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안은 전혀 달랐습니다. 뭔가 성에 차지 않던 차에 98년 6월 프랑스 월드컵을 참관하러 비행기를 탔습니다.
비행 중에 문득 우리 전통 소반과 방패연이 떠오르더군요. 그 자리에서 정신없이 도면을 그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서울로 팩스를 넣었습니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설계한 건축가 류춘수의 회고담이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은 뛰어난 조형미와 기능성을 갖도록 설계·시공되어 세계10대 축구전용 경기장의 하나로 손꼽힌다. 21세기 소망과 정성, 풍요를 담은 우리 고유의 전통 소반과 팔각모반,그리고
평화의 염원을 방패연에 실어 하늘에 띄우는 이미지와 함께 특이한 지붕 구조는 마포나루에 드나들던 황포 돛대를 형상화 하였다.
서울월드컵경기장 남쪽에 있는 한강은 우리민족과 역사를 함께 한 한반도 역사의 증인이다.
근대화가 진행되어 우리는 잘 정비된 한강의 모습을 얻게 되었지만 잊혀진 하얀 백사장과 함께 잃은 것도 많다.
대지부근 마포나루와 그곳을 드나들던 황포돛배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무명베로 돛을 만들고 무명 사이의 틈을 막기 위해 황토 가루칠을 해서 만들어진 황포돛배는
비록 지금은 잊혀졌지만 한강의 역사를 말해주는 대표적 상징물이었다.
주경기장은 주변 한강의 풍부한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담고 있다.
전통연과 배의 돛을 연상 시키는 케이블구조의 경기장 지붕은 마치 예전에 한강변 마포나루를 드나들던
마포돛배의 이미지와 흡사하다. 이렇듯 주경기장은 한강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물로 부각시켰다.
건축가 류춘수는 전통미를 살린 디자인과 첨단 기술의 조화를 이끌어내는 건축가로 이름 높다.
그는 “건축이란 사람들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통제하는 인문사회과학”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1974년 고 김수근 선생이 이끌던 ‘공간’(空間)에 합류했다.
86년 김수근 선생 타계 후 독립, 강촌 휴게소, 한계령 휴게소로 눈길을 모았다.
지하철 김포공항역, 릿츠 칼튼 호텔 등이 대표작이며 원주치악체육관, 부산종합운동장 야구장, 올림픽 체조경기장 등
스포츠 건축 작품에서도 명성을 쌓았다. 말레이시아 쿠칭 실내체육관도 지었다.
류춘수는 허리춤을 끈으로 동여맨 면 바지, 주머니가 줄줄이 달린 조끼 등 ‘작업복 패션’을 즐긴다.
월드컵 조형물을 설계한 젊은 건축가 함인선씨가 월드컵 경기장의 미학을 분석한 글을 아래에 옮긴다.
"왜 대부분의 경기장에는 관중석에만 지붕이 있을까.
환기? 채광? 첫째 이유는 공사비, 더 정확히는 구조비용 때문이다. 경기장은 시야를 가로막는 기둥이 공간 내부에 없어야 한다.
그런데 공학적으로 지붕은 기둥간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두꺼워진다. 그럴수록 그 무게를 받는 기둥과 기초 또한 커져야 하므로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라운드까지 지붕을 덮는다면 비용은 세 곱절쯤 늘어난다고 보면 맞다.
이래서 정작 주인공들은 뙤약볕과 장대비 속에서 뛰지만 관중은 그것을 피하며 경기를 즐기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경기장의 본질일지 모르겠다.
닭싸움이 되었든 검투가 되었든 무릇 경기장이란 구경꾼들의 원시적 공격성을 대리하여 표출하는 쌈꾼들의 장소와 그것을 보고
만족하는 관중의 장소로 나뉘어져 있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쌈꾼들의 장소는 피안이며 관중석은 차안이다.
그 전쟁터에 눈비가 내린들 무에 대수이겠는가. 하물며 발길질로 하는 격한 축구장임에랴.
이것이 손을 써서 하는 야구와는 달리 실내 축구장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겠다.
어쨌거나 경기장 건축 감상의 첫 번째 포인트는 지붕이다. 그라운드야 물론 관중석 역시 규격품에 가깝다.
반면 경기장의 지붕은 건축가의 창의력, 시공자의 기술력, 그 나라의 부품 산업 능력 등, 모든 것을 말해준다.
더욱이 이번 월드컵을 위한 경기장같이 한정된 기간과 예산으로 열 개를 동시에 세웠을 때는 그 지붕에 우리의 국력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서울 월드컵 경기장의 건축가 유춘수는 전통 소반, 방패연, 황포돛대가 설계개념이라고 밝힌다.
서로 연관성이 없을 듯한 이 세 가지는 그러나 이 건축 안에서 훌륭히 소화되고 있다.
먼저 관중석을 담는 기단은 소반처럼 팔각형으로 되어 있는데 통상 타원형인 여타 축구장과 형태적인 차별성을 가질 뿐더러 직선화된 부품화가 훨씬 용이하여 공기와 비용을 상당히 절약시켰다. 소반이 팔각형인 것은 원형에 가까우면서도 나무판으로 쉽고 싸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치를 잘 활용한 경우이다.
지붕 역시 직사각형인 방패연의 모서리를 따서 팔각형으로 만들어 기단과 형태적 일치를 이룬다.
더욱이 위로 도톰한 팔각형이기에 밑에서 보면, 기와 무게로 자연스레 처진 한옥의 추녀선을 연상시킨다.
지붕의 무게를 땅으로 전달시키기 위해서는 기둥에 얹거나 아니면 매달아야 한다.
잠실 올림픽 경기장이 앞의 방법이라면 여기는 후자이다.
고도의 기술력을 요하는 공법이지만 배의 돛대가 그렇듯이 훨씬 경쾌하며 경제적인 방식이다.
이처럼 좋은 건축은 개념이 필연성에 녹아 있다. 잠실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이 형태적 개념에 비해 쓰인 기술은 고만고만한 것이라면
상암동 경기장은 참신한 개념에 걸맞은 기술이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14년의 발전만큼의 일취월장이 월드컵을 계기로 이 나라에 일어나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