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칼뱅의 생애와 사상] 파리 : 지성의 형성
콜레주 드 몽테귀
콜레주 드 몽테귀는 14세기 초에 인정 많은 루앙의 대주교가 설립했다." 15세기에 몽테귀는 가파른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 15세기가 막을 내리기 몇 년 전에 뜻밖의 반전을 맞은 것은 전적으로 얀 스탄동크(Jan Standonck)의 엄청난 에너지와 헌신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탄동크는 공동생활형제단에서 수학했다. 공동생활형제단은 저지대 국가들 중심의 수도원 운동으로 건전한 교육을 통해 수도원 생활을 개혁하려는 특별한 소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몽테귀에 도입한 엄격한 규율을 공동생활형제단의 영향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이러한 시각이 과연 신뢰할 만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15세기 말에 다다르면서 공동생활형제단과 비아 모데르나(via moderna )’새로운 길'이라는 뜻으로 유명론을 지지하는 신학 운동) 사이에 강한 유대 관계가 생겨날 조짐이 보였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 비아 모데르나를 지지하던 대표적인 인물 가브리엘 비엘(Gabriel Biel)과 벤델린 스타인바흐(Wendelin Steinbach)는 공동생활형제단 튀빙겐 지부 회원이었다. 몽테귀의 경우, 노엘 베디에의 영향 아래 비아 모데르와의 관계가 강화되었다. 베디에는 1520 년까지 파리에서 데르나를 펼쳐 나갈 주요 근거지로서 몽테귀의 입지를 고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에라스뮈스는 1490년대에 몽테귀에서 얼마간 불운한 시간을 보냈다. 얀 스탄동크의 영향을 받은 몽테귀는 학비를 낼 시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에라스뮈스는 빈자들의 대학(collegium pauperum)에 들어가 교내의 허드렛일을 돕는 것으로 학비를 대신해야 했다. 그는 《대화집The Colloquies》에 몽테귀에서 받는 인생과 몽테귀의 독특한 분위기를 기록했다. 이 책은 몽테귀를 이가 득실거리고 낡고 야만적이고 개방식 변소 냄새가 코를 찌르고 폭군들이 사는 곳으로 소개한다.
첫 번째 화자: 어디 출신이오?
두 번째 화자: 콜레주 드 몽테귀 출신입니다.
첫 번째 화자: 그럼 배운 게 많겠네?
두 번째 화자: 아니오, 이만 많습니다.
감성이 풍부한 독자들은 생트주느비에브 도서관 구내를 두리번 거리며, 5세기 전 변소 옆에 자리 잡은 낡고 빛바랜 개인 열람석에 앉아 득실거리는 이 때문에 몸서리치는 에라스뮈스를 찾아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지도 모르겠다.
콜라동이 지나가듯 던진 말로 짐작컨대, 칼뱅은 몽테귀에서 에라스위스보다는 조금 나은 시간을 보낸 것 같다. 학생들은 다섯 부류로 분류되었다. 첫 번째 부류는 숙박을 제공받는 부르시에, 두 번째 부류는 숙식비를 지불하는 포르숑니스트(portionniste), 세 번째 부류는 스스로 방을 빌리고 생활비를 내는 카메리스트, 네 번째 부류는 자기 집에 살면서 학교에는 수업료만 지불하는 마르티네(martinet), 다섯번째 부류는 허드렛일로 생활비를 벌면서 가능한 시간에 강의를 듣는 포브르 (pauvre)였다. 에라스뮈스는 포브르에 속했던 반면에, 칼뱅은 부유한 학생이었던 것 같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학 밖에서 방을 빌려 생활하는 카메리스트였다" 몽테귀는 파리 라탱 지구에 자리했다. 라탱 지구 교차로는 콜레주, 수도원, 교회, 예배당, 여인숙, 그 밖에 학생들의 필요에 맞춘 다양한 시설이 미로처럼 얽혀 있는 좁고 지저분한 거리였다. (그런 시설들 중에는 서점도 있고 청루도 있었다. 그 때문에 신학생들은 바깥세상에 몸과 정신이 오염되는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반드시 둘씩 짝을 지어 다녀야 했다.) 트뤼셰와 우아요가 1552년에 제작한 파리 지도를 보면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은 라탱 지구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지도는 당시 거리들이 얼마나 좁고 협소했는지는 제대로 보여 주지 못한다. 학생 수에 대한 추정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파리 전체 인구가 약 30만 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몽테귀의 학생 수는 4,000명에서 5,000명 사이로 보인다. 당시에는 교회에서의 지위와 상관없이 모든 학생이 특정 성직복을 입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몽테귀 학생들은 학교에서 입는 회색 가운 때문에 '카페트(Capettes)’라는 별명을 얻었다.
