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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씨의 후예,왕건의 활동지역과 고려지명(중국고금지명대사전)
2002 율곤학회
중국 사천성 성도(成都)에 있는
고려태조 왕건의 묘.
1993년 답사기행 때 촬영.
① 왕건(王建)의 출생과 혈통
처음에는 전촉(前蜀) 나라를 세웠으나…
※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있는 왕씨계보(王氏系譜)에 의하면, 왕씨(王氏)의 선조는
개마고려대족야(蓋馬高麗大族也)라고 했다.
여기서 개마고려(蓋馬高麗)라 하는 것은, 개마대산(蓋馬大山)에 있던 고구려(高句麗)라는 뜻이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개마대산은 개마현(蓋馬縣)에 있다고 되어있다.
개마현은 현도군(玄菟郡)에 속하고, 개마대산이 있던 곳은 평양성(平壤城) 서쪽이며,
평양성은 즉 왕험성(王險城)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지도를 보면 섬서성(陝西省) 서안에서 서남쪽 태백산(太白山)이 있는 부풍현(扶風縣) 일대에
개마대산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 왕씨의 선조들은 고구려인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망하자 건현(建賢)이란 사람이
군장(君長:군신의 장)이 된 후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후당(後唐) 장흥(長興 AD.930~933년) 때,
권지국사(權知國事)로 후당 명종(明宗 AD.926~930년)으로부터 임명받아
건원도주도독충대의군사(建元菟州都督充大義軍使)가 된 후에 고려왕으로 오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고려도경에서 보면 건원도주도독충대의군사(建元菟州都督充大義軍使)가 고려왕(高麗王)으로
봉작을 받았다고 했다.
여기서 건원(建元 AD.343~344년)은 동진(東晋) 때 강제(康帝) 사마악(司馬岳)을 말한다.
※ 고려도경에서 보는바와 같이 왕씨의 가문은 본래 고구려의 큰 부족인 군신의 집안에서
파생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본래의 성(姓)은 왕씨(王氏)가 아니라 고구려의 씨족(氏族)에서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왕씨의 성은 본래 고씨(高氏)의 집안인 것을 고려도경에서는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고려도경에 의하면 북송(北宋)의 태조(太祖)였던
조광윤(趙匡胤 AD.960~963년)의 아버지는, 후한(後漢) 3代
건우(乾佑) 유승우(劉承佑 AD.948~950년)이며, 유승우의 조상은 동진(東晋)
7代 강제건원(康帝建元) 사마악(司馬岳 AD.343~344년)이다.
말하자면 사마악의 후손이 후한 3대 건우(乾佑)인 유승우(劉承佑)로 이어지고,
유승우의 아들은 북송(北宋) 때의 조광윤(趙匡胤)으로 성씨(姓氏)가 바뀌면서,
다른 나라로 혈통이 이어짐을 볼 수 있다
※ 성씨가 바뀌는 것은 어떤 나라에 등극할 때 그 나라 왕의 성(姓)을 따르는 것이 상식이다.
그리고 왕이 다른 성(姓)을 주는 경우도 같다.
예를 들자면 황제(黃帝 BC.2679년)의 아들이 25명이었는데, 성(姓)을 받은 아들은 고작
14명이라고 사기(史記)에는 기록되어 있다.
황제(黃帝)의 아들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 BC.2578년)는 김씨(金氏)로서,
신라왕의 대부분은 김씨(金氏)로 이어져왔다.
그리고 고구려의 시조는 고신씨(高辛氏 BC.2482년)로 황제의 증손자이다.
본래 황제의 성(姓)은 공손씨(公孫氏)라고 했는데, 후일 희씨(姬氏)로 바뀌었고,
아들들은 희씨 성이 아니라 엉뚱하게 다른 성씨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 제왕운기(帝王韻紀) 본조군왕세계년대(本朝君王世系年代)에서는,
성골장군(聖骨將軍)에서 시조사찬(始祖沙粲)으로 이어지고, 후당(後唐) 때
원덕대왕(元德大王)이었던 숙종(肅宗)인 이형지덕(李亨至德 AD.756~758년)의
왕비(王后)인 정화왕후(貞和王后)로 이어져 왔다.
그 후 경강대왕(景康大王)에서 마지막 당세조(唐世祖)인 장종(蔣宗) 이존욱(李存勖)
동광(同光 AD.923~926년)에 이어, 태조왕건(太祖王建)으로 혈통이 내려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나타난 태조왕건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왕씨(王氏)는 성이며, 건(建)은 죽은 후의 휘호이다.
왕씨는 한주송악군(漢州松嶽郡) 사람으로, 금성태수(金城太守)였던 아버지 융(隆)의 장자이며,
왕건의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이때의 금성(金城)은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임을, 후한서와 여러 정사(正史)에서
밝히고 있다.
당(唐)나라 희종(僖宗) 이현(李儇) 건부(乾符 AD.874~879년) 4년,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 AD.874~884년) 3년인, AD.877년 정유년(丁酉年) 음력 정월 14일에
태조가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 본문에서 한주송악군(漢州松嶽郡) 사람이라 했으므로, 한주(漢州)의 지명을 찾아보았다.
고조선 때부터 삼한(三韓)과 삼국 때까지 한반도에는 한주라는, 한자로 된 지명은 없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103쪽에, 한주(漢州)의 지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唐)나라 때 두었던 곳으로, 당나라 때 이름을 고쳐 덕양군(德陽郡)이라 했다.
송(宋)나라 때는 한주덕양군(漢州德陽郡)이라 했으며, 원(元)나라 때 와서 한주(漢州)라고 했다.
명(明)나라, 청(淸)나라 때에는 모두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성도부(成都府)였으나,
중화민국 때 와서 이름을 고쳐 광한현(廣漢縣)이라고 적고 있다.
※ 한주(漢州)를 당나라 때 덕양군(德陽郡)이라 했으므로,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161쪽에 있는
德陽郡을 찾아보았다.
덕양군은 후한 때 사천성(四川省) 자동현(梓潼縣) 북쪽에 두었다가, 그후 지명을 옮겼다.
그곳은 사천성 수녕현(遂寧縣) 東南이다.
앞에서 보는바와 같이 한주 송악군(漢州松嶽郡)은 중국대륙에 있는 사천성 성도(成都)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기에 태조 왕건은 한주 송악군에서 태어났으므로,
묘 역시 사천성 성도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 고려사(高麗史)를 살펴보기로 한다.
