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계자로 3男을 택한 이유
이에야스가 쇼군 직에서 물러난 것은 그 사건이 일어난 지 꼭 10년이 되는 해였다. 그동안 히데요시의 죽음, 세키가하라 전투, 도쿠카와 바쿠후의 성립 등 대사건이 있었다고는 하나 이 사건의 기억이 이에야스의 머리에서 사라졌을 리 없다. 그가 이러한 비극을 목격했으면서도 굳이 이원정치를 감행한 것은 절대로 히데요시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히데요시와 히데쓰구는 숙질간이므로, 나중에 히데요시에게서 친아들 히데요리가 태어났다는 것이 히데쓰구의 파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히데타다는 이에야스의 친아들이므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부자간이라고 해서 반드시 원만할 수 없다는 것은 전국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특히 이에야스는 맏아들인 노부히데를 자결시키는 통한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에야스가 히데타다를 후계자로 정한 데는 친아들이란 점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후계자로 물망에 오른 것은 차남인 유키 히데야스, 3남인 히데타다, 4남인 다다요시 세 사람이었다. 중신들과 상의한 결과 다다요시는 후보에서 제외되고 남은 두 사람 중에서 택하기로 했다.
히데야스를 지지하는 쪽의 의견은, 그는 무용이 뛰어나고 결단성이 강하므로 쇼군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히데타다를 지지하는 쪽은, ‘지금은 무(武)로써 천하를 위압하기보다는 문(文)을 장려하고 덕으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 히데타다 공은 효심이 깊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므로 그가 차기 쇼군으로 적당하다’고 주장했다.
히데야스의 결단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일화가 전한다.
어느 날 그가 후시미 성에서 승마를 하고 있을 때 항상 그를 수행하던 말구종이 따라와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이것을 본 히데야스는 불끈 성을 내고, 하천한 자가 무엄한 짓을 한다며 그 자리에서 베어버렸다.
히데야스를 지지하는 쪽은 그 일을 예시하면서 히데야스 공이야말로 용기와 결단성이 있는 재목이라고 추천했다. 이때 이에야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만일 히데타다였다면 어떻게 했겠느냐고 물었다.
중신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에야스가 다시 말했다.
“히데타다라면 아마 그를 죽이기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두 마디 주의를 주고 돌려보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처럼 두 아들의 성격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결국 히데타다를 후계자로 정했던 것이다.
히데야스의 과격하고 기민한 성격은 이에야스가 행하려는 이원정치에는 방해가 된다. 히데야스는 결코 이에야스의 노선을 충실히 이행할 인물이 아니다. 당연히 두 사람 사이에는 의견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10년 전에 있었던 히데쓰구의 비극을 되풀이하게 될 뿐이다. 이에야스가 히데쓰구에게 쇼군 직을 물려준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바쿠후(幕府)의 고자세
지배와 통치의 요체는 치외법권적인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 데에 있다.
앞서 미카와 시대에 이에야스가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잇코슈의 거점을 소탕한 것도 결국은 신도들이 그의 통제에 불복하고 외적과 결탁하여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에야스는 바쿠후를 개설함에 있어 모든 세력, 즉 다이묘, 사찰과 신사, 조정, 공경 등의 행동에 법적인 제한을 가하고 이를 탄압했다.
이에야스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조정에 대한 간섭이었다. 당시 조정은 비록 실권은 없이 유명무실한 것이었으나 국민에게 작용하는 그 상징적 의미는 매우 컸다. 그러므로 바쿠후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조정에 대한 간섭이 불가피했다.
그 첫 시도가 1611년에 공포한 3개조의 법령이다. 이것은 도쿠가와 바쿠후가 무인정치의 전통을 계승한 정권이란 점을 조정으로 하여금 인정케 하는 아주 우회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다가 1613년에 이르러 새로 5개조에 이르는 ‘공가제법도(公家諸法度)’를 마련하여 본격적인 간섭을 강화했다.
즉 조정에 출사하는 자로서 법도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자는 유형에 처한다, 주야의 근무를 게을리 하거나 공연히 거리를 배회하고 도박을 하는 등 행실이 나쁜 자는 유형에 처하며, 바쿠후가 집행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져 이러한 금령(禁令)이 나온 것이지만, 이에야스는 이를 구실로 조정에 대한 압력을 행사했다.
