좋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우리 인간적인 생각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언제나 매부 좋고 누이 좋고 식입니다. 그래서 나도 좋고 하나님께도 좋지 않느냐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편의적으로 생각하시지 않으십니다. 선교헌금은 꼭 부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부하다고 다 하나님께 선교헌금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가난하다고 선교에 무관심하거나 선교헌금 안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하거나 가난하거나의 문제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돈을 가지면 탐욕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이 탐욕 앞에서 자유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물질 때문에 타락하고 탐욕하게 되는 것은 물질을 마음대로 사용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 탐욕은 마침내 그 사람을 올무에 걸리게 만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이 무섭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는 경고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물질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물질 앞에서 탐욕으로 우상이 될 것임을 경고한 것입니다.
성경의 제안
그래서 성경은 물질을 사용하는 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족하라, 구제하라 나누라는 제안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이 영생을 질문하던 젊은 관원에게 그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보상은 종말 때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족과 구제,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물질 사용법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생활은 나 자신부터 철저하게 자족하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 생활에 침해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 때문에 시험 드는 일이 없도록 물질 관리에 신중하고 탐욕을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시대에는 이자 받는 것까지 반대했습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각 지파들이 모두 내 형제들이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이자를 받으면 탐욕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 탐욕이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은 이 비싼 이자 때문에 욕망의 덫에 걸립니다. 사채에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중학생들도 학교에서 사채놀이를 한다고 합니다. 어느 학생은 만원 빌리고 15만원을 갚았다고 하니 오늘이 비상식의 시대인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은 투기를 조심해야 합니다. 주식에 한번 투자하게 되면 온 정신이 거기에 몰두하게 되고 깊이 빠지게 됩니다. 그 때로부터 내 마음, 생활, 관심, 삶과 목적 전체가 그 주식에 매이게 됩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주식에 따라 울고 웃게 되고 하루 종일, 잠을 자도, 예배 시간에도 정신이 모두 거기에 쏠리게 됩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구약시대에는 물질관리 방법으로 구제에 힘쓰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도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제가 이기적인 삶을 버리게 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구제가 하나님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삶을 실천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 예수님은 젊은이에게 나누라고 하신 것입니다. 벤 위더링턴(Ben Witherington) 이라는 사람이 “예수와 돈” 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은 오늘의 신앙인들이 물질을 잘 사용하는 방법을 몇 가지로 제시하였습니다. 첫째 과소비문화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필수품과 사치품이 무엇인지 목록을 정해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구제에 힘쓰고 직접 사역현장에 뛰어가 보라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재물이 충분히 있다면 나머지는 하나님 일에 헌신하라고 권고하였고 넷째는 돈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희년을 선포하고 희년에는 과감하게 빚을 탕감하고 무이자로 빌려줘 보라고 제안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싸워야 할 것이 참 많습니다. 가장 먼저 싸워야할 대상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탐욕부터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영적 생활이 깊어지고 맑아지며 신앙이 순전하게 깊어질 것입니다.
죽기전에 구할 두 가지
잠 30:7-9, 약 3:13-18 / 이성희 목사
만일에 지금 한 가지만 구하라면 무엇을 구할 것입니까?
구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잠언서의 현자는 자신의 구할 것으로 현실적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가장 큰 소원이 무엇인가로 내 자신을 평가받습니다. '여호와가 누구냐' 라는 질문은 '무엇 때문에 여호와가 내게 필요한가?'라는 질문과 같은 뜻입니다. 바른 것을 구하여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괴테는 "내가 하나님께 구할 이대 소원은 청순한 마음과 위대한 사상이다"라고 하였습니다.
1. 허탄과 거짓말을 멀리하소서.
현인의 첫째 소원은 허탄과 거짓말을 멀리 해 달라는 것입니다. 허탄과 거짓말이란 허무함과 거짓말, 거짓과 거짓말하는 것, 악함과 거짓말 등으로 해석되는 말입니다. 즉 진실한 마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 는 사람은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시편의 기자는 자신의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은 허탄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들의 부어만든 우상은 바람이요 허탄한 것뿐이라고 합니다.
거짓말에는 세 가지가 있답니다. 보통 거짓말과 못된 거짓말과 그리고 통계 숫자라고 합니다. 세상에는 허탄한 것과 거짓된 것이 너 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때에 허탄과 거짓말을 멀리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이어야 합니다.
2. 가난하게도 마시고 부하게도 마소서.
현인의 둘째 소원은 가난하게도 마시고 부하게도 마시라는 것입니다. 현 명한 사람일수록 일용할 양식을 갖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에 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매일의 양식을 달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40년 동안 주신 것 은 일용할 양식인 만나였습니다. 만나는 하루의 양식이었고 욕심으로 많이 거둔 자는 벌레가 생겨서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정직한 방법으로 얻어진 수입으로 적당하게 사용하면서 사는 생활에 만족하겠다는 것이 현인의 생각 이었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신앙생활의 진수입니다. 사람들은 배가 부르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합니다.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라고 하였습니다. 가난하여 도적질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장발장이 그랬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실수를 피하려면 나의 소원은 무엇인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매일 소원이 몰려 올 때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굴의 기도
잠 30:7-9 / 방원철 목사
요즘 기독교 서점에 가면, 기도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물론 기도에 관한 책들이 많은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요즘 「누구의 기도」, 「누구의 기도」 하는 제목의 책들이 많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아마도 「야베스의 기도」란 책이 일등공신일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란 책이 출판된 후에, 이 책이 워막 반응이 좋아서, 출판사들이 앞 다퉈서 「누구의 기도」란 제목의 책을 출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의 기도」「예수님의 기도」등 기도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은 워낙 유명한 분들이라서 그런지, 저도 그 책들을 사보기는 했지만, 저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나온 책 가운데 저의 주목을 끈 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이 바로 오늘 설교의 제목과 같은 「아굴의 기도」란 책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아굴의 기도에 관해서 생각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에게 하나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기도' 하면 누가 떠오르십니까? 이렇게 질문하면, 주로 많이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 순위를 매기면, 대개 다음과 같은 기도가 앞 순위를 차지할 것입니다.