唐나라 세조의 장자(長子) 어머니는 당나라 원덕대왕(元德大王)이었던
숙종(肅宗 AD.756~758년)인 이형(李亨) 지덕(至德)의 왕후인 정화왕후(貞和王后)
한씨(韓氏)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당나라 세조는 당무후(唐武后)인 무종(武宗 AD.841~860년) 이전(李瀍)인
회창(會昌)이다.
그러니까 당나라 세조였던 무종(武宗)의 아들인 태조 왕건은 희종(僖宗 AD.874~877년)인
이현(李儇) 건부(乾符) 3년에 태어났다.
고로 AD.877년 정유년(丁酉年) 음력 正月 十四日에, 왕건은 당나라 혈통으로 한주 송악군에서
출생한 것으로 되어있다.
※ 고려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혈손(血孫)으로 고려(高麗)를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인
한주(漢州)였던 송악군(松嶽郡)에서 건국하게 되었다.
최초에는 전촉(前蜀) 나라를 세웠으나, 후당(後唐)에게 망한 후 궁예(弓裔)의 부하로 들어가
활약하였다.
태조왕건이 전촉(前蜀)을 건국한 연대는 AD.918년으로,
거란(契丹) 태조(太祖) 신책(神冊 AD.916년)이다.
그러므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태조왕건의 건국연대를 전촉(前蜀)을 세운
AD.918년으로 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고려는 고구려의 혈통을 이어 동진(東晋)에 이르고,
따라서 당나라 숙종인 원덕대왕의 장남으로 금성태수 융이었던 세조 무종으로부터
태어나게 되었다.
왕건의 아버지는 금성태수로 있다가 후당(後唐)의 왕으로 등극한 셈이다.
※ 한무제(漢武帝 BC.140~135년)는 우거(右渠)로서, 조선을 멸한 후 고려현(高麗縣)에
원도군(元菟郡)을 속하게 했다.
그 후 왕망(王莽 AD.9~13년)은 군사를 일으켜 흉노(匈奴)를 주살하고 전한(前漢)을
격파한 후 신(新), 즉 고구려(高句麗)를 세웠다.
그리고 후한(後漢)인 동한(東漢)이 실질적인 고구려로 내려왔다.
고려태조 왕건의 선조는 동진(東晋)을 거쳐 당나라의 혈통으로 이어지는 동안 나당(羅唐)에
의해 AD.660년에 백제가 망하고, 8년 후 고구려가 망한 후 당 숙종인 원덕대왕과
정화왕후(貞和王后)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 사람이 무종(武宗)인 이전(李瀍) 회창(會昌)이다.
또한 무종의 장남으로 태어난 왕건은 후당(後唐) 장흥(長興 AD.930~933년) 2년에 고려왕으로
등극하여 26년간 재위하다 67세에 죽은 것으로, 고려도경(高麗圖經)과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삼국사기(三國史記),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 기록되어 있다.
※ 태조왕건의 계보와 건국은 이상과 같이 이루어졌다.
전술한 바와 같이 전촉(前蜀) 나라 때 사천성 성도에서 도읍했다가, 후당(後唐)에 의해 망한 후
궁예(弓裔)의 장수로 활약하다가, 기원후 935년 고려는 송악인 개성(開城)을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으로 도읍지를 정하고 남송(南宋)과 북송(北宋), 그리고 거란을 차례차례 멸망시킨 후
삼한의 대통일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고려는 옛 서경(西京)인 서안(西安)에서 천자국(天子國)으로서서 위업을 떨치게 되었다.
고로 한국의 국제 칭호는 고려인 코리아로 현재까지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의 왕릉이 한반도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다.
고려의 도읍지였던 사천성 성도 좌측 하단 동그랗게 표시된 부분이다.
② 왕건의 활동무대와 지명
한주송악군(漢州松嶽郡)은 사천성 성도(成都)
※ 왕건은 기원후 877년 정유년(丁酉年) 음력 정월(正月) 십사일(十四日),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 남쪽인 한주(漢州) 송악군(松嶽郡)에서 태어났다고,
사서에는 기록하고 있다.
태조왕건은 한주(漢州) 송악군(松嶽郡)에서 태어났다고 했으므로, 그곳이 어디인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漢州松嶽郡. 唐改曰 德陽郡. 宋曰 漢州德陽郡. 元曰 漢州. 明淸皆屬. 四川省成都府.
한주송악군은 지금의 중국 사천성 성도(成都)임이,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103쪽에 기록되어 있다.
※ 왕건이 전촉(前蜀) 나라를 세웠으나 후한(後漢)에 의해 망한 후, 궁예의 장수로 활약할
무렵의 지명은 다음과 같다.
이 지명은 삼국사기・고려사・고려도경・삼국유사・고려사절요 등에 나타난 것을 정리해 본 것이다.
굳이 지명을 정리하고자 한 것은 과연 고려가 한반도에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중국대륙에서 태조왕건과 궁예, 그리고 견훤(甄萱)이 활동했는지의 여부를
이 기회를 통해 확실히 해두려는 데 있는 것이다.
※ 남주(南州)는 사천성(四川省) 만현(萬縣) 서쪽이다.
당나라가 땅이름을 고쳐 초주(楚州)라 했다가, 다시 남주(南州)라 했다.
다시 고쳐 남주군(南州郡)이라 했다. 그 후 다시 남주(南州)라 했고,
이곳은 현재 사천성(四川省) 기강현(綦江縣) 남쪽 90리라고 했다.
남당(南唐) 시에는 땅이름을 고쳐 장주(漳州)라 했다가, 다시 남주(南州)라 했다.
송(宋)나라 때 다시 고쳐 장주(漳州)라 했다가, 송나라는 다시 기미주(羈縻州)라 했는데,
이곳은 사천성 옛 서주부(敍州府)의 경계라 했던 것이다.
※ 철원(鐵圓)은 철주(鐵州)로서, 조선의 평양(平壤),
즉 중국의 서경(西京)인 서안(西安)의 서북인 감숙성 민현(岷縣)의 동쪽이라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381쪽에 기록되어 있다.
철원(鐵圓)은 옛 고구려의 땅으로서 궁예가 태봉국(泰封國)을 세운 곳이라고,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적고 있다.
※ 금성(金城)은 왕건의 아버지인 융(隆), 즉 세조였던 당나라 무종(武宗 AD.841~846년)이
금성태수로 지낸 곳이다.
