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만리 7월 14일 일요일. 여행 16일 차.
여행이 피곤해지는 이유는 일요일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신선계(神仙界)인 페리메도우(요정의 초원)여정을 마치고 인간계(人間界)로 복귀한다. 어제 저녁 남겨둔 음식으로 한국식 미역죽을 쑤었다. 속이 편안하다. 계란 후라이 위에 따뜻한 짜장 쏘스를 끼얹으니 이 또한 별미다. 집에서라면 상상 못 할 음식이다. 하지만 여행 길 야전에서 뭐 이것 저것 모양을 따지겠는가. 산장의 마당에는 댕댕이가 아예 늘어져 계속 취침중이다. 어제 밤에는 꾀나 친한 척, 아는체 하더니 이제는 나그네가 떠나든지 말든지 아랑곳하지 않는다.
식사를 마쳤으니 서둘러 하산길에 오른다. 일곱시가 좀 못 된 시간이다. 아홉시에 저 아래 '타투'마을에서 이틀 전의 그 찦차를 만나기로 약속해 둔 것이다. 배낭을 둘러 매고 스틱을 챙기고 신발끈을 고쳐 맨다. 두시간 동안 말 잔등에 걸터 앉아 올랐던 길을 이제는 걸어서 내려간다. 내리막 길이니 하산 시간은 여유가 있다.
손톱이 많이 길었다. 고산증 핑계로 잘. 씻지 않았더니 손톱 밑에 때가 끼어서 꾀죄죄하다. 하늘은 여전히 흐리고 봉우리는 구름에 가렸다. 이틀 밤 묵었던 산장을 뒤로하고 내려간다. 다시 또 올 일은 없으리니 자꾸만 돌아보게 된다. 완만한 경사 길에 흥이 절로 난다. 입에 흥얼흥얼 노래가락이 절로 인다. "도화ㅡ동아, 잘있ㅡ거라. 무릉촌도ㅡ 잘 있거라. 이제 내가ㅡ 떠나ㅡ가며언 어느 년 어느 때에 오랴ㅡ느냐." 심청가 가운데 한토막이다.
구름이 짙게 모이는가 싶더니 이내 굵은 비로 내린다. 준비한 우산이 열 일 한다. 이 우산을 챙겨준 룸메가 새삼 더 고맙다.
하산 길이 편안했던가보다. 마을에 예정보다 일찍 도착되었다. 약속된 찦차도 이미 대기 중이다. 바로 출발이다. 급경사의 산악도로, 내리막 길 시선이 더욱 아찔하다.
우려하던 일이 일어났다. 출발 삼십분만에 엔진 고장으로 운행 불가다. 선 곳이 하필 다른 차가 비켜 갈 수도 없는 좁은 곳이다. 밀어야만 한다. 하차하여 힘을 보탠다. 일단 고장난 차는 치웠지만 이제부터 걱정이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내려 갈 것인가. 다행히 위험한 절벽 곁은 아니니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내리는 비로 인해 계곡에 물이 불어 소리가 시끄럽다. 궁금하다. 과연 일이 어떻게 진행이 될 것인가.
걱정과는 달리 바로 해결되었다. 아까부터 뒤따르던 차는 저 위에서 여행자를 내려주고 빈 채로 하산 중이었다. 비록 여기가 오지 중의 오지라고해도 오르내리는 차량이 많으니 이런 상황에서 큰 걱정은 필요치 않다. 다만 걱정은 브레이크가 고장나지나 않을까 하는 것 뿐이다.
차량 상태가 확실히 좋다. 조금 안심이다. 역시 앞자리 조수석이 내 자리다. 내림길은 더욱 짜릿하다. 눈 앞에 놓인 가파른 벼랑길을 내려다 보노라면 커브를 돌 때 마다 차체가 저 아래 계곡을 향해서 처 박히는 듯 하다. 그 때 마다 온 몸에 힘이 가며 움찍한다. 이렇게 내 인생 최고의 오프로드를 경험했다.
해발 이천미터 아래인 예의 지프스테이션에 도착하니 슬슬 더워진다. 위와는 다른 진정한 인간세상이다. 비는 그쳤고 해가 나니 당장 달궈지기 시작하는 땅이다. 벌써부터 해발 3,200m의 페리메도우가 그립다.
우리를 태울 승합차가 이미 대기 중이다. 시원하고 조용한 차 안이 천국이다. 차량 번호 '1444'를 보고서 가만히 주역의 괘상을 떠올리며 점을 쳐본다. 양수인 1로 출발하여 그 뒤로 음수인 4가 세번 놓였다. 이는 주역 팔괘 중 '아래에서 움직임'을 상징하는 '진(震)괘'에 해당하니 '이제부터는 중간 관리자의 도움을 받아서 동료와 협조를 통하여 움직임에 안전을 도모하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지금의 상황에 맞아떨어지는 점사다.