이어서 1615년에는 ‘궁전 및 공가제법도’를 공표하여 천황과 조정의 생활 전반에 대해 법적인 규제를 가했다. 우선 제1조에 천황은 모든 일에 앞서 학문을 제일로 삼아야 한다며 우회적으로 천황의 행동을 법령으로 규제했다. 그리고 섭정이나 대신은 적임자에 한하여 임명하며 이 적임자는 노년이 되어도 사임시키지 않는다고 했는데, 여기에는 그 적임자를 바쿠후가 판단한다는 함축성이 개입되어 있다. 그로 인해 이후 고관의 임명에는 바쿠후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쿠후는 조정의 권한에 속하는 사항을 일일이 규제하게 되었는데, 실제로는 그 조문에 나타나 있는 것 이상으로 간섭하였다. 천황과 조정의 자유의사를 극도로 속박함으로써 바쿠후의 권한을 강화해 나갔다.
다이묘에 관한 법령으로는 1611년 바쿠후가 다이묘들에게 내린 ‘무가(武家) 제법도’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바쿠후와 다이묘의 관계에서 기본이 되는 영지·군역·공납에 대해서는 거의 규정하지 않고, 대부분이 다이묘와 그 가신들의 질서 파괴 행동을 엄단하는 금지 조항이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법도를 어기는 자는 영지 안에 두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가신 중에 반역자나 살인자로 지목된 자가 있으면 추방해야 한다. 성을 보수할 때는 반드시 신고하고 신축은 엄히 금지한다. 이웃 영지에서 도당을 결성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보고해야 한다. 사사로이 혼인하는 것을 금지한다 등이다.
사찰에 대해 노부나가는 무력을 행사하여 철저히 파괴하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반면, 히데요시는 불당을 짓고 탑을 세우는 등 부흥시켜 가면서 한편으로는 토지조사와 무기 회수 등을 펼쳐 무력화시키는 정책을 썼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확립한 정치권력과 사찰의 관계를 법률과 제도를 통해 굳혀 나갔다.
도쿠가와 바쿠후가 사원에 관한 일반적인 규칙을 발표한 것은 1665년이었으나 이에 앞서 1615년에 각 종파에 대해 개별적으로 법령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 법령을 통해 바쿠후가 강조한 것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였다.
첫째 승려에 대한 학문의 장려였다. 학문 수행을 소홀히 하는 자는 사찰에 있지 못하게 할 것, 주지나 고위 승직자는 학덕이 높은 자에 국한할 것 등을 규정했다. 이는 승려의 관심을 학문에 집중시켜 사찰의 세속적인 세력확대를 방지하려는 의도였다.
둘째 본사와 말사의 제도 확립이었다. 즉 불교의 각 종파 모두가 본사를 정하고 다른 사원은 여기에 종속된 말사로서 본사의 명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하면 바쿠후는 본사만 확실히 장악하면 그 종파 전체를 통제할 수 있다.
셋째는 승직 임명에 있어서 조정의 권한을 제한한 일이다. 이러한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후에 천황이 발한 칙령을 바쿠후가 무효화하는 일이 많아 천황이 분노하여 양위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다시 14년간의 인내
철저한 지배와 통치를 지향하는 이에야스에게 가장 큰 장애는 65만 석의 큰 영지를 가지고 나라 한가운데에 버티고 있는 히데요리였다. 도요토미 가문은 사실상 지방의 한 다이묘로 전락했으나 영향력은 상실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기요마사, 마사노리 등 앞서 히데요시에게 직속되었던 무장들은 슨푸나 에도로 올 때마다 은밀히 오사카에 들러 히데요리에게 인사하기를 잊지 않았다.
이에야스로서는 묵과할 수 없는 일로 도요토미 가문과 유력한 도사마 다이묘가 연계되어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세키가하라 패전 이후 실직한 무사들을 도요토미 가문이 암암리에 도와주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패전으로 실직한 무사는 전국에 걸쳐 수십 만, 대부분은 취업의 길이 막혀 있으므로 다시 난세가 오기를 바라는 반사회적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전국의 실직 무사를 위시하여 현상에 불만은 품은 자들은 심리적으로 도요토미 가문 쪽으로 기울어졌다. 만약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동정적인 세력과 반항세력이 하나가 되어 폭발한다면, 창설기에 있는 도쿠가와 정권은 토대가 흔들려 붕괴할 위험성이 크다.