금성은 금성군(金城郡)으로서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옛 난주(蘭州)와 서영(西寧)의
두 주(州)를 뜻한다.
또한 금성현(金城縣)은 감숙성 고란현(皐蘭縣) 西南이라고,
중국지명대사전 543쪽에 기록되어 있다.
金城은 왕건의 아버지인 세조 무종(武宗)의 말에 따르면,
당나라 대왕(大王)들이 항상 욕심을 가지던 조선의 숙신(肅愼)이었던 변한(卞韓)의 땅이라고,
고려사절요에는 적고 있다.
※ 광주(廣州), 충주(忠州), 청주(靑州), 괴양(槐壤)과 당성(唐城) 즉 당나라 성 등을
태조왕건 20년에 군(郡)과 현(縣)을 모두 정벌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이어서 광주(光州), 금성군(錦城郡) 즉 금성(錦城), 나주(羅州), 양주(良州)까지
정벌한 것으로 되어있다(고려사절요).
※ 광주(廣州)는 하남성(河南省) 노산현(魯山縣)과 양성현(襄城縣)으로 되어있는데,
후일에 광동성(廣東省) 곡강현(曲江縣)과 남해군(南海郡)으로 옮겨졌다.
※ 충주(忠州)는 사천성(四川省) 충현(忠縣)에서 다스린 것으로,
중국지명대사전에는 기록되어 있다.
※ 청주(靑州)는 산동성(山東省) 익도현(益都縣)과 강소성(江蘇省) 단도현(丹徒縣) 東南 80리와
강소성(江蘇省) 강도현(江都縣) 東北으로 기록되어 있다.
※ 괴양(槐壤)은 어디인지 기록이 없다.
※ 당성(唐城)은 당성현(唐城縣)으로 호북성(湖北省) 수현(隋縣) 西北.
※ 광주(光州)는 후위(後魏) 때 산동성(山東省) 액현(掖縣), 즉 지금의 산동반도 내주(萊州)이다.
※ 금성군(錦城郡)은 금현(錦縣)이며, 요(遼)나라 때 영락현(永樂縣)이라 했다.
영락현(永樂縣)은 하북성(河北省) 서수현(徐水縣)이며,
한편 산서성(山西省) 기현(祁縣) 동쪽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산서성(山西省) 영제현(永濟縣) 東南 120리로 기록되어 있다.
금성(錦城)을 금주(錦州) 또는 조양현(朝陽縣)이라 했으며,
일명 설금현(設錦縣)과 도하현(徒河縣)이라 했다.
그리고 한나라 때는 요서군(遼西郡)이라 했다는 기록이다.
※ 조양현(朝陽縣)은 하남성(河南省) 등현(鄧縣) 東南 80리와,
산동성(山東省) 장구현(章丘縣) 西北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조양현(朝陽縣)은 지금의 서안(西安)이다(왕성(王城)).
※ 도하현(徒河縣)은 교하현(交河縣)으로서 신강성(新疆省) 토노번현(吐魯番縣) 서쪽인
카자흐공화국까지 정벌한 것으로, 고려사 지명에 나타나 있다.
(예) 조선현(朝鮮縣)을 보면 한나라 때와 후한(後漢) 시까지 진(晉)나라가 있던 곳은
고려의 왕검성(王儉城)이라 했다. 이때 고려는 고구려이다.
즉 옛 조선의 왕검성(王儉城)이며, 이곳은 평양(平壤)인 장안성(長安城)이며,
후위(後魏)의 무리들이 모두 조선의 백성으로 조선현(朝鮮縣)이라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
904쪽에 기록되어 있다.
왕검성(王儉城)은 왕험성(王險城)이라고도 하며, 일명 험독성(險瀆城)이라 하여,
조선 왕만(王滿)이 도읍한 험독현(險瀆縣)은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이라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251쪽에 적고 있다.
※ 나주(羅州)는 치염강(治廉江)이 흐르는 치수(治水)이며,
치수(治水)는 산서성(山西省) 삭현(朔縣)으로 東北으로 흐르는 강이라고 되어있다.
지금에 와서 황수하(黃水河)라 한다.
그러나 후일에 이르러 광동성(廣東省) 화현(化縣) 東北으로 지명을 옮긴 것으로 되어있다.
※ 양주(良州)는 양성현(良城縣)으로, 강소성(江蘇省) 비현(邳縣) 북쪽 60리인 것으로 되어있다.
※ 상주(尙州)는 하북성(河北省)과 산서성(山西省) 북쪽 경계 지역이며,
이곳이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태어난 고향이다.
※ 정주(貞州)는 정풍주(貞豊州)로서, 귀주성(貴州省) 흥의부(興義府)로, 일명 정풍현(貞豊縣)이다.
※ 등주(登州)는 산동성(山東省) 모평현(牟平縣)이다.
일명 동모군(東牟郡)이며, 지금의 산동성 봉래현(蓬萊縣)을 말한다(지명사전 926쪽).
※ 운주(運州)는 운성현(運城縣)으로서 산서성(山西省) 안읍현(安邑縣) 西南 15리이며,
일명 가염성(可鹽城)이라고 지명을 바꾸었다.
특히 운주는 신라 56대 경순왕 8년 9월에 운주계(運州界) 30여 개나 되는 군과 현을,
태조대왕에게 내주면서 항복했다고 되어있다.
운주계란 운주의 주위에 있는 군과 현을 말한다(삼국사기, 고려사 등 참고).
※ 청주축나성(靑州築羅城)은 옛 九州의 하나이다.
청주에 나성(羅城)을 쌓은 곳은 지금의 산동성 익도현(益都縣)에서 다스려졌다.
이곳은 산동성 교동도(膠東道)인 제남(濟南)의 경계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 웅주(熊州)는 하남성 노씨현(盧氏縣) 西南 70리에 있으며,
이곳은 웅이산(熊耳山)이 있는 지역이다.
※ 염주(鹽州)는 한(漢)나라 때 두었던 고성현(高城縣)으로,
지금의 하북성 염산현(鹽山縣)으로 南 40리이다.
염주(鹽州)는 후위(後魏) 때 둠. 수나라 때 지명을 염천군(鹽川郡)이라 했고,
당나라 때 다시 염주(鹽州)라 했다.
송나라 때는 다시 지명을 고쳐 서하(西夏)라 했다.
이곳은 지금의 영하(寧夏)의 염지현(鹽池縣) 북쪽이라 했다.