다음 목적지인 '나란' 까지는 하이웨이를 따라서 여섯시간을 더 가야한다. 아까 하산길에 짚차 안에서 너무도 흔들려 아침식사는 소화된지 오래다. 간식으로 챙겨온 비스켓이 입에 달다.
지프테이션을 출발한 뒤 다시 인더스강을 따라 내려간다. 카라코람하이웨이(KKH)를 따라 해발 1,000m 언저리의 삼거리까지 내려온 차는 왼편으로 핸들을 꺽어 사이길로(N15) 들어선다. 우리로 말하면 지방도에 해당하는 길이다. 10월 말 눈이 오기 시작하면 여섯달 동안 저 위 4,200m의 바브사르 고개(Babusar Pass)를 넘을 수가 없다. 해를 넘겨 5월이 되어야만이 눈이 녹을 것이다. 이 계절에 맞추어서 여행길에 올랐기에 이 곳을 밟을 수 있는 것이다.
피곤하다. 잠시 쉬어가면 좋겠다. 이제는 장시간 승차가 피곤한 세월이 되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무렵 마춤한 곳이 나타났다. 고개가 시작되는 초입에 세워진 바브사르 게이트(Babusar Gateway). 그 곁에 제법 규모를 갖추 멋진 식당이 우릴 맞이한다. 불땀 좋은 화덕에는 고기 굽는 연기 자욱하고 노천의 테이블엔 손님들이 가득하다. 시선 가득, 생김새가 다른 우리에게 보내오는 눈인사에 호기심이 담겼다. 때마침 이슬람교의 기도시간인가보다. 바닥에 양탄자를 깔고서 메카를 향해 예배하는 무슬림의 모습이 보는 이 마저 경건케한다.
시간을 아껴 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에 오른다. 보슬비가 내린다. 창 밖을 내다보니 이제까지 지나온 메마른 산지와는 달리 풍요가 넘치는 곳이다. 겨울의 많은 눈과 여름의 빗물이 힘을 모아 녹색 세상을 만들었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뾰족 지붕으로 지어진 주택들. 이곳에 눈이 많다는 확실한 증거다. 경사를 많이 두어야만이 쌓인 눈이 쉽게 미끄러져 내릴 것이다.
거의 한시간이 걸려서야 바브사르고개(Babusar Pass)에 올라왔다. 뜻밖에도 이 높은 곳에 놀이 공원이 설치되었다. 대관람차를 비롯하여 회전목마 바이킹 등등 없는 것이 없다. 파키스탄에서는 요즈음이 가장 더운 철이라는데 이곳은 더위와는 아무 상관 없는 곳이다. 삼삼오오 친구들과 함께하는 무리들과 아이들을 대동한 젊은 부모들. 모두가 들 뜬 듯 몸짓이 활달하고 입에는 웃음이 담겼다.
동서남북 막힌데 없이 툭 트인 경치가 피로를 잊게한다. 고갯마루 기념탑 앞에 많은 사람이 줄지어 차례를 기다린다. 모두가 기념사진을 남기려는 것이다. 탑 안의 이정표에 적혔기를 '나란'까지 70km. 오늘 우리의 목적지다.
다시 내려가는 길. 한여름이 되도록 녹지 못한 길가의 눈더미는 냉장고로 쓰이면서 온갖 음료의 보관소가 되었다.
나란(Naran) 초입에 도착하니 거의 오후 8시가 되었다. 페리메도우에서 오전 7시에 출발했으니 무려 13시간 만이다. 이곳은 해발 2,400m의 고지대로써 여름 최고의 피서지로 알려젔다. 시골길 2차선 차도를 가득 메운 차량들. 마치 주차장에 다름 아니다. 계절이 본격적인 피서철이어서 이곳 작은 산골 마을이 수많은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여장을 푼 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거리 구경에 나섰다. 메인도로 양쪽 모두 온갖 종류의 상점들로 불야성을 이룬 가운데 중간중간 자리한 식당들에는 별미를 즐기는 손님들로 가득하다. 비록 거리의 끝과 끝이 그다지 멀진 않아도 너무 많은 인파에 섞여있다 보니 순간에 피곤이 엄습한다. 우리에게는 이곳이 하루밤 묵어가는 경유지일 뿐이다. 어서 들어가 쉬는게 상책이겠다. 오늘 하루가 참 길다. 이제 하늘의 달은 반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