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강 경강(京江)은 여기서 출발한다. 광나루 광진(廣津) 너븐나루로 불리는 곳이다.
버드나무가 많아 양진(楊津)이라고도 했다. 양수리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한 한강은 검단산 기슭에서 남양주로 넘어가던
나루 도미진(渡迷津)에 이른다. 이곳은 협곡이 발달하여 두미협(斗眉峽) 혹은 두협(斗峽)이라고 하고 그곳의 한강을 두미강(斗尾江)이라 불렀다.한강이 서울 경계로 들어오면 광나루가 나온다. 광나루는 광진대교 북단에 있었던 나루터로 양진(楊津), 광장(廣壯),
광진(廣津), 광진도(廣津渡)라고도 하였다. 광나루 부근 한강을 광호(廣湖)라고 부른다. 조선 후기에는 도호(陶湖)라고도 불렀다.
도호(陶湖)는 운치가 넘치는 강이다.중국의 그 유명한 '도연명(陶淵明)의 호수'로 격(挌)을 한껏 높여부른 도호(陶湖)다.
광나루와 광호(廣湖)는 경치도 빼어났고 물류도 많이 몰려 경강의 시작임을 실감하게 하였다고 한다.

광호(廣湖), 그 한강을 끼고 힘차게 남으로 치고내려오고 있는 아차산의 산세가 대단하다.
온조 임금이 어머니 소서노를 모시고 홀본부여에서 백두산 개마고원 원산 추가령 구조곡을 거처
북한산과 아차산을 밟고 백제를 건국한다.백제 건국, 그 희망의 루트의 남단 아차산이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남성으로 쫓기던 개로왕이 남성에서 생포되어 하남위례성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끔찍하고도 처절하게 죽음을 당한 곳도 아차산이다. 지금 워커힐 호텔이 들어선 곳이 그 처형장이라고 한다.

아차산이 한강과 조화를 이루면서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그 아름다운 산 기슭 명승지에 자리한 쉐라톤워커힐호텔이다.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명당이라 불리는 '배산임수' 지형에 자리한 특급호텔은 쉐라톤워커힐이다.
서울 광장동에 위치한 워커힐은 아차산성 남쪽 기슭아래 한강이 발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자리에 들어앉아 있다.
뒤로는 아차산 봉우리가 솟아 있고 강 건너 들판 동쪽에는 검단산 남쪽에는 남한산성 서쪽에는 관악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아울러 서남쪽은 한강을 비롯해 광나루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여 전망이 탁월하다.

이 워커힐 호텔은 출발부터 지금까지 숫한 화제를 뿌려왔다. 워커힐호텔은 출발부터 정치적인 이유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바로 '4대 의혹사건'의 하나로 워커힐호텔은 국민적인 관심을 끌기에 아주 충분하였다. 5.16군사정권은 민주공화당의 사전조직에
정치자금을 은밀하게 확보해야 했다. 세칭 ‘4대 의혹사건’을 통해 거액의 정치자금을 조성했던 것이다. 증권파동 워커힐사건 새나라자동차사건 빠찡고사건을 4대의혹사건이라고 불렀다. 워커힐사건은 5ㆍ16이 난 그해 가을 김종필의 중앙정보부가 외화를 획득한다는 명분으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광장동 광나루 일대 18만 평에 동양 최대의 관광단지인 워커힐을 건설하면서
그중 상당액수를 중앙정보부가 횡령한 사건을 말한다.
“한국에는 적당한 미군 위락시설이 없어 연간 3만여 명의 미군이 일본으로 휴가를 간다.”
61년 7월 어느 날 김종필중앙정보부장은 멜로이 유엔군사령관의 말을 듣는다.그는 미군 위락시설 건립을 결심하고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재가를 받아 추진한다. 김종필은 중앙정보부 제2국장이던 육사8기 동기생 석정선 등에게 워커힐 건설사업의 책임을 맡겼다. 중앙정보부는 총규모 60억 환을 들여 기가 막힌 절경 아차산자락에 이른바 사단법인 워커힐 관광사업 시설을 착공한다. 교통부로 하여금 관광공사법을 만들게 하여 관광공사를 설립, 교통부 장관이 주관하게 했다.
공사도중 산업은행의 융자거부로 시설공사가 부진을 면치 못하자 교통부 장관 박춘식 관광공사 사장 신두영은 1962년 8월부터
63년 2월 사이에 법적 업무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정부주식 출자금 5억 3,590만 9천여 환을 워커힐 이사장 임병주(당시 중정 제2국 제1과장)에게 전용 가불케 하여 워커힐을 건립케 했으며 임병주는 그중 막대한 공사자금을 횡령했다.
교통부 장관과 각군 공병감에게 압력을 넣어 각종 군장비와 군인들을 동원무상 노역케 하는 등의 부정을 저지른 사건이다.

