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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을 모르는 자
잠 30:15-23
15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16 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
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18 내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19 곧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자취와 반석 위로 기어 다니는 뱀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한 자취며
20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의 입을 씻음 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21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22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과
23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간 것과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잠 30:15-23 / [숫자로 말해 보는 잠언] 수많은 사람들은 마치도 흡혈귀 같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렇게 말하면서 다른 이들의 고혈을 빨아먹기에 바쁘니 도무지 만족할 줄 모르는구나. 다음 네 가지는 `그만하면 충분하다' 말할 줄 모르니 16) 스올, 문닫아 버린 아기집, 아무리 물을 퍼부어도 다 채워 줄 수 없는 메마른 땅이 그 세 가지요, 네번째는 도무지 만족할 줄 모르는 활활 타오르는 불이다. 17) 제 아비를 우습게 여겨 눈을 치뜨고 바라보는 자식과 제 어미 말이라면 죽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자식은 개천에 사는 까마귀가 그 눈을 쪼아 버릴 것이요, 독수리 밥 신세가 될 것이다. 18) 내 머리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 세 가지, 아니, 네 가지가 있으니 19) 하늘에 독수리가 날아간 자리, 바위 위에 뱀이 기어간 자리, 바다 한가운데에 배가 지나간 자리, 젊은 사내가 여인과 함께 누운 자리이다. 20) 부정한 여인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남자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하고도 입을 싹 씻고는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하고 시치미를 떼는구나. 21) 세상 사람들을 놀라 자빠지게 할 일이 서너 가지가 있으니 22) 신하가 임금이 되고, 멍청한 바보가 부자가 되고, 23)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는 막 돼먹은 여자가 신랑을 맞아들이고, 계집종이 안주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아굴은 아무 것도 아닌 작은 거머리의 모습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습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만족하려면 자기 영혼을 채워주는 것을 먹어야 합니다.
족한 줄 모르는 것(15-17) 탐심을 채우려는 자들의 불타는 탐욕에 대하여 거머리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거머리에게 “두 딸”이 있다는 것은 사람에게 달라붙어 피를 빠는 흡반이 거머리 양 끝에 하나씩 있음을 말하고, “다오 다오”는 몸에 달라붙어 악착같이 피를 빨아먹는 모습을 표현한 말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스올은 채울 수 없는 굴과 같습니다. 아이 낳지 못하는 여인은 아기 낳고 싶은 마음이 너무 절실하여 다른 것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물로 채울 수 없는 땅은 비가 아무리 와도 말라버립니다. 나무를 넣어도 활활 타는 불길은 족하다 하지 않습니다. 탐욕은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이리라’(17)고 합니다. 맹금류는 패악질로 명을 재촉한 자식의 시체를 파먹습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그 권위를 무시한 비극적 결과와 그에 따른 파멸을 생생하게 강조합니다.
깨닫지 못하는 것(18-20) 은폐에 대한 자연의 네 가지 비유로 인간의 위선을 설명합니다. 첫째, 공중의 독수리는 날아다닌 자취가 남지 않습니다. 둘째, 뱀은 바위에 지난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셋째, 배는 바다에 자취를 남기지 않습니다. 넷째, 남자는 여자와 잠자리를 하고도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이렇게 흔적이 다 사라지는 것처럼 수치의 증거를 숨기고 결백을 주장하는 음탕한 여인의 위선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21-23)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21) 질서를 파괴시키는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역할의 전도가 일어날 때, 종이 다스리고, 미련한 자가 부자가 되며, 미움을 받던 여인들이 결혼하고, 여종이 안주인이 되면, 사회는 큰 불안에 휩싸이게 됩니다. 자격이 없는데 혼란 중에 지위에 오르면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가 되어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적용: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바르게 순종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는 삶을 살게 됩니다.
