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 만리 7월 11일 목요일 여행 13일 차.
인생에 술이 빠지면 삶의 질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여행길에 알콜이 없으면 재미가 줄어드는 걸로 알았다. 착각이었다. 도리어 맑은 시간이 확보되어 사색하게 되고 음주하는 시간에 여행기를 적어보는 재미도 갖게 되었다. 새로운 발견이다. 파키스탄은 술을 금기시 하는 나라다. 여기서 만이라도 그 좋아하는 술을 한번 멀리해보자. 그게 또한 이 나라에 대한 예의일 것 같다. 나이가 들면 빼기 인생이라지만 빠지면 채워지는 게 있는 법이다.
오늘은 훈자를 떠나 길기트로 이동한다. 열시가 되니 벌써 태양의 열기가 만만찮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미처 못한 숙제인 '알티드 포트'를 방문했다. 들어가는 길목이 역시나 좁아서 진입하기 힘들다. 구백년의 역사를 가진 이곳은 고대 실크로드를 보호하기 위해 지어진 요새로써 외관상으로 티벳의 건물을 닮았다. 실크로드는 단순히 물자만 오간 길이 아닌 문화와 예술이 융합되는 길이였음을 알겠다. 내부에서 내다본 경치 역시 이틀 전에 방문했던 '발티트 포트'에 못지 않다. 다만 규모에 있어서 좀 작을 따름이다. 하지만 이곳은 지금도 따로 기도하는 방을 두어 작은 모스크의 역할까지 하고 있으니 그 쓰임새는 오히려 윗 급이라 하겠다. 사실 설립 연대도 여기가 조금은 앞선단다.
성격 좋은 문화유적 해설사는 언변은 물론이려니와 사진 써비스마저 열심이다. 탐방객의 카메라를 뺏다시피 하여 심지어는 드론샷 까지 시연해 보이는데 보통 익숙한 솜씨가 아니다. 덕택에 더욱 유콰한 탐방이 되었다.
이제 닷세를 지낸 훈자를 뒤로하고 길기트를 향해간다. 훈자강의 색이 항상 지금처럼 검지 만은 않단다. 추워지기 시작하는 시월달 가을이 되면 빙하가 더 이상 녹지 않게된다. 따라서 계곡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유속이 느려져 섞여 흐르던 토사가 침전되고 나면 빙하수 특유의 옥빛으로 변한다니 신기할 뿐이다.
점심을 위해 '나가르' 마을의 식당을 들렀다. 어제 올라갔던 베이스캠프의 반대편에 위치한 마을이다. 길가에서 빙하를 올려다볼 수 있는 멋진 장소여서 소규모나마 유원지로 개발되어있는 곳이다. 때 아닌 비명 소리에 올려다보니 짚라인에 매달린 젊은이들이 신나게 기분내는 중이다.
전망 좋은 맛집을 찾아 야외에 마련된 식탁에 나 앉았다. 편안한 시선으로 라카포시봉을 올려다 본다. 오늘은 날씨가 좋지 않아 정상은 물론 빙하의 허리까지 구름에 가렸다. 청명했던 어제 웅장한 산줄기의 전모와 빙하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었음은 참으로 행운이었다.
쏟아지는 물소리와 함께 경치 좋은 곳에서의 점심이 특별하다. 우리 식탁 곁 작은 공터가 라카포시를 관망하는 중요 지점이기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여들었다. 그들에게는 라카포시와 함께 우리 일행도 관심 대상이다. 전통적으로 손님에게 친절한 그들은 스스럼 없이 손을 내밀어 인사를 청한다.
쇠고기 맛과 흡사한 '야크 커리'와 함께 훌륭한 점심식사가 되었다. 이곳 파키스탄의 북부에 오니 뜻 밖으로 양(羊)을 보기가 힘들다. 자연히 식당에서도 양고기는 그 값이 엄청 비싸고 오히려 야크가 흔할 정도다. 이번 여행에서 야크고기는 정말 원없이 먹었다. 이후 여정에는 더 이상 맛볼 수 없다니 아쉬울 따름이다.
이제 라호르까지 직통 두시간 거리다. 이어폰 안에서 들려오는 재즈 씽어 '웅산'의 노래가 감미롭다. '눈치는 그만 봐요 걱정 말고. 이런저런 생각은 하지말고.......'