따라서 정권의 영구화를 꾀하는 이에야스로서는 반란의 진원지를 그냥 방치할 수 없었다. 그는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두르지는 않았다. 서서히, 그러나 착실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무려 14년이나 기다리다가 오사카 쪽에 손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야스의 압박작전은 1605년 쇼군 직을 히데타다에게 물려주었을 때 행동으로 옮겨졌다. 이때 그는 히데요리에게, 상경하여 새로운 쇼군에게 복종하는 예를 드리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오사카 쪽이 거부하자 일단 후퇴했다가 2년 후 슨푸 성 수축공사 때 다시 지시를 내렸다. 인근의 다이묘들과 똑같이 그에게도 부역하기를 요구한 것이다. 바쿠후의 통치권이 전국에 골고루 미치고 있으므로 예외를 인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오사카 쪽에서는 크게 노하여 5대 원로의 하나인 도시나가에게 부역의 철회를 주선하도록 의뢰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은퇴했다. 결국 도요토미 가문은 이에야스의 요구에 응하고 말았다.
이에야스의 끈질긴 압박작전은 그 뒤에도 계속됐다. 1611년 3월, 고미즈노오(後水尾) 천황의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를 니조(二條) 성으로 불렀다. 이때도 오사카 쪽에서는 분개하며 응하지 않으려 했으나 기요마사, 요시나가 등이 중간에 나서 ‘거듭되는 항명은 이에야스에게 처벌의 구실을 준다’고 충고해 겨우 히데요리의 상경이 이루어졌다.
니조 성의 회견으로 히데요리를 형식적으로나마 복종시킨 이에야스는 상경한 다이묘들에게 3개 조항으로 된 서약서에 서명하게 했다. 여기에는 통제를 강화하여 도요토미 가문을 압박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이 후에 확대되어 앞서 말한 ‘무가 제법도’라는 법령이 되었다.
한편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의 재정을 고갈시키는 작전을 폈다.
당시 오사카 성에는 막대한 양의 금괴와 금화가 비축되어 있었다. 난공불락의 성이라 일컫는 오사카 성이 그 엄청난 금을 가지고 저항한다면, 이쪽의 손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권하여 각지의 사찰을 재건·수축하여 죽은 아버지의 명복을 빌라고 설득했다.
그 제의에는 지금까지 무슨 일에나 반대하던 요도 부인도 선뜻 응했다. 그녀는 신앙심이 깊다기보다는 미신에 빠져 있었다. 이리하여 오사카 쪽에서는 세쓰(攝津)의 덴노(天王) 사를 비롯하여 무려 20개가 넘는 사찰과 신사에 시주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요토미 가문은 호코(方廣) 사에 거대한 대불(大佛)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대불 건조는 돌아가신 타이코 전하의 숙원입니다. 반드시 이룩하십시오. 나도 미흡하나마 협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라고 히데요리 모자를 격려한 것은 이에야스였다.
대불의 건조는 1602년부터 착수하여 10년 후인 1612년에 끝났다. 그동안 오사카 성의 금은은 고갈되어, 친동생인 히데타다 부인에게 협조를 부탁하게 되었다.
한편 그동안에 도요토미 가문이 키운 기요마사를 비롯하여 요시나가, 나가마사, 요시하루, 토시나가 등 유력한 다이묘들이 병으로 쓰러졌다. 오사카 쪽으로서는 팔다리가 잘린 상태가 되었다.
호코 사의 대불전과 대불 및 범종의 낙성식은 1614년 8월에 거행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행사를 며칠 앞두고 별안간 에도에서 낙성식 연기 명령이 내려왔다.
용마루에 도편수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고 종명(鐘銘)에 새겨진 ‘군신풍락(君臣豊樂), 자손은창(子孫殷昌)’ 이라는 여덟 자와 ‘국가안강(國家安康)’이라는 넉 자가 무엄하다는 이유였다.
|
최후의 명연기
용마루에 도편수의 이름을 넣지 않는 것은 고금의 관례이고, 종명도 글자 그대로 새겨 읽으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의도를 간파한 측근의 학자 그룹 중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왜곡하여 해석하는 자가 있었다.
