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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분원의 나눔입니다
+ 마르 3, 22-3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당신께서 성령의 힘으로 마귀 쫓아내는 일을 하신다는 것을 밝히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9)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다니 말입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속죄양이 되셨는데, 어찌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혹 하느님의 자비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왜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한 죄”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용서하지 않는 죄”가 아니라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는 점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셔도 그가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곧 용서받지 못함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도 악마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의 결함이 아니라, 그들의 선택이 지닌 돌이킬 수 없는 특성 때문”(393항)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는 게 아니라 용서하시지만, 인간이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용서받지 못한 죄”라는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도대체 어떤 죄를 말할까?
그것은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의지적으로 배척하고 비난하거나, 혹은 사탄의 일로 단죄하거나 방해하거나 핍박하는 죄를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율법학자들이 바로 그런 죄에 걸려든 이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왜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되는 걸까?
그것은 용서를 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고의적으로 방해하여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바람에 새 생명으로 태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곧 빛을 주시고 성화시키시는 성령의 활동을 스스로 제외시킴으로써 결국 구원의 가능성이 상실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성령의 활동을 거부한 바람에 용서가 차단되어 버린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달리 말한다면, 그것은 주님이 아닌 피조물, 특히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따르는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우상숭배에 빠진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앞세우다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거스르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 혹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당장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 당장, 용서하시는 성령을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 이영근 신부님 강론입니다.
1월27일 [연중 제3주간 월요일]
마르코 3,22-30
성체를 모독한 자에게 회개의 기회가 주어질까?
오늘 율법 학자들은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듭니다.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령과 악령을 구분할까요?
진짜 부모가 주는 것과 가짜가 주는 것의 차이를 알면 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요? ‘평화’입니다. 그래야 자녀가 착하게 자라 세상에
적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불안’을 준다면 그것은 창조자에게서 오는 영이 아닙니다.
이것이 영을 분별하는 가장 완전한 기준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거나 마귀가 나간 존재들이 느끼는 것은 기쁨과 평화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찬미합니다.
이런 결과를 보고도 율법 학자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조심하라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성령은 믿음으로 이끄는 하나의 ‘초대’와 같습니다.
‘성령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초대장’입니다.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이나, 동방박사들에게 나타난 별들은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악령을 쫓아내는 성령도 그러한 표징을 통해 사람들을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유산은 아들이 아버지를 공경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 성령과 같습니다.
이 초대장을 거부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 초대장의 가치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한 아들이 회개는 힘이 들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아버지의 자비를 믿고 회개를 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가 회개하기 어렵게 만든 원인은 무엇일까요?
바로 ‘양심’입니다.
우리 안에 양심이 있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그리고 그 양심은 ‘정의 시스템’입니다.
양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하게 만드는 게
양심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뜻을 들어주며 음식도 흘리지 않게 먹게 되고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하여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양심이 없다면 어떤 존재도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양심 때문에 지옥에도 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에 무조건 양심이 발현하여 성장합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사람들은 거짓말과 자기 욕심에 사로잡혀 양심을 속이는 일을 종종 하게 됩니다. 이것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결국 하느님의 초대까지 거부하거나, 심지어 그 초대가 악한 것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양심상 하느님께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초대는 하느님의 피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고 조롱하였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이것을 허락하지 않고 차라리 그분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하기보다는 지옥에 가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중요한 갈등 구조는 전과자 장 발장과, 법과 정의를
절대시하는 경찰관 자베르 사이의 대립에서 비롯됩니다.
장 발장은 미리엘 주교의 자비로 새 삶을 살게 되고, 자베르는 “범죄자는 결코 변할 수 없다”고 믿으며 장 발장을 악으로 단정합니다.
그러나 시가전 중 자베르가 위기에 처하자 장 발장은 복수 대신 “이 사람이 악령인지, 혹은 진정한 선인지”를 고민하던 그를 살려 주어, 오히려 ‘자비와 용서’를 베풉니다.
자베르는 이 모순을 견디지 못합니다.
“악이라고 믿었던 자가 선행을 한다면, 내가 믿어 온 법과 정의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양심의 충돌 속에서 그는 자신이 세운 절대적 틀을 무너뜨릴 자유를 얻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이는 복음서에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마르코 3,29)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악령’으로 치부하거나 거부하는 행위는 스스로 구원의 길을 막아버리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의 초대를 뒤늦게 후회하면서도, “나는 용서받을 수 없다.”라는 절망에 빠져
돌아오지 못한 것과도 닮았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용서가 찾아왔음에도 스스로를 옭아매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이 자베르의 비극이며, 이는 성령을 거부하는 영혼의 파멸을 경고하는 대표적 사례가 됩니다.
나라에 대한 불만 때문에 국보 1호 숭례문을 방화한 사람은 다시 잘 살아 보자는 나라의 초대에 응해서 편하게 잘 살 수 있을까요? 한국 국민들이 자신을 용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어서 세상에 다시 나오더라도 자신이 움츠러들어 온전히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여성 인권 주의자는 왜 하느님이 남성이어야 하며 성체를 불로 태우고 성체에 욕설을 써서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오늘 복음대로 하면 그녀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모독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떻게 세례를 받고 자신이 그렇게 무자비하게 한 성체를 계속 받아모실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한 번만 부르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계속 당신 피의 용서로 부르십니다.
성령은 “내가 너의 부모야!”라고 하는 부모의 피가 섞인 초대장입니다.
부모를 만나는 길은 평화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여러 번의 초대를 계속 거부하는 것도
결국 그 초대가 악하다고 여기는 것이기에 나중에 양심이 하느님의 마지막 초대에 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양심을 우리 안에서 떼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양심상 되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일이 없도록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27일 [연중 제3주간 월요일]
복음: 마르 3,22-30
의인들의 존재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을 드러내는 명확한 표지입니다!