하류로 내려갈수록 강폭은 훨씬 넓어지고 탁류의 요동도 더욱 커졌다. 레프팅에 최적의 장소로 보이지만 워낙 수온이 낮아서 얼어죽기 십상이란다.
지금 달리고있는 이 길, 카라코름 하이웨이가 깔리기 전에도 이곳은 주요 실크로드의 한 구간이다. 건너편 강물 위로 까마득한 절벽을 따라서 옛 실크로드가 빨래줄 처럼 놓였다. 걷고 걸어서 동서를 오간 옛 사람들이 참으로 대단하다. 삶의 무게가 그 먼길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으리라.
험악한 산악지대를 벗어났다. 키 큰 미류나무가 우쭐거리고 장마철에 물 불은 강원도의 어디쯤으로 착각 될 수 있는 풍광이 되었다. 주변 산지에 나무가 울창해서 그런지 흐르는 물빛도 맑디 맑다. 물소리 들려오는 강촌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 한 후 다시 달리기를 한시간 여. 이제 거의 다 와 가는지 길기트시티 이정표가 보인다. 오른 편으로 차를 꺾어 까마득히 높은 다리를 건너자 바로 시내가 시작된다. 유서 깊은 교량이 있어 일부러 찾아갔다. 역시 현수교다. 유속이 빠른 이곳에는 교각의 설치가 어렵기에 자연히 앙쪽 두개의 교각만 필요한 현수교가 채택 되었을 것이다, 다리 중앙에 서니 흔들거림이 짜릿하게 전해온다. 듣자하니 옛적 당나라 시절에 고선지 장군이 파미르를 넘어 여기까지 왔다가 이 다리가 끊어져 있던 바람에 결국 회군하고 말았다는 그 장소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서 바로 시내구경에 나섰다. 길기트강의 강변도로를 따라가기로한다. 구글 지도로 확인하니 다운타운과 시장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
불과 오분 만에 강변로에 닿았다. 예보된대로 바람이 많다. 구경삼아 한가한 걸음으로 터벅터벅 걷는다. 강변에 드문드문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주로 남성들이다. 여기 남성들의 패션은 거의 한가지로 통일이다. 도포자락 스타일의 상의에 펑펑한 바지차림. 그 색상도 대부분 검정색 아니면 갈색이어서 좀 칙칙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사람들은 결코 칙칙하지 않아 이방인에게 온갖 친절을 다 베푼다.
요즈음 성인인 누군가의 축일 기간이란다. 그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왔고 곳곳에서 소리 높여 행사가 한창이다. 일단의 사람들이 다가와 이방인에게 음료수를 권한다. 마침 목마른던 터에 아주 꿀맛이다. 뭔지는 몰라도 작은 꽃잎이 둥둥 뜬 허브차가 매우 향기롶다.
일기예보에서 오늘 저녁 돌풍 가능성이 있다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돌개바람이 일며 온 거리가 먼지 투성이가된다. 버스 정류장 가림막에 기대어 피해있자니 다행히도 십분 지나 그쳤다. 여기에는 돌풍이 일상적인가보다.
재래 시장 안에 자리한 모스크(회교사원)를 방문했다. 본당 안에 들어가려하자 총 든 경비원이 제지를 하며 무슬림이냐고 묻는다. 겨우 소통을 끝내고서 입장을 허락받았다. 기도 중인 사람들 곁에 앉아서 나만의 방식으로 존중을 표한다. 내 비록 무슬림은 아니지만 집 주인에게 예를 갖춤은 당연한 것이다. 바닥에 주저앉으니 심신이 편안하다. 어디가 되었든지 종교시설에 들어서면 그 경건함으로 인해 차분해지면서 정신이 맑아진다.
구글 지도를 살펴가며 되짚어 돌아간다. 걷는 길이 꾀나 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당히 멀리 걸어졌던가 보다. 겨우 약속된 저녁식사에 시간 맞춰 참석했다. 딱 두시간 걸렸다.
내일부터는 이박삼일간의 '페리메도우' 여행이 예정되어있다. 거기에서 '낭가바르팟'의 '바엘 베이스캠프'까지 걸을 것이니 쉽지 않은 여정이 될 것이다. 당연히 등짐이 무거우면 부담이 된다. 배낭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필수 물건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내일 지프스테이션 부근의 적당한 곳에 맡기기로 했다. 그럴려면 배낭을 둘로 나누어 새로 꾸려두어야만 한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술 안 마시니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