마케팅 전문가들은 매우 교묘한 방법으로 불만족을 유발해 우리에게 없는 것을 사게 하고 큰 유익을 얻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우리 내면의 깊은 필요를 채울 수는 없습니다. 숨겨진 탐욕은 우리를 해로운 욕심, 올무,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며 믿음에서 떠나게 합니다. 탐욕을 품은 사람은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러 상처를 냅니다. 탐욕을 치료하는 유일한 해독제는 자족입니다.
< 설 교 >
만족을 모르는 생활
잠 30:15-16 / 박조준 목사
오늘 저녁 우리는 얻으면서도, 누리면서도 만족을 모르는 생활에 대해서 기록한 부분을 읽었 습니다.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그저 다고 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족을 모르고 언제 나 불평 불만인 사람의 생활이 그러할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랐는데 이렇게 5,6월이 되면 논에서 모를 하였습니다. 나마 여기도 그런 게 있을 줄 압니다마는 논에 모를 심을 때 제일 싫은 것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거머리가 붙는 것입니다.
이 거머리는 피를 좋아하는 벌레여서 한 번 붙으면 떨어질 줄을 모릅니다. 처음 에는 조그만 벌레가 점점 피를 많이 빨아먹으면 새끼손가락만큼 배가 불러서 축 늘어집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아무리 배가 불러도 집어 뜯어버리기 전에는 스스로 물러나는 법이 없습 니다. 어떤 때는 일곱 마리 여덟 마리가 붙어서 피를 빨아먹습니다. 제가 듣는대로 요 사이는 시골서 나일론 양말을 신고 논 모를 하면 괜찮다고 합니다. 거머리는 만족할 줄 모르는 생활을 하는 것의 대표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잠언 기자가 왜 이런 말을 썼을까 생각해 보셨어요? 우 리 인간 사회에도 이런 일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교훈으로 주신 거예요.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삶에서 만족할 줄 아는 생활을 배우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1절 이하에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 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하였습니다. 스스로 만족해하는 생활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자족이란 말의 반대되는 말은 불만이란 말일 것입니다. 불만과 불평도 어떤 경우에는 필요합 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만족하지 아니하고 보다 나은 자리로 나아가려는 노령이 따르기 때문에 자연히 발전하고 향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무식한 사람이 그 무식한데 대한 불만이 있을 때 승부할 의욕이 생길 것입니다. 가난한 가정이 빈곤에 대한 불만이 있을 때 가정 생활의 향상과 수입의 증대를 위해서 좀 더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정치에서도 불의, 부정, 부패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있을 때 사회의 정의 구현을 위해서 그 국민은 좀더 투쟁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조상들이 밤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지내는 것으로 만족해 하였다면 오늘과 같은 이 런 전기를 발명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디에 갈 때 옛날처럼 말이나 소를 타고 가는 것으로 만족해 하였다면 오늘과 같은 훌륭한 교통기관이 발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기차나, 자동차, 비행기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 다. 옛날 사람들은 옷을 지어 입을 때 고작 짐승을 잡아 짐승의 가죽으로 해 입었는데 그것으로 만족하였다면 오늘과 같이 아름답고 편한 옷을 만들어 입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이 상태가 어떤 것이든지 그것으로 만족 하다면 아무런 성장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은 성장해야 하는데 현재의 자리에서 보다 나은 자리로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2절에 이하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 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 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 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니라 하였습니 다. 범사에 개선할 것은 개선하고 향상할 것은 향상하도록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겐 누구나 때로는 내 자신이 고칠 수 없는 불가항력의 경우를 당 할 때가 있습 니다. 가령 불치의 병이라든지 불구의 몸이라든지 부득이 당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나 고난이 있 습니다. 이런 때 계속해서 이런 자리에서 불평하고 원망한다고 하면 이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 니다. 이것은 백해무익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2장에 이런 간증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셋째 하늘에 이끌 려가 본 일이 있는 신령한 체험을 했습니다. 