1. 야베스의 기도(복을 구함) - 대상 4:10
2. 솔로몬의 기도(지혜를 구함) - 왕상 3:4~15
3. 한나의 기도(자녀를 구함) - 삼상 1:9~17
4. 히스기야의 기도(병낫기를 구함) - 왕하 20:1~11
5. 엘리야의 기도(비를 구함) - 왕상 18:41~46그러면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아굴의 기도는 몇 번째나 될까요? 아마 모르긴 해도 순위에 들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아굴의 기도는 야베스의 기도나 히스기야의 기도 못지않게,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굴의 기도를 살펴보기에 앞서서, 아굴이 누구입니까? 아쉽게도 아굴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아굴의 기도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그 내용이 평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굴이라는 인물 자체가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만 우리가 그의 됨됨이를 알 수 있는 것은 잠언 30장에 그가 남겨놓은 기록을 통해서뿐입니다. 그런데 잠언 30장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그는 날카로운 관찰자인 동시에 뛰어난 상상력의 소유자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개미에게서 부지런함을 배우고, 거머리에게서 탐욕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사자의 갈기에서 제왕의 위엄을 보고, 사반에게서 협동심을 배웠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녀의 동침의 자리를 통해서 범죄의 은밀함을 보고, 종이 임금이 되는 것을 보면서 부조리한 사회상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어리석다고 여겼으며, 총기가 없고, 배움이 모자란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짐승 같다고까지 했습니다. 이런 그가 드린 기도의 내용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내용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아굴의 기도라는 사실을 잘 모른 채, 그리고 그 내용의 깊이를 잘 모른 채 했을 뿐입니다. 그러면 그의 기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의 기도의 내용을 셋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허탄, 즉 헛된 욕망을 버리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거짓말을 멀리하게 해달라는 것, 다시 말하면 정직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너무 가난하게도, 너무 부하게도 말아달라는 것, 다시 말해서 탐욕을 멀리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지금 저는 그의 기도 제목을 셋으로 요약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그의 기도 내용을 두 가지로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첫 번째 기도와 두 번째 기도를 하나로 묶어서 정신적인 문제로, 그리고 세 번째 기도는 실제적인 삶의 문제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의 기도 제목을 하나씩 좀 더 살펴보겠는데, 순서를 바꿔서 그의 마지막 기도부터 거꾸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의 마지막 세 번째 기도는 '나로 하여금 너무 가난하게도 마시고, 너무 부하게도 마시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가난의 미덕이 있습니다. 적당한 가난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지나친 가난은 우리로 하여금 도적질이나 구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게 만들고, 또 비굴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마음속에 불평과 원망의 독버섯이 자라게 하고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아굴은 지나친 가난을 원치 않았고, 그것을 기도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부요함이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여유 있게 만들어 주고, 남에게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도울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나 지나친 부는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남을 더 많이 돕는 것이 아니라, 탐욕을 갖게 합니다.
실례로 미국의 통계에 의하면, 하층민의 경우 수입의 15%를 구제금으로 낸다고 합니다. 반면에 중산층은 7%를, 그리고 연봉 10만불 이상의 상류층은 2%만 낸다고 합니다. 결국 통계가 말해주듯이, 너그럽게 베푸는 사람은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굴은 지나친 가난도 원치 않았지만, 지나친 부요함도 원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평생의 기도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결국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물질에 대한 기도를 할 때 꼭 필요한 것이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많이 달라는 속물주의 영성을 멀리 하십시오. 그러나 동시에 극단적인 금욕주의는 위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물질에 관한 말씀은 얼마 후에 더 자세히 드릴 기회가 있어서 그때 더 나누기로 하고 두 번째 기도제목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또한 그는 '나로 하여금 거짓말을 멀리하게 해 달라, 다시 말해서 정직하게 해 달라' 고 기도했습니다.
거짓말이 도처에서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습니다. 신문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주위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거짓말을 듣고, 보고, 또 우리 역시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강이 없는 곳에도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합니다. 재판정에서는 손을 들고 위증을 하지 않겠다고 해놓고도 천연덕스럽게 허위진술을 합니다. 회사 경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허위장부를 기록하고, 외박을 한 남편은 초상집에 다녀왔다고 둘러댑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하나님과 한 맹세는 사람과 한 약속보다 더 쉽게 깹니다. 성도들은 회개하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돼지우리 같은 옛 생활로 돌아갑니다.
오늘날 우리 가정과 교회, 그리고 나라와 사회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직함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어느새 우리네 성품은 정직보다 거짓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거짓의 홍수 속에서 살다보니, 정직한 사람이 오히려 융통성이 없는 사람으로 따돌림을 받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짓말을 미워하십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보십시오. 그가 그렇게 엄청난 저주를 받은 것은 물질을 조금 바쳐서가 아니었습니다. 봉사를 많이 못해서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십니까?
죄를 감추고 있지 않습니까? 재판정에서 말을 슬쩍 바꾸지는 않습니까? 이웃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 얼렁뚱땅 진실을 덮어버리지는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그는 '허탄, 즉 헛된 욕망을 갖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허탄' 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사람이나 땅, 말이나 성품 등에 두루두루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사람에게 사용되면, 근거없는 말로 사람을 현혹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땅에 사용되면, 땅이 너무 황무해서 아무 소출도 내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 단어가 말에 사용되면 그 말은 속이는 허풍을 뜻합니다.
결국 허탄을 버리게 해달라는 기도는, '그릇된 생각이나 행동을 하지 않고, 현실에 충실하면서, 하나님을 잘 섬기게 해달라는 간구인 것입니다. 자신을 과장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루하루의 삶에 충실하면서 살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말끝마다 허풍을 떠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평생 동안 하나님을 우러르며 최선을 다하는 내실 있는 신앙인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 면에서 리 기도는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현실의 문제나 고통을 부정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과 하루하루 대면하면서 살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기도를 초현실에 이르는 탈출구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면, 비현실적인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속세를 등져야만 영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면 할수록 현실적인 사람이 되고, 이렇게 현실적이 되면 될 수록 더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몽상가가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물론 꿈을 꾸지만, 그 꿈은 현실의 토대 위에서 현실을 변혁시키는 꿈을 꾸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아굴은 실제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허탄을 버리게 해달라는 그의 기도는 뜬구름 잡는 기도가 아니라, 현실과 마주 대하면서 그 현실을 극복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 땅에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허락하신 모든 문제를 지고 가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살아야 합니다. 가정과 직장, 그리고 이웃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디서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생활비 때문에 걱정하고 있습니까? 자녀가 문제를 일으켜서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까? 너무 이가 아파서 어제 한잠도 자지 못하신 분은 안 계십니까? 내 남편이나 아내, 또는 이웃집 사람이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아서 잠못 이루신 분은 안 계십니까?
