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혀지는 책 중의 하나가 존 번연(John Bunyan, 1628-88)의 천로 역정이다. 번연은 이 책에서 가장 평범하고 소박하면서도 적나라하게 우리 인간의 영성 체험을 제시한다.
그가 사용한 언어는 엄청난 사유를 요구하는 철학 용어나 과학 용어가 아니다. 번연은 주위에서 흔히 보고, 느낄 수 있는 일상 생활 언어를 꾸밈 없이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러나 이 언어 속에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역동적 힘이 있다. 참된 신자의 영혼 속에 부각되는 상승된 영적 희열이 있고, 왜곡된 믿음을 가진 위선자들에 대한 풍자적 책망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진리를 위해 살아가려는 모든 이들에게 주는 위로와 격려가 있다.
번연을 연구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는 세계의 고전으로 널리 인정된 천로 역정의 저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끈다. 또한 그의 작품이 주는 영향력을 바로 알기 위해 우리는 그를 연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번연 시대 청교도 신앙의 진수를 바로 알기 위해 그의 생애와 사상은 반드시 연구되어야 한다.
I. 존 번연 시대의 정치 상황
II. 존 번연 시대의 종교 상황
III. 존 번연의 생애
IV. 번연의 사상
V. 정리
I. 존 번연 시대의 정치 상황
번연은 영국 청교도들이 겪었던 가장 심한 격동기의 일부분을 직접 보면서 살았다. 그의 생애 동안에 영국 왕정이 일시 중단되었다가 복구되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그는 청교도들이 영적 및 정치적으로 승승 장구하다가 처참하게 패배하는 것도 보았다. 그러므로 번연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가 살았던 시대를 돌아보아야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1603년에 죽자 왕위 계승에 문제가 생겼다. 여왕이 후계자 없이 죽었기 때문이다. 혈통을 찾아 왕위는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인 제임스 1세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역사란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제임스 1세의 모친인 메리 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반역죄로 몰려 살해당했는데 그의 아들이 엘리자베스 여왕의 후계자로 영국 왕이 될 줄이야!
메리 스튜어트는 헨리 7세의 딸 마가렛(Margaret)의 딸이었고, 제임스 1세는 마가렛의 손자가 된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통치 전반부에 고모의 딸이자 왕위 상속권을 주장할 수 있는 메리 스튜어트에게 항상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 교육을 받고 이미 제임스 6세란 칭호로 스코틀랜드 왕위에 올랐었다. 그러나 그가 영국에 와서는 “감독 없이는 왕이 없다”(No bishop, no king)라고 영국 국교도를 지지했다.
은근히 칼빈주의 장로교를 지지해 줄 줄 알았던 영국 청교도들은 신왕의 종교 정책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제임스 1세는 왕권 신수설(divine right theory, ius divinum)을 주장하면서, 왕의 권한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세속의 어떤 기관이나 사람이 도전할 수 없고, 왕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에게만 책임을 질 뿐이라는 독재자의 면모를 유감 없이 나타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종교계의 반발뿐 아니라 의회의 반발도 불러 일으켰다. 의회에서 만들어진 법령을 국왕이 거절하겠다는 왕권 신수설을, 전통을 가진 의회 의원들이 좋아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귀족원은 귀족들과 감독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제임스 1세의 통치 방법에 일반적으로 찬성했지만, 평민원(the House of Commons)에서는 심한 거부 반응을 나타냈다.
평민원은 상업 자본가, 법률가, 시골 지주들이 의석을 차지해 오고 있었는데, 신앙적으로는 영국 국교회를 신봉하였다.
17세기가 되자 평민원 중에 발언권이 강한 청교도들이 늘어났다. 청교도들은 의회에서 영국 교회를 “정화”(purify)하기를 희망했으며, 가톨릭의 유산인 거창한 예식과 권위를 부리는 성직 계급을 제거하기 원했다.
제임스 1세는 이와 같은 평민원의 의사를 거부했고 특히 청교도들의 장로교 대의 정치(Presbyterian representative system of church government)를 노골적으로 혐오하였다. 대의 정치는 왕의 권위와 통치에 반대 세력이 될 수 있고 그의 왕권 신수설에 정면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치세 중 물가는 뛰고 왕실 경영은 재정난에 봉착했다. 왕은 국회를 열어 세금 인상을 요구했으나 평민원은 왕이 평민원의 권위를 인정해 주는 조건으로 타협책을 제시하였다. 그러자 왕은 평민원의 건의를 묵살하고 세관의 세입을 늘리고 또 귀족 작위를 팔아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 나갔다.
제임스 1세는 이렇게 불편한 관계를 국회와 맺고, 결국 그의 아들 찰스 1세에 와서는 왕이 참수당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 제임스 1세와 가톨릭과의 관계는 처음에는 원만하였다. 1605년 11월 5일 가톨릭 교도들이 의사당을 폭파시키려 한다는 음모가 정부에 적발되었다.
가이 포크스(Guy Fawkes, 1570-1606)를 위시한 열심 있는 가톨릭 교도들이 폭발물 운반 도중 들켜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가톨릭은 국왕과 영국인에게 냉대받게 되고, 국왕은 국교회의 분리파들에 대한 적대 감정을 가속화한다.
포크스 사건 1년 전(1604) 왕은 청교도들의 청원을 받고 햄프턴(Hampton)에서 종교 회의를 개최한다. 왕은 청교도들로부터 영국 교회의 신조와 소요리 문답을 폐기할 것과 성경 번역 착수를 청원받는다. 왕은 성경을 새로 번역하는 것만을 허락하고 나머지 사항은 묵살하였다.
1611년 새 번역 성경이 나왔는데, 당시 영국 말과 습관이 잘 정리된 훌륭한 것이었다. 이 성경은 제임스 왕 때 나왔다 하여 흠정역 성경(King James Authorized Version)으로 불린다.
이 이전의 성경으로는 1560년에 나온 감독의 성경(The Bishop’s Bible), 1557년에 발행된 제네바 성경(Genevan Bible) 등이 있었으나 본문에 파당적 해석이 많아 독자의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었다. 흠정역 성경이 나옴으로써 영국인들은 성경을 독자적으로 자유롭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전반적인 종교 상황에서 볼 때 제임스 1세 통치 기간에 청교도들이 대폭 증가하게 되었고, 그 활동 범위로는 상업, 공업, 의료직을 위시해서 국가 기관인 평민원까지 요소 요소에 진출하게 되었다.
제임스 1세가 주일에 스포츠를 장려하자 각종 체육 대회가 주일에 성행되었다. 5월의 놀이(May games), 춤추기 등도 왕이 1618년 공공연히 선포하였다.
청교도들은 종교의 세속화에 경악하여 더 한층 주일 성수를 강화하고, 성경 읽기, 가정 예배, 찬양 등에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바로 이 시기에 왕의 종교 정책에 불만을 품고 새로운 종교 자유 지역을 찾아 1620년 7월 6일 101명의 청교도 순례자가 플리머스(Plymouth)를 출발 미국 뉴잉글랜드로 향한다.
제임스 1세가 죽자 그의 아들 찰스 1세(재위 1625-49)가 등극하였다. 찰스 1세는 아버지 제임스 1세보다 더 완곡하고 편협했다. 1628년 의회는 권리 청원(the Petition of Right)을 통과시키고, 국왕도 법령에 따라야 하며 세금을 부과할 때는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찰스 1세는 조금도 권리 청원에 동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그 내용을 지킬 의사도 없으면서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청원서에 서명했다. 그러면서도 의회가 문제를 제기하면 의회를 해산시키곤 했다. 실제로 11년 동안(1629-40) 의회 소집 없이 그는 “왕권 신수설” 이론 속에서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통치했다.
찰스 1세는 청교도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반칼빈주의자요 열렬한 국교도인 윌리엄 로드(William Laud, 1573-1645)를 켄터베리 대감독으로 임명하였다. 성격이 엄격한 로드는 모든 영국인이 경건히 영국 국교회에 참석하도록 명령하여 청교도들의 원성을 샀다.
찰스 1세의 실책 중 하나는 1637년 스코틀랜드에 영국 국교회 의식을 사용(the use of the Anglican worship service)하도록 명령한 것이다. 스코틀랜드는 낙스(1514?-72)가 메리 스튜어트의 가톨릭을 무너뜨린 이래 장로교식 대의 정치를 실시해 오고 있었다.
비록 제임스 1세가 영국 및 스코틀랜드의 통합 국왕으로서 정치를 했었지만 스코틀랜드의 종교 문제에 대해선 손을 댈 수 없었다. 1578년에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에서는 제2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를 만들어 국회에서 통과시킴으로 교회의 정치적 독립을 재천명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이 있는 스코틀랜드인들이 호락호락 찰스 1세의 주문에 응할 리 없었다. 찰스 1세가 국교회 의식을 강요하자 에든버러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곧이어 전스코틀랜드가 벌떼같이 일어났다.
스코틀랜드인이 종교의 자유를 위해 영국을 공격하자 찰스는 군비를 조달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의회를 소집하였다. 처음엔 3주간에 걸친 단기 의회(the Short Parliament)를 열었다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장기 의회(the Long Parliament)를 열었다. 장기 의회는 1640년에서 시작해서 1653년까지 질질 끌다가 1660년 막을 내렸다.
찰스 1세는 장기 의회를 다시 소집하여 우선 스코틀랜드 침입군의 위험을 다급히 막아야 했다. 의회는 찰스 1세의 옹고집을 꺾고 그의 정책을 변경시키기 위해 찰스 1세 주위의 정객들을 숙청할 필요를 느꼈다.
맨 먼저 찰스 1세의 측근인 스트래퍼드(Strafford) 백작 토머스 웬트워스(Thomas Wentworth)의 생명을 요구했다. 찰스 1세는 마음이 조금도 내키지 않고 심히 불쾌했지만 의회와 일반 시민의 욕구 충족을 위해 스트래퍼드를 희생양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의회는 다시 윌리엄 로드의 목숨을 요구했다.