사람의 말로 가히 표현 할 수 없는 경험을 하였습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한대로 하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를 주셨다 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것을 가시라 고 표현하였겠습니까? 우리는 그 가시가 무엇이었는지 성경에 말씀하지 않은 진리를 억지로 추 측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떻든 그 몸에 괴로움을 준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무 괴로워서 이 가시가 떠나가기 위하여 주님께 세 번 간구하였다고 했습니 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위대한 진리를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오히려 인간 편에서 볼 때 약 한데서, 부족한 것 같은데서 온전하여 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권능 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려 합니다. 따라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해지며 모욕을 당하며 궁핍과 곤궁을 당하는 것을 기뻐합니 다. 그것은 내가 약할 그때가 곧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진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원망한다고 그 짐이 가벼워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쓴 잔이 달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괴로움이 적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환경이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악한 영향만 더할 뿐입니다. 얼굴에는 주름살이 하나라도 더 생기고 머리카락은 하나라도 더 세기 마련입니다. 불평과 불만은 자신에게만 악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악한 영향만 줍니다. 우리 가정에 이런 사람이 하나만 있어도 결국 온 가족이 불행해 집니다. 가령 가정 주 부가 이런 여자라고 하면 남편의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이 밖에 나갔다 가 집안에 들어오기를 싫어합니다. 가정 살림이 넉넉하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간에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워야 가정이 화평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잠언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였습니다. 15장 16절에는 가산이 적어도 여호 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낫다 고 하였고 그 다음 절에는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낫다 고 하였습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인간의 임으로 어떻게 할 수 없을 때는 자족하는 생활을 해야 행복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범한 죄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원망하는 죄입니 다. 그들은 부득이 광야를 지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려면 광야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신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광야 생활에는 물론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 은 불평과 불만을 계속하였습니다. 아니 우리는 무엇 때문에 애굽에서 떠나서 이런 고생을 하는 가? 애굽에서 떠나지 않고 그래도 고기 가마 옆에 있었을 것인데 거기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좋 을 뻔했지! 마실 물도 없으니 어떻게 살란 말인가? 지도자 모세를 계속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 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원망하고 불평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약속한 땅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앙 생활이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 야 생활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여러 가지 불편한 점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 스스로 만 족한 생활을 할 때 영혼이 가나안 땅인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만족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옛날 우리 동양의 성현들도 우리에게 이 교훈을 주었습니다. 가령 옛날 경행록이란 책에는 지족가락이요 무탐즉우라(知足可樂 無貪卽 優)는 말이 있습니다. 족한 것을 말면 가히 즐거워 할 수 있고 탐하기를 힘쓰면 근심만 더한다 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런 말도 있어요. 지족자는 비천하여도 영락이요,부지족자는 부귀라도 역운이라 하였습니다.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비천하여도 또한 즐겁게 살고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부 귀한 자리에서도 늘 근심만 한다고 했어요. 이런 말도 또 있어요. 지족상족이면 종신불욕하고, 지지상지면 종신불치라. 만족할 줄 알아서 항상 만족하게 여기면 종신토록 몸에 욕됨이 없고 그 칠 때를 알아서 항상 그칠 줄을 알면 그는 종신토록 몸에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아니한다 고 하 였습니다.
