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원 교룡산성 홍예문이다.홍예문안에 비석군이 있다.




성벽 귀퉁이에서 성안으로 통하는 길이 오른쪽으로 꺾여 있다. 이는 본래 성벽과 평행하게 쌓은 외벽으로 그 안쪽에 성으로 통하는 문이 감추어져 있다. 이 이중벽 사이로 들어가 다시 왼쪽으로 꺾인 곳에 조그만 홍예문이 있다. 이것이 교룡산성의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고 하는 동문으로, 원래 문루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고, 계곡 쪽에 수구와 홍예문만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교룡산성안에는 토종닭을 키우고 있고,민박집과 식당도 있다.

<교룡산성>답사여행 길잡이에서 펌
남원지역에 남아 있는 20여 개 산성 중에서 그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교룡산성은 교룡산 정상과 동쪽으로 형성된 계곡을 두른 포곡식 산성이다. 삼국시대 말기 백제가 축성하였다고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고려 말 이성계가 이곳에서 왜구를 맞아 싸웠다고 하며,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승병장 처영(處英)이 홍예문을 다시 쌓는 등 크게 보수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룡산성 전경남원시에서 바라본 교룡산성의 모습이다. 산의 허리에 보이는 흰 띠가 산성의 성벽이다.
산성 앞에 이르렀는데도 홍예문은 보이지 않고 성벽만 보인다. 성벽은 자연석이 아닌 잘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쌓았으며, 현재 약 3㎞ 정도가 남아 있다. 성벽 귀퉁이에서 성안으로 통하는 길이 오른쪽으로 꺾여 있다. 이는 본래 성벽과 평행하게 쌓은 외벽으로 그 안쪽에 성으로 통하는 문이 감추어져 있다. 이 이중벽 사이로 들어가 다시 왼쪽으로 꺾인 곳에 조그만 홍예문이 있다. 이것이 교룡산성의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고 하는 동문으로, 원래 문루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고, 계곡 쪽에 수구와 홍예문만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동쪽의 홍예문교룡산성의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고 전하는 동문이다. 원래는 문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고 홍예문만이 남아 있다.
홍예문을 들어서면 좁은 비탈길이 나서는데, 길 오른쪽에 비석군이 있다. 교룡산성을 지켰던 역대 무관 별장들의 기적비(紀績碑)들이다. 비석군 맞은편에 작은 푯말 하나가 있다. ‘김개남 동학농민군 주둔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농민군의 지도자인 김개남(金開南, 1853~1895)은 남원성을 점령하고 이 교룡산성을 거점으로 활약하다가 끝내 여원치에서 관군에게 패하였다. 한때 교룡산성에 김개남과 농민군이 주둔하였던 것을 기념한 표식인 것이다.
산성 안에는 옛 용천사(龍泉寺)였던 호국사찰 선국사가 있다. 선국사로 이름을 고친 연대나 유래는 알 수 없으며, 약 200여 년 전에 만든 북과 승장동인(僧將銅印) 등이 남아 있다.
남원은 하동-구례-곡성을 거쳐 광한루 앞에 도착하는 섬진강 뱃길과 운봉-함양을 거쳐 진주까지의 육로가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북쪽은 풍악산(603m)의 연봉들이 병풍처럼 가로막고, 반대쪽은 지리산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인 남원에서 유사시에 적과 맞서 싸우기에 가장 효과적이었던 곳은 가운데에 독립하여 우뚝 솟아 있는 교룡산(蛟龍山, 518m)이었다고 한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원성의 관군과 백성은 모두 교룡산성으로 옮겨 일대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원군으로 와 있던 명나라 장수 양원이 이러한 사정을 잘 모르고 평지인 남원성에서 싸우기를 고집하여 교룡산성을 버리고 나왔다가 남원성에서 참패를 당한 적도 있다고 한다.
교룡산성의 동문인 홍예문에 올라서면 남원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교룡산성 (답사여행의 길잡이 6 - 지리산 자락, 초판 1996., 16쇄 2009., 돌베개)