이곳은 고조선(古朝鮮)의 경계라 했으므로, 이때 고조선은 중심부인 서경(西京),
즉 서안(西安)의 북쪽이다.
지금의 섬서성 북쪽인 내몽고(內蒙古)와의 접경지대를 말한다.
그러나 염산현(鹽山縣)은 하북성 염산현으로 되어있다.
※ 위주(謂州)는 지명이 보이지 않음. 그러나 고려사(高麗史)에는 땅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 아주(牙州)는 아산(牙山)으로 흠현(欽縣) 남룡문(南龍門) 동쪽 60리로 되어있다.
그러나 거아산(距牙山) 20리로 되어있는데, 거아산은 지명사전에 없었다.
한편 마안산(馬鞍山)으로 되어있어,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을 찾아보았더니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마안산(馬鞍山)은 아산(牙山)으로 처음 있던 곳부터 순차적으로 지명이 옮겨진 것을 번호
순으로 엮어보려 한다.
1.감숙성 경천현(涇川縣) 西北.
2.감숙성 예현(禮縣) 北 15리.
3.산서성 편관현(偏關縣) 東 70리.
4.하남성 무양현(舞陽縣) 西南 40리.
5.호북성 의창현(宜昌縣) 西北 60리.
6.호북성 포은현(蒲圻縣) 西 2리.
7.호북성 무창현(武昌縣) 南 90리.
8.호남성 봉황현(鳳凰縣).
9.산동성 봉래현(蓬萊縣) 南 15리.
10.강소성 곤산현(崑山縣) 西北.
11.강소성 강녕현(江寧縣) 西北 10리.
12.강소성 남통현(南通縣) 南 낭산(狼山) 西.
13.복건성 장락현(長樂縣) 南.
14.광동성 구룡(九龍) 北.
15.광동성 오천현(吳川縣) 南 80리.
16.광동성 성치(省治) 北.
17.운남성 은안현(恩安縣) 西南 30리.
18.봉천(奉天) 금현(錦縣) 西南 50리.
19.길림성 길림현(吉林縣) 西南 70리.
20.길림성 연길현(延吉縣).
21.길림성 길림현(吉林縣) 西南 70리.
22.흑룡강성(黑龍江省) 철려설치국(鐵驪設治局) 東北.
이와같이 지명이 옮겨진 것을 볼 수 있다.
※ 진주(鎭州)는 한나라 때 진주(鎭州). 후일 승격시켜 진정부(眞定府).
이곳은 하북성 정정현(正定縣)이다. 당나라와 오대(五代) 시에는 진정부(眞定府)이다.
특히 고려태조 왕건 때 홍유(洪儒) 장군과 유검필(庾黔弼) 장군이,
군졸 1,500명을 이끌고 진(陳)을 친 곳이 진주(鎭州)라고 적고 있다.
이 기록은 고려사절요의 태조왕건 원년 6월에 적혀 있다.
※ 개주(開州)는 고려 경주(慶州)이며, 본시 예맥(濊貊)의 땅이며,
당나라가 이름을 고쳐 성산군(盛山郡)이라 했다.
이곳은 지금의 사천성 개현(開縣)에서 다스렸다고 했다.
※ 예산현(禮山縣)은 호북성 응산현(應山縣) 東南으로 되어있다.
※ 平壤은 섬서성 서경(西京)인 장안성(長安城). 즉 지금의 서안(西安)으로 되어있다.
※ 강주(康州)는 당나라가 두었던 남강주(南康州)라고 했다.
그후 이름을 고쳐 진강군(晉康郡)이라 했다가 다시 강주(康州)라 했다.
송나라 때 승격시켜 덕경부(德慶府)라 했으며, 후에 고려의 강역이라 했다.
이곳은 지금의 광동성 덕경현(德慶縣)에서 다스렸다고 되어있다.
※ 명주(溟州)는 강릉(江陵)이다. 호북성 강릉현(江陵縣)에서 다스렸다.
또는 호북성 형주부(荊州府)에서 다스렸다고 했다.
이곳은 한나라 때 남쪽의 군(郡)으로 다스리던 땅이라고 적고 있다.
※ 일월사(日月寺)는 일월산(日月山)에 있으며, 이곳은 감숙성 서녕현(西寧縣)에서 다스렸으며,
사천성 바깥 입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월산(日月山)은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이며,
번이(番夷)들의 시장(市場)이 있던 곳으로 되어있다.
※ 서경(西京)은 섬서성 서안(西安)임. 즉 평양성(平壤城)과 장안성(長安城)이 있던 도시.
※ 순주(順州)는 호북성 수현(隋縣) 北 80리.
※ 백제 연산진(百濟燕山鎭)은 하북성 계현(薊縣) 東南.
즉 백제가 있던 곳은 주(周)나라 소공(召公 BC.1152년)은 진당숙우(晉唐叔虞 BC.1115년)에
이어온 사람으로, 나라이름을 연(燕)이라 한 후 연산(燕山)이라 했다고 되어있다.
연산(燕山)은 흡사 긴 뱀과 같고, 1천리나 되며 이한(夷漢) 즉 한(漢)나라 사람으로 동이족에
속한다고 되어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태조왕건 8년 10월에 고려 서대장군(西大將軍)이었던
유검필(庾黔弼)이 파견되어, 백제 연산진(燕山鎭)에 있던 백제 장군 길환(吉奐)을 죽이고,
또한 임존군(任存郡)을 공격하여 뭇 병사를 죽이고 3천 명의 포로를 잡은 곳이
백제 연산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로 백제 연산진은 지금의 북경(北京) 지방인 하북성 계현(薊縣) 東南이라고 되어있다.
※ 역주진(歷州鎭)은 역현(歷縣)으로 하북성 고성현(故城縣) 北.
※ 용주(龍州)는 후위(後魏) 때 두었던 강유군(江油郡)이나, 서위(西魏) 때에는 용주(龍州)라 함.
즉 사천성 강유현(江油縣) 西北을 말한다.
※ 청주(靑州)는 산동성 익도현(益都縣) 西北 8리. 또는 산동성 낙릉현(樂陵縣) 西南 30리.
산동성 임치현(臨淄縣)과 산동성 교동(膠東)의 길이라고 되어있다.
※ 공산(公山)은 문산(文山)과 같은 곳으로 복건성 우계현(尤溪縣)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문산(文山)은 산동성 평도현(平度縣)과 강서성 길안현(吉安縣) 東南 15리와 복건성
우계현(尤溪縣)으로 되어있다.
