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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코복음 3,13-19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13)
성경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산’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하느님 면전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뽑으시고 부르십니다.
예수님 당신이 ‘원하시는’ 그리고 ‘가까이 부르시는’ 행위는 예수님의 주도권을 나타내고 이렇게 부르시는 그분께 ‘나아가는’ 행위는 사도들의 순명을 나타냅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ᆢ"(14)
예수님을 따름의 첫번째 자리는 그분과의 친교입니다.
그분과 함께 하는 기도(그분 곁에 머무는 기도)없는 신앙생활이란 없습니다.
따로 갖는 기도시간이 우리를 일상에서도 예수님 곁에 살게 해줍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사명이 파견의 사명보다 먼저 언급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친교를 나누며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복음이 무엇인지를 먼저 배워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냄’은 제자의 정체성이며, 파견 활동의 원천인 것이지요.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 "(15)
제자, 곧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란 예수님의 사명을 계속해 나가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맛보는 사람이
기쁜소식, 복음을 전할수 있습니다. 죄의 유혹을, 죄의 근원이 되는 악의 세력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부르심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도 가까이 오라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 부르심을 듣습니까?
어떻게 응하시렵니까?
(천 사비나 수녀님)
1월24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마르코 3,13-19
신앙생활 오래 해도 주님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
라이언 벨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목사로서 약 20년 동안 신앙과 사역에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2013년, 그는 “하느님 없이 보낸 1년”이라는 실험을 시작하면서 그의 인생은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그의 신앙에 대한 점진적인 의심과 불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벨은 자신의 갈등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제 신앙을 더 포용적이고 자비롭게 만들고자 했지만, 그럴수록 기독교가 감당할 수 있는 경계가 점점 좁아지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내가 속한 교회가 동성애자나 여성들을 대하는 방식과 타협하기 어려웠습니다.”
이 실험에서 벨은 기도와 교회 출석을 포함한 모든 종교적 관행을 중단하고, 마치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무신론의 세계로 들어가고 무신론자로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입니다.
1년간 기도도 하지 않고 성경도 읽지 않고 하나님을 어떤 일의 근원이라든지 나 자신이나
어떤 이의 삶을 바꾸어줄 희망이라고 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기대지 않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마주했을 때,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알아보고 싶습니다.”
그는 이 여정을 기록하며 자신의 경험과 고민을 솔직하게 나누었습니다.
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아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깊은 불안감도 들었습니다.
단순히 신념 체계를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의 방식을 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인간 중심의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이성, 연민, 정의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회상했습니다.
“제가 신앙 안에서 소중히 여겼던 많은 가치들 — 친절, 관대함, 평등에 대한 헌신 — 이 하느님을
믿지 않아도 여전히 실천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1년이 끝난 후, 벨은 더 이상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솔직히 고백했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책도 읽고, 깊이 생각하고, 신앙과 무신앙 양쪽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제가 믿음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라이언 벨의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벨은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시간이 지나며 다시 거의
무신론자가 되는 수많은 냉담자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열둘을 뽑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가 열둘을 임명하셨으니, 그들이 그분과 함께 있게 하시고, 그들을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낼 권한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제자로 뽑으시는 세 가지 이유는
a. 함께 있게 하시고 = 기도하게 하시고,
b.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 선교 사명을 주시며,
c.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 성령의 선물을 주고자 하심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라이언 벨의 문제점이 발견됩니다.
분명 뽑혔으니 주님과 함께 머물렀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 사명으로 ‘파견’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파견받으면 주님께서 성령의 힘을 주시는데 이를 통해 주님을 의심할 수 없게 됩니다.
성 요한 보스코의 삶을 돌아봅시다.
그는 1815년 이탈리아 베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가난과 고난을 겪었습니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잃은 후 그의 가족은 생계를 위해 애썼습니다.
어머니 마르가리타는 그에게 강한 신앙심을 심어주며, 어려운 시기에도 하느님을 신뢰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밝고 쾌활한 성격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요한은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데 능했지만, 그는 훗날 자신의 부르심 이전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참새 같았다.