우리의 기도 중에서 실제 삶과 관계되지 않은 추상적인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참된 기도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그러면 빨래하면서, 운전하면서, 일상생활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그의 이름은 '애비'
며칠 전 어느 일간신문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인천시 서구 석남동 성민병원 안병문 원장. 그에겐 아내 이미숙씨와 두 딸이 있습니다. 큰 애가 '선천성 단지(短肢)' 라는 장애를 갖고 태어난 경민이고, 둘째는 10년이나 터울진 하영이입니다.
그는 '손가락 도사'를 자처하는 정형외과 전문의이지만, 막상 자기 딸의 조그만 신체 결함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딸을 19년 만에 끝내 '작은' 피아니스트로 키워냈습니다.
물론 그러기까지는 아내의 공이 컸지만, 그 역시 자기 자신과, 그리고 세상과 소리 없는 전쟁을 벌이느라 속이 숯 검정이처럼 다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가 지난달 CD 출반 기념 독주회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딸에게 쓴 편지를 좀 소개하겠습니다.
"항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딸 경민아. 네가 있을 때만 해도 아직 쌀쌀한 기운이 남아 있었는데, 어느덧 20일이 지나 이곳은 온통 봄꽃 잔치판이구나. 하지만 아무리 진달래, 개나리꽃이 흐뜨러져도, 애비는 지금도 지난달 12일 저녁 서울 앰배서더 호텔에서 있었던 너의 CD 출반 기념회 때의 감격으로 꽉 차 있을 뿐이란다.
그날 그 자리엔 1백여 명의 하객들이 자리를 함께 해주셨었지. 그분들은 네가 피아노로 베토벤과 쇼팽을 연주할 때까지만 해도 사실 그날 행사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단다.
그저 "돈 많은 병원장이 딸에게 피아노나 시켜 또 잘난 척한다." 고 생각했다는구나. 하지만 손가락이 없는 왼손으로 피아노를 치는 너의 모습이 담긴 영상과 함께 너의 엄마가 인사 겸 설명을 곁들이자, 얼마나 놀라는 모습들이던지 …… .
나도, 그리고 네 엄마도 그동안 온갖 편견을 잘 참고 이겨내는 네가 늘 대견하고 자랑스러웠지만, 막상 여럿이 지켜보는 데서 공증을 받는다 싶은 생각에 그만 목이 울컥하더구나. 그날 네 동생의 바이올린 축하 연주도 일품이었지.
경민아, 지금도 그 때의 장면이 눈에 선하게 밟히는 것을 어쩔 수가 없구나. 따지고 보면 지금 내가 너에게 이런 얘기를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것도 세월이 우리 편에 서서 고맙게 흘렀기 때문이란다. 사실 몸이 성치 못한 너를 낳고 너의 엄마와 함께 얼마나 속상해했는지 …… .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너에게 얼굴을 들지 못하겠구나.
이왕 내친 김에 지나온 세월에 대해 얘기해보자꾸나. 너도 어렴풋이나마 알겠지만, 우리 집안은 몇 안 되는 의료명문이지. '상' 자 '호' 자를 쓰시는 너의 증조부께서는 서울의대의 전신인 관립의학교 교관으로 계시면서 초대 의사협회장을 지내셨고, 조부께서도 성심병원장을 지내셨지 않니.
그 덕에 애비는 고교와 대학을 세칭 명문이란 데를 거쳐 가업을 잇게 되었지. 1976년 대학을 마친 뒤 할아버지가 계시던 병원에서 수련의를 거쳐 서른한 살에 수련부장을 할 정도로 잘 나갔단다.
너의 엄마도 바로 거기서 처음 만났지. 그때 엄마는 부산에서 간호대학을 나와서 그 병원에 취업 중이었지.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미술을 공부하겠다면서 노르웨이로 유학을 떠났다가, 핸디캡 디자인 석사 과정을 마치고 5년 만에 귀국했단다. 우리가 82년 말에 결혼을 했으니, 7년 만에 사랑의 열매를 맺은 셈이구나.
하지만 이듬해 내가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엄마도 내 근무지를 따라 원주로 와서 살림을 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단다. 그래도 조금만 있으면 우리의 아기가 태어난다는 기대에 힘든 줄 모르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단다.
출산일이 임박해서 엄마는 내가 근무하던 병원에 입원했고, 나도 곁을 지켰지. 그런데 노산이라 그런지, 진통을 시작하고 하루가 지나도 소식이 없는 거야. 우여곡절 끝에 결국 출산을 했는데,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지.
담당의사에게 물어봐도 아무 얘기를 안 해줘서, 간호사에게 물어보았더니, 산모도, 아기도 모두 건강한데, 다만 아기 왼손이 존 작다는 거야. 아기손이니 작은 게 뭐 대수겠나 생각하고, 사내앤지 계집앤지도 모른 채 너를 찾아가 보지 않았겠니.
순간 나는 내 눈을 몇 번이고 의심했단다. 손이 조금 작은 게 아니라, 왼손이 엄지와 새끼 손가락이 한 마디만 있는 게 아니겠니. 아무리 마음을 가누려고 애를 써도, 너의 유난히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 그만 병실을 뛰쳐나오고 말았단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밖을 방황하다가 자정 무렵에야 마음을 다잡고 너의 엄마를 찾아갔더니, 엄마는 그때까지 모르고 있더구나. 용기를 내서 겨우 사실을 말해줬더니, 너의 엄마 역시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더구나.
하지만 엄마는 곧 냉정을 되찾고, "당신은 뼈를 다루는 의사이고, 나는 장애인을 위한 공부를 한 사람이니, 앞으로 이들을 위해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계시의 징표를 준 것 아니겠느냐."며 애비를 위로하더구나.
나중에 실토를 하더라만 말은 그렇게 해놓고도, 엄마 역시 속으로는 옆에 누운 아이가 내 아이였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는구나. 둘 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생각뿐이었지. 퇴원한 후에 네 외할머니가 오셔서 돌봐주셨는데, 누가 볼세라 숨겨 키우셨지. 이사도 여섯 번이나 해야 했단다. 솔직히 2년이 넘게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너무 힘들었단다.
그런데 제대가 가까워지면서, 네가 장애아가 아닌 내 딸로 보이기 시작하더구나. 그러던 어느 날, 지인의 도움으로 서울 금호동에 병원을 차렸을 무렵이니까 네가 우리 나이로 네 살 때 일거다. 갑자기 네가 엄마에게 물었단다.
"엄마, 내 왼 손은 왜 이렇게 작아?"
그때 엄마가 이렇게 대답했지.