※ 해주(海州)는 본래 옥저국(沃沮國)의 땅임.
고려(高麗)의 사비성(沙卑城) 또는 비사성(卑沙城)이며, 혹왈 비사성(卑奢城)이다.
발해(渤海) 때 남경(南京)이며 남해부(南海府)라 했으며, 명현(溟縣)을 위주(爲州)에서 다스렸다.
금(金)나라 때는 징주(澄州)라 했고, 명나라 때는 해주(海州)라 했다.
이곳은 지금의 강소성 동해현(東海縣) 東北을 해주(海州)라 했다고 되어있다.
※ 청구(靑丘)는 신선(神仙)이 살던 곳으로 장주(長州)라 했다.
이곳은 산동성 광요현(廣饒縣)의 북쪽이라고 되어있다.
※ 경산(京山)은 호북성 경산현(京山縣) 東 10리로 되어있다.
※ 패강(浿江)은 패수(浿水)로서 한나라 위(魏)나라 시대 때의 패수(浿水)이다.
이곳은 압록강(鴨綠江)이며, 연(燕)나라 때에는 진번군(眞番郡)에 속했다.
조선(朝鮮)과 한(漢)나라와 더불어 어렵게 지켜졌으며, 당나라 때의 패수(浿水)이다.
도읍지가 있던 서경(西京)에는 평양성(平壤城)이 있었다.
백제국의 북쪽 경계에는 패수(浿水)가 있었고, 패수를 예성강(禮成江)이라 하며,
일명 임진강(臨津江), 대동강(大同江)이라고도 부른다.
★ 삼국사기에는 도패대이수(渡浿帶二水)라고 하여,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라고 하고,
이곳에 이르면 미추홀(彌鄒忽)이며, 미추홀은 즉 지금의 조선의 인천(仁川)이라고 되어있다.
한반도에 있는 인천(仁川)이 미추홀(彌鄒忽)이 아니라, 패수(浿水)와 대수(帶水)가 있는 곳이
조선의 인천이며, 이곳이 미추홀(彌鄒忽)이라는 것이다.
※ 패수현(浿水縣)은 한(漢)나라가 두었던 패수(浿水)의 이름이며,
조선(朝鮮) 압록강(鴨綠江) 남쪽 물가에 있던 곳이 의주(義州)라고 되어있다.
이곳은 한나라 때 요동(遼東)에 있던 낙랑군(樂浪郡)에서 다스렸다고 했다.
여기서 의주(義州)의 주위에 있는 곳에 압록강(鴨綠江)이 있다고 했는데,
의주(義州)는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동쪽이다.
즉 의주(義州)의 주변에서 샛강으로 흐르는 것이 압록강(鴨綠江)이다.
※ 압록강(鴨綠江) 일대를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이후부터 낙랑군(樂浪郡)에서 다스렸다고
했는데, 이때의 낙랑군은 하남성 낙양(洛陽)에 있었다.
※ 갑여산(甲如山)은 갑산(甲山)으로 산동성 치천현(淄川縣) 西南 30리로 되어있다.
※ 탕정군(湯井郡)은 탕산(湯山)으로, 섬서성 서경(西京)으로 경조(京兆) 완평현(宛平縣)
북쪽이라 했다. 그리고 소탕산(小湯山)의 남쪽에는 평양성(平壤城)이 가운데 있는
탕천(湯泉)이라고 되어있다.
※ 옥산성(玉山城)은 옥산(玉山)으로 직예성(直隸省) 만성현(滿城縣) 북쪽 15리로 되어있다.
한편 옥산(玉山)은 주(周)나라 때까지 서왕모(西王母)가 살고있던 곳으로 숙주(肅州),
즉 감숙성 주천현(酒泉縣・郡) 西 70리로 되어있다.
또한 곤륜산(崑崙山)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산록이며, 이곳에 염전산(鹽田山)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 백주(白州)는 한나라 때 남주(南州)라 했다가, 이름을 고쳐 백주(白州)라 했다.
그후 다시 지명을 남창군(南昌郡)이라 했는데, 이곳은 사천성 만현(萬縣) 서쪽으로 되어있다.
※ 노주(路州)는 노현(路縣)으로, 한나라가 두었던 곳인데, 섬서성 서경(西京)인 경조(京兆)로
통하는 현(縣)으로서 동쪽 8리라고 되어있다.
※ 진주(眞州)는 사천성 무현(茂縣) 西北. 일면 진부(眞符).
※ 양주(陽州)는 양현(陽縣)으로 주나라 때의 양국(陽國)이다.
한나라 때는 양현(陽縣)이며, 옛 성(城)이 있던 곳은 산서성 홍동현(洪洞縣) 東南 15리이다.
수나라가 도읍지를 옮겨 홍동현(洪洞縣)에서 다스리다가 이름을 고쳐 홍동(洪洞)이라 했다.
※ 황주(黃州)는 수나라가 이름을 고쳐 옥주(玉州)라 했다.
이곳은 옛날에 다스리던 곳이 호북성 황피현(黃陂縣) 동쪽이다.
수나라 때 이름을 고쳐 영안군(永安郡)이라 했다가, 다시 제안군(齊安郡)이라 했다.
그후 다시 고쳐 황주(黃州)라 한 곳은 호북성 황강현(黃岡縣)이며,
원나라 때에는 고조선이 있던 서경(西京)의 경계라고 되어있다.
※ 과주(過州)는 과(過)나라의 옛 이름이다. 이곳은 산동성 액현(掖縣) 북쪽으로 되어있다.
※ 경주(慶州)는 수나라 때 다시 찾아 홍화군(弘化郡)이라 했다.
당나라 때에는 안화군(安化郡)이라 했다가 다시 순화군(順化郡)이라 했다.
그후 다시 찾아 경주(慶州)라 했으나, 송나라는 경주안화군(慶州安化郡)이라 했다.
그후 승격시켜 경양부(慶陽府)라 했는데, 그곳은 감숙성 경양현(慶陽縣)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숙주(肅州)는 감숙성 예천군(醴泉郡・縣)임.
※ 경성(京城)은 강소성 진강현(鎭江縣)에서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이천(利川)은 이천현(利川縣)으로, 본래 만이(蠻夷)의 땅을 말한다.
원나라, 명나라 때 다스리던 곳이며, 청나라 때 이름을 고쳐 이천현(利川縣)이라 했는데,
이곳은 호북성 시남부(施南府)라 했다. 이곳이 속한 곳은 지금의 호북성 형남(荊南)의 길이다.
