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눅19:1-4절)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엔 신기한 메커니즘이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리고로 지나가시고 삭개오는 이에 반응합니다.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과 우리 사이에 일어나는 부르심과 우리의 응답입니다.
주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시는데 삭개오에게 주를 보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우리가 구원을 얻는 과정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겁니다.
이 사건의 핵심적인 단어는 4절의 ‘보고자’하는 말입니다. 이는 삭개오가
예수를 찾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삭개오사건 이전의 배경은 눅18장에
맹인이 주님께 부르짖어 눈을 떠는 사건이 있습니다. 이는 눈을 떤 다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보고 제대로 찾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삭개오의
신앙은 과거의 번역 같으면 뽕나무 위의 신앙이라는 말에 익숙합니다만 지금은
새로 번역이 된 대로 돌무화과나무 신앙이라고 말하려니 어색하기도 합니다.
삭개오가 키가 작고 사람이 많이 할 수 없이 나무에 기어 올라갔습니다.
이건 자신의 문제와 주께 나아가는데 장애가 되는 다른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3절 삭개오가 ‘보고자 하되 어찌 할 수 없어’ 삭개오의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행함입니다.
맹인은 주님께 소리를 지르고, 삭개오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갑니다. 삭개오는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그냥 구경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만나기를 원합니다.
눈이 뜨여 예수그리스도를 본 자는 만나야 합니다. 안 보이면 고함을 쳐야죠.
그 다음에 보이면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발견되어야 합니다(5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따라 그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 세례를
통해 죄 사함을 받으면 성령이 임하여 예수 그리스도 구주가 되심이 보입니다.
그때부터 삭개오처럼 자신의 키가 턱 없음을 알고 십자가를 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앉아 간구하시는 주님을 향해 달려 나아가면 주님께서
반드시 우리 안에서 반응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르짖고 앙망하는 겁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삭개오의 의사를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절)하십니다. 이는 나를 영접하라는 뜻입니다(요1:12)
우리는 주님을 찾아 만남이 있은 다음에 반드시 나의 구주로 영접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기 이전에 빛이 있고 그 빛으로 보고
만남이 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영접하러 나온 겁니다. 그 믿음이 곧 나무에
올라가는 행함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복잡한 상황을 극복하는 믿음으로 도저히
‘할 수 없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3절)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라는 말입니다.
삭개오 사건에서 중요한 구절의 말씀은 8-9절의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하는 고백입니다. 삭개오는
지금 율법의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의와 정의라는 삭개오의
이름과 달리 갈등하는 양심과 율법에 대한 부담이었을 겁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자신의 존재와 소유를 포기하는 회개를 하고 난 다음에 구원이
선포됩니다. 빛을 보고 눈이 열린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보고자 하면 반드시
이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얻은 복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9절)
나사로가 간 곳이 바로 아브라함의 품이었습니다. 나를 포함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했으나 아직 자신이 정리가 안 된 사람이 많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보면 오순절 성령 이전에 자기 정리가 안 된 상태와
오순절 성령이 임하신 이후에 자기 정리가 된 후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자기 정리는 40년이 걸렸습니다. 미디안 신학교를 통해 모세는 드디어
바로의 공주의 아들의 영광을 버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기로 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주인인 자리에서 청지기로 내려앉았습니다. 잘 못하면 십일조나 봉사로
하나님께는 당당하고 돌아와서는 혼자 염려를 하는 신앙이 됩니다(마6장) 이것저것
때문에 그만 약해지고 맙니다. 불교에서 연이 업을 낳고 업이 보를 낳는다고 말합니다.
땅의 원리를 말하는 철학도 관계에 의해 보상과 보응이 따른다고 말합니다.
이는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사망을 낳는다(약1:15)는 말씀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지금까지 삭개오는 이와 같은 상태에서 의와 정의라는 그의 이름이 구겨진 자화상을
가지고 자기 부조리에 의한 심각한 갈등으로 심한 홍역을 앓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었다 함은 대학입학시험의 합격과 같습니다.
그 다음부터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입어
율법에서 속량이 되면 드디어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되는 겁니다(갈3:14)
삭개오는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잃어버린 자란 구원 안에 있어야 할 자가
구원 밖에 있는 겁니다. 지금도 많은 신자들이 삭개오와 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삭개오는 의, 정의라는 이름만 가졌듯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삭개오와
같이 끙끙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요? 드디어 잃어버린 삭개오가 다시 찾아진
삭개오가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자의 특징은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겁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는 정신승리에 몰두합니다.
구원은 참 자신을 잃어버렸다가 그리스도를 만나 다시 찾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난 죄 사함 받았다 난 의롭게 되었다 하는 명분만 내세울 뿐 삭개오와 같이
속앓이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요? 따라서 자신을 방어하느라고 신앙의
의식이나 활동으로 딴 짓하는 자리에서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