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전 스님의 본생담으로 읽는 불교
27.마하쟈나카 본생(‘본생경’ 539번) ③출가의 계기
욕망 떨칠 때 진리로 가는 출세간의 길 열려
풍성한 열매 때문에 황폐해진 망고나무 보며 출가 결심
‘열매 없는 나무’는 욕망 없어 두려움도 없는 자의 상징
눈물로 왕의 마음 바꾸려는 왕비·칠백 후궁 노력도 허사
동산놀이 가는 마하쟈나카.
지난 1월의 연재가 마하쟈나카가 불굴의 노력과 지혜로 역경을 극복하고 왕위에 오른 내용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정점에 이른 영화를 버리고 출가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느 날 마하쟈나카 왕은 왕원의 동산으로 구경을 나갔다. 동산 입구에는 감청색으로 빛나는 망고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한 그루는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한 그루는 열매가 없었다. 왕은 코끼리를 탄 채 열매를 하나 따먹었다. 천국의 풍미(風味)와 같은 맛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한껏 따서 먹으리라 생각하였다.
동산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한 나무는 완전히 못 쓰게 되어있고, 한 나무는 잎도 빛깔도 그대로 있었다. 왕이 그 영문을 묻자, 대신들은 “열매가 달린 나무는 대왕님이 첫 열매를 따서 먹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훔쳐 땄기 때문이며, 다른 나무는 열매가 없었기에 망쳐지지 않은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왕은 크게 감동을 받았다.
‘이 나무는 열매가 없었기 때문에 감청색으로 빛나며 서 있고, 이쪽 것은 열매가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못쓰게 되어 서 있다. 이 왕위에 있는 것은 열매가 있는 나무와 같고, 출가하는 것은 열매가 없는 나무와 같다. 무엇이든 있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있고, 아무것도 없는 자에게는 그것이 없다. 나는 열매 있는 나무의 발자국을 밟지 말고, 열매 없는 나무와 같이 되고 싶다. 이 지상의 모든 행복을 다 버리고 집을 나와 출가하자.’
왕의 이러한 생각은 굽은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속담을 떠오르게 한다. 장자도 ‘인간세편(人間世篇)’에서 “사람은 모두 쓸모 있는 것의 쓸모만을 알고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알지 못한다”고 하여 무용(無用)의 대용(大用)을 말해두었다.
이제 왕은 장군에게 통치를 맡기고 궁전의 가장 위에 올라갔다. 그는 무용에도 노래에도 마음이 끌리지 않고, 왕원에 사는 짐승들과 왕궁 연못의 거위도 돌보지 않고, 정사도 처리하지 않고, 말없이 잠자코 앉아 사문(沙門)의 법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애착을 완전히 버린 벽지불(碧支佛. 혼자서 인연법을 깨친 성자)들을 상기하면서 감흥어를 읊었다.
‘지복(至福)을 찾아 모습을 감추고 은둔하여/ 살해의 마음을 없애고 속박을 끊은 사람들/ 오늘은 그 어느 동산에서/ 늙고 젊은 성자들 살고 있는가//애착을 버린 현명한 사람들/ 그 위대한 선인(仙人)들에게 나는 귀의하려네/ 이 탐욕의 세상에 살면서/ 그 탐욕을 버린 그들이니라//환술사가 단단하게 짜놓은/ 광대한 죽음의 그물을 찢고/ 집착이 다 없어진 그들은 열반에 나아가나니/ 누가 나를 그곳으로 이끌어주리’
그렇게 4개월이 지나자 자신의 궁전이 로칸타리카 지옥처럼 보이고 삼계(三界)는 불에 타는 것과 같이 생각되었다.
‘나는 언제나 번화한 거리/ 넓고 크며, 두루 빛나는 이 미틸라/ 이것을 버리고 출가할 수 있으리/ 실로 그 날은 언제나 내게 오리// 언제나 나는 이레 동안/ 내리는 비에 젖은 옷 그대로/ 여기 저기 행걸할 수 있을까/ 실로 그 때는 언제나 오리// 언제나 나는 늘 항상/ 나무들 우거진 숲 속에서/ 아무 욕망 없이 살 수 있을까/ 실로 그 때는 언제나 오리// 언제나 나는 신발가죽의 낡은 부위를/ 가죽수선공이 잘라내는 것처럼/ 애욕의 얽맴을 끊을 수 있을까/ 천상과 지상의 그 속박을’
출가심이 깊어진 왕은 이발사를 시켜 머리와 수염을 깎게 하고 가사를 입고 흙발우를 어깨에 걸치고 지팡이를 짚고 궁전을 내려갔다.