※ 삼한(三韓)은 주무왕(周武王)의 아들 대부한만(大夫韓万)과 성왕(成王)의 동생
진당숙우(晉唐叔虞)가 제후왕 때 합하여 진(晉)나라를 세운 후 주(周)나라 말기
진(晋)나라에서 한(韓)・위(魏)・조(趙) 나라가 독립하여 세운 나라가 삼한(三韓)이다.
★ 조(趙)나라는 산서성 조성현(趙城縣) 西南에 도읍했다. 이곳은 산서성 태원현(太原縣) 북쪽이다.
★ 위(魏)나라는 하남성 낙양(洛陽)에 도읍했다.
★ 한(韓)나라는 하북성 고안현(固安縣) 東南으로, 한(漢)나라 때 삼한(三韓)의 땅이라고,
중국고금지명대 사전 1305쪽에 적고 있다.
다시말해 진(晋)나라가 한(韓)이며, 위(魏)・조(趙)나라도 같다.
그후 춘추시대(春秋時代)에 들어와 섬서성 한성현(韓城縣) 남쪽 18리에 도읍했다.
★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 BC.425~402년) 23년 진(晋)나라에서 한(韓)・위(魏)・조(趙) 나라가
나누어 진 것이 삼한(三韓)이며, 평양(平陽)에 도읍한 곳은 산서성 임분현(臨汾縣)에서 다스렸다.
그후 하남성 우현(禹縣)으로 옮겨졌으나, 구한(九韓), 즉 아홉의 한국(韓國)으로 되었다가
진(秦)나라 때 망했다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305쪽에서 한(韓:三韓)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 황룡사(皇龍寺)는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라 24대 진흥왕(眞興王 AD.537년) 17년 癸酉 二月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에
황룡사(皇龍寺)를 세운 것으로 되어있다. 이곳은 울주(蔚州)인 곡포(谷浦)라고 기록했다.
★ 여기서 하곡현(河曲縣)은 중국고금지명대사전 514쪽에 의하면,
산서성 하곡현(河曲縣) 東南 70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로 황룡사는 산서성 하곡현 東南 70리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 연산(連山)은 연주(連州)로서, 한(漢)나라 때 두양현(杜陽縣)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隋)나라 때는 연현(連縣)이라 했으며, 남조(南朝) 때 양(梁)나라가 양산군(陽山郡)이라 했다.
수나라는 양산군(陽山郡)을 파하고 연주(連州)라 했다가,
이름을 고쳐 연산군(連山郡)이라 하다가 연주(連州)로 고쳤다.
송(宋)나라 때 와서 연주연산군(連州連山郡)이라 하다가,
원나라 때 승격시켜 연주(連州)라고 했다.
청(淸)나라 때는 직예주(直隸州)라 했다.
이곳은 사천성 균연현(筠連縣)의 경계라고 되어있다.
한편 한(漢)나라 때 두양현(杜陽縣)이라고 했는데, 두양현(杜陽縣)은 호남성 침주(郴州)이며,
이곳은 호남성 형양(衡陽)의 길목에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산(連山)에 있는 연주(連州)는 지금의 호남성 침주(郴州)임을 나타내고 있다.
※ 황산군(黃山郡)은 황산궁(黃山宮)으로, 한나라 혜제(惠帝) 때 세운 곳으로 섬서성
흥평현(興平縣) 西南이라고 되어있다.
한편 황산군(黃山郡)은 황산(黃山)으로, 중국고금지명대사전 975쪽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① 섬서성 무공현(武功縣) 북쪽.
② 산서성 호관현(壺關縣) 남쪽 28리.
③ 하남성 급현(汲縣) 西北 10리.
④ 산동성 액현(掖縣).
⑤ 하남성 확산현(確山縣) 東南.
⑥ 강소성 강음현(江陰縣) 북군산(北君山) 北 5리.
⑦ 강소성 무진현(武進縣) 西北 70리.
⑧ 안휘성 흡현(歙縣) 西北.
⑨ 안휘성 합비현(合肥縣) 東 129리.
⑩ 호남성 안향현(安鄕縣) 北 60리.
⑪ 절강성 여항현(餘杭縣) 西南 25리.
⑫ 운남성 여강현(麗江縣) 西 2리
★ 백제의 계백장군과 당나라 소정방, 그리고 신라군이 맞서 싸운 곳이 황산(黃山)의 들이라고
했는데, 그럼 앞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황산은 과연 어느 곳인지, 연구가 필요함을 절감케 한다.
※ 평주(平州)는 진(晋)나라 때 나누어 둔 유주(幽州)라 했다.
이곳은 전 연(燕)나라 때 하북성 처용현(處龍縣)에서 다스려졌으며, 양평(襄平)이라고 되어있다.
후일에 지명을 옮겨 요령성(遼寧省) 요양현(遼陽縣) 동쪽 45리라고 적고 있다.
※ 원주(原州) 흥법사(興法寺)는 감숙성 고원현(高原縣)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 외에 고려태조 왕건 때의 지명을 총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위주(爲州).
2.삼문산(三門山).
3.삼능산(三能山).
4.금산(金山)은 7군데나 된다.
5.금산사(金山寺)는 감숙성 고란현(皐蘭縣) 西北이다.
6.지리산(地理山).
7.무주(武州)는 백제 땅으로, 호남성 상덕현(常德縣)과 산서성,
그리고 감숙성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8.전주(全州)는 광서성 계림(桂林)이다.
9.공산(公山)은 문산(文山)으로, 산동성 평도현(平度縣)과 강서성, 복건성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10.고주현(故州縣).
11.계림(雞林)은 옛 신라의 이름이며, 탈해니사금(脫解尼師今) 9년에 시림(始林)이라 했으며,
감숙성 성현(成縣) 西南으로 되어있다.
12.순주(巡州)는 서경(西京)에 있는 순주진(巡州鎭)이다.
13.기주(基州)는 호북성 종상현(鐘祥縣) 남쪽이다.
14.강주(剛州)는 강현(剛縣)으로, 산동성 영양현(寧陽縣) 東北 35리이며,
진(晋)나라 때의 강평현(剛平縣)이다.
15.가은현(加恩縣).
16.고창군(古昌郡).
17.모산성(牟山城)은 백제 땅으로, 산동성 모평현(牟平縣) 東北 3리이다.
18.현도주(玄菟州)는 서경(西京).
