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빛과 저녁놀,
그 속에서 땀흘리고 일하던 아이들
더러는 굶기도 하며 가난까지도 끌어안았던 아이들,
그 꿋꿋함과 진실한 태도를 마음에 새기며~~
이 글은 이오덕(1925~2003)선생님이 문경과 상주지역의 초등학교 재직시절 1958년부터 1978년까지 가르친 아이들의 일기장을 책으로 낸 것입니다.
선택하기 어려운 그 중에서 몇개 입니다.
● 아가시아 (김용구, 상주 청리초등학교 3학년 - 1963. 6. 14)
교실에서 밖을 내다보니 아가시(아까시아, 아카시아) 꼭두배기가 고개를 들고 우리 공부하는것을 봅니다. 그러다가 바람이 불면 고개를 요리 조리 둘립니다(돌립니다). 바람이 시기 불면 온 둥치가 막 날뜁니다. 가재이(가지)는 우리 교실에 걸어올라 카는 것 같습니다. -끝-
● 감자 캐는 날(김규필, 안동 임동동부초등학교 대곡분교 - 1969. 8. 3)
아침을 먹고 가징기 감자 캐러 온 식구가 갔습니다. 나는 아기를 업고, 어머니는 규대를 데리고, 언니는 소를 몰고 호미와 다래끼를 가지고 갔습니다. 규부는 지게를 지고 옥녀는 빈 걸로 갔습니다.
다 올라가서 쉬다가 감자를 캤습니다. 아버지와 언니와 어머니가 감자를 캤습니다. 나는 아기를 한참 보다가 아기가 젖이 먹고 싶어 가지고 울어서, "엄마, 아기 젖 조아" 하니 엄마는 아기 젖을 주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감자를 캤습니다. 쪼매 캐다니 어머니가 불러서 나는 다시 아기를 보고 어머니는 감자를 캤습니다.
아기를 한참 보다니 모두 점심을 먹으러 옵니다. 그래서 점심을 그늘에서 먹다가 고운 새소리가 어디서 들려옵니다. 한참 들어 보니까 우리 머리 위로 울며 지나갑니다. 색갈도 아주 노랑색 하얀색이었습니다. 점심을 다 먹고 한참 쉬다가 또 감자를 캤습니다. 한 참 캐다가 저녁할 때가 되어서 언니는 저녁 하로 밥그릇을 가지고 내려갔습니다. 엄마와 아버지는 그대로 감자를 캤습니다. 그러다가 해가 빠져서 집으로 갈라고 했습니다. 감자는 다 캤습니다. 마구(모두) 네 가마이뿐입니다. 거기에 감자를 심었는 게 눈을 따 가지고 한 가마이 심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올해는 감자가 많이 속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에 올 때 아버지는 감자를 한 가마이 지고 왔습니다. 어머니는 아기를 업고 소를 몰고 왔습니나. 나는 규대를 데리고, 규부는 꼴을 한짐 지고 왔습니다.옥녀는 빈 걸로 왔습니다.
집에 오니 언니는 저녁을 다 해 놨습니다. 그래서 저녁을 다 먹고 언니는 설거지를 하고 나는 방 청소를 하였습니다. -끝-
*문제 : 여기에 나오는 식구는 모두 몇?
답은 총 아홉입니다.
●선생님께 (심필련, 대곡분교 3학년 - 1968. 8.4)
선생님, 더위에 얼마나 수고하십니까?
저는 이 방학에 어머니, 아버지, 나와 온 식구가 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일찍부터 밭에 나가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저씨와 같이 담배 뜯기를 하였습니다. 한참 뜯다가 저는 담배를 안아내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저씨는 담배를 뜯고 하였습니다. 또 한참 뜯다가 아버지는 담배를 지고 집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다가 작은언니가 점심을 먹으러 오라고 해서, 아저씨는 담배를 지고, 나와 어머니는 담배를 안고 점심을 먹으러 왔습니다. 점심을 먹고 또 담배를 엮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두 담배를 엮는데, 어머니가 70발, 아저씨가 70발, 언니가 60발, 새형님도 60발, 저는 20발 엮었습니다. 그래서 다 엮어 가지고 세어 보니 모두 280발이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달았습니다. 다는데, 용구네 아버지와 우리 아저씨가 담배를 달았습니다. 나와 언니는 담배를 들어 주었습니다. 다 달아 놓고 손을 씻고 나서 감나무 그늘에서 방학책을 하다가 대추나무에 가서 매미를 잡았습니다. 매미를 잡아 가지고 집으로 와서 아기를 주었습니다.
선생님, 오늘 얘기는 이만 씁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68년 8월 4일.