내 마음은 무언가를 찾고 있었지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삶이 하느님의 목적에 따라 계획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아홉 살 때 꾸었던 생생한 꿈을 회상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싸우고 소리치며 욕설을 퍼붓는 소년들로 가득 찬 들판을 보았습니다.
그때 흰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폭력이 아니라 친절과 사랑으로 그들을 도와야 한다.’”
이 꿈은 그의 삶 내내 그를 떠나지 않았으며, 아이들을 이해와 사랑으로 인도하고 돌보겠다는
그의 사명을 형성했습니다.
그는 이 사명이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진 것이라는 확신을 절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아이들을 내 손에 맡기셨다. 그분은 내가 이들을 인도하고 사랑하며, 그들을 하느님께 가까이 데려가길 원하신다.” 그의 이러한 목적의식은 그가 어려움을 견디고 자신의 사명을 지속하도록 힘을 주었습니다.
그는 기도의 힘을 깊이 믿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는 하늘의 열쇠이며, 우리는 끊임없이 사용해야 합니다.
기도 없이는 우리의 노력은 어둠 속의 화살과 같습니다.”
그는 성체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사역을 위한 힘과 지침을 얻었습니다.
그는 소년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체와 마리아께 가까이 있으십시오. 그러면 여정에서 힘을 얻을 것입니다.”
성령의 은총은 보스코의 삶에서 놀라운 사건들과 열매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오라토리오가 심각한 재정적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보스코는 기도하며 하느님께서 채워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부유한 후원자가 예상치 못하게 찾아와 필요한 금액을 기부했습니다.
또 다른 일화로, 보스코는 한 중병에 걸린 소년이 나을 것이라고 예언하며 말했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하느님의 손길을 보게 될 것입니다.” 소년은 회복되었고, 이는 많은 이들에게 신뢰를 심어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돛을 채우는 바람과 같습니다. 그분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가 한 모든 것 안에서 성령의 힘을 체험했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파견받지 않으면 큰일입니다.
성령으로 주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면, 기도할 것이고, 기도한다면 그 부르심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사명을 찾으려 할 것이며, 사명에 순종하면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평화와 기쁨을 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0,10-12)
주님께 파견받았다고 믿어야만 성령의 도우심이 주어집니다.
라이언 벨처럼 목사로 살아도 매일 기도로 파견받지 못하면 목사가 되어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매일 미사를 하거나 기도를 마칠 때,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나의 사명을 위해 오늘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묻고 결심하고 나가서는 실천해야 합니다.
기도에서 파견이 빠지면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24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복음: 마르 3,13-19
제네바의 주교님이 저렇게 선(善)하다면 하느님은 얼마나 더 선하실까?
많은 분들이 제게 묻습니다.
돈보스코 성인이 설립한 수도회인데, 왜 돈보스코 수도회가 아니라 살레시오회인가요?
돈보스코가 활동하던 1800년대 당시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쪽 대세 성인이 한분 계셨는데, 그분이 바로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십니다.
살아 생전 돈보스코는 사랑의 박사, 친절과 온유의 성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존경하고 흠모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진행 중인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 사업의 주보 성인으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을 선정했습니다.
그리고 수도회를 설립하면서 이름조차 살레시오회로 명명한 것입니다.
1593년 갓 서품된 순간부터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성소 여정은 범상치 않았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는 서품과 동시에 제네바 교구 참사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서열상 교구장 다음가는 위치였습니다.
1594년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샤블레라는 험한 산간 지방에 칼뱅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되돌아오게 하기 위한 목숨 건 선교를 자청했습니다.
그가 샤블레에 최초로 도착했을 때 그곳 사람들의 냉대와 박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불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심자들의 수는 극히 미미했습니다.
칼뱅파 신자들의 집회가 끝난 예배당에서 홀로 쓸쓸히 미사를 봉헌해야만 했습니다.
도우미로 따라왔던 사촌은 2년 만에 두손 두발 다 들고 돌아갔습니다.