워커힐 호텔 본관 앞 피차 힐로 올라가는 산 중턱에 월튼 해리스 워커 장군을 기리는 기념비가 마련되었다.
"오늘 우리가 장군을 특별히 추모하는 것은 한국전쟁 초기 유엔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던 미국 조야의 지배적인 분위기 속에서
유독 장군만이 홀로 한반도 고수를 주장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공산화를 방지하여 우리의 오늘을
가능케 한 그 공덕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기념비문에서
월튼 해리스 워커 장군(Walton H. Walker: 1889~1950)은 초대 미8군 사령관으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남진하는 북한군을 낙동강
방어라인(워커라인)을 구축하여 막아낸 인물이다. 포항·영천·대구·창녕·마산·통영을 잇는 낙동강 전선이 뚫렸다면 대한민국이라는
신생 독립국은 지도 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전선에서 몸을 사리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던 워커 장군은 6·25 전쟁이 한참이던
1950년 12월 23일 전사(戰死) 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중공군과 맞서 방어전을 펼치던 미 24사단과 영연방 27여단을 방문하기
위해 의정부 북방으로 가다가 반대편에서 남하하던 한국군 트럭과 부딪혀 현장에서 사망한 것이다. 미 제24사단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아들 샘 워커 대위에게 미국 정부가 수여한 은성무공훈장을 직접 가슴에 직접 달아 줄 계획이었기 때문에 안타까움을 더했다.
“오직 사수하느냐 죽느냐(Stand or Die)의 선택밖에 없다.”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만 뚫으면 100km도 되지 않는 부산까지는 한달음에 진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필사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북한군의 낙동강 전선 돌파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다부동, 영천, 포항, 마산 등지에서는 연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워커 장군은 낙동강 방어선의 사수를 위해 예하 장병에게 다음과 같은 훈시를 했다.
“우리에게 제2의 뒹케르크(1940년 5월 프랑스 북부 뒹케르크 항구에서 독일군에 몰린 영국-프랑스 연합군 30만명을 영국으로
철수시킨 작전) 철수는 없다. 그러한 탈출구가 있다고 기대하지도 말라! 부산으로 밀리면 대살육이 일어난다. 오직 사수하느냐
죽느냐(Stand or Die)의 선택밖에 없다.”
워커 장군은 자신의 말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의 육군본부가 부산으로 내려간 상황에서도 미8군사령부를 대구에서 후퇴시키지 않았다. 워커는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지목하고 낙동강방어진을 역(逆)기억자로 그려 한국군은 다부동지역의 1사단을 비롯하여
문경-예천에 6사단, 안동-의성에 8사단, 그 우측에 수도 사단, 영덕 포항에 3사단을 횡으로 배치하고, 백선엽 장군의 1사단의 바로
좌측 남방에 미1기병사단, 그 아래로 미25사단, 미24사단, 미7사단, 제1해병사단 등을 수직 배치해 어깨를 마주한 밀집방어를
할 수 있게 했다.
중공군의 진격이 청천강을 넘고 38선을 육박하고 있던 12월 12일, 워커는 무초를 대동하고 이승만을 만나기 위해 경무대를 방문했다. 이승만은 서울이 다시 함락되는 경우 더 이상의 민간인피해를 없애기 위해 한강철수대비책을 점검하려 한강지역 시찰을 하다가,
워커가 경무대에 들어와 대통령과 각료를 만나기를 원한다는 전갈을 받고 급히 들어왔다.
대통령과 장관들이 배석한 자리에서 워커는 대통령을 향해 “왜 사람들이 서울을 떠납니까?”라고 묻고, 이어 “미군은 싸울 것입니다. 나는 서울로부터 철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군이 싸우지 않으면 나는 서울을 방어할 수 없습니다.”라고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이승만은 ‘우리국군은 싸우고 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다’고 말했다. 12월 19일, 이승만은 워커에게 대한민국 최고훈장인
금성무공훈장을 수여했고 워커의 전용비행기를 빌려 춘천지역을 시찰하는 등 8군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했다.
크리스마스 전날인 1950년 12월 23일 오전 10시 40분경, 워커장군은 의정부방면의 빙판길을 달리다가 짚차가 미끄러져 사망했다.
이날 짚 차에는 2차 대전 때부터 워커의 운전병으로 일해 온 조지 벨튼 상사와 조 타이너 부관, 기관총수 프란시스 리난이 타고
있었는데 워커장군만 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추운 날씨가 싫다면서 담요로 다리를 감고 이것을 의자에 매고 있다가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충격을 받아 사망했다.
첫댓글 역사의식 교육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