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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
최남선
1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처얼썩 처얼썩 튜르릉 콱.
2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내게는 아무 것 두려움 없어
육상에서 아무런 힘과 권(權)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얼썩 처얼썩 튜르릉 콱
3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가
지금까지 있거든 통기하고 나서 보아라
전시황, 나파륜 너희들이냐
누구 누구 누구냐 너희 역시 내게는 굽히도다.
나하고 겨룰 이 있건 오너라.
처얼썩 처얼썩 튜르릉 콱
4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조그만 산(山)모를 의지하거나
좁쌀 같은 작은 섬 손뼘만한 땅을 가지고
그 속에 있어서 영악한 체를
부리면서 나 혼자 거룩하다 하는 자
이리 좀 오너라 나를 보아라
처얼썩 처얼썩 튜르릉 콱
5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나의 짝 될 이는 하나 있도다
크고 깊고 너르게 뒤덮은 바 저 푸른 하늘
저것은 우리와 틀림이 없어
작은 시비 작은 쌈 온갖 모든 더러운 것 없도다.
저 따위 세상에 저 사람처럼
처얼썩 처얼썩 튜르릉 콱.
6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저 세상 저 사람 모두 미우나
그 중에서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담 크고 순진한 소년배들이
재롱처럼 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너라 소년배 입맞춰 주마.
처얼썩 처얼썩 튜르릉 콱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명시 100선 중 37
part 2 그대의 입술은 꽃으로 말하리
채빈 엮음
[작가소개]
최남선崔南善 | Choe Nam-seon
출생 : 1890년 4월 26일
한성부 남부 명례방 동현계 사정동
(現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2가)
사망 : 1957년 10월 10일 (67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묘동
본관 : 동주 최씨
호 : 육당(六堂)·한샘·남악주인(南嶽主人)
곡교인(曲橋人)·육당학인(六堂學人)·축한생(逐閑生)
대몽(大夢)·백운향도(白雲香徒)
직업 : 시인, 번역가, 역사가
<개요>
본래 독립운동가였다가 변절한 일제강점기의 시인, 번역가, 역사학자. 춘원 이광수, 벽초 홍명희와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렸으며 실제로 역사와 문예에 많은 발자취를 남긴 지식인이지만 이광수와 함께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지식인으로 비판받는다.
동생 최두선은 동아일보사 사장,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생애>
최남선은 시와 역사서 외에도 신문 관련 활동을 하였고 잡지를 발간하였으며 밝 사상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908년에 발간한 잡지 <소년>은 최초로 소년을 타겟팅하여 만들어진 계몽 잡지이다. 근대 한국어 문제의 확립과 톨스토이 번역을 통한 민족 의식의 고취라는 업적을 남겼는데 이 과정에서 이광수가 번역가에서 소설가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918년까지 5개의 잡지 창간을 주도했으나 모두 일제에 의해 폐간당했고, 1919년 3.1운동때는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1921년 10월 출소하였다. 1924년에는 시대일보를 창간하였으나 일제에 의한 비판적인 논조 때문에 폐간되었고 이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객원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학도여 상전에 나서라
최남선이 학도병 권유를 한 친일 선전문.
1928년 일본의 어용 역사 단체인 조선사편수위원회에 참가하였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직을 지내면서 <만몽일보> 편집위원과 경성제국대학에 취업이 안 되자 만주 건국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하였다. 귀국 후에는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의 학병 권고를 위해서 친히 일본까지 찾아가는 열성을 보였다. 일선동조론에도 참여하여서 아래 소개되는 '일선융화론'까지 가면 답이 없게 된다. 때문에 1925년에 나왔던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 역시 결국 같은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 결론만 다르게 나왔다는 점에서 '불함문화론' 시기까지 최남선의 친일을 소급하기도 한다. 최남선의 이러한 활동과 결과물은 광복 이후 극우 민족주의 사학과 교묘하게 융합해 발전하면서 유사역사학-환빠가 등장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당연히 광복 후에는 완전히 버로우해 우이동에서 칩거하면서 역사 연구만 하고 지내다가 결국 반민특위의 소환장을 받고 투옥되는데 그 과정에서 문제의 자열서(自列書)를 작성했다. 자열서에 대해서는 스스로의 죄를 인정했다는 긍정적 측면을 찾으려는 이도 있지만 '해방이 되자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지나치게 무고하므로 이에 대해 나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썼다'는 글이 반성문이 될 수가 없다. 실제로 최남선은 위에도 언급된 5가지 죄목을 들고 있지만 그 모두에 대해서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학문 연구를 위해서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학문을 연구했다는 것이 주요 논지이다. 실제로 문화계 인사들이 친일 활동에 대해서 가장 많이 주장하는 변명거리인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아서 해석하자. 최남선에 대한 변명으로는 "일본과 하나가 된다면 우리도 일본인처럼 부강해져서 잘 살게 되겠지"라는 명목으로 친일을 했다는 것이 있다. 또 하나는 "일본 놈들끼리 멋대로 역사를 왜곡하게 놔둘 바에는 그 위원회에 참가하여 정확한 사료라도 확인해 두는 것이 장기적으로 나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조선사편수위원회에 참여하였다는 것이 있다.
