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는 장면
야구를 보면서 인상적이었던 기억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요즘도 TV에서 가끔 볼 수 있는 극적인 장면들이 있다. 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한일전에서 한대화가 날린 역전 3점 홈런 장면, 프로야구 원년 이만수의 첫 홈런, 이종도의 개막전 만루 홈런과 이선희를 또 한번 울렸던 82년 코리언시리즈 김유동의 만루 홈런, 84년 코리언시리즈 유두열의 결승 쓰리런 홈런, 2002년 코리언시리즈에서 나온 이승엽, 마해영의 랑데뷰 홈런도 인상적이다.
그리고 또 하나, 81년도 봉황대기 결승전에서 나왔던 비극적인 장면. 홈으로 슬라이딩하던 박노준의 발목이 꺽이는 끔찍한 장면.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장면일 것이다. 박노준이 부상으로 물러나고, 김건우도 어깨 부상으로 마운드에서 내려와야 했던 선린상고는 결승전에서 경북고에 패했다. 마운드에서 이 바오로가 깜짝 투구를 보여줬지만, 경북의 깜짝 스타 문병권의 호투가 더 빛났다. 청룡기 결승에 이어 두번째로 경북고의 벽을 넘지 못하고 준우승에 머물렀다. 마지막 대회였던 황금사자기, 박노준과 김건우가 빠진 선린상고는 신일에 콜드게임패를 당하고 만다.
프로야구 출범 직전, 고교야구의 마지막 황금기로 기록될 수 있는 1981년. 전국 최강으로 기대를 모았던 선린상고는 무관으로 그 해를 마감했다. 그 이후 선린상고는 한번도 중앙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1981년 선린상고
1981년 야구 시즌이 시작되기 전의 관심은 선린상고가 과연 몇 개 대회에서나 우승할 수 있을 것인가에 모아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직전 80년 전국대회 2관왕을 차지했던 주전 멤버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박노준과 김건우 투 톱이 내뿜었던 포스는 대단했다. 이들은 2학년 때 한 해 선배인 유지홍, 나성국 등과 힘을 모아 청룡기 때는 언더핸드 박동수가 이끌었던 마산상고를, 황금사자기 때는 천하의 선동렬이 버티고 있었던 광주일고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어디 2학년 때만 잘했는가 ? 박노준은 고등학교 데뷔 무대였던 79년 대통령배 결승에서 윤학길의 부산상고에 15대 1이라는 대패의 치욕을 안겼다. 당시 선린에는 에이스에 4번을 쳤던 좌완 윤석환이 있었지만, 대통령배의 MVP는 고교 루키 박노준에게 돌아갔다. 고교 데뷔 무대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슈퍼 루키는 이후에도 조계현, 위재영, 봉중근 등이 있었지만, 까치를 연상시키는 야구 천재 박노준이 발했던 빛에는 미치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냥 내가 보기에 그렇다.
81년 선린상고는 박노준과 김건우 외에도 왼손 중거리 타자 조영일, 오른손 거포 이경재, 재간둥이 김국진, 김웅대, 박지원 등이 있었다. 가히 전국 최강의 전력이었다. 얼마전 주간지 스포츠 2.0에서 선정한 All Time 고교야구 베스트 팀 중 하나로도 80년대 초 선린상고가 뽑히기도 했다. 기사를 제대로 못 읽어서 80년의 선린야구였는지, 81년의 선린야구였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어느해라도 마찬가지이다. 80년이든, 81년이든 전력의 핵은 박노준이었고, 김건우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선린 야구의 81년은 지독히도 불운했다. 첫대회인 대통령배에서 까치 김정수가 이끌었던 광주 진흥에 2대0으로 완봉패를 당했다. 당시 김정수의 호투는 장안의 화제가 됐다. 다음 청룡기. 승승장구하며 결승까지 올랐다. 그렇지만 경북고에 연장 접전 끝에 분패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경북고의 전력도 참 좋았다. 성준이 있었고, 최무영, 홍순호, 구윤, 유중일이 있었다. 선린상고가 화려했다면 경북고는 짜임새가 있었다. 청룡기 때 까지만 해도 그해 경북고가 봉황대기와 황금사자기까지 석권하면서 3 관왕에 오를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청룡기 준우승 이후 선린상고는 부산 화랑기에 도전한다. 이번에도 결승 진출. 그렇지만 서울의 라이벌 신일에게 패한다. 그리고 봉황대기는 박노준의 비극적 부상과 함께 또다시 경북고에 패배.