"응, 그건 하나님이 훌륭한 일을 하라고 특별히 주신 거야."
그랬더니 너는 고개를 끄덕이더라는 얘기를 전해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 무렵부터 엄마는 너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지. 어린 나이에 온전한 손으로도 힘든데, 부족한 손가락으로 찍듯이 쳐야 하니 네가 싫어한 것도 당연하지. 그럴 때마다 '남보다 작은 손가락으로 해낼 수 있어야 훌륭한 사람' 이라며 채근하면, 고통을 참아가며 따라주던 네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단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기형아'니, '손귀신'이니 하고 친구들이 놀려댔지만, 너는 꿋꿋하고 당당하게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었지. 네가 5학년 때 전교 피아노 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을 때, 애비는 참 기뻤단다. 그러나 더 놀란 건 네가 그 불편한 손으로 손톱만한 종이학을 접어 대는 걸 보고서였지. 그래서 애비는 네가 피아니스트 대신 의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도 말리지 않았던 게다.
솔직히 98년 중3인 너를 미국에 유학을 보낸 것도 아직까지 이 사회가 장애인을 꺼리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유롭게 네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서였단다. 네가 가자마자 코네티컷 주 경연에 대표로 선발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미국이라 가능했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구나.
어쨌거나 네가 이제 의사가 되기 위해 이미 몇 군데 대학에 합격해 새로운 도전을 하겠다니, 애비는 기쁘기 한량없구나. 그래도 애비의 마음엔 대학에 가서도 피아노를 계속했으면 싶다. 너도 언젠가 얘기했듯이 피아노가 없었으면 오늘의 네가 있었겠니? 애비 마음 같아선 유명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것도 보고 싶단다.
아! 참 깜박했는데, 애비는 요즘 장애인 돕기 사업도 열심히 하고 있단다. 93년에 지금의 성민병원으로 옮겨온 뒤에 IMF 관리체제를 맞아 병원을 살리기 위해 고생하던 때, '아빠 엄마가 변했다' 는 네 말을 듣고 크게 뉘우친 덕이다.
그동안 병원 키우기에 급급한 나머지 '장애인을 위한 재단 설립'이란 당초 목표를 잊고 살았었는데, 네 덕분에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 그래서 우선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고 맘먹은 게 장애인을 비롯한 불우 이웃에 대한 무료 치료란다.
그러고 보면 애비는 정말 너를 통해 배운 게 너무 많구나. 온전한 몸뚱이를 가진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상처받은 이웃이 왜 결코 남이 아닌지, 의미 있게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된 게 모두 네 덕분이구나.
내 사랑하는 딸 경민아, 너는 바로 '나'고 나는 네 애비다. 몸 건강히 잘 있거라."
아굴의 기도는 비록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은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는 않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이 땅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상고하면서 우리도 아굴처럼 비록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은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는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양식에 대한 기도
잠 30:7-9 / 김흥규 목사
얼마 전 한국 교회에서 청부론 논쟁이 한참 뜨거웠던 적이 있습니다. 워낙 유명하다보니 저도 청부론을 주장한 숭의교회 김동호 목사님의 ‘깨끗한 부자’라는 설교 테잎을 들어보고, 또 반대 의견으로 감신대 김영봉 교수의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라는 책도 읽어 보았습니다.
청부론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기독교는 청빈론을 주장하는 유교나 불교와 같지 않아 깨끗한 부자가 되는 것을 권장한다고 주장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깨끗하게 번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겁니다.
반면 청빈론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예수님을 좇아가는 제자들이라면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가난한 삶을 자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성경에도 물질을 맘몬신으로 보며 예수님도 부자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1. 청부인가? 청빈인가?
그러면 과연 “청부론이 옳으냐? 청빈론이 옳으냐?” 이 문제는 성경을 근거로 해도 정확하게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문제는 물질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마치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두고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예수님에게 묻는 무리들과 똑같은 잘못을 번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사실 물질의 문제에 있어 자신의 깨끗함을 주장할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은 외적인 깨끗함 뿐 아니라 내적인 깨끗함까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을 때 주위에 있던 자들이 최소한 그 여인처럼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히진 않았지만 간음에 대해서 내적인 죄는 다 갖고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다만 이 문제에 대한 또 하나의 시각을 성경에 있는 한 사람을 통해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이 시간에 읽은 잠 30:은 부제에 「아굴의 잠언」이라고 씌여 있습니다.
사실 아굴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1절에 ‘야게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과 이 잠언이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라는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그저 추측하기로는 그가 대단히 지혜로운 자, 또한 깊은 신앙을 가진 자였을 것이라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내가 두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다’고 한 것을 통해 이 글이 ‘아굴의 기도’에 대해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아굴의 기도
아굴은 본문에서 두가지 기도제목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둘째는, ‘나로 가난하게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먹여달라’고 기도했습니다.
1) 첫 번째 기도
먼저 첫째 기도 제목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면 자신이 지켜야 할 근본적인 삶의 자세에 대해 허탄과 거짓말이 없는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허탄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된 것을 가리킬 때 ‘허탄’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아무런 목적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성경에 ‘허탄’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25개인데 대부분이 우상 숭배에 대한 것과 연관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딤후 4:3에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2000년전 사도 바울이 말한 ‘때’가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 현상을 보면 오늘날과 너무나 비슷하지 않습니까?
제가 어제 일자로 저희 교회 홈페이지에 ‘하나님의 교회’라는 이단에 대한 글을 올려놓았는데, 좀더 잘 정리된 글이 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인터넷 상에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실체’에 대해 정확한 답변을 해 달라고 했더니 하루에 7건의 답변이 올라왔는데 모두가 ‘하나님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자기들 선전하는 글만 올려져 있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그들의 주장을 보면서 또 그런 허탄한 말에 넘어가 좇아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또 어제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제 한 여섯 살이 되었을까? 어린 아이와 그 엄마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둘이서 ‘유행가 유행가 신나는 노래’하면서 정말 유행가를 부르는데 아이보다 엄마가 더 신나게 부르는 것을 들으면서 정말 머리가 산란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어가고 있는지? 본문에 ‘허탄을 내게서 멀리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던 아굴의 심정이 과연 이런 것이었을까?
그리고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마음에 거짓이 없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의 힘만 갖고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아굴과 같은 지혜로운 사람도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아굴과 같이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2) 두 번째 기도
사실 이 시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려고 한 것이 아굴의 두 번째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기도보다 두 번째 기도가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와 직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초두에 청부론 논쟁에 대해 말씀드렸지만 사실 청부론이면 어떻고, 청빈론이면 어떻습니까? 실제 현실에서 물질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되면 그런 것들은 모두 이상적인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 아닙니까?