여기 서양의 철학자들을 보면 동양의 철학자보다 더 강조해서 가르쳤습니다. 특히 헬라의 철 학 가운데 스토익파에서는 자족이란 말을 썼는데 바로 성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아우타 혹은 아 우타케이 란 말인데 마음 속으로는 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아주 강조했습니다. 사실 스토익파 윤리의 최고 목적은 자족한 생활에 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란 어떤 물건이나 어떤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족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스토익파에서는 자족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네 욕망 을 제거해 버리라 하였습니다. 만족한 생활이란 물질을 많이 소유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욕망 을 줄이는데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사실 뜻이 있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유명한 헬라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에게 찾아가서 선생님, 세상에서 가장 부한 사 람이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이 때 노철인 소크라테스가 얼른 대답하는 말이 가장 적은 것에도 만족해하는 사람이 가장 부한 사람이지 하더랍니다. 전에 디오게네스라고 하는 스토익파의 유명한 성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평생토록 자기의 집도 없이 밤에는 산기슭에 가서 나무통 속에서 자곤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헬라의 왕이 유명 하다고 소문이 퍼진 이 성자를 찾아보려고 왔습니다. 그리고 정중히 인사를 드린 후에 이 성자 의 가난한 형편을 본 왕이 선생께서는 무엇을 원하십니까? 무엇이든지 원하시면 제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선생께 해 드릴 터이니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니까 이 철인 디오게네 스는 예, 감사합니다. 저는 대왕께 원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대왕께서 제 앞에 계시 니까 햇빛이 가리워서 그러니 다만 좀 비켜만 주십시오. 하
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욕망을 제거해 버리라! 이것이 헬라의 철학자들이 가르치던 것입니다. 감정을 제거하라. 애정 의 감정까지 제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목석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실패하였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의지력으로 모든 욕망을 억제하고 또 감정을 제거하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스스로 만족한 생활을 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왜요? 인간의 의지는 약합니다. 인간은 감정이 없는 목석이 아닙니다. 나무나 돌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욕망이 있고 감정이 있습니다. 인간은 한 마디로 말해서 목이 말라 있습니다. 이 갈한 목을 적시려고 무엇을 찾아 헤매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 본능을 억누른다고 눌러지는 것도 아니요, 없애 버리 려고 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목마른 인생, 배고픈 인생이 마실 물을 찾아서 헤매입니다. 먹을 것을 찾아서 분주히 다닙니다. 어떤 때는 물질이 우리에게 만족을 줄 것 같아 돈을 찾아 헤매입니다. 의리도 버리고 눈에 보이는 것도 없이 보인다면 돈만 보고 좇아 다닙니다. 그러나 돈이 인간의 깊은 곳에서 안 타까워하는 갈증을 해갈시킬 수가 없습니다. 짐승은 물질로 만족합니다. 배고파하는 짐승에게 먹을 것을 넉넉히 주고 목말라 하는 짐승에 게 마실 물을 주면 그것으로 만족해합니다. 다른 고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짐승은 본능대로 살고 본능을 충족시키면 그것으로 다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물질적인 것만 가지고는 참 만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왜요? 사람에게는 겉으로 보면 짐승과 별로 다른 것이 없지만 이 속에는 영원히 변함없는 영 혼이 있기 때문에 이 영혼이 만족을 얻기까지는 육신적인 것을 아무리 채워 준다고 해도 거기에 서 만족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혜자 솔로몬의 고백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그는 사람으로 가질 수 있는 재물, 지식, a명 예, 권세를 한 몸에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부족한 사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최고 영화를 말씀하실 때 솔로몬의 영화 라고 하시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참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전도서 1장 2절에 헛되고 헛되며 헉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하였습니다. 세상의 것을 다 누려 보고 한 말입니다. 여기서 진리가 있습니다. 영혼의 기갈을 세상의 것으로 만족시킬 수가 절대로 없습니다. 인간은 그저 다고 다고 합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세상의 것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 수록 더 목이 탑니다.
돈도, 명예도, 권세도 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참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 비결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사야 55장 1절, 2절을 보세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 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 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 으리라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몸이 마실 물이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없이 참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영혼의 갈급함을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을 기름진 것으로 즐겁게 하세요.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통 해서 갈급한 여러분의 영혼에 참 만족을 주도록 하세요.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요 7:37-38) 하였습니다. 행복을 얻기 위해, 만족한 생활을 하기 위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종래는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주님을 영접할 때 비로소 참 만족을 얻은 사람 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혼의 만족을 주지 못하는 단순한 세상적인 젓의 번영은 오히려 고통만 이 더 할 뿐입니다. 참 만족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옛 시인 다윗이 말한 것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 치나이다. 만족하도다. 이것은 옛 시인의 고백만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주님께 나아 오기만 하 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기만 하면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만족을 얻기 원하십니까? 주님께 나아오세요. 1. 자비한 주께서 부르신다, 부르신다, 부르신다.사랑의 햇빛을 왜 버리고 점점 더 멀리 가나 (후렴) 지금 오라, 지금 오라, 자비한 주께로 지금 곧 나아 오라. 2. 고달파 지친 자 쉬라신다, 쉬라신다, 쉬라신다.무거운 짐을 다 가져오라 다 벗겨 주시리라.