로드는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 총장으로까지 승진한 자로 지성과 도덕성 훈련에 엄격하였다. 그는 또한 청교도 신학에 강력히 반대했으며 국교도와 가톨릭 전통을 지혜롭게 융합하여 영국식 국교회를 신장시키려 했다.
찰스 1세에게는 로드 같은 인물이 절실히 필요한 터라 그를 켄터베리 대감독으로 임명하였던 것이다(재위 1633-45).
찰스 1세에게는 유능한 감독인 로드였지만 청교도에게는 눈에가시 같은 존재였다. 의회는 로드를 1641년 3월 런던탑에 가두고 1645년 1월 참수토록 하였다. 찰스 1세와 의회의 긴장은 계속 되었다.
한편 1641년 아일랜드 가톨릭 교도의 반란(an Irish Catholic revolt)이 일어났다. 아일랜드 가톨릭 교도들이 광폭스럽게 날뛰면서 약 30,000명의 개신교도들을 살해하였다. 영국 의회는 찰스 1세가 배후에서 이 사건을 조종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영국 군대 지휘권을 의회가 지명한 자에게 주어 아일랜드 폭도들을 진압할 것을 요구했다.
의회는 국민들을 선동하게 될 수도 있는 “대항의서”(Grand Remonstrance)를 왕에게 제출했다. 대항의서 속에는 찰스의 비 마리아(the French princess, Henrietta Maria)가 가톨릭 교도이기 때문에 아일랜드 반란을 교사했을 것이라는 강경한 내용도 포함되었다.
더 나아가 찰스 1세의 불법 행위도 거론되었고, 영국 국교회 감독 제도를 폐지하고 감독들이 귀족원에서 축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찰스 1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왕비를 모욕한 의회의 다섯 지도자를 체포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의사당을 침입했으나 그들은 이미 피신해 있었다. 고위 국교회 성직자들은 국왕의 편이 되어 의회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왕에게 작위를 받은 사람들도 급속히 왕권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정국은 내란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 청교도 혁명 전쟁(1642-49)
청교도 혁명 기간 동안 왕을 정점으로 집합된 자들을 왕당파(Cavaliers)라 하고, 왕을 비난하는 세력을 청교도 원두당(Round- heads)이라 한다. 원두당은 머리를 짧게 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평민원의 지휘권이 칼빈주의자들인 독립파(the Independents)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왕당파의 군비 조달은 그들 스스로 해결할 것이고 원두당도 전쟁을 위해 스스로 군비 조달을 하겠다고 언명(言明)하였다.
왕당파는 영국 북서부에서 지지자를 많이 거느렸으나 청교도 세력은 남동쪽에서 후원자를 얻었다. 런던을 포함한 남동쪽 주민들은 경제적으로 왕당파보다 더 부유하였기 때문에 내란 초기부터 왕당파는 경제적으로 열세에 있었다.
그러나 찰스 1세는 자신이 열세에 있다고 생각지 않았다. 사실 정치적으로는 찰스 1세에게 이로운 점이 많았다. 성직자들이 자기편이고, 귀족 계급과 일부 부유층 주민들도 왕에게 동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 아일랜드 가톨릭 교도들도 자신을 위해 싸울 수 있도록 1643년에 동맹을 맺어 놓았다.
한편 청교도들은 반가톨릭 스코틀랜드인들(the anti-Catholic Scots)을 자기편에 둘 외교적 필요성이 생겼다. 그래서 영국 의회는 “엄숙한 연맹과 계약”(a Solemn League and Covenant)을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과 맺고 공동 전선을 펴기로 하였다.
영국 청교도들은 스코틀랜드 칼빈주의자들과 종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감독 제도를 폐지하고 두 나라가 지향할 공통 교리서를 만들기로 합의하였다(1643). 칼빈주의 회중파, 청교도적 감독파, 다수의 장로교인들이 모여 토의한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1643년에 시작하여 1647년에 마무리된 이 신앙 고백은 1647년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1648년 영국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1644년에 예배 규범을 의회에 제출하여 재래의 기도문을 폐지시키고, 칼빈주의에 기초한 요리 문답도 제정하였다.
1644년 마스턴 무어 전투(the battle of Marston Moor)에서 청교도 군이 왕당 군을 격파하였다. 이 전투는 청교도이자 평민원 의원인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의 눈부신 활약에 기인한 승리였다. 크롬웰은 종교인들을 모아 군대를 강화시켰다.
가톨릭과 국교회를 반대하는 자면 누구든지 차별 없이 그의 휘하에 들어갈 수 있었다. 회중교도, 침례교도, 장로교도 등 칼빈파 청교도들이 대거 그의 진중에 입영하였다.
크롬웰은 개인적으로는 자유로운 회중파 교인들을 더 좋아하였다. 영국 장로교인들이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과 연합하여 그에게 도전하는 위험성, 장로교인들의 교리적 배타성, 그리고 장로직이 가톨릭이나 국교회 감독과 같다는 그의 사상 때문이었다.
크롬웰은 1645년 네이즈비(Naseby) 전투에서 왕당파를 결정적으로 무찔렀다. 찰스 1세는 더 이상 싸울 의욕을 잃고 1646년 스코틀랜드 군에 항복하였다.
찰스 1세는 다시 재기할 때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크롬웰과 장로교도들간에 금이 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크롬웰이 국가와 종교를 분리시키고 각 교회는 국가의 보호와 후원하에 독립하여 서로 구속됨이 없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리보다는 형제의 사랑을 강조한 것이다.
칼빈주의 교회 정치를 주장하며 교회, 노회, 총회 등 대표 정치에서 교회 이상을 발견하는 장로교인들에게는 크롬웰이 아주 느슨한 교리를 가지고 있는 것같이 보여졌다. 또 크롬웰이 너무 분별 없이 과격파들을 옹호하며 급진적인 혁명 정책을 수행한다고 생각되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도 크롬웰의 독주가 그렇게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크롬웰보다 더 과격한 군부의 한 파가 있었는데, 청교도 극단주의자로서 수평파(Levellers)라고도 불렸다. 수평파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인민 주권을 주장하고 왕정 폐지도 거론하였다.
군부의 갈등과 장로교도와 크롬웰의 갈등을 호기로 잡고 찰스 1세는 1647년 12월 비밀리에 스코틀랜드인들과 회합을 가졌다. 국왕은 장로교회를 영국 국교로 만들겠으며 청교도 과격파도 제거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하여 이제 왕당군과 스코틀랜드 장로파 군 그리고 영국내 장로파 청교도들이 합세하여 크롬웰 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찰스 1세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을 모른 채 영국의 장로파들은 국왕과 연합하여 장로 교회를 부흥시키고 온건한 입헌 정치를 수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크롬웰은 1648년 8월 프레스턴 팬즈(Preston Pans)에서 스코틀랜드 군을 격파하고, 찰스 1세를 포로로 체포한 후 의회에서 140명의 장로파 의원을 제거하였다. 의회는 청교도 과격파인 독립파 60인으로 구성되어 “잔당 의회”(the Rump Parliament)로 불리어졌다.
크롬웰 진중의 청교도 목사들은 혁명군에 가담하여 위험 부담이 큰 전투 지역을 오르내리며 병사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존 바이카즈란 병사는 보고하기를, “청교도 마샬 목사, 아쉬 목사, 몰튼 목사, 오바댜와 세지윅 목사, 윌킨즈 목사 그리고 여러 뛰어난 목사들이 진중의 위험 지역을 오르내리며 도망치지 말고 용감히 싸우라고 병사들을 위로, 격려하고 있었다. 병사들의 종교와 시민법을 수호하기 위해 단연코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면서.”
청교도 혁명 기간 중에 기독교 전사(The Christian Soldier), 병사의 요리 문답(The Soldier’s Catechism)과 같은 책들이 청교도 군문에 널리 유포되어 병사의 전쟁 참여를 적극 장려하고 있었다. 병사는 보이지 않는 어둠의 세력과 영적 전쟁을 해야 할 뿐 아니라, 보이는 현실 세계의 악을 제거하기 위해 거룩한 전쟁을 치러야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자는 기독교 군인이어야 하며, 군인이 아닌 자는 기독교인이 아니다”(Whoever is a professed Christian he is a professed soldier, or if no soldier no Christian)란 영국 청교도 전쟁 신학이 탄생한 것이다. 찰스 1세는 1649년 1월 크롬웰의 명령으로 참수되었다.
2. 공화정과 크롬웰의 통치(1649-58)
잔당 의회는 영국의 왕정과 귀족원을 폐지하였다. 영국은 공화정 시대로 들어간 것이다. 공화정은 장기 의회 기간 중 참석한 전체 의원수의 십분의 일 정도로 축소한 인원을 평민층에서 선택하여 국사를 운영하였다. 이 소수의 정치인들은 크롬웰의 군사에 적극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크롬웰은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불안 요소로 잠재해 있는 아일랜드 적대자들을 1649-50년 사이에 소탕하고, 찰스 1세의 아들을 지원하고 있는 스코틀랜드인들도 강압으로 다스렸다.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는 변장하고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영국의 대외적인 권위를 신장하고 상공업 발전을 위해 크롬웰은 1651년 항해 조령(the Navigation Act)을 반포하였다.
항해 조령은 일종의 중상주의 정책으로서, 유럽 외에서 영국으로 들어오는 상품들은 영국 선박에 의해 수송하고, 유럽내에서 영국으로 들어오는 상품들은 영국 선박이나 생산국의 선박에 의해서만 수송할 것을 규정한 법령이다.