그런 면에서 아굴의 두 번째 기도는 청부론이나 청빈론보다 우리에겐 더 현실적으로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기도도 세 가지 내용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첫째, 가난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진짜 가난입니다. 청빈론이 말하는 부유할 수도 있는데 스스로 가난을 택하는 것같은 그런 가난이 아니라 일자리를 잃어 월급이 나오질 않고,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나가려고 해도 버스비 없고, 몇 천원이 없어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그런 가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가난해 보셨습니까? 저는 농촌목회를 7년하면서 첫 해에 월 10만원 사례를 받았고, 매년 5만원씩 올라 마지막엔 40만원을 받았습니다만 하지만 저는 그때를 가난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돈 3만원이 없어 이장에게 모곡 대신 돈으로 바쳐야 하는 것을 식사하러 오시라는 전화를 받고도 돈이 없어 못 가고, 돈이 없어 고속도로 통행료가 없어 거저 얻다시피 한 중고차를 타고 산길을 넘다가 길 가운데서 차가 서서 고생한 기억이나, 그 중고차 때문에 운전석 옆에서 라디에이터 가열로 뚜껑이 열리며 뜨거운 물이 분수처럼 치솟아 오르고, 교인들을 태우고 구역회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차에서 불이 붙어 모두가 불을 끄느라 정신없이 뛰어다닌 것도 물론 고생도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때도 그걸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겪은 고생은 청빈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고생을 택한 것 말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정말 가난했습니다. 환경이 너무나 불우했고, 그들이 겪는 고생은 정말 고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난하지 않게 해 달라고 어려움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한 적이 많습니다.
그때 성도들 중에 한 분은 남편이 술을 많이 마셔 간경화로 죽었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4학년, 6살짜리가 있었는데 바로 옆에 이 성도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어머니가 자궁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술을 많이 마셔 중풍에 걸려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그 부모 집에 고등학교 2학년, 중학교 2학년되는 동생들이 있는데 그 아버지까지 여섯 명을 혼자 챙겨야 하는 겁니다.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살다보면 가난이 순식간에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굴은 이런 가난이 찾아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9절에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자신이 가난한 것으로 고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가난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될까봐 두려워서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정말 중요한 건 그런 것이 아니겠지만 그래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성도가 너무나 가난한 것도 덕이 되지 않쟎습니까? 물론 그럴 때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굳건한 모습을 가질 때 오히려 복음이 전해지는 계기도 되지만 아굴이 기도하는 것은 너무 가난한 것 때문에 남에게 폐만 끼치는 그런 삶을 살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간절히 기도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아굴과 같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부하게도 말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청부론을 반대하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청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럼에도 부의 좋지 못한 속성에 대해 잘 알기에 부하게도 말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실 청부는 좋은 것입니다. 다만 물질에는 자체가 갖고 있는 위력이 있어 그것이 사람의 영혼을 무너뜨릴 수 있기에 ‘깨끗한 부자’가 되기가 어려운 것이 마치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굴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9절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사람이 부요해지면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잃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종교개혁가인 마틴 루터가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은 사탄이 큰 의자에 앉아 있고, 그 밑에 졸개들이 많은 사람들을 끌고 와서 보고하는 꿈이었습니다. 그 졸개들이 하는 말이 “어느 교회에 들어가서 10년 동안 재물을 주고 복을 주고 또 교인들 가정이 잘되게 내버려두었더니 나중에는 재물 때문에 잠이 들고 사업 때문에 잠이 들고 거듭되는 축복 때문에 잠이 들어서 다 넘어지는 것을 끌고 왔다”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돈입니다.
청부론이니 청빈론이니 하는 것이 관심을 끄는 것도 돈에 대한 관심이 많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청부론을 이야기하는 김동호 목사님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그 분의 설교를 듣고 있는 돈많은 성도들은 자신들의 돈이 많은 것에 대해 변호해 주는 것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생각하는 청부는 예수님 당시의 고르반과 마찬가지로 교회에 십일조(온전한 지는 정확하지 않지만)나 헌금을 하면 나도 깨끗한 부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어떻게 부를 모았든지 그것은 중요치 않게 생각합니다. 너무나 좋은 설교도 듣는 이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아닙니까?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청부 즉 깨끗한 부자라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혹시 나의 많은 재물 때문에 관심이 주님을 떠나 세상을 향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와 금덩이 하나에 빠져버린 아간과 같은 영혼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하신 말씀이 바로 자신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먹여달라고 기도합니다.
아굴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청부도 아니고, 청빈도 아닌 중간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길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시나이 반도의 광야라고 하는 것은 척박하기가 그지 없습니다. 있는 것이라곤 모래 대신 흙 밖에 없는 사막입니다. 가끔 아카시아 나무같은 싯딤나무가 보이고 말입니다.
그 40년의 세월을 장정만 60만 인구가 매일 어떻게 생활하였습니까? 하늘로부터 만나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만나의 법칙이 무엇입니까?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거두었더라”입니다.
톨스토이가 쓴 「인간은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책에 보면 도무지 만족을 모르는 부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갖고 있는 땅도 많지만 더 많은 땅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새로운 유목지가 한창 개발중인 지역에 러시아 화폐로 1천 루블만 내면 하루 종일 자기가 걸은 만큼의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단 해가 떨어지기 전에 자기가 출발한 지점에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규정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이 사람은 흥분을 가누지 못한 채 해가 뜨자마자 기름진 대평원을 젖먹는 힘을 다하여 걷기 시작했습니다. 기름진 땅 곳곳에 말뚝을 박으면서 이 광활한 땅이 모두 자기 것이 된다는 기쁨 때문에 피곤도 모른 채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서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니 엄청난 길이의 땅이었습니다. 더 가고 싶지만 해지기 전에 출발지점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규칙을 지키기 위해 왔던 길을 부지런히 돌아옵니다. 너무 멀리 왔기에 해 떨어지기 전에 출발지점으로 돌아가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달렸습니다. 겨우겨우 출발지점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힘겹게 뛰어왔기에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을 다음과 같이 끝내고 있습니다. “머슴이 괭이를 들고 머리에서 발끝까지의 치수대로 여섯 자의 땅을 팠다. 그의 묘를 쓰기 위해. 그리하여 그를 그곳에다 묻었다”
이 부자에게 필요한 땅은 겨우 6자 밖에 되지 않는 땅이었지만 필요 이상의 욕심을 부렸던 것입니다.