남원성의 밖과 안

1700년대에 제작된 「남원부지도」(南原府地圖)에 의하면 남원성은 마치 바둑판처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길이 나 있고 이에 따라 외곽이 네모 반듯한 성터이다. 성곽 밖으로 넓고 깊은 해자가 만들어졌고, 요천물을 끌어들여 채웠다. 사방에 성문이 있었으며, 성문마다 해자를 건너는 다리가 있었는데, 정유재란 때 왜군과의 싸움에서 이 해자가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성안에는 조선 태조의 전패를 모시던 객사인 용성관(龍城館)과 관아 등 건물이 다수 있었고, 성문 중에서는 남문이 가장 장대하다. 남문에는 홍예를 튼 석축이 있으며 그 위에 완월루라는 누각이 올라서 있다. 갑오농민전쟁 때 동문과 남문이 소실되고 서문과 북문은 일제강점기 때 헐렸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원성 (답사여행의 길잡이 6 - 지리산 자락, 초판 1996., 16쇄 2009., 돌베개)

남원성 안쪽에서 교룡산성을 보고 사진 찍으면 위와같은 사진이 찍힌다.전선(電線)을 지중화(地中化)해야하겠다.
또다시 남원시청과 문화원,한전 남원지사에도 전화를 해야겠구나.
한전에 전화하니까 자기들이 할일이 아니라고한다.일을 찾아서 할줄 모르는 ,월급만 잘 받아 먹는 유능한 사람이 하는 말이렸다.
다시 남원시청에 전화를 했는데,시장과 시의원,시의 공무원들이 직을 걸고 해결해야할 사항이라고 조언을 해줬다.
일을 안하고도 월급과 보너스를 타먹는 사람들이 있고,열심히 일하는 나는 보너스도 없는 사람이다.
일을 안하는 사람들이 모여앉아서 정치인과 대통령 욕을 할 때,생기는 돈도 없지만 나는 열심히,잃어버린 역사를 찾는 일을 하고 있다.

깻잎으로 미꾸라지(추어)를 싸서 튀겼다.추어튀김


남원 광한루 주차장에 주차하고 바로옆 정옥추어탕집에 들어갔다.주인아지매는 거제에도 추어탕집을 운영하고 있다고 하는데 수십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남원 맛집 정옥추어탕 전화번호:063-635-7087
남원 춘향전에 나오는 이도령이 성도령이고 이름은 성이성 선생인데 임란직후 남원부사로 와있던 아버지 '성안의'를 따라왔던 책방도령이라고 전해주었다. 성이성 선생이 나중에 문과급제하여 암행어사를 몇번 나갔는데,바로 여기 남원땅에 와서 부친을 따라와서 젊었을 때 춘향이와 놀던 추억을 생각하면서 회고를 하였는데,양반으로서 신분을 밝힐 수 없었는데 암행어사 출두장면 같은 그런 내용을 임진왜란때 활동했던 산서 조경남 의병장이 '속잡록'에 실려있는 내용에 비슷한 내용이 실려있다고한다.
http://cafe.naver.com/karmadream/2456 -요기를 클릭하시면 남원부사 성안의와 책방도령이었던 암행어사 성이성 선생에 대한 자료(연세대 국문과 설성경 교수)를 볼 수 있다.
사실 맨처음 남원 역사기행을 계획한 것도 조경남의 난중잡록을 전시한다고 해서 가볼려고 한것이다.계서당 성이성 선생의 종손인 성기호(봉화 '계서당' 종손)님과 전화로 통화를 했지만 먼거리라 힘들 것 같아서 문득 생각난김에 답사를 떠난 것이다.
남원추어탕 식당을 운영하시는 분들도 나중에 봉화 계서당 종손과 기념사진을 찍어서 벽에 걸어둘 시간이 아마도 오겠지?
'이도령과 성춘향'이 아니고 성을 바꾸면 된다.바로 '성도령과 이춘향'이다.

첫댓글 교룡산성은 전시 남원주민이 대피하는 기능을 했겠군요.
그렇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