요즘 자주 듣는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평소 늘 젊잖고 예의 바르던 사람,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 불리던 사람들 입에서조차 깜짝 놀랄 정도의 욕이 튀어나와 깜짝 놀란답니다.
하도 어이없는 일,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일, 그야말로 웃픈 일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니
벌어지는 에피소드 같습니다.
뿐만아니라 많은분들의 생활 리듬이 깨진 관계로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습니다.
열이 받쳐 새벽 두시 세시까지 잠이 않오니, 자연스레 관련 뉴스를 지속적으로 접하고, 겨우 겨우 아침이 일어나고를 반복한답니다.
이런 결과를 초래하게 만든 장본인들은 저리 실실 웃으며, 말을 돌리고, 별의 별 해괴망측한
스토리를 만들어가며 상황을 즐기는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애꿎은 사람들이 받으니, 이 또한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 사탄의 존재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사탄이란 노골적으로 하느님 반대편에 서서 인간을 악으로 빠져들게 하는 사악한 무리들입니다.
이 시국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사탄 같은 존재들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님을 실감합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는 거짓말이 청산유수처럼 줄줄 흘러나옵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천박한지 듣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름 확고한 의지와 강한 충성심으로 무장해있지만, 그 끝이 죽음이요 멸망인지 모르고
불나방처럼 불속으로 달려드는 사람들이 참으로 가련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라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옵니다.
하도 답답해 이렇게나마 정말이지 지극히 소극적이고 정제된 표현을 시도해보는 저를 보고 사탄의 자식,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마귀라고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토록 나라 전체와 국민 전체를 사분오열 갈기갈기 찣어놓는 사탄의 무리들이 조속히 무대 뒤로 사라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위안이 되는 측면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난세에 영웅이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위기 상황 앞에서 옥석이 가려진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부각되었고, 일제강점기때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유관순 열사 등등 의인이 출몰했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참담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마냥 죽어라 죽어라 하지 않습니다.
아무 개념 없는 사람들만 윗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와중에 용기있게 진실을 말하는 의인들이 등장합니다.
중차대한 위기 상황이 극적으로 타개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상황을 반전시키는 애국자들이 등장합니다.
저는 요즘 참으로 고통스런 하루하루를 지내면서도, 이 비참한 우리나라의 현실 안에서도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제 두눈으로 똑똑히 확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군가의 양심을 건드리십니다.
용기를 내게 하십니다.
진리를 선포하게 하십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중요한 표지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우리의 하루도 사탄의 존재를 드러내는 하루가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을 명명백백하게
만천하에 드러내는 의인의 삶으로 엮어가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주간 월요일 강론>
(2025. 1. 27. 월)(마르 3,22-30)
<지금도 마귀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한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마르 3,22-30).”
1)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율법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라고 말한 것은, 단순히 시기심과 적대감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생각했습니다(요한 10,33).
마귀는 하느님께만 복종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마귀는 ‘사람의 힘’으로는 쫓아낼 수 없고,
‘하느님의 힘’으로만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이 생각해 낸 논리가 바로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힘도 아니고 하느님의 힘도 아니라면,
남은 것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뿐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억지 논리를
‘상식적인 논리’로 반박하십니다.
만일에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에 마귀 우두머리의 힘이 사용되었다면, 그것은 사탄의 자멸행위가 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반박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사탄은, 또는 마귀들은 자살을 할 수 없는 존재이고, 자멸행위를 할 수 없는 존재”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들에게는 오직 생존본능밖에 없습니다.>
27절의 ‘힘센 자’는 마귀들이고, 마귀들을 묶어 놓는 ‘더 힘센 자’는 예수님입니다.
여기서 묶어 놓는다는 말은 쫓아낸다는 뜻입니다.
‘힘센 자의 재물’은 마귀들의 억압과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고, 재물을 턴다는 말은, 사람들을 마귀들의 억압과 지배에서 해방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은,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마귀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쫓겨난 것은,
예수님의 명령은 곧 ‘하느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마귀들을 쫓아낼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쫓아냈고(사도 16,18),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쫓아내고 있습니다.>
3)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은 ‘일반적인 죄’인데, 그런 죄들은, 무슨 죄든지 간에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부정하는 자들, 특히 구원과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라는 말씀은, “회개해도 소용없다.”는 뜻도 아니고, “회개해도 용서받지 못한다.” 라는 뜻도 아니고, “용서받기를 거부하고,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지옥으로 직행하게 된다.” 라는 뜻입니다.
그들 자신들이 용서받기를 거부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라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4) 마귀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 숨어서 유혹하고, 이간질하고, 갈등과 분열을 부추기고,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마귀 들린 현상으로 생각하던 일들이
오늘날에는 대부분 정신병이라고 밝혀지고, 또 의학적으로 치료가 가능한데, 드물긴 하지만 마귀 들리는 일들이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귀가 사람들에게 접근할 때, 자기가 마귀라고
밝히는 경우는 없습니다.
또 마귀의 힘에 물들어서, 또는 마귀의 지배 아래에 있으면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자들이 “나는 마귀 편에 서서 활동한다.” 라고 말하는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실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2코린 11,14ㄴ-15).”
요즘 세상을 보면, 마귀의 세력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자들의 모습에서 보이는 증오심, 탐욕, 이기심 등이 바로 ‘마귀의 세력’이라는 증거입니다.
<‘선, 사랑, 자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다고 주장할 때, 그 행동에 선과 사랑과 자비는 없고, 증오심과 탐욕과 이기심만 가득하다면, 그 신념은 신념이 아니라 거짓 선전일 뿐이고, 그자들은 마귀의 세력에 이미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