아굴의 기도는 물질을 놓고 기도할 때 필요한 우리의 자세입니다. 너무 가난한 것도 문제지만 너무 부한 것이 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물질에 대해 갖고 있는 자신의 생각이 중요한 것 아닙니까?
물론 성경에 돈 자체는 문제가 없다고 해도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돤다”(딤전 6:10)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가난해도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넘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부유해도 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자가 물질에 넘어질 확률이 가난한 자가 넘어지는 확률보다 크다는 사실입니다.
눅 12:15에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느니라”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며 여러분들이 물질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들이 바뀌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물질은 하나님의 권한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얻을 수 있지만 그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그래서 아굴과 같이 물질에 대해서 지혜롭게 기도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굴의 기도
잠 30:7-9 / 박기완 목사
오늘 본문은 아굴이라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문입니다. 기도는 그 사람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아굴의 잠언'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잠언은 지혜서죠... 지혜자들이 남긴 소중한 말들을 기록한 책이 잠언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아굴의 지혜가 기록된 말씀입니다. 물론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이기 때문이지만 이것은 동시에 그가 지혜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기록된 아굴의 기도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경험도 없는 사람이... 그냥 마음가는 데로 하는 소박한 기도가 아닙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소원이 아니예요...
인생의 모든 것을 경험한 지혜자가 정말 중요하고, 정말 바라보아야 할 것을 깨닫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아굴의 기도는 우리에게 올바른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어찌보면 기도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도생활에서 승리하고 하나님께 인정받아야 합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신앙의 위인들은 한결같이 기도생활에 승리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야곱이 그렇고... 한나, 솔로몬, 엘리야, 히스기야가 그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로 승리하셔서 우리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생활을 잘 해서 기도생활에 승리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더구나 본문에 기록된 그의 소원은 마지막 소원이었습니다. 7절에서 그는... 죽기 전에 꼭 이루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냥 한번.... 이것저것 바라는 중에 가져보는 소원이 아니예요. 이것이야말로 마지막 소원이요, 결사적인 소원입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것만은 꼭 이루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기록된 아굴의 기도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소원이요, 그래서 우리 모두가 가져야할 기도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아굴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습니까?
1. 기도의 자세
1) 생각하고 한 기도
먼저 기도의 자세를 살펴보면, 그의 기도는 생각하고 한 기도였습니다.
본문 7절에서 그는 말하기를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라고 했습니다.
두 가지의 기도 제목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기도가 기도하기 전에 무엇을 구할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고 정하여 기도하였던 것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무엇을 구할런지를 먼저 생각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인은 생각한 뒤에 달리고, 영국인은 걸어가면서 생각하고, 스페인 사람은 달리고 나서 생각한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스페인 사람이 달리고 나서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하고 나서 "내가 무슨 기도를 했는가?" 하고 생각한다면 문제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먼저 생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전도서 5:2절에 보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그랬는데, 우리가 기도할 때에 신중하게 생각하고 하라는 말입니다.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마음에 소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주시기를 바라는가?" 하는 것을 미리 생각해 놓고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않게 되고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닌 준비된 믿음의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응답을 믿고 끈기 있게 한 기도
둘째로, 아굴의 기도는 응답을 믿고 끈기 있게 한 기도였습니다.
7절에 보면,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라고 했는데, 이 기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라는 말은...
① 첫째는 기도를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죽기 전까지... 계속해서 기도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가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을 쉬어서는 안됩니다.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무엘상 12:23절에서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겠다" 고 그랬습니다.
새벽기도를 하다가 쉬지 말아야 합니다. 저녁에 잘 때와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는 것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를 계속하고, 우리가 나름대로 정해 놓고 하는 기도를 쉬지 말고 해야 하겠습니다(엡6:18).
유명한 토레이(Toray)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엇을 얻기 위하여 얼마동안 기도하다가 그 기도가 성취되지 않으면 이 기도가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보다 하고서 그 기도를 그만 두는데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기도를 시작하였으면 끝까지,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8장에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비유로 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망치 말고 끈기있게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② 둘째로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라는 아굴의 기도는 응답을 믿고 간절히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는 죽기 전에 응답을 받게 될 것을 믿고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시편 94:9절에 보면,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하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수없이 많은 기도 응답의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믿는 성도가 기도하게 되고, 그렇게 기도하므로 응답을 받고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17:6절에서 "내게 응답하시겠는고로 내가 불렀사오니" 하고 고백했습니다.
시편 86:7절에도 다윗은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와같이 기도의 응답을 믿는 믿음이 있었을 때, 다윗은 기도하게 되었고 많은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를 한 이후에 응답을 받고 이렇게 간증하였습니다.
시편 34:4절에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시편 120:1절에서는 "내가 환난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아굴과 같이.... 기도할 것을 먼저 생각하고 하는 기도, 그리고 응답을 믿고 기도하는... 그런 기도의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2. 기도의 내용
1) 진실하게 하옵소서
그러면, 아굴은 어떻게 기도를 했습니까?... 본문에서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그는 진실을 구했습니다.
8절 말씀에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허탄' 이라는 말은 헛된 것, 거짓된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헛된 것과 거짓말을 멀리하게 해 달라는 말은 다시 말해서 진실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거짓말' 은 본문에서 말씀하는 거짓말과는 좀 다릅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짓말은 좀 특별한 개념이 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말이 사람의 마음속에 있으면 생각이요, 사상이고..., 그것이 입을 통해서 밖으로 나오면 말이 되고, 다시 그것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면 행동이 됩니다. 그러므로 말이 곧 사상과 행동의 중심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하나님의 생각이나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 말씀의 결과로 하나님의 행동,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각과 역사의 중심이 곧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거짓말을 멀리하게 해 달라는 말은... 그냥 거짓말하지 말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과 내 말과 내 행동, 내 인격 전체에 거짓을 멀리하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요즘에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는 무엇입니까?...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어디를 보아도 부정과 부패... 거짓이 많습니다.
경제가 부강하게 되고, 과학이 발전되어서 점점 잘 살고 편리한 세상이 된 것 같지만 그러나 진실하지가 못합니다. 진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거짓말에도 자동차 운전면허처럼 제 1종 거짓말에서 제 5종 거짓말까지 있다고 합니다.
제 1종 거짓말은 도덕적인 교육용 거짓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죠...
서당아이 셋이 길 가다가 돈 한 푼을 주웠습니다. 한 푼을 셋이서 나누어 가질 수도 없는 일이라 거짓말을 제일 잘한 아이가 갖기로 했습니다.