당시 네덜란드는 영국의 경쟁 해운국으로서 영국에 위협적인 존재였으므로 크롬웰은 네덜란드 선박을 이용할 경우 영국 경제가 피폐될 것을 우려하였다. 네덜란드는 크롬웰의 정책에 도전하여 해상 전쟁을 일으키나 영국군을 당해 내지 못한다. 이후부터 영국은 유럽에서 해상권을 독차지하게 된다.
정치적으로 크롬웰은 잔당 의회원들과 일부 군대의 도전을 늘 받아 왔다. 잔당 의회는 권력의 폭을 넓히기 위해 새롭게 선택되어 들어오는 의원들을 그들이 받아들이거나 거절하거나 마음대로 하여 크롬웰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
크롬웰은 군대의 지원을 받아 잔당 의회를 1653년 해체하고, 각 지역의 회중교회 목사들 중에서 선별하여 공석된 의원수 자리를 채우도록 했다. 수개월 후 새 의원들이 모두 사직하고 크롬웰은 호민관(the Lord Protector of England)의 자리에 오른다.
모든 권력을 손에 쥔 크롬웰은 1653년부터 1658년까지 사실상의 독재 정치를 실시하였다. 1653년 일단의 왕당파의 반역이 있자, 크롬웰은 가톨릭 성직자들을 국외로 추방시키고, 영국 국교회(성공회) 성직자들에게는 설교 금지 명령을 내렸다. 영국을 11개의 군대 주둔 지역으로 나누어 장군들로 하여금 세금을 징수케 하고, 경찰 업무를 수행토록 하며, 공중 도덕을 유지시켰다.
과거 주일 중에 성행했던 체육 행사, 도박, 음주, 유희 등을 금했으며, 사창가는 폐쇄되었다. 극장 구경도 금해졌다. 크롬웰은 의무 교육, 출판의 자유, 국립 은행 설립을 도왔으며, 국제적으로 상업 발달을 위해 국제 무역과 해외 진출을 장려하였다.
그가 1658년 9월 3일 사망하고 그의 아들 리처드(Richard)가 호민관이 되었으나 강력한 지도력이 부족하여 군대와 과격파 종교가들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군부에서 잔당 의회 소집을 요구하고 나서자 거절할 힘을 잃은 리처드는 잔당 의회를 소집하게 된다.
군부와 잔당 의회가 다시 마찰을 일으키자 지금까지 기회만 노리고 있던 왕당파 요원들이 왕정 복고를 추진하였다. 1660년 5월 29일 찰스 2세는 런던으로 돌아와 영국왕에 등극한다(재위 1660-85).
3. 왕정 복고
찰스 2세는 잔꾀가 많고 매력적이나 이기적이며 사생활은 몹시 음란하였다. 장로교도들과 칼빈주의 극단파를 혐오하였으며, 입으로는 영국 국교도라고 부르짖었으나 가톨릭에 대해 항상 동정적이었다.
그는 공화정 시대에 사역했던 개신교 지도자들을 면직시키고 이들에게는 설교와 학교의 교사 생활도 금지시켰다. 그리고 국교회 전성 시대에 마련했던 통일령(Act of Uniformity)과 공동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 사용을 복원시켰다.
또한 청교도들을 단속하기 위해 1664년과 1670년에 비밀 집회 금지령(the Conventicle Act)을 반포하여 5명 이상이 모이는 것을 금했으며, 만일 모일 때는 국교회에서 사용하는 기도서(the Prayer Book) 외에 다른 종교 서적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5마일 퇴거령(the Five Mile Act)을 1665년에 반포하여 비국교도 성직자는 도시에서 5마일 이상 격리하여 살도록 했다.
만일 청교도 성직자가 5마일 이내 도시에 입성하여 설교하거나 성경을 가르칠 때는 국교회와 정부에 반대되는 이야기를 일체 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만 허용하였다. 청교도들이 주로 도시 지역에 밀집해서 거주하고 있는 형편에 이처럼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은 청교도들에게 엄청난 영적 재난이었다.
1672년 찰스 2세는 종교 자유령(the Declaration of Indulgence)을 발표한다. 이 법령은 가톨릭과 개신교 분리파들에게 좋은 호응을 받기 위한 방법의 일환이었지만 의회는 1673년 국왕에게 종교 자유령 취소를 강제한다.
그 대신 의회는 “심사법”(the Test Act)을 제정하여 국교도 이외는 공직을 담당할 수 없도록 했다. 군인이건 시민이건 국가 기관에 봉직하는 자는 반드시 국교회에서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을 받아야 하며, 국교회에 충성하는 선서식을 거행해야 한다.
국왕은 왕권 신수설을 신봉하는 자였지만 이미 공화정을 맛본 영국 시민이 국왕의 뜻을 순순히 들어 줄 리 없었다. 의회는 1679년 인신 보호령(Habeas Corpus Act)을 제정하여 왕이 마음대로 국민을 체포하거나 투옥하지 못하도록 결의하였다.
그의 치세에 도덕은 급속히 추락했다. 이 시대의 타락상은 존 번연과 존 밀턴 같은 이들에게 탄핵되었다. 찰스 2세는 임종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왕위를 동생 제임스 2세(재위 1685-88)에게 넘긴다.
4. 명예 혁명(1688)
제임스 2세는 치세 중 절대 왕권의 확립과 가톨릭 교회의 부흥을 소명이라 생각했다. 찰스 2세 시대에 발전된 정당 중 왕권을 보수하는 토리당(Tory)이나 왕권을 제한하고 민권을 신장하려 하는 휘그당(Whig) 모두가 제임스 2세의 국정 방향에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토리당은 왕권을 지지하지만 자신들이 영국 국교도(성공회 성도)이기 때문에 가톨릭 교도인 제임스 2세를 탐탁하게 생각할 리 없었다.
제임스 2세는 국법으로 금함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교도들을 고위 관직에 임명하고, 1687년에는 “양심의 자유”(the Declaration of Liberty of Conscience)를 발표하여 가톨릭을 포함한 개신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준다고 공포하였다. 국회의 허락 없이 공포된 왕의 헌장은 의회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사태가 더욱 악화된 것은 제임스 2세의 부인인 메리(Mary of Este, 1658-1718)가 아들을 잉태한 것이다. 영국 국민의 눈으로 볼 때 이 사건은 대이변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가톨릭 국왕 제임스 2세와 가톨릭 왕비인 메리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다음 왕위 계승자가 분명한데 이 왕자가 커서 가톨릭 왕이 된다고 생각하니 일이 크게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가톨릭을 혐오하는 영국 국민들은 이 재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네덜란드 총독인 윌리엄(William of Orange, 1650-1702)과 그의 부인 메리(Mary)에게 왕관을 제공했고,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윌리엄은 영국 왕 윌리엄 3세(재위 1689-1702)로 등극하여 “신앙 자유령”(the Toleration Act)을 발표했다.
누구나 왕과 정부에게 충성하고 왕을 교회의 머리로 인정하는 한 신앙, 예배, 교회 조직을 자유롭게 하도록 하였다. 그렇다고 국교회가 없어졌다는 말은 아니다. 국교회는 계속 영국을 대표하는 교회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윌리엄 3세의 비 메리는 제임스 2세의 딸이었으니 사위가 장인을 몰아낸 혁명이 된 셈이나, 개신교 역사에서 보면 윌리엄 3세의 비 메리가 개신교도였기 때문에 이 혁명이 가능했던 것이다.
영국 국민 절대 다수의 지지와 또 토리당과 휘그당 모두가 손을 잡고 피흘림 없이 이 혁명을 완성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 혁명을 명예 혁명(the Glorious Revolution)이라 부른다.
윌리엄 3세는 1688년 의회가 제출한 권리 선언(the Declaration of Rights)을 승인하고 이것을 법제화한 것이 1689년에 발표된 권리 장전(the Bill of Rights)이다. 이 장전으로 왕권에 대한 국가 법률의 우위가 인정되었다.
제임스 2세의 세력이 보인 전투(the Boyne Battle in Ireland)에 투입되어 1690년 윌리엄 3세에 게 저항했으나 전쟁에 패한다. 이후부터 윌리엄 3세는 별탈 없이 평온하게 국사를 치리하게 된다.
윌리엄 3세와 메리가 후사 없이 죽었기 때문에 메리의 동생 앤(Anne)이 등극하여 스코틀랜드를 정식으로 합병하고 국호를 대영 제국(the Great Britian)으로 호칭한다. 앤 여왕(재위 1702-14)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의회는 제임스 2세의 아들인 제임스 3세(제임스 에드워드)가 가톨릭 교도로서 영국 왕에 취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제임스 1세의 손녀인 소피아(Sophia)의 후사 중에서 영국 왕을 모시기로 결정한다.
소피아는 아들 조지(George, elector of Hanover)를 낳았는데, 조지가 나중에 영국 왕 조지 1세로 등극한다(재위 1714-27).
독일에서 장성한 조지 1세는 영어를 잘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영국 국정에 큰 관심이 없었기에 자연히 국가의 대소사 관리는 의회의 수중에 떨어졌다. 의회는 2대 정당으로 나누어져 다수당이 책임 내각을 구성하여 국정을 통할하였다.
“국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란 말이 나왔듯이 영국은 점진적으로 의회 정치를 실시하게 되었다.
II. 존 번연 시대의 종교 상황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청교도 신앙도 상당히 윤곽을 드러낸다. 청교도들은 하나님 말씀이 제도나 조직, 예식보다 위에 있다는 점에서 가톨릭의 교황 지상주의, 교권주의에 반대했다.
청교도들은, 우주와 인생을 주관하는 자는 하나님이시라는 절대 신관을 신봉했고, “영국 국교회가 성경에 금하지 아니하는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하는 말에 청교도들은 성경이 허락한 것만 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구원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이지 인간이 인위적으로 얻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 예정과 유기가 성립된다고 믿었다. 그들의 설교는 단순하였다.