효도의 중요성
잠 30:17 / 이주영 목사
세월이 흘러 갈수록 효도에 관한 사상이나 교육이 점점 희미해 가고 시효가 지난 것을 말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합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해야 된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이며 중요 한 윤리사상입니다.
1. 효도는 모든 도덕의 기본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하는 사람은 좋은 시민이 되고, 좋은 회사원이 되고 악한 사람이 될 수 없는 줄 압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둘로 나누면 대신 계명과, 대인 계명 둘로 나눌 수 있는데 그 대인 계명 중에 제일 첫 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네가 오 래 살리라"한 말씀입니다. 즉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하는 계명보다 먼저 하신 말씀입니다. 사실 부모를 잘 공경하고 효도하는 사람이라면 살인하거나, 도적질 하거나 간 음하는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효도는 모든 도덕의 기초가 되고,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요사이 남편을 독살하고 보험금을 타먹으려는 끔찍한 사건이라든지 일류대학을 나온 스승이 자기 제자를 죽이 는 참사같은 일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상이 점점 사라져가는데 그 원인을 찾아 볼 수 있는 줄 믿습 니다.
이 세상의 예의있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려면 효도의 정신이 다시 살아나야 되리라고 믿습니다. 오늘 본문 30:17에 보면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2. 효도는 모든 질서의 기본이 됩니다
하나님은 권위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세상이 질서가 있는 세상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질서있는 세상이 되려면 먼저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할 줄 아는 사람이 먼저 되 어야 합니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의 어머니 수산나는 말하기를 자식은 두살 때부터 부모에게 자기의 고집을 꺾고 순종하는 법을 가르쳐야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순종할 줄 모르고 제 고집대로 하게 내버려두면 다음에 자라서 하나님께도 순종하지 않게 된다고 했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세운 권위에 불순종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잘났건 못났건 하나님의 권위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하체를 드러내 놓 고 잠자는 것을 보고 비웃고 비방한 둘째 아들 함은 종의 종이 되는 저주를 받았고 아버지의 결점과 허물을 덮어 드린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실수가 있어도 부모의 권위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입니다. 그 권위에 복종하고 공경할 때 복을 받는 것입니다. 노아가 저지른 부끄러운 행동보다 함이 저지른 죄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왜냐하면 함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반항한 죄 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권위를 무시하고 도전하며 질서를 파괴하는 것을 대단히 미워하십니다. 로마서 13:1-2에 "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 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고 했습니다.
가정의 권위나 국가의 권위나 교회에서의 권위나 다 하나님이 세우신 것으로 알고 순종할 때에 하나 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질서 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3. 축복의 약속이 붙는 계명입니다
십계명 중에 다른 계명은 다 "…하지 말라"는 말로 되어 있으나 이 5계명에 와서는 "네 부모를 공경 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네가 오래 살리라"고 축복의 약속이 붙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6:1-2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부모를 잘 공경하는 사람이 복을 받고 불효자식은 무궁무진 고생이라는 말이 옛부터 내려옵니다. 충신이나 위대한 인물은 다 효자의 가문에서 난다는 말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효도는 중요한 것 입니다.
4. 부모의 은덕이 지대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은혜, 무슨 은혜해도 내 생명을 낳아 주시고 키워 주시고 돌봐주신 은혜와 사랑보다 더 큰 은혜가 인간 세상에서야 어디 있겠습니까?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은 가장 큰 배은망덕자요, 그런 사람은 다른 일에서도 얼마든지 배은망덕할 사람입니다.
저희들이 4남 3녀 7남매가 자랐고 저희 아내는 8남매 속에서 자랐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어려운 때에 공무원 생활 박봉생활에 그 많은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느라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까 하고 생각됩니다. 오늘날은 옛날에 비하면 살기도 좋고 자식도 많지 않은데도 힘들다고 하는데 말입 니다.