한 아이가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는 바람이 세어 지리산이 쓰러진다고 지게 작대기 들고 받치러 갔단다" 그랬습니다.
이어서 한 아이가 말하기를, "우리 어머니는 날이 가문다고 열 마지기 논에 오줌누러 갔단다" 하고 응수했습니다.
나머지 한 아이는 이런 거짓말을 했습니다. "우리 누나는 장마가 길다고 바늘과 실을 갖고 찢어진 하늘을 꿰매러 갔단다" 하고 말했습니다.
누가 거짓말 챔피언인지 판결을 낼 수 없자.... 서당 훈장님을 찾아가서 심판해 달라고 했습니다.
훈장님은 크게 노하시면서 "이 녀석들... 거짓말 내기를 하다니 이런 못된 놈들이 있나! 나는 평생 거짓말한 적이란 단 한 번도 없어!" 하고 말하자 엎드려 있던 세 아이가 일제히 고개를 들면서 "야! 훈장님이 이겼다. 이 한 푼은 훈장님 차지야!" 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평생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그 큰 거짓말이 제 1종 거짓말입니다.
제 2종 거짓말은 선의의 거짓말입니다. 이를테면 병을 숨겨주거나 강도에게 사실을 그대로 말하지 않는 거짓말은 제 2종에 속합니다.
제 3종 거짓말은 남을 즐겁게 해주되 그로써 자신의 이득을 노리는 저의가 내포된 것인데, 윗사람이나 권세있는 사람에게 하는 속없는 아부성 말이 모두 이 3종에 속합니다.
무지개빛 공약으로 유권자를 잘 속이는 정치가들은 거의가 제 3종 기능의 보유자들인 것입니다.
제 4종 거짓말은 사실을 빙자한 거짓말입니다.
옛날에 미국에서 해군 입대를 홍보하면서 이런 설명을 했다고 합니다.
"미국과 스페인과의 전쟁 동안 미해군의 사망률은 1천명당 9명이었지만, 같은 기간 뉴욕에서 사고로 죽은 사망률은 1천명당 16명이었다" 그러면서 이 통계를 들어 해군에 입대하는 편이 한결 안전하다고 선전했다고 합니다.
제 5종 거짓말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을 해치는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 제 5종 거짓말입니다.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또 법률적으로 절대 악이 되는 거짓말이 5종 거짓말입니다.
어느 설문 조사를 보니까, 우리나라 사람 중에 63%가 이 나라에서는 정직하게 살면 잘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진실되게 살고 올바르게 살면 손해가 되고, 피해가 오고,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슬픈 일이죠...
그러나 우리가 믿는 사람으로서 정말 가슴 아픈 것은.... 세상사람들의 거짓이 아니라, 우리 믿는 사람들입니다. 바닷물이 짭니다만 바닷물 속의 염분의 농도는 3%라고 합니다. 3%의 소금이 모든 바닷물을 짜게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3%의 정직한 사람만 있어도 우리 나라가 정직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할 때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을 당했습니다만.... 오늘 내가 이 10명의 반열에 설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거짓으로 살아온 인생은 모두 다 헛수고라는 사실입니다. 어떠한 형태였든지 간에 진실하게 산 것만이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고 그것이 내 인생입니다.
아무리 높고 화려한 인생의 집이라고 해도 거짓 위에 세워진 것이라면 그것은 신기루에 불과합니다.
교회에 다닌지 오래되고, 직분을 많이 맡았어도...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거짓된 삶이었다면 모두 헛수고입니다.
"나는 교회에 다니니까, 나는 직분을 많이 맡았으니까, 나는 오래 다녔으니까... 천국에 가겠지" 하고...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아굴은 진실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오직 진실하게 살게 하여 주옵소서!..." 이 아굴의 기도가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말고 필요한 양식으로 먹여주옵소서
두 번째는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말고 필요한 양식으로 먹여달라고 했습니다.
부가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죠... 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은 모두 부자였습니다. 욥은 동방에서도 가장 큰 부자였다고 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재벌이었습니다. 부는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또 가난이 나쁘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성경에 신앙의 위인 중에 가난한 사람들도 많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아굴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자신에게는 부도 가난도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나는 부해지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나는 부하면 교만해 지고 하나님과 멀어지기 쉬운 사람입니다. 그러니 나는 차라리 부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 말이예요.....
마찬가지로 "나는 가난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혹시 도적질할까 하오며..." 라고 했습니다.
"나는 가난하면 정당하지 않은 것을 바라며 비굴해집니다. 그러니 나로 하여금 가난하게도 말게 해 달라" 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진실성을 알려면 그 사람에게 물질이나 권세를 주어보면 안다는 말이 있지요....
가난할 때는 괜찮았어요.. 없었을 때, 낮았을 때는... 겸손하고, 열심이 있었고, 정직하고, 예의바른 사람이었는데.... 뭔가 많아지고, 부자가 되고, 권력을 얻으니까 달라지는 사람이 있거든요..
사람이 영 달라집니다. 완전히 딴 사람이 되는 그런 사람이 있지요... 교만하고, 안하무인(眼下無人) 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터무니없이 부해지기만 소원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부해져서 하나님과 멀어질런지 누가 압니까?...
부해서 교만해지고, 부해서 죄를 짓는다면... 그 부는 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또 가난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가난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다면 안되지요....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궁핍하지 않도록...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대로 족한 줄 아는 것... 이것이 복입니다. 더 부할 것 없고, 더 가난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아셔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사람의 눈과 귀와 입은 세상의 것들을 다 보고 듣고 먹어도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무엇으로 그것을 채웁니까?... 욕심대로 하면 끝이 없어요..... 땅덩어리보다 더 두터운 사람의 욕심을 무엇으로 채웁니까?...
족한 줄 아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족한 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을 존귀케 하게 하옵소서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아굴의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을 존귀히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9절 말씀에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했습니다.
기도의 중심이 무엇입니까?... 아굴은 지금, 혹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까, 너무 부하면 부해서 나무 가난하면 가난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는 않을까, 그것이 걱정입니다. 그래서 가난도 부도 말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생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살고 싶습니다. 바울의 소원처럼 죽든지 살던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히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만이 보람이요 그것만이 중요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고 남은 생애를 마치고 싶다는 것이 아굴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여러분... 아굴의 기도를 통해서 여러분은 무엇을 깨닫습니까?....