19.범주(犯州).
20.서천축(西天竺).
21.신흥사(新興寺)는 신흥군(新興郡)에 있으며, 이곳은 호북성 강릉현(江陵縣) 3리.
22.흥법사(興法寺), 세달사(世達寺), 흥교사(興敎寺), 흥선사(興善寺)는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南 50리.
23.하주(下州).
24.목포(木浦).
25.도산성(島山城).
26.예산현(禮山縣).
27.대흥사(大興寺)는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28.오관산(五冠山).
29.배산성(拜山城).
30.부산(負山).
31.탕정군(湯井郡).
32.벽진군(碧珍郡).
33.곡성(谷城).
34.곡죽령(谷竹嶺).
35.진국성(鎭國城)은 진국군(鎭國郡)으로, 섬서성 화현(華縣).
36.통덕진(通德鎭).
37.흥덕진(興德鎭)은 흥덕현(興德縣)으로, 광서성 흥업현(興業縣) 南.
38.아차성(阿次城).
39.재암성(載巖城).
40.병산(甁山).
41.동주군(東州郡).
42.안수진(安水鎭).
43.능도(陵島).
44.연주(連州)는 연산(連山)으로, 사천성 균연현(筠連縣) 경계.
45.저산도(猪山島).
46.대우도(大牛島).
47.혹도(鵠島).
48.영청현(永淸縣)
49.혜산성(橞山城).
50.아불진(阿弗鎭).
51.성주진(省州鎭).
52.수완성(修完城).
53.예성강(禮成江).
54.양주(楊州),
55.천왕사(天王寺).
56.개태사(開泰寺).
57.탐라국(耽羅國).
58.선교사(禪敎寺).
59.백성군(白城郡).
60.외주(外州).
61.죽주(竹州).
62.당현(唐縣).
63.괴양(槐壤).
64.흥주(興州) 부석사(浮石寺)는 봉주(峯州)이며, 섬서성 약양현(略陽縣).
65.세달사(世達寺)는 흥교사(興敎寺)로,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南 50리 번천(樊川) 北.
66.이천(利川).
67.치악산(雉岳山).
68.미리사(美理寺).
69.성산진(星山陳).
70.마리성(馬利城).
71.청천강(淸川江).
72.저족성(猪足城).
73.성천성(狌川城).
74.부약성(夫若城).
75.거성(居城).
76.내성현(奈城縣).
77.악곡성(岳谷城).
78.어진현(御珍縣).
79.울도현(鬱島縣).
80.의성부(義城府).
81.주천현(酒泉縣)은 감숙성.
82.진보성(眞寶城).
83.한도강(恨島江) 등.
모두 합쳐 148개소의 지명과 성(城), 그리고 절과 강(江)으로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태조왕건과 궁예(弓裔), 견훤(甄萱) 등이 활동한 지역과 강역 등을 보면,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대륙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현재까지 중국에는 많은 지명을 옮기고 바꾸고 없애버리는 바람에,
더 많은 고증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나타나 있는 지명과 강역, 현군(縣郡), 그리고 절과 강(江) 등을 보면,
고려태조 왕건의 혈통과 활동무대가 앞에서 보는바와 같이 중국대륙임이 밝혀져 있는 것이다.
특히 궁예(弓裔)가 어릴 때 도망가 살았던 세달사(世達寺)는 흥교사(興敎寺)로,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남쪽 50리임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③ 궁예(弓裔)
어릴 때 도망가 살았던 세달사(世達寺)는 흥교사(興敎寺)로,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남쪽 50리
※삼국사기 열전 제 10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궁예는 본래 신라 사람이다.
신라 47대 헌안왕(憲安王 AD.856~859년)의 빈(嬪)의 몸에서 태어났다고도 하고,
또는 48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어느 해에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음력 5월 5일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궁예가 외가에서 태어날 때 집 위로 흰빛이 무지개처럼 길게 하늘로 향한 것을 본 관리가 말하기를,
5월 5일에 태어날 때 이가 나 있었고, 연기같은 이상한 빛이 있었으므로 장차 나라에
불리할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중사(中使)라는 관리를 시켜 궁예를 죽이라고 명하였다.
그 관리는 궁예를 취하여 강보에 싸 다락에서 아래로 던져버렸다.
이때 유모가 궁예를 밑에서 받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으로 궁예의 한 눈을 찔렀는데,
그대로 안고 도망쳤다.
궁예는 이때부터 한 눈을 실명한 채 10여 세가 되었는데, 노는 것이 지나칠 정도로 위험스러워,
유모가 노는 것을 중지시켰다.
유모가 나라에서 버린 자식임을 실토하자, 궁예는 참지 못했다.
그리하여 유모는 이 일이 알려지면 궁예가 위험함을 느끼고 떠나자고 하자, 궁예는 눈물을 흘리며
그 길로 세달사(世達寺)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세달사(世達寺)인 흥교사(興敎寺)는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236쪽에 의하면,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남쪽 50리로 되어있고,
번천(樊川)의 북쪽에는 당나라 때 세운 현장탑(玄奘塔)이 있다고 되어있다.
※ 궁예의 출생한 연도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필자가 조사해 보니,
후당(後唐) 대순(大順) 2년에 궁예 나이 28세로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
연대를 추적하여 고증해본 결과 후당(後唐) 대순(大順)의 연대가 AD.890년이며,
대순 2년에 궁예 나이 28세로 죽은 것을 계산해 보니, 그가 태어난 해는 AD.865년이었다.
간지(干支)로 따져보면 기유년(己酉年) 음력 5월 5일 생으로 밝혀지는 셈이다.
④ 견훤(甄萱)
상주(尙州)는 하북성과 산서성의 북쪽 경계이며,열하파림(熱河巴林)의 동북 140리
※ 견훤(甄萱)은 상주 가은현(尙州加恩縣)에서 출생한 것으로, 삼국사기 열전에는 기록되어 있다.
상주(尙州)가 어디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의하면, 상주(尙州)는 하북성과 산서성의 북쪽 경계이며,
열하파림(熱河巴林)의 동북 140리에 있다.
견훤의 아버지는 아자개(阿慈介)로서 농사꾼이라 했다.
들에서 밭갈이를 할 때 아이를 나무 밑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고 했다.
견훤의 성은 이씨(李氏)로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힘은 장사였다고 되어있다.