밤비노의 저주에 버금가는 경북고의 저주라고 해야 할까. 81년을 마무리한 이후 선린상고는 전국 중앙대회에서 한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안타까운 패배들이 너무도 많았다.
1981년 이후의 선린야구
박노준, 김건우 이후의 선린야구는 몇 해 침체를 겪었다. 훗날 서울의 거포로 성장했던 김상호가 있었지만, 그 혼자 선린야구를 이끌기에는 힘이 부쳤다. 82~83년은 전국 중하위권의 전력에 그쳤다.
84~85년은 전력이 좋았다. 야구해설을 하는 개그맨 이병훈이 있었고, 또다른 이병훈이 있었다. 동명이인 두 이병훈은 초등학교 이후 계속 야구를 같이 해왔다. 신기한 인연이다. 그리고 MBC에서 뛰었던 나웅, 삼성에서 활약했던 포수 박선일, 신입생때부터 주전으로 뛰었던 송구홍도 있었다. 마운드도 탄탄했다. 개그맨 이병훈도 잘 던졌고, 노민승, 이성필 등의 수준급 투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 때도 우승은 못했다. 84년 봉황대기 4강과 85년 청룡기 4강에서 박형렬, 이용호, 김동수가 있었던 당대 최강 서울고의 벽을 넘지 못했다. 아.. 그래도 지방 전국대회에서 우승은 했다. 85년 부산 화랑대기에서 이병훈이 역투하면서 강길룡의 광주일고를 꺽고 우승했다. 지방대회를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당시도 화랑대기는 대구 대붕기와 함께 열렸기 대문에 반 쪽 이상의 권위를 부여하기는 힘들었다.
86년은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해였다. 내가 입학한 학교도 야구부가 있었고, 첫 대회였던 대통령배 1회전에서 선린과 붙었다. 1회전인데도, 야구에 관심이 많았던 재단의 후원으로 단체 응원을 갔다. 선린이 이겼다. 3학년이 된 송구홍이 있었고, 포수였던 김영수도 타격이 좋았다. 마운드에서는 유희곤이 잘 던졌다. 당시 선린의 전력은 좋았지만, 다음 경기에서 어이없이 노히트노런으로 패한다. 상대는 부산의 사이드스로우 권영일. 1대0으로 지고 말았다. 다음 대회였던 청룡기. 서울시 예선에서 우승을 하고 동대문에 나섰지만, 야구부를 재창단한지 몇 해 안됐던 라이벌 덕수상고의 우승을 지켜봐야 했다. 덕수에는 황일권이 있었다. 선린과 덕수는 손꼽히는 명문 상업학교였고, 동문들의 라이벌 의식도 강하다. 이 두 학교는 87년부터 야구 정기전을 벌이기도 했다. 86년은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87~88년에는 별다른 기억이 없다. 핸더핸드 장원혁, 포수 장재중 정도가 떠오르지만 별다른 성적은 내지 못했다.
89년에는 전력이 좋았다. 94년 LG 돌풍을 이끌었던 인현배와 서용빈이 투타의 핵이었기 때문이다. 청룡기 4강 진출. 김경원의 동대문상고에 막혀 결승 진출 좌절. 마지막 대회였던 황금사자기. 박노준 시절 이후 처음으로 중앙대회 결승까지 올랐다. 상대는 최상덕의 인천고. 선린도 우승에 목이 말랐지만, 50년대 김진영 시절 이후 30여년 만에 우승에 도전하는 인천의 의지가 더 강했다. 서용빈이 홈런을 쳤지만, 선린상고는 2대4로 분패하면서 준우승에 만족해야했다.
90년은 그냥 넘어갔고, 91년 다시 우승에 도전했다. 마운드와 타격에서 모두 팀의 주축을 이뤘던 2학년 듀오 좌완 심영호와 우완 이경일이 있었다. 선배 박노준, 김건우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재능있는 선수들이었다. 봉황대기 결승 진출. 경남상고와 함께 91년의 고교야구를 양분했던 신일이 결승전 맞수였다. 무더운 토요일 오후에 벌어졌던 이 경기에서 선린은 초반 찬스를 살리지 못하고, 조성민, 강혁, 설종진, 김재현, 백재호 등 호화 멤버의 신일에게 0대10으로 대패한다. 아쉬운 패배였지만, 심영호, 이경일은 2학년이었으니, 92년을 기약해볼만 했다.