혹독한 시절이었지만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소용이 없자, 칼뱅파로 넘어간 신자들을 위해 팔이 아프도록 눈물의 편지를 썼습니다.
복사기도 없던 시절이라, 같은 내용을 쓰고 또 썼습니다.
그리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대문 밑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는 이른바 ‘미디어 선교’를 일찌감치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그의 부단한 노력에 더해 1598년 프랑스와 사보이아 간에 이루어진 평화 협정에 힘입어 샤블레 지역의 칼뱅파들이 서서히 가톨릭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마침내 4만여 명에 달하는 양들이 다시금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노력에 대한 보상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1602년 35세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제네바 교구장에 착좌하게 됩니다.
알프스산맥과 안시 호수가 멋지게 어우러진 안시에 거처를 정한 그는 600여 개의 본당을 두루 다니며 사목활동에 전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부드럽고 달콤한 품성의 소유자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을 각별히 사랑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큰 환영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그의 모습과 삶에 홀딱 반하고 매료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까지 나 돌 정도였습니다.
“제네바의 주교님이 저렇게 선(善)하다면 하느님은 얼마나 더 선하실까?”
틈만 나면 분노하고, 여차하면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향해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은
부드럽고 자상한 어투로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한 말의 식초보다는 꿀 한 방울로 더 많은 파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그의 생각은 참으로 설득력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고,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하느님을 갈망하며, 하느님에 대해 말하기를 결코 멈출 수 없습니다.”
그가 남긴 불멸의 명저 신심 생활 입문을 통해 영성 생활에 대한 그의 선구자적 시각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창조하실 때, 초목들은 종류에 따라 각기 자기 열매를 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당신 교회의 살아있는 초목인 그리스도인이 각자 자신의 품위와 신분, 성소에 따라 신심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신심은 귀족, 노동자, 왕족과 노예, 과부와 미혼녀, 기혼녀 등에 따라 각각 다른 방법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실천은 각자의 능력과 일, 직무에 알맞아야 합니다.
신심 생활은 군인들의 막사, 수공업자들의 점포, 왕족들의 궁정, 부부들의 가정에서도 활짝 꽃 피어나야 마땅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주간 금요일 강론>
(2025. 1. 24. 금)(마르 3,13-19)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주춧돌은 건물의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돌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마르 3,13-19).”
1) 묵시록을 보면 ‘새 예루살렘’을, 즉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성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동쪽에 성문이 셋, 북쪽에 성문이 셋, 남쪽에 성문이 셋, 서쪽에 성문이 셋 있었습니다.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묵시 21,12-14).”
묵시록의 묘사를 근거로 해서,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일은, ‘새 예루살렘’을, 즉 ‘종말의 하느님 나라’를 본격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하신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바오로 사도는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19-22).”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즉 모든 신앙인이 하느님 나라의 ‘한 시민’이며 ‘한 가족’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남들보다 더 중요한 사람도 없고,
남들보다 덜 중요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중요하고 귀한 존재입니다.
물론 각자 맡은 직책과 직분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중요도의 차이가 아닙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모두 한 지체로 되어 있다면 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1코린 12,12.18-20.26-27.29.)”
그러므로 자신이 맡은 직책과 직분을 내세우면서 우쭐거리면 안 되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면 안 됩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맡은 직책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져도 안 됩니다.
3)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도 그렇고, 사도들을 교회의 ‘주춧돌’로 삼으신 일은,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5-27).”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3-17).”
주춧돌이 건물의 가장 아래쪽에서 건물을 떠받치는 일을 하는 것처럼, 사도들은 교회 공동체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공동체 전체를 섬기는 이들입니다.
<인간적으로만 보면 고위 지도자의 자리가 ‘높은 자리’로 보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그런 것이고,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낮은 자리’입니다.>
4) ‘낮춤, 섬김, 사랑’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칠 일이 아니고, 교회 밖으로 확장되어야 하는 일이고, 세상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이 말씀은 ‘섬기는 사랑’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신앙을 증언하라는 명령인데, 사실상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명령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