“국가안강은 이에야스(家康)라는 이름을 둘로 갈라놓은 것으로 무서운 악의가 숨어 있습니다”
“군신풍락 자손은창은 도요토미 가문을 주군으로 삼아 자손의 번창을 즐긴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렇게 해석한 이는 다름 아닌 하야시 라산, 수덴(崇傳) 등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이에야스는 매일같이 학자를 불러 특강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 정도의 간단한 글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그는 학자들의 해석을 받아들였다.
여기서 이에야스는 73세의 생애를 통해 터득한 노회함을 연기해 보였다. 그는 크게 노하여, 아니 사실은 회심의 미소를 띠고 사자를 오사카로 보내 힐문했다. 그리고 수습책으로 히데요리와 요도 부인은 에도로 옮겨올 것, 오사카 성을 비우고 영지를 교체하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것은 최후통첩이었다.
오사카 쪽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조건의 수락은 곧 도요토미 가문의 멸절을 의미하기 때문에 강경하게 맞섰다. 이에 히데요리 측은 도요토미 가문의 최고 원로로 그 동안 바쿠후와의 관계를 조율하고 있던 가타기리 가쓰모도(片桐且元)를 살해하려 했으나, 그는 이를 알아차리고 성에서 탈출했다. 그러자 히데요리는 그의 영지를 빼앗고 이 사실을 에도와 슨푸에 통고했다. 이것은 사실상의 선전포고였다.
나날이 사태가 긴박해지는 것을 보고, 노부나가에게 추방된 후 각지를 전전하며 갖은 고초를 겪던 오다 노부카쓰도 교토의 류안(龍安) 사로 은퇴하고 말았다. 히데요리의 고문격이던 그도 오사카에 남아 있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이어서 무장의 하나인 이시카와 사타마사(石川貞政)도 물러가고 남은 것은 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 등 강경파 무장들뿐이었다.
히데요리와 요도 부인을 정점으로 하는 주전파는 전투를 결의하고 사방으로 지원을 청하는 서신과 사자를 보냈다.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에게는 아끼던 명검을 보냈으나 그대로 돌아왔고, 마사나리는 사자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이에마사는 한 마디로 거절했다. 도요토미 가문의 구신들은 한 사람도 동조하지 않았다.
오사카 쪽에 가담한 것은 통제의 강화와 궁지에 몰린 실직 무사들뿐이었다. 따라서 서군의 병력은 총 10만이라고 하지만 히데요리 직속의 가신단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오합지중에 불과했다.
1614년 10월, 히데요리가 군사를 출동시켰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이에야스는 마침 병상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는 벌떡 일어나, “오사카 토벌은 나의 숙원이었다!”고 외치며 칼을 뽑아 허공을 갈랐다.
이에야스와 히데타다의 군사는 모두 20만. 그들은 일제히 오사카 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마사나리, 나가마사 등 도요토미 가문 출신 장수는 포함되지 않았다. 여전히 신중한 이에야스였다.
직접적인 전투는 11월19일에 시작되어 약 1개월 동안 계속됐다. 그러나 주위 수십 리에 걸쳐 방대한 해자를 둘러친 이 천하 제일의 오사카 성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초조감을 느낀 동군 일부는 성곽 밖의 작은 성을 공격했지만 수많은 병사가 해자에 빠지는 등 사상자가 속출했다. 그런데도 젊은 히데타다는 억지로 공격을 감행하려고 했다.
이에야스는 그를 제지했다. 포위전의 1인자로 알려진 히데요시도 30만의 대군으로 오다와라 성을 포위한 채 속수무책이던 적이 있다. 결국 그가 마지막으로 동원한 것은 총포나 활이 아니라 내응과 유인 등 모략전이었다.
마지막 승자, 이에야스
그 히데요시가 오사카 성 준공 때 의기양양하게 내뱉은 말이 있었다.
“이 성을 함락할 수 있는 방법은 장기적인 포위전 외에 외곽의 해자를 메우는 일밖에는 없다”
이에야스의 뇌리에 문득 떠오른 것은 그 말이었다.
‘그렇다, 일단 강화를 맺고 나서 싸우기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는 곧 화평 교섭을 시작했다. 적의 급소는 요도 부인과 하루나가였다. 화평 공작은 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처음에는 기세가 등등하던 요도 부인도 네덜란드제 대포로 덴슈가쿠를 공격당해 시녀 몇 명을 잃은 뒤부터는 갑자가 사기가 떨어져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이에야스는 탐지했다. 마침 성안에는 요도 부인의 동생으로 미망인이 된 조코인(常高院)이 있고 동군에는 그녀의 아들 교코쿠 다다타카(京極忠高)가 있었다. 이에 조코인을 다다타카의 진지로 불러내고 이에야스 쪽에서는 그의 소실 아챠(阿茶) 부인에게 혼다 마사스미를 딸려 교섭에 임하게 했다.