이때 4개월이나 남편을 보지 못한 시왈리 왕비가 칠백 후궁들을 데리고 “모두 아름답게 꾸미고 될 수 있는 대로 여자의 애교를 보여 애욕의 밧줄로 꽁꽁 묶어 버리도록 하자”고 하면서 왕이 있는 방으로 올라오다가 내려가는 왕과 마주쳤다.
그녀는 벽지불인 줄 알고 한쪽에 섰다. 방에 들어와 보고서야 머리털과 장식품을 발견하고는 아까 그이가 자신들의 주인인 줄 알았다. 그녀와 칠백 후궁들은 빨리 가서 돌아오시도록 하자고 하면서 왕궁 뜰로 내려갔다. 그녀들은 모두 머리를 풀어 흩뜨리고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대왕님, 왜 이런 일을 하십니까”하면서 못내 가엾게 슬피 울면서 왕의 뒤를 따라갔다. 시왈리 왕비는 눈물 흘리며 슬퍼하였다.
‘그리하여 보기에 아름답고/ 허리 날씬한 칠백 후궁들은/ 두 팔을 벌려 울부짖나니/ 어쩌면 우리들을 버리느냐고//그리하여 충성하고 어질며/ 즐거움을 말하는 칠백의 후궁들을/ 집 버리기 원하는 그 왕은/ 모두 버리고 떠나갔도다//그는 백 파라의 구리쇠와/ 백 라지카의 황금 버리고/ 흙으로 만든 발우 가졌네/ 그것은 제2의 관정(灌頂)이었네’
가지고 싶은 욕망을 쫓아 무언가가 많아지고, 많아지면 서로 가지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모두 욕망의 거스를 수 없는 작용이다. 욕망의 문제를 다루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욕망의 조율이며, 다른 하나는 욕망을 떠나는 것이다. 전자는 세간적인 방법으로 끝이 없는 과정이며 불완전하다. 반면에 후자는 출세간적인 방법으로 끝이 있으며 완전하다. 불교는 출세간의 가르침이다.
왕은 숲속에서 아무 욕망 없이 살 수 있기를 희구한다. 그는 욕망을 버리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왕의 지위를 버렸다. 욕망을 벗어나는 것만이 완전한 안락과 평온과 평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왕으로 하여금 그러한 인식을 하게 하였는가? 황폐해진 망고나무이다. 망고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가 돌연 황폐해진 망고나무는 욕망 추구의 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왕은 이것을 강렬하게 인식한 것이다.
많은 재물, 아름다운 여인들, 높은 권력, 그것을 지키려는 자와 빼앗아 가려는 적들의 존재, 그러한 욕망이 충돌하는 장소가 번화한 도시와 궁전이다. 그는 욕망이 만든 도시와 궁전을 벗어나 욕망 없는 숲속에서 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왕궁을 떠났다. 원효 스님은 “높은 산 치솟은 바위는 지혜로운 이가 머무는 곳이며, 푸른 소나무 깊은 계곡은 수행자가 깃드는 곳”이라 하였다.
왕은 마지막으로 “애욕의 얽맴을 끊을 수 있을까?”라고 읊고 있다. 욕망을 떠나려 하지만 애욕이 자신을 잡고 있으며, 천상과 지상의 즐거움이 자신을 붙잡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원효 스님은 “마음 가운데에서 애욕을 떠난 것을 사문이라 이름하며, 세속을 연연해하지 않는 것을 출가라 한다”하였다.
부처님도 보리수 아래에 앉아 새벽 별을 보고 “나의 마음은 열반에 이르러 모든 갈애는 파괴되어 버렸네”라고 읊으셨다. 애욕의 얽매임을 떨치고 욕망을 버릴 때 출세간의 길이 열린다. 출세간의 길이 열릴 때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고 다시 남은 미세한 욕망의 습기(濕氣)마저 떨쳐버리면 만리(萬里)에 걸쳐 펼쳐진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으리라.
[1669호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