청교도들의 교회관은 일치하지 않아 대충 회중, 장로, 침례교 식으로 성도들의 편향에 따라 구분짓게 된다. 여기에 첨부해야 할 중요한 신학 사항이 있는데 바로 “계약 신학”(Covenant Theology)이다.
계약 신학은 하나님께서 그 선택한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게 하시고, 그의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을 주시며, 그들이 생존시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신앙 생활을 충실히 감당할 때 지상에서도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 신학은 청교도들의 삶의 원동력이 되었고, 영국에서뿐만 아니라 미국 이민 생활에서도 엄청난 위력을 제공한다.
영국 청교도 혁명 이후 종교 생활은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왜냐하면 크롬웰은 군주나 다름없는,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실제적 실력자였기 때문이다. 신앙적으로 크롬웰은 독립 회중파 칼빈주의자였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순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애를 쓰는 칼빈주의자들간에 불협 화음이 일어나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독재 가톨릭이나 영국 국교회가 싫었지만, 영국에 교회가 없어지기를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는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성도들을 지도할 “국가 교회”(national church) 성립을 희망했다.
그러나 그가 말한 국가 교회는 결코 영국 국교회식 감독 교회를 뜻하지 않는다. 영국 성공회는 국가의 명령 아래 종교의 교리와 실천을 강제했지만, 크롬웰은 그러한 국가의 규제에 종지부를 찍고 관용과 자유를 교회에 줌으로써 다양한 교회가 경건을 위한 열심을 내도록 유도했다.
그가 말한 국가 교회는 성직자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똑바로 전해지며, 말씀에 따라 성결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의 모임을 말한다. 성직자는 장로파, 독립 회중파, 침례파, 또는 칼빈주의 분리파 중에서 신중히 선택되어 회중을 지도할 수 있게 했다.
이들 칼빈주의 청교도들이 지도하는 교회면 국가에서 지원해 주고, 가난하여 특별 원조가 필요한 교구도 정부 지원을 받도록 하였다.
크롬웰은 국교도나 가톨릭 교도들도 정부에 시비를 걸지 않고 조용히 예배를 드리면 탄압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크롬웰의 온화한 종교 정책은 가톨릭 교도와 국교도에게 인기가 없었다. 극단주의 청교도들인 몇 분파들도 크롬웰의 정책에 찬성하지 아니했다.
수평파(Levellers)들은 런던 무역상 중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는데 이들의 상당수가 침례교도들이었다. 이들의 지도자 존 릴번(John Lilburne)도 침례교도로서 전투적이고, 때로는 무식해 보일 만큼 용감하며 고집 불통이어서 그의 추종자들의 인기를 얻었다.
릴번은 만인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며 의회원들은 모든 사람이 참가한 투표에 의해서 선택받아야 하고, 선택된 의원들은 오직 국사인 행정과 정치에만 관여해야 되고, 이미 선택받은 의원은 두번 다시 의원직에 출마할 수 없다는 급진적 정치 이론을 제시했다.
또 다른 극단주의자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다섯번째 제국” (the Fifth Monarchy)을 꿈꾸는 자들과 개간파(Diggers)들이었다.
다섯번째 제국을 믿는 자들이 주장한 이론은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셔서 다섯번째의 신제국, 즉 천년 왕국을 건설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이론에 따르면 첫번째 제국은 앗시리아 제국이고, 두번째는 페르시아 제국, 세번째는 그리스 제국, 네번째는 로마 제국인데, 모두 역사의 흐름에서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왕국이 임한다는 것이다. 개간파는 윈스턴리(Gerrard Winstanley, 1609-52)의 지도 아래 토지를 비롯한 모든 재산의 평등한 소유를 주장했다.
크롬웰이 싫어한 “청교도 중의 청교도”가 있었는데 이들은 “떠는 자”(Quakers) 또는 “친우들의 조직”(the Society of Friends)이라고 불리는 개신교도들이다.
창시자 조지 폭스(George Fox, 1624-91)는 방직공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청교도 설교자들을 좋아하고 그들의 설교를 경청했다. 성경을 사랑하여 성경 구절을 많이 암송하였다. 19세 때 종교 생활에 의심이 생겨 참기독교가 무엇인가 여러 성직자들을 찾아다니며 물어 보았으나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 못하자 조용히 명상 기도에 들어갔다. 1647년 그에게 영적 깨달음이 왔다.
그는 “기독교란 외적 신앙 고백이나 의식이 아니요, 그리스도가 직접 신자의 혼에 비추어 주시는 내적인 빛이다. 성경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신자의 영을 비추어 준다. 성령은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며, 우리에게 봉사의 정신을 새롭게 하여 주신다”고 하였다.
폭스는 내적인 빛(inner Light)을 강조하여 교역자, 성례, 교회의 권위를 배척하였다. 그의 교회는 1625년 영국 북방 프레스턴 패트릭(Preston Patrick)에서 처음 설립된 후 급속하게 영국 각지, 서인도 제도, 독일, 네덜란드, 미국 식민지, 오스트리아 등지로 전파되었다. 폭스의 퀘이커파는 많은 희생자를 내는 핍박을 받아 왔는데, 그들은 숨지 않고 집회를 해 왔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그들은 성결을 강조하여 비굴한 태도, 전쟁, 노예 제도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초대 교회와 칼빈주의가 주장한 성찬 등 성례를 인정하지 않고 교직 제도를 탄핵했으므로 크롬웰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윤리와 도덕성에 있어서, 우리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만한 많은 장점이 있는 퀘이커파들이지만 그들의 판이하게 다른 교회관 때문에 칼빈주의 청교도라고 불러서는 안 될 것이다. “청교도 중의 청교도”란 이름은 그들의 교회 정화 이론이 너무 개방적이고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임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본장의 주인공인 존 번연은 침례교도였다. 당시 침례교회는 일반 침례교회와 특수 침례교회로 나누어져 있었다. 일반 침례교회는 존 스미스(John Smyth, 1554?-1612)에 의해 창립되었고, 신학적으로는 알미니안 색채가 짙었다.
특수 침례교회는 헨리 제이콥(Henry Jacob, 1553-1625)의 신학 사상을 따르는 일단의 칼빈주의자들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제이콥은 1553년 켄트(Kent)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에서 교육을 받고, 켄트의 체리턴(Cheriton) 교구 목사로 임명받았다. 1591년경까지 영국 성공회에 몸담고 있다가 그의 청교도 신앙 양심에 따라 성공회를 사임하고 네덜란드로 가서 망명 중인 영국인 회중을 섬겼다.
제이콥은 영국으로 돌아와 1616년 사우스와크(Southwark)에 독립파 회중교회를 세웠다. 제이콥이 제일 독립파 회중교회를 세운 것은 영국 성공회가 교리적으로 잘못되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제이콥이 1624년 미국 버지니아로 이민 가자(그는 이민 1년 후 사망한다), 제일 회중교회는 여러 목회자들에 의해 지속되었다. 헨리 제시(Henry Jessey)도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제시는 재세례를 받았기에 원칙적으로 침례교도라 부를 수 있다.
존 번연은 침례관에 대해 제시의 영향을 받았고, 제시는 헨리 제이콥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제이콥의 신학 사상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616년 제이콥은 “영국 국교회의 교리에 동의하지만 28개 항목에 대해 성경의 증거 가운데 반대해야 하는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으로 된 고백 및 항변”이라는 글을 출간한다.
이 글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의 직분. [그리스도는] 교회의 질서와 통치의 문제들에 있어서 왕이시다.
2. 완전한 성경.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만 따라야 한다.]
3. 교회의 구분,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참가시적인 교회.
4. 가시적이고 정치적인 그리스도의 참교회. [자유롭고 독립된 회중 교회].
5. 대회와 회의들. [대회(Synod)를 통한 연합 운동, 그러나 대회의 결정이 성경을 위반하면 굴복할 이유가 없다.]
6. 보편적 또는 가톨릭적 교회. [외면적 차원의 유일한 보편 교회는 없다.]
7. 한 지역 단위의 독립 교회. [교구 중심의 지역 교회를 인정할 수 없다.]
8. 참된 통치적 자주권을 가진 가시적 교회. [개교회.]
9. 주교장이나 교구 주교에 대해. [성경에 이러한 직책을 인정하는 것은 일체 없다.]
10. 교역자를 세우는 일. [회중의 승낙.]
11. 영국 교구 사역자들이나 교구민 사이의 교통에 대하여. [원칙적으로 가하나 영국 국교회의 통제를 받을 필요가 없다.]
12. 겸직 목회자들과 부재 성직자들에 관하여. [이것은 불법이다.]
13. 규율과 책망. [교구권이나 지방 감독관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다.]
14. 각 교회의 목회자들의 수와 교회의 목회 지침. [적어도 1명의 목회자와 장로, 집사를 두어야 한다.]
15. 권징. [필요하다.]
16. 인간적인 전통에 대하여. [불필요하다.]
17. 사도의 유전에 대하여. [성경이 금하지 않으면 존경해야 한다.]
18. 은사의 성경적 적용. [성경의 범위내에서 가하다.]
19. 설교문을 읽는 것에 대해서. [예배시 설교문을 읽지 말 것.]
24. 교회 사역자들이 국가의 행정관이 되는 것. [부당하다.]
26. 십일조와 목회자의 사례비. [자원하는 마음으로 할 것].
27. 정부와 교회. [정부는 교회의 영적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
이상을 살펴보면 제이콥은 가톨릭, 영국 성공회의 교회관을 부정할 뿐 아니라 장로교회의 대의 정치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가 생각한 진정한 교회는 모여드는 공동체(gathered commu- nity), 곧 개교회 회중들로 구성된 지역 교회(the local congrega- tion)를 말한다.
이 지역 교회는 상호 독립성을 인정하며 연합 활동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제이콥은 세례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침례교도들이 강조하는 침수 세례의 문제는 언제부터 논의되었을까?