부모의 마음은 자식들의 기침소리 하나에도 가슴에 화살이 박히는 것처럼 따끔 따끔하고 머리에 열만 조금 있어도 가슴이 철렁하고 놀라게 되는데 옛날에는 그 많은 자식들이 이놈 아팠다 저놈 아팠다 하 느라고 얼마나 가슴을 조이며 놀라셨겠는가를 가만히 생각해 보곤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부모의 은덕보다 더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부모의 은덕을 생각할 때 효도가 어찌 중요하지 않겠으며 시대가 흐른다고 효도의 사상이 변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무조건적 아가페의 사랑과 가장 근사하게 비교될 수 있는 사랑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6·25 사변 직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군인을 나가고 부인 혼자 애기를 낳게 되었는데 애기를 낳으면 먹을 양식도 없고 애기를 싸줄 옷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 크리스마스 전날이라 할 수 없이 미국 선교사 집에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막 진통은 오는데 날은 어둑어둑해지게 되었고 한참 가다가 다리위를 지나가는데 금방이라도 애기를 낳을 것만 같아 아무도 안보이는 다리밑으로 내려가서 애기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 산모는 애기를 자기 속옷으로 벗어 싸주고 겉옷으로도 싸주고 산모는 벌거벗은 몸으로 얼어 죽었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선교사가 그 어려운 사람에게 선물을 주려고 지 프차를 몰고 가는데 그만 다리 위에서 고장이 났습니다. 고장이 나서 차에서 내려가 보았더니 휘발유 가 떨어졌던 것이었습니다. 그 때 마침 다리 밑에서 아기 울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듣고 내려가 보 았더니 그 산모는 얼어죽고 애기는 산모의 옷으로 뒤감겨서 산모에게 꼭 껴안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교사는 애기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키웠습니다.
어린이가 커서 10살쯤 되니까 선교사보고 자기 어머 니에 대해 알려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는 그 어머님 무덤앞에 찾아가서 자기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다 해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난 아들은 너무 감격해서 흐느껴 울면서 자기 옷을 속옷까지 다 벗어서 자기 어머니 무덤을 덮어주면서 "어머니 저를 낳으시느라 얼마나 추우셨겠습니 까?" 하면서 흐느껴 울었답니다. 그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을 대신해서 죽었던 것입 니다. 이와같은 사랑이 바로 어머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동요에도 어머님의 은혜에 대한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1.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하늘 그 보다도 높은 것같아
2. 넓고 넓은 바다라고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넓은게 또 하나 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바다 그 보다도 넓은 것같아
3. 산이라도 바다라도 따를 수 없는 어머님의 그 사랑 거룩한 사랑 날마다 주님 앞에 감사올리라 사랑의 어머님을 주신 은혜를 효도는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윤리요 사상입니다. 시대가 변천한다고 이 진리도 변하지는 않습니다.
흔히 부모님들이 자식들 듣는데 "나는 자식 덕 안바란다. 너희들이나 잘 살아라. 양로원에 가면 갔지 너희들 신세 안진다"고 하는 말을 흔히 하는데 그것은 절대로 잘못된 교육이라고 봅니다. 효도를 하라고 잘 가르쳐도 할까 말까 한데 왜 자식들 듣는데 그런 말을 합니까? 효도는 꼭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효도는 받아야 한다고 강요라도 해야지 왜 부모님들이 그런 말을 합니까? 그것은 잘못입니 다. 믿는대로 되고 말하는대로 되는 것입니다 기대와 소망을 가져야 현실이 나타나는 법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르치려면 그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 공경하는 법을 가르쳐야 할 줄로 믿읍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효도는 모든 도덕의 근본이 되며, 질서의 기본이 되며, 그리고 축복의 약속 이 붙은 계명입니다. 또한 부모의 은덕이 지대하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께서는 효도의 중요성을 올 바로 깨닫고 실천함으로써 복된 삶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