이리하여 오사카 성은 본성만 남기고 모두 철거한다, 하루나가 쪽에서 에도에 인질을 보낸다는 조건하에 앞서의 요구사항을 모두 철회하고 강화를 성립시켰다.
그런데 이 밖에 명문화하지 않은 희망 조항이 있었다. 그것은 도요토미 쪽과 강화 교섭에 나섰던 마사스미가, “오고쇼님의 출전 기념으로 하다못해 성 외곽의 해자라도 제거하고 싶다”고 제안한 일이었다. 도요토미 쪽에서는 그 정도의 일이라면 굳이 거부할 필요가 없다고 안일하게 생각한 나머지 승락하고 말았다.
해자 제거작업은 12월 21일부터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동원된 인부는 수만에 이르는 다이묘들의 병사였다. 성을 포위했던 군사들이 대번에 인부로 변했다.
순식간에 셋째 성의 해자가 메워지고, 내친 김에 둘째 성과 본성의 해자까지 메우고 말았다. 이것은 공사의 착오가 아니라 처음부터 그런 지시가 내려져 있었던 것이다. 현장의 총감독은 마사스미, 그 뒤에는 이에야스가 있었다.
|
이에야스에게 속은 요도 부인
도요토미 쪽은 나중에야 이 사실을 거세게 항의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마사즈미는 “현장의 인부들이 착각한 모양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계속 사과만 할 뿐이었다.
하루나가는 마사스미를 상대해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교토로 올라가 이에야스에게 면담을 청했다. 이에야스 곁에는 마사스미의 아버지 마사노부가 있었다. 그는 하루나가의 항의를 받고, “아들 녀석이 어이없는 실수를 했군요. 반드시 할복을 명하는 것으로 사과를 드리겠소”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해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도요토미 쪽에서는 이때서야 비로소 이에야스의 계략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듬해 4월, 이에야스는 서둘러 전쟁준비를 시작한 도요토미 쪽을 비난하면서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오사카 성을 공격했다. 이때 서군은 10여 만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겨울과는 완전히 양상이 달랐다. 주위에 해자가 없는 성은 민가와 다를 바 없었다. 서군은 농성도 할 수 없게 되어 전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해 나왔다.
이에야스가 뜻했던 대로 그들을 야전에 끌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더구나 서군은 지휘계통도 확립되지 않은 혼성부대였다. 드디어 열흘 만에 서군은 2만의 사상자를 내고 대패했다. 5월8일 아침이었다. 히데요리와 요도 부인은 불탄 덴슈카쿠 밑에 숨었다가 자결하고, 오노 하루나가는 전사했다. 이로써 도요토미 가문은 2대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인내와 집념으로 명실상부하게 천하의 패권을 장악한 이에야스도 그 이듬해인 1616년 4월17일 슨푸에서 75세의 삶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유훈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인간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르면 안 된다. 무슨 일이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걸 알면 굳이 불만을 가질 필요가 없다. 마음에 욕망이 생기거든 곤궁할 때를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근본, 분노는 적이라 생각하라. 승리만 알고 패배를 모르면 해가 자기 몸에 미친다. 자신을 탓하되 남을 나무라면 안 된다. 미치지 못하는 것은 지나친 것보다 나은 것이다.’
이것은 후세의 위작(僞作)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이보다 더 그의 처세법을 정확히 표현한 것도 없다.
여기 언급된 많은 사항 중에 단 하나도 제대로 지키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에야스는 그 모두를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지켰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 사람을 일본 역사상의 3대 영웅이라 부른다. 사실 일본을 통일한 고대의 전설적인 영웅을 제외하면 이 세 사람이 일본 역사에 가장 큰 발자취를 남겼다.