로이드 존스는 영국내 침례교의 기원을 1612년경으로 잡고 있지만 침수 세례 논쟁은 1641년경으로 보고 있다. 이 말은 1640년까지 침례교도가 침수 세례보다는 점수(點水) 세례를 받았다는 말이다.
회중 교회 목사이면서 재세례를 받고 침례교도로 자처한 헨리 제시도 1663년 죽을 때까지 점수 세례와 침수 세례 모두를 인정했다. 신학적으로는 침수 세례가 원칙이라고 생각했지만 침수 세례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교회 분열과 성도들간에 화평이 깨어지는 아픔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후술하겠지만, 존 번연도 제시의 견해를 따랐기에 보다 과격한 침수 세례파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았다.
요약하면, 번연 시대의 영국 교회들은 다양한 교파 분열을 하고 있었다. 크롬웰은 이 다양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영국 성공회 지지자들이나 장로회주의자들은 이 다양성에 똑같이 반대하였다.
성공회주의자들이 반대한 것은 그들의 원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서였고, 장로회주의자들이 반대한 것은 크롬웰의 정책이 종교를 너무 느슨하게 한다는 우려와 장로회 정치가 가장 성경적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장로파들이 같은 청교도들인 독립파와 싸움을 할 때 가장 이익을 보는 집단은 말할 것도 없이 성공회 지지자들이었다.
스코틀랜드 장로파들과 영국의 장로파들이 연합하여 크롬웰을 대적한 것과 크롬웰 사후 장로회 지도자들이 프랑스에 망명해 있는 찰스 2세를 영국 왕으로 불러들인 것은 영국의 청교도 운동을 급격히 퇴보시키는 대실수였다. 장로파 청교도들은 정객들의 음모와 술책을 간파하지 못한 채 정치와 야합하는 비극을 산출했다.
1660년 찰스 2세의 왕정 복고, 1662년 영국 국교회의 통일령은 청교도 진영의 분열과 싸움의 결과였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존 오웬(John Owen, 1616-83), 토머스 굿윈(Thomas Goodwin), 존 번연과 같은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목회자들이 나왔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들은 다양한 교파의 청교도들을 하나로 연합시켜 집결된 힘을 창출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III. 존 번연의 생애
존 번연은 1628년 11월 영국의 농경 지대 베드퍼드(Bedford) 근교인 엘스토(Elstow)에서 태어났다. 성인이 되었을 때 “그는 외모상 키가 크고 뼈대가 튼튼한 사람이었지만 살은 찌지 않았고, 반짝거리는 눈에 비교적 좋은 혈색을 하고 있었다.
또한 고대 영국의 유행을 좇아 윗입술 부분까지 그의 머리를 늘어뜨렸다. 그의 머리는 불그스레한 갈색이었는데, 생애 후반기에는 나이가 들어 회색으로 변했다. 그의 코는 잘생겼으며 구부러지거나 비뚤어지지 않았고 입은 좀 컸으며 앞이마는 약간 넓었다.”
번연의 아버지 토머스 번연은 떠돌이 땜장이여서 자녀들에게 충분한 교육을 시킬 능력이 없었다. 번연은 겨우 읽고 쓰는 것을 문법 학교에서 배운 후 일찍 아버지의 직업을 전수받았다.
번연은 소년 시절을 엘스토 농경지 소작농의 아이들과 어울리며 보냈다. 그는 감수성이 뛰어났으며 비록 정규 대학 공부를 하지는 못했지만 독서열이 대단하였다.
번연은 케임브리지 근처 스타워브리지(Stourbridge)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책들을 닥치는 대로 구해 읽었다. 햄프턴의 베비스(Bevis of Hampton)나 그리스도교의 7용사 같은 모험담이 주제가 된 책들을 통해 번연은 풍부한 상상력을 길렀다.
이 외에도 번연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목판본으로 출판된 존 폭스의 순교자 열전(Book of Martyrs), 쉬운 말로 된 설교집, 일상의 도덕적인 대화록, 하나님께 나아가는 감상적인 판단과 행위를 다루는 책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흠정역 성경을 탐독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책들에서 번연은 영웅 심리, 인문주의적 로맨스 그리고 영국 민담과 전승이 주는 시민의 일상 생활을 접할 수 있었다.
번연은 부모를 따라 영국 성공회에 출석했으며, 9세 때 죄 때문에 고통당하는 영혼의 자각이 있었다. 번연은 이 상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주님에게 큰 잘못을 범했으므로 나의 어린 시절에도 주님은 무서운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고 겁을 먹게 하셨으며, 두려운 환상을 통해 나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셨다.
즉, 나는 종종 죄 가운데서 나날을 보낸 후 잠자리에 들었을 때 악령들에 대한 불안으로 아주 큰 고통을 맛보았던 것이다······
내가 9세나 10세의 어린 아이였을 때 이러한 생각들이 내 영혼에 큰 고통을 주었으므로, 그때 나는 많은 오락과 유치하고 보잘것없는 일들을 즐기고 나의 헛된 동무들과 어울리면서도 종종 심하게 낙담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극심한 괴로움을 맛보았다. ]
번연의 감수성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1644년 곧 번연이 16세일 때 어머니가 6월에 돌아가셨고, 7월에는 누이동생 마거릿이 죽었다. 8월에 아버지는 새 어머니를 데려왔다. 이 일련의 처참한 상황에서 번연의 감수성은 어떻게 표출되었는가? 번연의 전기 작가 해리슨은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감수성이 강한 소년[번연]이 광폭하게 되었다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번연은 [동네] 청소년들의 선동가가 되었고, 불경건하고 못된 짓을 하는 데 있어서 골목 대장이 되었다.]
1644년 11월 우리는 번연이 뉴포트 파그넬(Newport Pagnell) 의회군 수비대의 보충병으로 일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의회군은 청교도 지도자 크롬웰을 중심으로 영국 왕 찰스 1세에 대항하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번연은 가정을 떠나 내란의 한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위직 보충병의 지위에 있었던 번연에게 어떤 특별한 임무가 부여된 것 같지는 않다. 번연은 1647년 7월까지 의회군에 있었으나 오직 한번 레스터셔 포위 공격 중 옆에 있던 동료가 총에 맞는 사건을 제외하곤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았다.
3년의 군복무 중에 번연은 다양한 분파의 청교도 교리를 접할 수 있었고, 크롬웰의 신형군(New Model Army)이 가진 경건한 신앙 생활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크롬웰의 철기병대는 “전장에서나 막사에서나 고도로 엄격한 훈련을 실시했다······노름도 하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았으며” 촌락에 접근해도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이때 받은 인상들이 후에 거룩한 전쟁(The Holy War)에 표현된다.
제대 후 번연은 마리아라고 하는 매우 경건한 여성과 결혼했다(1649). 그녀는 결혼 혼수감으로 접시나 숟가락 같은 가정 용품 대신 번연에게 큰 영향을 줄 두 권의 책을 가져왔다.
한 권은 아더 덴트(Arthur Dent)의 평범한 사람이 하늘에 이르는 좁은 길(The Plain Man’s Pathway to Heaven)이었고, 또 한 권은 루이스 베일리(Lewis Bayly)의 경건의 훈련(The Practice of Piety)이었다.
번연은 덴트의 글에서 쉽고 친숙한 격언을 가지고도 통렬한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또한 덴트와 베일리가 사용한 대화 형식의 글들이 아름다우나 예리하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도 알게 되었다. 번연이 천로 역정이나 다른 글에서 왜 대화체를 애용하게 되었는가를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겠다.
마리아와의 결혼은 번연에게 영적 성장을 가져왔다. 마리아는 거친 남성인 번연을 조용한 인내와 섬김으로 품었다. 번연에게 말싸움을 걸기보다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약점을 스스로 깨닫게 도왔다.
예를 들면, 마리아의 아버지(번연에게는 장인)의 신앙 생활에서 그녀가 어떻게 은혜를 받았는가를 이야기하는 식으로 번연을 부드럽게 충고하였다.
번연의 신앙 성장은 결혼 후 약 5년 동안(1650-55)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즐기던 춤, 종치기, 운동 경기와 같은 오락들을 서서히 포기하였다.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도 이 시기에 읽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죽고 사망 권세의 두려움에서 빠져 나오는 비밀도 깨닫기 시작했다.
번연의 일생에 금을 그을 중요한 영적 선생인 존 기퍼드(John Gifford) 목사도 이때 알게 되었다. 기퍼드는 의사였고, 한때 왕당파 군의 소령이었다가 1650년 개종하여 침례교 목사가 되었다.
기퍼드는 번연에게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구원의 확신을 심어 주었다. 칭의는 그리스도를 단순히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며 그리스도 밖에서 어떤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기퍼드의 성경 강해로 인해 번연은 광명의 길로 들어섰다. 후에 번연은 은혜의 교리를 이렇게 정의했다.
[자기의 선행으로써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럴 때 그들은 은혜로써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행위로써 구원받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행위와 은혜는 이 문제에 있어서······서로 상반된다. 만약 [우리]가 행위로써 구원을 받는다면 은혜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교리를 연구하라.
당신이 이 약 저 약을 써 보지만 치료되지 않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다면, 치료를 위하여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약에 대하여 알아보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의 문제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라고 확신한다. 우리의 상처받은 양심을 치료하기 위한 최초의 조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특별히 그의 시선에 있는 저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는 것에 대하여 아는 일이다.
상처받은 양심 아래 사는 사람은 자연히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게 되며, 그가 마땅히 행하여야 하는 그 행위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만족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말씀에 이르기를,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고 하셨다. 그러므로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배워야만 한다. 마음을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다운 것이다.]