여러분의 기도와 한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뭐 엄청난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진실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진실하게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높이는 그런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내가 잘 살고 못 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존귀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이 아굴의 간절한 기도 제목입니다.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어떤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까?.... 눈을 감고 기도할 때.... 기도의 우선순위는 무엇입니까?....
무엇을 마음에 품고 소원해야 후회 없는 인생을 살겠습니까?....
먼저, 무엇을 기도할지 생각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응답을 믿고 끈기 있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굴과 같이 진실하기를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대로 만족하고 주님만 존귀히 되기를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간구할 때.... 참으로 거기에 영광과 기쁨이 함께 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도 저희들을 권고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을 바랬기에 삶이 피곤했고, 우리의 소원이 타락했었기에 우리의 삶이 이처럼 부끄럽습니다.
바라옵기는 지혜자의 마지막 소원을 우리도 배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진실이 귀한 줄을 알고, 오직 진실을 소원함으로... 후회 없는 삶을 살게 하시고....
이대로 만족함을 배워 하나님만 존귀히 되기를 소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굴의 기도가 나의 기도임을 깨달아... 다시 한번 간구합니다.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아굴의 기도
잠 30:7-9 / 손상률 목사
기도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아버지에게 다가갈 수 있는 특권을 행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성도의 신앙 행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의 기도가 신비로운 능력을 행사한다고 하였습니다(마 21:22).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지만 기도를 통하여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물이 쏟아지는 등 기적을 이루어냈습니다(약 5:17-18). 많은 사람들은 엘리야처럼 기도를 통하여 기적을 이루고 신비를 행사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기도가 마냥 기적적인 신통술의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건전한 기도는 그의 삶과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모범으로 삼아야 됩니다(마 6:9-13). 여기 아굴의 기도문도 매우 평범하면서도 의미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진실을 추구하는 기도입니다.
아굴은 자기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거절하지 마시고 죽기 전에 꼭 이루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루어지는 기도가 평생 동안 자기의 삶으로 이어질 것입니다(7절). 그것은 헛되고 거짓되지 않는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얼굴을 의식하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그 얼굴을 비추사 은혜와 평강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민 6:25). 기도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의식하는 자입니다. 히브리서 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청결한 마음을 가진 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하였습니다(마 5:8). 청결한 마음은 거짓이 없는 진실된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진솔한 기도를 하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자기에게로 향하고 계시기 때문에 자기의 앉고 일어서는 것도 아시고 심지여 마음속의 생각까지 알고 계신다고 하였습니다(시 139:1-2).
2)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기도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신 7:9). 로마서 3:4에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고 하였습니다. 참되신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지 못한 말이나 행위를 싫어하십니다. 시편 15:2에 보면 하나님의 성산에 오르는 자는 정직하게 행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나 움직이는 행위 가운데 진실하지 못한 것을 쉽게 감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의 눈만 의식하는 나머지 거짓된 기도를 하는데 대하여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 6:5-8).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거짓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하고 부르짖었습니다(시 17:1).
3)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사람마다 양심이 있습니다(고후 1:12). 본래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속에는 진실을 추구하는 본성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19에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헛된 것과 거짓말을 서슴없이 행하게 될 경우 그 마음속에서 이를 거부하는 반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2:15에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거짓되지 않는 삶을 실천하는 사람은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습니다.
2.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말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것이나 부요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굴은 가난한 사람이 겪어야 되는 고통과 시험을 알았습니다. 또한 부요할 때 교만하고 방종하는 인간의 본성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말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1) 범죄한 인간의 실상을 아는 자입니다.
아굴의 기도를 보면 가난한 사람도 문제가 있고, 부요한 사람도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의식하며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에 물질의 많고 적음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신약의 야고보는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고 하였습니다(약 1:9-10). 옛날 선비들은 청빈함을 자랑했고 인간의 실상을 아는 사람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고 하여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실천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범죄한 인간의 마음에는 욕심이 있어서 물질을 보게 되면 거기 노예로 전락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 6:24).
2) 부요할 때 오는 문제를 아는 자입니다.
9절에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라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물질이 부요하여 배부르게 먹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은 하나님께 물질의 복을 달라고 매달립니다. 그렇지만 막상 재물이 많아지고 부요하게 되면 교만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고 하면서 하나님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겪었던 어려운 시절은 생각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멸시합니다. 옛날 마온 땅에 사는 나발이 그런 사람입니다. 자기는 매일같이 호화판으로 잔치하면서 다윗의 사환들이 찾아갔을 때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하고 폭언을 하며 멸시하였습니다(상상 25:10-11).
3) 가난할 때 오는 문제가 있습니다.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 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옛말에 “삼일 굶으면 남의 집 담장을 뛰어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배고픔을 참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요즘에는 ‘생계형 도둑질’이라는 말도 유행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자기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라도 너무 가난하여 가족들의 생계가 어렵게 되면 원치 않는 과오를 저지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빈부가 섞여 사는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사람의 능력이나 인격을 비교하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하고 좌절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이런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신앙에 상처를 입게 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돌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3. 분수에 맞게 해 달라는 소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충만하신 분입니다(엡 3:19). 그러나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인간의 욕심을 채우는 것으로 악용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이적으로 오천 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나 남았지만 그 부스러기 하나도 허비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요 6:12).
1) 일용(日用)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먹고 입고 사는 의식주(衣食住)문제는 매우 절실한 요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대목을 일러 주셨습니다(마 6:11). 본문 말씀 8절에도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기도입니다. 조금도 허황되지 않고 가장 합당한기도입니다. 그러면서도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꼭 필요한 만큼 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원은 하나님께서도 만족하게 여기십니다. 옛날 애굽에서 올라온 이스라엘이 광야 여행을 하는 동안 매일 아침 하늘의 양식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때도 한 사람당 한 호멜씩 그날그날의 양식을 주셨습니다.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게 채워주셨습니다(출 16:4).
2) 자족하며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야고보서 1:15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욕심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6에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유익이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물질의 있고 없음에 상관없이 받은 것으로 만족하며 감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심을 부리며 부하려고 무리수를 쓰게 되면 시험과 올무에 걸리게 되고 급기야 파멸을 가져오게 된다고 하였습니다(딤전 6:7-10).
3) 최상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부요함을 자랑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두고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한자”라고 하였습니다(계 3:17). 그렇지만 환난과 궁핍이 극심한 서머나 교회는 “사실상 부요한 자“라고 하였습니다(계 2:9). 예수님께서는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2:15).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도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불행합니다. 한편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지도도 남을 만큼 행복한 사람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합 3: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