이들은 모두 독자적인 힘으로 천하를 손에 넣었다. 바쿠후 말기의 유신 때에도 많은 영웅이 있었으나 그 어느 누구도 혼자의 힘으로는 나라의 방향을 바꾸지 못했다. 그들은 힘을 합쳐서야 겨우 왕정복고를 이루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가마쿠라(鎌倉) 바쿠후를 연 미나모토(源)씨는 간토 실력자의 조종을 받았고, 무로마치(室町) 바쿠후의 아시카가(足利)씨도 지방의 다이묘들이 지지하지 않았다면 정권을 유지할 수 없는 허약한 지배자였다.
이들에 비해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는 독력으로 정권을 창출했다. 이 세 사람은 릴레이식으로 바톤을 이어받아 천하를 장악했으나, 저마다 독자적인 창립자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대책 하나만 보아도 이를 보호한 노부나가, 금교(禁敎) 정책을 쓰면서도 무역의 이익을 추구한 히데요시, 금교와 무역을 제한한 이에야스 등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노부나가는 혁명적인 천재였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는 데 선인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 자신의 파격적인 발상만으로 난세를 헤쳐나갔다. 그에게는 군사(軍師)도 없었다.
특유의 판단으로 남이 생각지도 못한 전술과 전략을 개발하고 이를 모두 성공시킴으로써 라이벌의 의표를 찔러 천하통일의 길을 앞당겼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인심 장악에서 결정적인 약점을 드러내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발굴한 농민 출신의 무장이었다. 그는 노부나가의 부하로 종횡무진 지략과 권모술수를 발휘했다. 야전의 경험을 쌓아, 무장한 군단의 이동능력이 하루 50리에 불과하던 시절에 무려 200리나 진격하는 전격작전을 감행하여 적의 허를 찌른 일이 종종 있었다. 그는 무장으로도 귀재지만 정치면에서도 발군의 기량을 발휘했다. 고마키·나카쿠테 전투에서 이에야스에게 패전하고도 뛰어난 정치력으로 그를 굴복시켰다.
그러나 만년의 히데요시는 발전하는 국운에 발맞추어 이를 경영할 역량이 부족했다. 성격적인 결함도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조선 침략이란 무모한 도전을 감행했다가 자신의 파멸과 정권의 몰락을 동시에 초래했다.
이에 비해 이에야스는 무슨 일에나 신중을 기하고 판단하는 인물이었다. 야전의 제일인자임을 자타가 공인하고, 용맹과 결속력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막강한 미카와 무사의 뒷받침이 있는데도 히데요시에게 굴복했다.
그러나 여기에 이에야스의 강점이 있었다. 인내가 그것이다. 인내는 굴종과는 다르다. 자기 제어 능력이고 그랜드 디자인을 지속하는 의지다. 시대의 흐름을 예리하게 내다보는 안목이다. 일단 기회를 포착하면 지체없이 돌진하는 행동력의 밑거름이다.
‘인내’의 이에야스
이 세 사람의 인물을 단적으로 비교하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한다.
‘두견새가 울지 않을 때 노부나가는 때려죽이고, 히데요시는 울도록 만들며,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
여기서 ‘두견새’를 ‘상황’이란 말로 바꾸어 놓으면 더 이해하기 쉽다. 즉 노부나가는 어떤 일을 해야 할 때 그럴 상황이 아니라도 과단성 있게 추진하는 경향이 있다. 히데요시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지략을 짜내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에 비해 이에야스는 오로지 기다리면서 자연적으로 상황이 형성될 때까지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쉽게 표현하면 ‘무단’의 노부나가, ‘지모’의 히데요시, ‘인내’의 이에야스가 된다.
적을 쓰러뜨리고 난세를 평정하여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무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을 마무리하는 데는 남다른 지모가 필요하다. 그러나 천재형인 무단적 인간이나 지모의 인간으로는 안정된 천하를 유지할 수 없다. 그들의 무단과 지모는 수습된 혼란을 되살아나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기업하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얘기를 한다. 창업자에게는 노부나가형의 인간이 적합하다.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 경쟁 상대를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하여 기업의 기초가 다져졌을 때 히데요시형의 인간이 나오면 조직이 더욱 크게 발전한다.
그러나 안정기에 접어든 기업에는 노부나가형이나 히데요시형의 리더는 필요치 않다. 그들의 모험심이 조직을 와해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관계를 슬기롭게 조정하는 이에야스형의 인간이 활약할 무대가 필요한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는 지금도 살아 있고 앞으로도 살아 있을 그러한 인물이다.(끝)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