1653년 번연은 기퍼드의 성 요한 교회에 정규 회원으로 가입했다. 1655년 번연은 엘스토에서 베드퍼드로 이주했고 평신도 설교자로 봉사했다. 이때 건강이 나빴던 마리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기퍼드가 죽은 후 번연은 더 한층 설교할 기회가 많아졌다. 그러나 1660년 찰스 2세의 왕정 복고로 청교도 전성 시대가 끝나 가고 있었다. 찰스는 성공회를 영국의 유일한 교회로 복귀시키고 비국교도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축출하였다. 크롬웰 치세에 사용했던 베드퍼드 성 요한 침례 교회는 다시 성공회의 교회가 되었다.
번연같이 비국교도이고 아울러 성직을 받지 못한 자로서 설교한다는 것은 국법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 되었다. 설교 금지령을 위반한 번연은 12년 동안(1660-72)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
감옥에 들어가기 1년 전 번연은 엘리자베스를 새 아내로 맞이했다. 엘리자베스는 총명하고 용기 있는 여성이었으며 번연을 구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항소하였다. 그녀의 항소는 묵살되었다.
번연의 오랜 수감 생활은 상당히 자유스러운 것이었으며 때로는 밖으로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러 나갈 수도 있었다. 우리는 번연의 수감 생활이 융통성 있는 것임을 한 간수와 번연 사이의 일화에서 볼 수 있다.
[번연이 종종 감옥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이 런던에 있는 번연의 박해자들 중 몇몇 사람에게 알려졌기 때문에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 간수와 이야기할 관리를 내려 보냈다······번연은 그때 그의 가족과 함께 집에 있었는데 마음이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내에게 말하기를, 비록 간수가 다음날 아침까지 집에 머물 수 있는 자유를 주었지만 왠지 불안하므로 즉시 돌아가야 겠다고 했다. 번연은 감옥으로 돌아갔고, 간수는 그렇게 좋지 않은 시간에 번연이 돌아온 것에 대해 싫은 소리를 했다.
이른 아침에 그 관리가 도착했고, 그는 간수에게 물었다. “모든 죄수들이 잘 수감되어 있는가?” “그렇습니다.” “존 번연도 안전하게 수감되어 있는가?” “그렇습니다.” “그를 봤으면 한다.” 번연은 불려 나왔고 그래서 만사가 잘 해결되었다.
그 관리가 돌아간 후 간수는 번연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당신은 당신이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때에 다시 나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제 돌아와야 하는지를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까요.” ]
번연은 양심수로서 심지어는 일부 간수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옥중에서 번연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였다. 그의 육체는 감금당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딤후 2:9). 그는 감옥에서 60여 명의 양심수들에게 소망과 위로의 말씀을 전해 주었다.
또 한편 자신과 가족의 생활을 위해 장식이 달린 레이스(long Tagg’d laces)를 뜨기도 했다.
1672년 3월 찰스 2세는 비국교도들에 대한 종교 관용을 선포하였다. 동년 5월 번연은 석방되었다. 출감 즉시 번연은 베드퍼드의 비국교도 침례교회 목사로 임직되었다.
1676년 다시 비국교도 박해가 시작되어 번연은 6개월 간 짧은 투옥을 당하는데, 이때 천로 역정 전반부를 쓴 것으로 생각되고, 후반부는 1684년에 완성하였다. 천로 역정에 버금가는 대작 거룩한 전쟁은 1682년에 썼다.
번연의 천로 역정은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이것 때문에 그의 유명세는 높아만 갔다. 영국 왕 제임스 2세는 번연을 비국교도 진영에서 빼내려고 관직을 제의하는 등 여러 모양의 회유를 시도했으나 번연의 지혜로운 저항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번연은 유명해졌지만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켰다. 1688년 8월 31일 번연은 재산 상속 관계 때문에 생긴 어떤 부자간의 갈등을 화해시키러 런던에 갔다가 심한 비를 맞고 열병으로 사망하였다.
IV. 번연의 사상
1. 교회관
번연은 많은 의미에서 교리적 청교도였다. 그는 칼빈과 같이 교회의 표지로 말씀의 선포와 올바른 성례의 집행 그리고 권징을 믿었다.
특히 권징에 대해서는 “정확성을 지니고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며 경우에 맞을 뿐 아니라 교회내에서 그런 것들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도 신속했기 때문에 대단히 유익을 끼쳤다.”
번연은 1655-60년 사이에 영국에서 시작된 퀘이커 교도들과 교리적인 논쟁을 한 적이 있다. 그가 쓴 몇몇 열린 복음의 진리들(Some Gospel Truths Opened, 1655)과 몇몇 열린 복음의 진리들을 옹호함(A Vindication of Some Gospel Truths Opened, 1657)은 퀘이커파의 지나친 “광명의 교리”를 비판한 책들이다.
성령의 빛(내적 조명)을 강조하여 모든 신학의 영역을 개인적 체험으로 대체한다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번연은 퀘이커파의 몽롱한 빛보다 성경에 근거한 확실성 있는 객관적 진리를 추구했다. 확실히 퀘이커파는 성경의 권위를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퀘이커 교도들의 신비주의는 교리의 모호를 가져왔다고 비판했던 번연은 성찬과 세례에 대해서는 놀라우리만큼 관용적이었다. 번연은 공개 성만찬(Open Communion)을 지지하였다. 공개 성만찬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룩한 생활을 하겠다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찬식을 허락하는 것이다.
세례에 있어서 번연은 성인의 침수 세례가 성경적이라고 굳게 믿어 자신도 침수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세 자녀를 각각 1650, 1654, 1672년에 엘스토 교회에서 유아 세례받게 했다.” 왜 번연은 자신의 신학과 다른 세례관을 자녀들에게 허용했을까? 틀림없이 번연과 번연의 처 사이에 유아 세례 문제로 의견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이때 번연은 아내의 세례관을 존중해 주고 불필요한 싸움을 피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베드퍼드 교회에서 번연의 후임 목사로 사역한 두 사람도 유아 세례를 받은 자들이었다.
번연은 1616년 헨리 제이콥이 런던에 세운 독립 교회의 목사 헨리 제시의 세례관을 수용하고 있었다.
헨리 제시는 로마서 14장에 기초하여 세례의 상징적 의미를 설명하였다. 세례는 우리의 육체의 더러움을 제함이 아니라 우리의 양심을 하나님께 응답하도록 돕는다. 번연은 제시의 상징적 세례관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교회에 침수 세례자나 점수 세례자를 모두 교인으로 인정하였다.
이러한 번연의 태도를 침례파 동료 목사인 윌리엄 키핀(Wil- liam Kiffin)이 공격해 왔다. 키핀파들은 번연에게 런던에서 공개 토론을 요청했다. 번연은 논쟁을 회피했다. 논쟁은 결국 교회의 혼란과 무질서만 야기시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대신 물세례에 대한 판단상의 차이가 교제의 장애가 될 수 없음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존경하는 독자께······16여 년 동안 세례 방법에 관심이 있는 형제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가 자기들의 방법대로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우리를 분열시키려고 애써 왔습니다······[그들은] 저에 대해서 마귀적인 사람,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 거만하고 주제넘고 뻐긴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말한 대로 말하지 않겠습니다······그러나 제 원리를 고수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원리들은 평화롭고 경건하며 유익한 것이며, 형제들의 덕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물세례를 믿지 않는다고 지옥을 가고 정죄를 받아야 합니까?······
만일 물세례에 대해서만 다투고 싸우는 것이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것보다 낫다면 그런 본문을 제시해 보십시오······결론적으로 내가 말한 모든 것은 세례 방법에 있어서 형제마다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기기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도 아니고 나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다만 경건한 자들 중에 연합과 교제가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
번연은 침례파 칼빈주의자였지만 모든 칼빈주의자들과 교리가 건전한 모든 개신교도와 연합하고, 화합하고, 교제하기를 진정으로 원하였다.
그는 초대 교회의 4가지 표지, 즉 일치성(one), 거룩성(holy), 사도성(apostolic), 우주성(catholic)을 비록 신학 언어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과 영으로 지지하였다. 참으로 번연은 보편적 기독교 정신을 소유하였다. 결코 그는 분파 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기독교인인 자신을 이렇게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된 이름으로 나를 알려고 하기 때문에 당신에게 말해 주는데,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고 현재도 그리스도인이고 싶다. 또 하나님께서 나를 가치 있는 존재로 간주해 주신다면 나는 나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나 “성도” 혹은 성령께서 인정해 주신 이름으로 불려지기를 원한다.]
불후의 명작 천로 역정을 읽고 또 읽어 보아도 그의 교파를 찾을 수 없다. 번연은 어떤 교파의 이름으로도 자신이 불려지기를 원치 않았다.
2. 목회관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 전파, 성도의 섬김과 교회의 조직적 행정 등을 포함한다. 번연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공적으로 선포하였다. 그의 설교는 보통 사람뿐만 아니라 지식인, 심지어 국왕인 찰스 2세까지도 인정할 정도였다.
찰스 2세는 대설교가 존 오웬 박사가 런던에서 종종 번연의 설교를 경청한다는 말을 듣고 오웬 앞에서 놀라움을 표시한 적이 있었다. 이때 오웬은 국왕에게 “폐하, 만일 저에게 그 땜장이의 재능이 있다면 저는 기꺼이 저의 학문을 포기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번연은 베드퍼드의 교회뿐만 아니라 대도시에서도 설교하였다. 그가 설교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예배 장소로 모여들었다. “한겨울에 때때로 1,200명 이상의 성도들이 아침 7시 이전에”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운집하였다.
번연의 설교의 특징은 충분한 성경 연구와 기도로 준비되었다는 것이다. 번연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그리고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는 기도 중에 성령의 능력과 도우심을 간구했으며, 진실하고 의미 있게, 간절히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쏟아 놓았다.
번연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에게 매우 엄격한 기도의······생활을 요구하였다. [마치 여호수아처럼 번연은]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간에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말했다.
한번 설교가 시작되면 그는 열렬하고 정렬적으로 말씀을 선포했다. 어떤 이도 그의 설교에 감동되지 않을 수 없었다. 번연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순종한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확신을 가지고 단순하고 소박한 일상 언어로 증거하였다.