다만 스스로 작성한 자열서를 넘어설 만한 근거는 없다고 봐도 된다. 최남선의 장손 최학주가 쓴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과 같이 근본적으로 친일을 부정하는 책들도 있기는 하지만 최남선의 친일 자체를 부정하는 평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불교 신자이면서도 김홍섭(1915~1965) 판사에게 가톨릭 개종을 권유한 바 있었다. 1955년 인생 말엽에 윤형중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불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했는데 세례명은 베드로였다.
육당 최남선이 사망한 해 독립운동가 장준하는 그가 발행하던 《사상계》 1957년 12월호를 "육당 기념호"로 발간하며 그 권두언을 이렇게 썼다. "육당 선생은 이 민족이 가장 암담한 절망의 골짜기에 처해 있을 때에도 항상 우리와 더불어 있었고, 우리의 가장 친근한 벗이요, 경애하는 스승이었다. 그로 인하여 민족의 생명은 싹을 부지하고, 겨레는 위안을 받고 희망을 갖추어 광복에 이른 것은 만인이 다 아는 사실이다. 한 때 선생의 지조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본의가 어디까지나 이 민족의 운명과 이 나라 문화의 소장에 있었음은 오늘날 이미 사실로서 밝혀진 바요, 항간에 떠도는 요동부녀(妖童浮女)들의 억설과는 전면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赦)하는 법이 없고 인재를 자기 눈동자 같이 아낄줄 모르고 사물을 널리 생각하지 못하는 옳지 못한 풍조 때문에 우리는 해방된 후에도 선생에게 영광을 돌린 일이 없고 그 노고를 치하한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욕된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실로 온 민족의 이름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이 말인즉슨 최남선의 친일 행적은 민족 문화 보호를 위한 것이니까 비판하면 안 된다라는 것인데 장준하의 말과는 달리 최남선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장준하가 죽고 한참이 지나서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이다. 그래서 이 글은 최남선을 통해서 장준하가 비판받는 계기가 되는데 독립기념관 관장을 역임했고 <장준하 평전>을 지은 김삼웅은 이걸 장준하 유일의 오점이라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역시 친일 문학가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김동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을 <사상계>에서 만든 것과 함께 장준하가 비판받는 대목이다.
장준하 사후 장준하를 평가하는 좌담회에서 김준엽과 양호민은 이러한 장준하의 흑역사를 회고하기도 했는데 자신들이 지켜본 바에 의하면 장준하는 최남선과 이광수가 비록 친일을 했다는 오점은 있지만 한국 근대 문학 발전에 공을 세웠다는 점에서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 때문에 이런 권두언을 실고 <육당.춘원의 밤>이라는 문학 행사까지 열었다는 것이다. 다만 <사상계>가 한참 출판되고 있을 당시인 1950년대에도 이광수와 최남선은 친일 행적으로 평가가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처음에 <사상계>에서 이광수와 최남선을 추모하는 <육당.춘원의 밤> 행사를 개최한다고 했을 때 집필진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괜히 친일파로 몰릴까봐 다들 도망가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독립운동가 경력을 가지고 있던 장준하가 직접 총대를 매서 개최했다고 하는데 김준엽은 이 당시 일을 회고하면서 "자신과 장준하가 그나마 독립운동에 가담했으니 망정이지 독립운동 경력도 없이 이런 행사를 개최했으면 친일파로 몰렸을거 같다"고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여담>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제작 당시 허구의 이야기인 백두산 7회 등정설, 전국 답사설, 옥사설을 퍼트린 원흉이다. 그 시초가 동아일보에 투고한 고산자를 회함이고 10년 후 조선어독본을 통해 저 낭설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오직 친일 역사학만 판 것은 아니고 일단은 역사학자라 오랫동안 정체가 잊혀져 있던 신라 진흥왕의 마운령 순수비를 고증해내기도 했다. 또한 "19세기 조선 최고의 백과사전"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덕무의 손자 이규경(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게 했다. 사연은 다음과 같은데 1920년대 중반 어느 겨울밤 국문연구소 위원으로 국어 운동에 기여했던 권보상은 군밤을 사먹는데 군밤장수가 싸주는 종이가 이상해서 보니 고서였다고 한다. 이를 뭉치째로 사 조선광문회로 가져가서 검토를 한 결과 책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로 판명났는데 조선광문회가 해산되면서 <장전산고>는 최남선의 장서가 되었다. 한국 전쟁 때에도 보따리에 싸들고 피난왔지만 최남선이 소장한 원본은 영인하지 못한채 6.25 전쟁으로 불타버리고 대신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던 필사본만 남아 전해지게 되었으며 1~4권은 낙질되어 나머지 56권만 남았다.