라탱 지구는 거의 대부분 재개발되었다. 그래서 당시 칼뱅이 일상적으로 보았던 광경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아직 보관되어 있는 고문서들 덕분에 이 지역의 주된 특색을 부분적으로나마 복원할 수 있다." 몽테귀의 정문은 세트 부와 거리로 이어지는 중앙 안뜰의 동쪽에 있었다. 중앙 안뜰의 남쪽 끝에는 생트주느비에브 대수도원 교회와 그보다 규모가 작은 생 에티엔뒤몽 교회와 교회 묘지로 향하는 입구가 있었다. 학교 건물에서 나와 좌회전을 하면, 몽테귀와 인근 생트 바르브 사이를 가르는 악명 높은 쉬앙 거리를 지난다. 17세기에 제작된 지도에는 이 거리가 생포리앵 거리로 표시되었다. 서쪽 끝에 있는 교회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이 예배당은 평소에는 방치되었다가 매년 8월 22일 생포리앵 축일에 축제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 거리는 사람과 개가 대소변을 보는 변소에 지나지 않았다. 길에 어슬렁거리는 개들 때문에 '쉬앙' 거리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시에 거리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했다. 개들이 싸 놓은 똥과 오줌 때문이기도 했지만, 몽테귀에서 그 거리를 개방 하수로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좀 더 개연성이 있다('쉬앙chien'은 프랑스어로 '개'라는 뜻이고, '시에chier'는 '똥 누다'라는 뜻이옮긴이). 어둠이 깔리면 거리는 호색한들과 탐탁지 않은 인간들의 소굴이 되었다. 길 양쪽에 소유지가 있는 몽테귀 입장에서는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1500년의 어느 시점에 몽테귀는 마침내 길을 가로질러 주변보다 지대를 조금 높이고 지붕을 씌운 보행로를 건설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이로써 콜레주 학생들과 교사들이 위험한 쉬앙 거리를 지나지 않고 빈자들을 위한 뜰(jardin des pauvres)에 접근할 수 있게되었다. 주랑은 1500년 11월 26일에 완공되었다. 일주일 정도지나 두 번째 개선 작업까지 마쳤다. 12월 4일, 몽테귀 주변에 울타리가 세워졌다. 몽테귀가 있는 쉬앙 거리 동쪽 끝은 세트 부와 거리와 연결되어 있었다. 거리에 출몰하는 노상강도의 출입을 막기 위해 밤에는 울타리 문을 잠가 두었다. 1522년에는 도로를 포장했고,몽테귀에서 거리로 방출하던 하수는 나중에 지하 관로를 통해 생트바르브 쪽에 있는 오물통으로 배출했다.
쉬앙 거리 바로 맞은편에는 콜레주 드 포르테가 있었다. 콜라동에 따르면, 칼뱅은 1533년 10월 만성절에 니콜라 콥이 운명적인 연설을 하기 직전까지 이곳에서 방을 얻어 생활했다. 세트 부와 거리를 따라 한참 더 내려가면 콜레주 드 랭스가 있었다. 몽테귀를 나와서 우회전을 하면 세트 부와 거리가 나오고,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묘지가 나오고, 묘지를 지나 우회전을 하면 생 에티엔 데 그레거리가 나왔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면 왼편에 콜레주 드 리지외가 나오고, 오른편에 숄레 거리가 나온다. 그 길을 쭉 따라가면 생 자크대로와 연결된다. 현대에도 똑같은 이름을 그대로 쓰는 이 대로는시테 섬의 작은 다리와 파리시 남쪽에 있는 생 자크 문을 이어 준다. 생 자크 대로 양옆에는 박공 구조의 높은 집들이 늘어섰고, 높이 솟은 콜레주 드 소르본 건물의 뒷모습도 보였다. 소르본 건물의정면은 생 자크 대로와 서쪽으로 나란히 뻗은 소르본 거리를 향해있었다. 소르본 옆에는 콜레주 드 칼뱅이 있었다. 콜레주 드 칼뱅은'작은 소르본'이라는 뜻으로 '라 프티트 소르본(la petite Sorbonne)’’으로자주 불렸다. (칼뱅이라는 사람이 두 콜레주의 후원자였다. 우리가 아는 개혁가 칼뱅과는 무관한 인물이다.)
몽테귀는 북쪽으로는 쉬앙 거리, 동쪽으로는 세트 부와 거리, 서쪽으로는 숄레 거리와 생생포리 교회, 남쪽으로는 생 에티엔 데그레 거리가 사면을 두른 사각형 안뜰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시기의 대다수 콜레주는 주변에 크고(오텔hôtel) 작은(메종maison) 집들이붙어 있었다. 몽테귀도 마찬가지였다. 인접한 주택 중 가장 큰 건물이었던 오텔 뒤 그랑 베즐레는 베즐레 수도원에서 취득한 것이다."서쪽에는 오텔 뒤 페티 베즐레가 있었고, 북쪽 건물 위층에는 작은예배실과 자습실이 있었다. 한때 에라스뮈스가 머물렀다는 이유로명성을 얻은 빈자들의 집은 생 에티엔 데 그레 거리와 맞닿아 있는 본관 1층 한쪽에 위치했다. 몽테귀는 콜레주 드 생트 바르브와 인접한 정원 두 개도 소유하고 있었다. 두 정원 중 작은 정원은 신학자들을 위한 것으로 한쪽에 오물통이 있었다. (이 오물통이 제 기능을 못하고 다른 데 쓰이는 바람에 생트 바르브와 몽테귀 사이에 마찰이 생겼다. 한편, 두 정원 중 큰 정원은 몽테귀가 소유한 두 채의 주택과 인접해 있었으며 교양학부 학생들과 라틴어를 배우는 학생들이 주로 사용했다. 지붕을 씌운 보행로를 건설해 연결한 곳이 바로 이 큰 정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