다시 말하면, 성경 언어의 실제 경험이 모든 성도들에게도 영적으로 똑같이 체험된다는 분명한 확신을 전달하는 데 번연은 성공한 것이다.
심방도 번연의 목회에서 중요한 일부분이었다. 번연은 자신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고 찾아 나섰다. 고난과 어려움을 당한 성도들을 권면하고 위로하였고, 영적으로 침체한 자들을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의 젖을 공급함으로” 그들을 성장시켰다.
병자를 찾아가 기도해 주었고 불화하는 가정을 심방하여 화목하게 하였으며, 분쟁하는 곳에 뛰어들어 화해의 사도가 되었다. 그의 최후도 화해자로서 마감했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번연은 또한 보통 이상의 조직적인 행정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집회 규모가 커지자 보다 큰 예배당이 필요하였다. 1672년 8월 예배당 건축 대지를 성도들의 자발적 헌금으로 구입하였고, 1707년 6월 헌금 400파운드로써 예배당이 완공되었다.
비록 번연이 죽은 후 예배당이 완공되었지만 모든 기초를 번연이 놓았다. 이 예배당은 1,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번연의 영적 지도력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성도들은 번연을 존경하여 그에게 “번연 감독”이라는 별명도 붙여 주었다.
3. 번연의 저술:천로 역정을 중심으로
번연은 그의 60평생에 60권의 저술을 하였다. 그 중 천로 역정, 죄인의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 거룩한 전쟁은 기독교 문학사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다.
(1) 천로 역정의 구성
천로 역정은 저자의 변명에서 볼 수 있듯이 은유(metaphor), 비유(parable), 풍유(allegory), 상징(symbol)을 수없이 사용한다. 번연은 이러한 것들이 자신의 글을 더욱 명료하게 해준다고 믿었다.
그는 구약의 선지서와 신약의 복음서, 바울 서신에서 상징이나 암시 그리고 은유가 폭넓게 사용되었음을 알고 있었고 상징이나 은유 체계 속에 진리의 빛과 은혜가 넘친다고 고백하고 있다.
비유나 상징은 그 자체로 모든 것을 입증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수학으로 1+3=4이다. 오직 하나의 답, 즉 4가 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합리적인 답이다. 그러나 “1”, “3”의 부호가 상징으로 주어질 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독자의 시각과 상상에 따라 “1”, “3”은 1+3, 13, B 등 다양한 해석이 여러 가지의 풍부한 내용을 함유한 채 나타난다.
보다 구체적인 예를 천로 역정에서 찾아보자. 번연은 “죄는 폭군”이고, “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무지개는 하나님의 언약”이며, “펠리컨은 그리스도”라고 은유의 언어를 사용한다. 문자적으로는 “죄=폭군, 약=하나님의 말씀, 무지개=하나님의 언약, 펠리컨=그리스도”라는 공식이 결코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죄는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원리를 침해하는 것이고, 약은 질병을 치료하는 물체이며, 무지개는 창공에 나타난 여러 색깔을 가진 궁형의 형체이고, 펠리컨은 조류의 한 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유는 간단히 해설하거나 번역될 수 없는 “언어와 의미의 복합적 사건”인 것이다.
현대 해석학의 대가 리쾨르에 의하면, 은유는 문자적으로 그 의미를 해독하기가 이상하고 기묘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큰 효과를 나타낸다고 한다. 그리스도는 문자적으로 펠리컨이라는 새가 될 수 없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정말 기이하고 이상 야릇할 것이다.
바로 이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기능을 은유가 한다. 이 기능에는 은유를 보여 주거나, 읽거나 듣는 자가 해석하는 작업이 반드시 뒤따른다.
은유의 해석에 필수적인 것은 은유를 문자적으로 번역하지 말고 다른 뜻으로 변용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펠리컨으로 번역하거나 무지개를 하나님의 언약으로 번역해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펠리컨이라는 새의 특징이나 상징이 주는 의미를 찾아야 하고, 무지개의 상징이 주는 또 다른 의미 체계를 발견해야 된다는 말이다.
번연은 펠리컨이라는 새가 “제 부리로 제 가슴을 쪼아” 대는 것은 “어린 새끼를 자신의 피로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피를 아낌없이 흘리셨다”고 해석한다.
“그리스도=펠리컨”이란 은유는 이러한 해석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이해된다. 펠리컨은 피를 흘리는 새로 해석되고 이 피를 흘리는 펠리컨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상에서 피흘리셨던 그리스도로 상징되는 언어의 변용(paraphrase)을 거친다. 이 변용의 과정 속에서 은유가 가진 혁신적 의미의 영원성이 포착된다.
은유는 언어의 일시적 노리개가 아니라 어떤 중요한 주제를 새롭게 열어 주는 특이한 언어 기술이다. 좋은 은유는 다양한 해석을 불러오고 어떤 현실을 확실히 개념화시켜 주는 능력을 가진다. 이런 의미에서 은유는 감추어진 것을 개방시키는 기술이며, 불확실한 것을 확실하게 하는 참조(reference)이다.
번연은 이와 같은 상상 언어의 창조적 광채를 발견한 것이다. 상징 언어의 “진리는, 그것이 비록 갓난 아기의 기저귀 같은 말투로 표현되었다 하더라도 인간의 판단력을 고취시키고 마음을 바로잡으며, 즐겁게 이해하게 해주고 의지력을 좌우할 수 있게 하며······추억을 채워 주고 그리고 우리의 고통을 가라앉는 방향으로 이끌어 준다.”
천로 역정은 대화식의 글이다. 번연이 소년 시절에 일상 언어로 나누는 도덕적인 대화록을 즐겨 읽었다는 것과 첫 결혼 직후 아내 마리아가 가져온 덴트의 평범한 사람이 하늘에 이르는 좁은 길과 베일리의 경건의 훈련에서 대화 형식의 글들이 아름답고 예리하다는 것을 배웠음을 기억하자.
번연은 이들로부터 배운 대화의 묘미를 천로 역정에서 유감없이 발휘한다.
천로 역정은 목적이 있는 글이다. “무력하고 의지할 데 없는 자”에게 커다란 위안을 제공하고, “무관심한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불어넣으며, 우울한 자를 유쾌한 상태로 이끌며, 무엇보다도 영원한 진리를 획득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한다. 따라서 번연의 천로 역정은 처음부터 선교적이다.
(2) 천로 역정의 내용
천로 역정은 전반부와 후반부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에서는 한 남편의 신앙 문제가 다루어지고, 후반부에서는 그의 부인과 아이들의 순례 행진이 그려진다. 전반부는 등에 무거운 짐을 진 크리스천이 한 책을 펴서 읽고 큰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크리스천은 “아,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비탄의 절규를 시작한다. 크리스천이 읽은 책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해석할 수 있고, 크리스천의 절규는 등에 짊어진 죄로 인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영적 상태라고 짐작할 수 있다.
크리스천은 자신이 죄로 인하여 고통받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죄악의 도성이 머지않아 불 심판을 받게 될 것도 알게 된다. 이러한 고통을 치르던 중, 어느 날 크리스천은 전도자를 만나 장차 올 징벌을 피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 그 방법은 죄악의 도성을 떠나 천상의 도성을 향해 가는 것이었다.
크리스천은 천상의 도성으로 가기 위해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하는 희생을 치러야 했고, 그의 여행이 어리석고 위험하다고 조소하는 이웃들의 반대를 물리치는 용기를 가져야 했고, 한때 그의 여행의 동반자로 천상을 향했던 유순의 자포 자기를 보고도 좌절하지 않아야 했으며, 속세 현인의 달변과 철학의 유혹을 극복해야만 했다.
한마디로 크리스천은 진리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모형이라 할 수 있다.
신학적으로 크리스천의 순례 과정(가족과의 이별→속세 현인의 유혹→마귀 아폴리온과의 조우 →허영의 시장→죽음의 계곡→청년 무지(Ignorance)→죽음의 강을 건너 천상에 이름)은 성도의 일생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중생 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되고, 양자가 되며, 일생 성화의 과정을 거치다가, 죽어서는 하나님 나라에 가듯이 천로 역정도 비슷한 내용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번연은 천로 역정에서 칭의론을 설명할 때 바울과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에 충실하여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이신 칭의론을 일반 영국인의 정서에 맞게 민담의 형식으로 재진술한다. 활력과 재치가 넘친 그의 글을 직접 살펴보자.
[크리스천:이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는 것이야말로 바로 내가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 혼자 힘으로는 벗어버릴 수가 없어요. 온 나라에 이 짐을 내 어깨에서 벗겨 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말씀드린 대로 이 짐을 벗어버리기 위해 지금 이 길을 가고 있는 중입니다.
속세 현인:누가 당신에게 짐을 벗으려면 이리로 가야 한다고 말했죠?
크리스천:······전도자라는 이름으로 기억됩니다.
속세 현인:그따위 충고를 한 그 사람을 나는 저주하오. 그가 당신에게 가르쳐 준 길보다 더 위험하고 험한 길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오······당신이 이 길을 계속 가다 보면 싫증, 아픔, 굶주림, 위험, 헐벗음, 칼, 사자들, 용들, 뱀들, 어둠 등 다시 말하면 죽음을 비롯한 온갖 재난을 만나게 될 것이오······.
크리스천:저는 제가 잡으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어요. 그건 내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하는 것입니다.