군밤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이 군것질을 하는 버릇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유난히 최남선은 군것질을 좋아해서 주머니 속에서는 시조 원고 외에도 항상 호떡, 군밤, 완두콩, 땅콩 등을 넣어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하루는 보성전문학교에서 역사 관련 강연을 했는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다가 군밤 몇 톨이 강단 아래로 떨어졌고 그날 이후 학생들은 최남선이 지나가는 걸 볼 때 마다 "군밤선생"이라고 애드립을 치면서 웃음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어린이 잡지인 <붉은 저고리>를 창간하였는데 이 잡지는 독특한 것이 4컷 만화를 연재하면서 '만화'를 '다음엇지'라는 순 우리말로 소개했다는 점이다. 즉, 다음엇지란 말은 "다음에 어찌될까"라는 뜻인데 "이것은 차례차례 보아가는 웃음거리 그림이니 첫째 그림을 자세히 보아 그 뜻을 짐작하고 다음을 보시면 설명이 없어도 재미있게 알아보시라" 라고 편집자가 창간호에 밝히고 있었다고 한다. <붉은 저고리> 외에도 다수의 잡지와 신문 창간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재홍과 함께 <시대일보>를 창간하기도 했는데 안재홍은 후에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기지만 친일파 논쟁과는 별개로 역시 친일파인 윤치호에게 찾아가서 <시대일보>를 설립하도록 돈 내놓으라고 성화인데 돈도 없고 어차피 상황상 망할거라고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윤치호 일기>에 나온다.
심산 김창숙 선생은 대전형무소에 수감 당시 교도소장이 육당이 쓴 「일선융화론(日鮮融和論)」을 갖고 와서는 감상문을 쓰라고 하자 첫 몇 장을 읽더니 책을 교도소장에게 던지며 “나는 반역자가 미친 소리로 요란하게 짖어대는 흉서(凶書)를 읽고 싶지 않다. 기미독립선언서가 (최)남선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이런 사람이 도리어 일본에 붙어 역적이 되었으니 비록 만 번 죽여도 죄가 남는다”라고 호통친 일화도 유명하다.
책에 대한 욕심이 상당하였다는 증언도 있는데 최태영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황해도 지역 절에 보관된 고서들을 많이 가져갔다고 하며 그 외에 다른 사람에게 책을 빌린 후에는 절대로 반환하지 않았다고 한다. 국내에 있던 책들을 많이 수집했다고 하는데 6.25 전쟁 직전까지 모은 책이 무려 17만 권이지만 안타깝게도 6.25 전쟁을 거치면서 전부 불타버렸다고 한다. 부산에서 책을 쓰던 중에 자료 참고차 다시 서울로 갔는데 전부 불타버린 것을 보고 절규했다고 한다. 만약 불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면 한국 역사를 몇 번은 다시 써야 했을 것이다. 6.25 전쟁이 끝난 이후로도 계속 책을 모아서 2만여 권 정도를 모았는데 고려대학교에 기증했다고 한다.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5-1번지에 고택 '소원(素園)'이 있었는데, 1939년 인쇄소 '신문관' 자리에 세워져 최남선이 1941년부터 11년간 거주했다. 한동안 최남선 유가족 소유였으나 2002년 차남 최한웅 교수가 사망한 후 부지가 두온종합건설에 매각됐고 2003년 1월 25일 철거되어 그 자리에 저층 아파트형 빌라가 들어섰다. 서울특별시 문화재위원회 측이 밝힌 철거 사유로는 "1939년 이래 고택은 세월이 흘러 원형을 잃었고 일제 말 최남선이 해당 고택에 살면서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논설 등을 썼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최남선 후손들과 광복회 등이 보존할 필요가 없다고 진정서를 냈던 것도 이에 한몫했으며 고택에 남아 있던 최남선의 서신 등 잔존 유품들은 현대사 연구가, 고서적 수집상, 관련 동호회 회원 등이 전부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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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처얼썩을 감당할 수 있는 자
누구이더냐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무더위 잘 극복하시고
건필하시길 소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