3학년 심필련 올림. - 끝 -
*방학때 선생님한티 편지써 본 사람있습니껴?
네, 저는 써본 적 있습니다. 냉중에 개학하고 칭찬 받았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 (김요섭, 안동 길산초등학교 6학년 -1978. 7. 20)
학교에서 첫 시간 공부를 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사람 3명이 물에 빠졌다고 하셨다. 내가 책을 꺼내고 자리에 앉아 있으니 선생님께서 너희 식구 일하러 갔나 물으셨다. 나는 갔다고 했다. 또 누구랑 갔나 물으셨다. 나는 누나와 엄마와 아버지캉 갔다고 했다. 나는 어머니와 누나와 아버지가 빠졌으까 봐 걱정이 되어서 공부 시간에 자꾸 강을 보았다. 그리고 한 시간을 마치고 교실에 있으니 누구가 밖에서 나를 불렀다. 밖에 나가니 미술이가 집으로 가자고 했다. 내가 나가니 용한이도 교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내캉 용한이와 미술이와 교문에 나왔을 때 미술이가 넌 엄마 물에 빠졌다고 했다. 용한이와 내캉은 울면서 집으로 왔다. 방에 들어와 울고 있으니 누나가 울면서 마을사람들캉 집으로 왔다. 누나는 나가고 밖에서 울고 있으니 작은 누나가 왔다. 나는 엄마가 물에 빠졌다고 했다. 나는 누나보고 용한이와 강에 가 봐라고 하고 나는 할머니 못 나가게 한다고 했다. 누나와 용한이가 나가디만 또 집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방에 있으니 갑이가 책가방을 들고 왔다. 선생님도 왔다. 좀 있다가 선생님은 나가시고 저녁 때 누나와 형캉 삼촌 숙모가 왔다.
아버지 어머니 신체는 다음 날에도 못 찾았다.또 그 다음 날에도 찾지 못했다. 물이 많이 불어서 며칠 있다가 물이 좀 맑아져서 마을 사람들과 찾아도 없었다. 그날은 형과 삼촌, 작은 누나와 마을 사람들이 나갔는데 저녁때도 안 돌아오셨다. 그러다가 새마을 지도자가 우리집에 와서 엄마와 아버지 찾았다고 했다. 나는 울음을 참았다. 그리고 숙모는 새마을 지도자 아저씨의 오두바리(오토바이)를 같이 타고 갔다. 그리고 그 다음날 엄마 아버지 신체를 올린곳에 갔다가 큰누나와 작은누나와 용한이와 내캉 중학교에 다니는 누나와 집으로 가라고 해서 집으로 왔다.
우리집에는 딸이 3명이고 아들이 3명이다. 모두 6남매다. 그런데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비지(빚)도 많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살아계신 때는 무엇이든지 잘 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강 건너편 불도자로 밀어 놨는 땅에 돌이 많은 것을 아버지와 어머니와 누나와 그 많은 것을 가려내 갖고 갖다 버리고 무르지 않은 땅에다가 모를 심었다. 그래서 일한 보람이 있었는지 나락은 잘 되었다. 형과 작은 누나는 여기서 나락을 비어 갖고 비지를 개리고(갚고) 부산에 올라가자고 한다. 아직도 결정은 안 지었다. - 끝 -
*1978년 7월 13일. 이 어린이는 부모가 장마로 잡풀이 자라나는 강 건너 밭매기를 걱정하여 강물을 건너다가 함께 글류에 휩쓸려 돌아가셨다. 같이 물에 빠져 떠내려가던 둘째 누나는 천만다행히도 구조되었다. 소작농으로 빚만 지고 살던 이 집의 남은 식구, 할매니와 6남매는 맨손으로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는 부산으로 떠났다.
**저는 이 글을 읽고 3일 동안 가슴앓이를 했습니다. 아니 지금도 아니 영원히 가슴이 아프고 아릴 것입니다. 저와 비슷한 또래의 이 어린이와 한번 만난다면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인생여정과 인생철학을 듣고 싶습니다. 얘기 들으메 농주한잔 나누고 싶은 마음 강합니다 -저만 그런가요? 제 생각엔 지금 부산이 아닌 마산이나 창원에 살 거 같습니다. 부산 자갈치 시장보다는 마산의 수출자유지역이나 창원의 공단이 편할 수 있으니까요.-순전히 제 생각. 상상해 보는것도 재밌습니다.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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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난 아무리 세어도 여덟인데ᆢ
나(규필)ㆍ아기ㆍ어머니ㆍ규부ㆍ옥녀ㆍ언니ㆍ아버지ㆍ규대
푸하아아아~~~.
잘 봤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언니 다음에 있습니다.
바로 '소' 입니다. - 식구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