속세 현인:하지만 왜 하필이면 이런 식으로 짐을 가볍게 하려는 것이오? 눈앞에 수많은 위험이 있음을 빤히 보면서. 내 말을 명심하고 들어 줄 용의만 있다면, 당신이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에 놓여 있는 여러 가지 위험들에 봉착하지 않고서도 당신이 그렇게도 열망하는 것을 잡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리다······
저쪽 건너편 마을에 합법(合法)이라는 이름의 신사 한 분이 살고 있소. 그는 매우 사리가 분명하여 명성을 크게 떨치는 분으로 당신처럼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이들의 짐을 벗겨 주는 기술이 있지요······
그의 집은 여기서 1마일도 안 돼요. 그리고 만일 그가 집에 있지 않으면 그의 젊은 아들을 찾으시오. 이름은 예의(禮儀)라고 하지요. 내 장담하는데, 거기 가면 당신은 반드시 짐을 벗어버릴 수 있을 것이오······.]
크리스천은 속세 현인의 말을 믿고 합법(도덕)이 사는 언덕으로 가 보았지만 언덕은 너무 높고 길에 접한 까마득한 절벽은 금방 무너질 것 같았다. 더 괴로운 것은 합법이 사는 곳으로 가면 갈수록 등의 짐은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언덕에서는 타오르는 불꽃들이 크리스천을 위협하였다. 이 위기의 순간 전도자가 나타나 크리스천을 꾸짖고 바른 길을 제시하였다.
[지금부터 내가 일러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시오······당신이 만났던 그 사람은 속세 현인이라는 자인데······그는 이 세상의 신조와 교훈에만 집착하기 때문이오(그래서 그는 언제나 도덕(道德) 읍내의 교회에만 나가지요). 그리고 그 신조를, 그것이 십자가 없이도 자기를 구원해 준다고 생각하여 최상으로 사랑합니다······.
[합법이란 사람 역시] 당신의 짐을 벗겨 줄 수가 없단 말이오······법대로 행동한다고 해서 당신이 의로워질 수는 없어요. 율법의 행위로 등에 진 짐을 벗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속세 현인은 결국 문외한이고, 합법이란 자는 사기꾼이며, 그의 아들 예의 역시 겉으로는 선한 웃음을 웃지만 위선자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번연은 인간의 노력과 공로에 기초한 율법의 허위성을 폭로하지 않는가! 아무리 고상하고 아름다운 도덕이나 철학, 심지어는 믿음 없는 종교 생활도 구원을 가져올 수 없다고 못을 박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풍자를 함으로써 행위 교리를 강조하는 영국 교회를 비평하고 있는 것도 주지해야 할 것이다.
교회 비평에 관하여 재미있는 비유를 쓰고 있는 번연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유익할 것으로 생각된다. 크리스천이 순례 길에 비리(非理)라는 사람을 만났다. 비리는 교언(巧言) 마을에서 나와 하늘 나라를 순례한다며 크리스천과 동행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길을 걸으며 대화를 시작했고, 크리스천이 교언 마을 사람들에 대해 비리에게 물었다. 비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마을 사람 전체가 거의 다 친척이죠······기회주의자경, 교언경, 기생 오라버니씨, 표리 부동씨, 팔방 미인씨, 그리고 우리 교구의 목사로 일하시는 일구 이언(一口二言)씨는 외삼촌이죠······나의 아내는······허위 부인의 딸이지요.
그러니까 아주 지체 높은 가문에서 태어난 것입니다······우리[도] 종교가 순탄한 길을 걸어갈 때 가장 열심히 믿고, 태양이 밝게 비추고 모든 사람이 그 종교를 찬양할 때에만 함께 길을 걸어다니길 좋아합니다.]
여기서 비리의 입을 통해 얼마나 종교가 세속 인간과 결탁하여 가장 고상하고 신령한 듯이 가장을 잘 하는가를 번연은 폭로하고 있다. 번연은 세속적인 성직자의 모습도 돈을 사랑하는 세속인의 눈을 통해 신랄하게 비평하고 있다.
[어떤 훌륭한 목사가······더 많은 보수를 받기 위해 좀더 공부하고 자주 설교하고······그리고 사람들의 기질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자기가 갖고 있던 어떤 주장, 주의들을 희생시키기까지 합니다······
결론을 지어 말하자면 한 목사가 적은 보수를 큰 보수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 자체가 탐욕적인 행동으로 비판받기보다는 오히려 그 때문에 자기 직분이나 일을 도모함에 있어 개선을 보이는 것이므로, 자기 직무에 충실하고 선한 일을 할 기회를 놓치지 않는 점에서 오히려 찬사받아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세속인의 입에서도 당시 목사들이 돈을 사랑하고 시대 조류에 부합하며, 목회직을 사업으로 생각하고, 또 소신 없이 변덕스럽게 신학 사상을 바꾸어 간다고 말하지 않는가! 번연 시대의 목회자의 타락상이 오늘날 한국 교회에도 만연되어 있지는 않은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천로 역정의 전반부는 많은 고통과 위험 속에서 승리하는 전투적 그리스도인을 풍자하지만, 후반부는 크리스천의 아내를 등장시킴으로 보다 부드러워진다. 남편 크리스천의 영적 행로를 뒤쫓는 아내 크리스티아나는 단체적이고 여유 있는 순례하는 교회를 상징한다.
이러한 차이는, 전반부가 번연이 회심과 종교적 탄압 속에서 체험했던 것을 기술한 것이고, 후반부는 종교 박해에서 해방되어 어느 정도 안정된 마음으로 사역했을 때의 신앙 정서를 기술한 것이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번연은 일상 언어로 전하는 설교를 통해 청중을 사로잡았지만, 천로 역정과 같은 글을 통해서도 독자들의 심령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학식 있는 자나 무식한 자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그 누구도 번연의 글에 매혹당한다.
상징, 은유, 비유를 무한정으로 사용한 그림과 같은 대화체의 글 속에 사람을 감동시키는 무엇이 잠재하고 있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에 대한 인식을 성경 언어와 접목시켜 표출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깊은 내면 세계를 바라볼 수 있었다.
얼핏 보면 17세기 영국 특유의 서민 생활을 작품화한 것 같지만, 천로 역정에는 17세기 영국을 뛰어넘는 초월성이 있다. 정욕, 물욕, 권력욕, 교회의 부패는 단지 그 시대만의 문제가 아니요 바로 오늘날의 문제이자 아마도 영원한 인류의 문제이기 때문이리라.
(3) 천로 역정의 영향력
천로 역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을 해석하는 입장에 있다. 단지 그것을 영국식 서민 문화에 연결시켜 보다 쉽고 재미있게 기록했을 따름이다. 천로 역정이 베스트 셀러가 되어 영국 사회에 널리 읽혀졌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보다 확실히 이야기하자면 천로 역정은 교단이나 교파를 초월하여 영국 사회 전반에 보급되었다.
번연 생전에 100,000부 이상이 판매되었다.
이 말은 천로 역정으로 말미암아 청교도 신학과 신앙이 일반 대중에게까지 알려질 가능성이 컸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더 나아가서는 천로 역정으로 성경의 권위가 더 한층 높아지고 성경의 가치 판단이 일반인의 가치 판단이 될 수 있는 문화적 혁신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천로 역정은 1909년에는 세계 112개의 나라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현재는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가 자국어 번역본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이다.
V. 정리
존 번연은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에 살았다. 크롬웰의 공화정은 그의 생전에 붕괴되었고, 한때 자유스럽게 예배드렸던 청교도 공동체는 1660년 이후 다시 탄압을 받았다. 청교도들은 크롬웰 치세 때에 부여된 종교의 자유를 지혜롭게 사용하지 못하고 분열과 싸움으로 스스로를 약화시켰다.
존 번연은 칼빈주의자들이 연합하지 못하고 서로 중상 모략, 탄핵하는 데 몹시 실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회 교육 배경은 그로 하여금 청교도 전반에 걸친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토론하고 개혁할 수 있는 입장으로 만들어 주지 못했다. 그는 심지어 동료인 침례교도들로부터도 질시를 받았다.
한마디로 번연은 그 시대에 정치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가 연합이나 화합을 전혀 시도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번연은 특별한 교리 문제(예를 들면 퀘이커파의 신비주의)를 제외하고는 항상 대화의 창을 열어 놓고 있었다. 다만 이러한 그의 신학 사상을 당시 종교계에서 충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러한 시대적 한계 가운데 살았던 번연은 다른 의미에서 참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불후의 명작 천로 역정과 거룩한 전쟁 등을 통해 그는 기독교를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보편 종교로 만들었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천로 역정을 통해 그는 영국과 전세계에 기독교 윤리관, 문화관, 특히 구원관을 천명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바울,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어려운 신학 사상을 그는 가장 평범하고 쉬운 일상 언어로 전세계인의 마음 가운데 심어 주었다.
번연은 열병으로 죽어 런던의 비국교도의 묘소인 번힐 필즈(Bunhill Fields)에 묻혀 있지만, 지금도 책을 통해 우리에게 하늘 나라 가는 비밀을 말해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번연의 유언을 살피고 이 장을 마감하려 한다.
[[번연의 유언]
이 세상에는 선한 것이 없으며 악이 섞여 있다. 명예가 인간을 당황케 하며 부유함이 걱정을 일으키고 쾌락이 건강을 해치는구나.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괴롭히는 것 없이 그리고 은혜로운 모든 것과 함께 정결하게 살아가면서 복락을 누리리라.
오! 그 누가 상상할 수도 없고 감히 표현할 수도 없는 그곳의 기쁨을 알겠는가? 그 기쁨을 맛본 자 외에는 아무도 모르리라. 주여, 우리를 도우사 그 기쁨을 준비하기 위하여 이곳의 모든 미혹케 하는 즐거움을 버리는 일에 기꺼이 앞장서게 하소서.
어린양의 신부가 영원토록 그의 신랑과 함께 거하게 될 때 하늘 나라에는 기쁨의 소리가 차고 넘치리라! 그리스도는 만국의 소망이요, 천사들의 기쁨이며, 성부 하나님의 즐거움이라. 그때 영혼은 놀라운 위로로 충만할 것이니, 이는 주께 속한 모든 것을 영원히 누리는 위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