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5.10.;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사도 11,19-26; 요한 10,22-30 )
제1독서
<그들은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1,19-26
그 무렵 19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20 그들 가운데에는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하면서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21 주님의 손길이 그들을 보살피시어 많은 수의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섰다.
22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23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24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25 그 뒤에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26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22-30
22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23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24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그리스도인'과 '천주학쟁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잘 알아 들을 것이라고 자신하셨습니다. 과연, 초대교회 시절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이들에 대해서 유다인들은 자신들처럼 율법을 따라 살지 않고 낯선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이유에서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들’(사도 9,2)이라고 다소 막연하게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스테파노로 인한 박해로 흩어진 신자들이 다시 안티오키아에 모여서 공동생활을 했는데, 이를 본 주변 이교인들이 이 신자들이 가는 ‘새로운 길’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 때문임을 알고 나서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구체적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사도 11,28).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당신의 제자임을 알아볼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는데, 안티오키아에 있던 사람들도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생활을 통해 서로 사랑하며 살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이끄시는 삶의 형태는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에는 부활신앙이 녹아있기 마련이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영적인 몸의 사기지은(四奇之恩)도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즉, ‘상하지 못함’의 은총은 공동체가 세상의 죄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사회적 사랑을 지향함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빛남’의 은총은 공동체가 그 구성원들이 지닌 하느님 사랑의 신앙과 상호간에 나타나는 인간 사랑의 신뢰로써 불신에 가득 찬 세상의 어둠을 비추어주는 데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빠름’의 은총은 공동체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상호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사도직 활동을 사회에서 해 나감에 있어서 일과 돈에 대해서 증거하는 신용으로 나타납니다. 필요하다면, 일에 있어서든, 돈에 있어서든 약속을 지키는 행태로써 신용을 쌓아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겠다고 해도 과연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을 수 있으며 무슨 용도에 돈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 말만 믿고 아무런 담보가 필요 없이도 빌려줄 수 있을 만큼, 말에 힘이 있고 그 말만 듣고서도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믿을 수 있게 됩니다. 말이 말씀의 무게를 지니게 되는 것이지요. 이는 대단히 중요한 점입니다. 사람의 말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변화되는 장이 전례인데, 공동체에서도 전례에서처럼 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하느라 주고 받는 말이 말씀처럼 무게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공동체가 인간의 구원에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지를 웅변과도 같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전혀 이렇지 않지요.
이 세 가지 은총이 종합된 결과가 ‘사무침’의 은총으로 나타납니다. 시간적 통공과 지역적 연대로 나타나는 이 은총은 공동체들끼리의 관계와 유대가 물 흐르듯이 맺어져서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공동체에는 하느님을 믿는 신앙과 서로를 믿는 신뢰와 일과 돈에 관한 사회적 신용이 조화를 이룹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비유되어 온 교회의 뿌리요 원형입니다.
이 땅에 복음을 들여와 교회를 세운 선각자들은 서적과 지성을 통해서 신앙을 깨달았고 또 사람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를 믿게 된 이들을 조선시대 사람들은 ‘천주학쟁이’라고 낮추어 불렀지만, 이 비하된 천주교 신자의 별명 속에는 그들이 천주교 교리를 진리로서 받아들이고 지성을 발휘하여 새로운 지혜를 얻었음을 인정하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조선왕조는 백성을 신분으로 나누어 차별했지만 천주교 교리는 모든 백성이 하느님 앞에 평등하고 귀한 존재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조선왕조 시대에 양반들끼리만 지식을 독점하고 이 지식을 무기로 휘둘러서 나머지 신분의 사람들에게 위세를 부렸지만, 천주교 교리는 모든 백성이 하늘의 진리와 땅의 지혜를 알아야 하며 그렇게 깨달은 진리와 알게 된 지혜로 서로를 가르쳐서 모두가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르면 자유로울 수도 없고 행복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이러한 가치와 가르침은 우리 민족이 오랜 옛날부터 전해 받았던 천손의식과 홍익인간 이념을 상기시켜 주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러하셨듯이 당신을 믿는 이들도 죽기 전에 이미 천국을 살 수 있으며 부활하여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 선조들은 박해 중에서도 교리를 힘써 배워 익혔습니다. 이것이 천주교 신자들을 그저 천주교도가 아니라 ‘천주학쟁이’라고 부르게 된 배경이었습니다. 신자들은 자신이 믿는 바를 교리에서 분명히 알고 또 이웃에게 전해 주어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습니다. 교리에는 성경 말씀이 녹아 있으며, 성경과 교리는 우리를 이끄시는 목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입니다. 그분의 양 떼라면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야 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그저 막연하게 착한 천주교 신자에 머물지 마시고 성경과 교리를 구체적으로 잘 아는 ‘천주학쟁이’가 되어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하여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할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