견훤은 당나라 소종(昭宗) 때 경복(景福) 원년(元年)은 기원후 892년이며,
신라 진성왕(眞聖王) 재위 6년이라면, 역시 AD.892년에 해당된다.
고로 견훤은 AD.892년 임자생(壬子生)에 해당된다.
견훤은 진(晋)나라 천복(天福) 원년인 45세 때 멸했는데, 진나라 천복원년은 AD.936년이다.
※ 견훤이 활동한 지역을 살펴보면, 경서남주현(京西南州縣), 진주(珍州), 무주(武州), 공주(公州),
한남군(漢南郡), 완산주(完山州), 금마산(金馬山), 철원(鐵圓), 지리산죽전(地理山竹箭),
대야성(大耶城), 진례성(進禮城), 조물성(曹物城), 거창성(居昌城).
전주(全州), 등주(登州), 성산진(星山陳), 미리사(美理寺), 평양(平壤), 패강지수(浿江之水)란
패강(浿江) 또는 패수(浿水)의 뜻을 말한다.
부산(負山), 금성(金城), 갑여산(甲如山), 조어성(造於城), 연산군(燕山郡), 마리성(馬利城),
경산(京山), 강주(康州), 오강(烏江), 청구(靑丘), 양산(陽山), 악곡성(岳谷城), 고창군(古昌郡),
병산(甁山), 순주(順州), 하지현(下枝縣), 예성강(禮成江), 염주(鹽州), 백주(白州), 정주(貞州),
저산도(猪山島), 운주(運州), 웅진(熊津), 금산(金山), 금성(錦城), 양주(楊州), 이천(利川),
황산(黃山), 고주현(故州縣), 진주(眞州) 등이다.
※ 견훤이 태어나서 활동한 지명이 많이 있는데,
지명 중에 한반도에 지금까지도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高 麗 年 代 表
(一名 後高句麗)
건국 A.D. 918년, 亡 A.D.1392년. 475년간
世 |
王名 |
干支 |
年代 |
在位年 |
1 |
태조 건(太祖建) |
戊寅年 |
A.D 918 |
26 |
2 |
혜종 무(惠宗武) |
甲辰年 |
944 |
2 |
3 |
정종 요(定宗堯) |
丙午年 |
946 |
4 |
4 |
광종 소(光宗昭) |
庚戌年 |
950 |
26 |
5 |
경종 주(景宗伷) |
丙子年 |
976 |
6 |
6 |
성종 치(成宗治) |
壬午年 |
982 |
16 |
7 |
목종 송(穆宗誦) |
戊戌年 |
998 |
12 |
8 |
현종 순(顯宗詢) |
庚戌年 |
1010 |
22 |
9 |
덕종 흠(德宗欽) |
壬辛年 |
1032 |
3 |
10 |
정종 형(靖宗亨) |
乙亥年 |
1035 |
12 |
11 |
문종 휘(文宗徽) |
丁亥年 |
1047 |
37 |
12 |
순종 훈(順宗勳) |
甲子年 |
1084 |
1 |
13 |
선종 운(宣宗運) |
甲子年 |
1084 |
11 |
14 |
헌종 욱(獻宗昱) |
乙亥年 |
1095 |
1 |
15 |
숙종 옹(肅宗顒) |
丙子年 |
1096 |
10 |
16 |
예종 우(睿宗俣) |
丙戌年 |
1106 |
17 |
17 |
인종 해(仁宗楷) |
癸卯年 |
1123 |
24 |
18 |
의현(毅晛) |
丁卯年 |
1147 |
24 |
19 |
명종 호(明宗晧) |
辛卯年 |
1171 |
27 |
20 |
신종 탁(神宗晫) |
戊午年 |
1198 |
7 |
21 |
희종 영(熙宗韺) |
乙丑年 |
1205 |
7 |
22 |
강종 오(康宗) |
壬辛年 |
1212 |
2 |
23 |
고종 질(高宗眣 |
甲戌年 |
1214 |
46 |
24 |
원종 식(元宗植) |
庚申年 |
1260 |
15 |
25 |
충렬왕 거(忠烈王昛) |
乙亥年 |
1274 |
34 |
26 |
충선왕 장(忠宣王璋) |
己酉年 |
1309 |
5 |
27 |
충숙왕 도(忠肅王燾) |
甲寅年 |
1314 |
25 |
28 |
충혜왕 정(忠惠王禎) |
辛未年 |
1331 |
6 |
29 |
충목왕 흔(忠穆王昕) |
己酉年 |
1344 |
4 |
30 |
충정왕 시(忠定王昕) |
己丑年 |
1349 |
3 |
31 |
공민왕 전(恭愍王顓) |
壬辰年 |
1352 |
24 |
32 |
우왕(禑王) |
乙卯年 |
1375 |
14 |
33 |
창왕(昌王) |
己巳年 |
1389 |
1 |
34 |
공양왕 요(恭讓王瑤) |
己巳年 |
1389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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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릉이 사천성에 있는 이유는
고려사 고려5악=근세조선의 5악과 한민족의 땅 중원(중주)이 같다고 추측을 할수 있다
그렇다면 중국과 한국은 한민족???
hydi95 (yudi****) 자료제공.
첫댓글 개뼈닥구 같은 소리하고 있네`
장대한 역사네요..,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역사의 진실은 정치가에 의행 많이 왜곡되어 오고 있는것이 사실이지요. 우리나라역사도 조선시대에 고려역사를 많이 왜곡했습니다.
사실일까요? 뭐가뭔지 이해가안되는군요.
거짓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앞뒤가 잘 맞아서 전전긍긍 입니다 ㅎ 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닙니다 저도 참역사찾기 자료를 보고 놀라서 올렸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가셔서 확인하시고 알려주세요^^
넘 불안해 하시고 편안이 생각하세요 지금에 와서 어쩔수 없지요 진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요^^
1.사천성 성도에있는 왕건의묘는(재위907ㅡ918)영능으로 전촉을창건한군주, 훗날 촉왕으로 하남성무양현사람, 한주송악에서 태어남, 2.고려태조왕건은(재위918ㅡ943)금성태수융과위숙왕후한씨 사이에서 877 년송악(개성)에서 태어나,개성근교,만수산에,신혜왕후와같이모셔져 현능이라 칭함. 중국의왜곡된 역사을게시한건아닌지요?
시원한답을못드려 죄송합니다 꾸벅 참역사 바로찾기에 가면 시원한 답을 얻으실겁니다^^
http://cafe.daum.net/khankorea 큰겨레 참역사 카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