92년. 기대했던 것처럼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렇지만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우승의 기회가 있었던 것은 청룡기였다. 결승 진출. 상대는 공주고. 4대0 완패. 그것도 그냥 완패가 아니라 공주의 에이스 노장진에게 노히트노런을 당했다. 전국 대회 결승전 최초의 노히트노런 패를 당한 것이다.
이후에도 우승 문턱에서 아쉽게 미끄러졌다. 95년 경헌호, 이준 등이 활약하면서 봉황기 결승에 올랐지만, 박명환, 장성호의 충암에 밀렸다. 98년에는 권오준, 손시헌, 정종수, 이종욱 등 멤버는 화려했지만 역시 제대로 성적을 내지 못했다. 90년대 이후 선린야구에서 가장 아쉬웠던 순간은 99년 청룡기였다.
1999년 6월 청룡기 4강전
아마도 1999년은 선린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였을 거다. 그래서 학교나 동문들도 선린의 교기인 야구가 좋은 성적을 내기를 바랬을 것이다. 멤버도 좋았다. 철완…이라기 보다는 고등학교 때 너무도 혹사당했던 전하성이 마운드를 지켰고, 허용이 4번을 쳤다. 6월에 열린 청룡기에서 선린은 다시 우승에 도전한다. 8강전에서 2년생이던 추신수가 이끌었던 난적 부산과 격돌, 연장전에서 허용이 굿바이 홈런을 날린다. 당시 이 홈런은 레프트 폴대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가, 파울인지 홈런인지 논란이 많았다. 부산고 벤치는 격렬하게 항의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쨌든 선린이 이겼고, 행운의 여신은 선린에게 손을 내미는 듯 했다.
4강전. 장준관, 이정호, 박기혁, 이영수 등이 이끌었던 대구상고가 결승에 선착했다. 선린으로서는 해볼만한 상대였다. 4강전 두번째 경기는 선린과 춘천. 춘천고도 휘문에서 전학생을 대거 받아들이면서 만만치 않은 전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래도 무게 중심은 선린 쪽으로 기울었다. 경기 초반은 예상대로 흘러가는 정도가 아니라, 권투 경기였다면 거의 타울을 던져야 할 정도로 선린의 일방적인 페이스였다. 선린은 1회초 선공에서 무려 7 점을 획득한다. 2회에도 추가 2득점. 9대0의 리드이다. 누가 봐도 선린의 결승 진출은 확정적으로 보였다. 김동건, 최승순, 황이갑이 있었던 춘천도 반격을 했다. 6회까지 4점을 만회하면서 스코어는 4대9. 그러나 선린은 7회에 2점을 도망간다. 4대11. 선린 응원단에서는 소주 파티가 벌어진다. 내일 결승은 6시30분 야간경기, 1루쪽 스탠스에 모이자고 선린 동문들은 약속한다. 그러나 7회말 춘천이 대거 5점을 기록한다. 9대11. 갑자기 타이트한 분위기로 바뀐다. 마운드에 서 있었던 전하성. 이를 악물고 던진다. 8회는 양팀 모두 득점없이 넘어갔고, 9회초 선린 공격도 무위로 끝났다. 마지막 춘천고의 공격. 안타와 4구, 수비 에러가 겹치면서 두점을 추격. 10대11이다. 그렇지만 아웃카운트도 두개가 늘엇다. 11대10 선린 리드. 9회말 2사 만루였다. 아마도 마지막 타자는 춘천의 8번타자였을 것이다. 전하성이 공을 뿌렸다. 알미늄 방망이에서 나는 경쾌한 타격음. 공은 우익수 키를 훌쩍 넘겨버렸다. 12대11 춘천고의 대역전승. 0대9의 리드를 뒤집어 버린 것이다. 선린선수들은 모두 운동장에 드러누워버렸고, 눈물을 흘리는 선수도 있었다. 올해 청룡기 강릉고가 일으켰던 감자바위 돌풍의 원조는 99년 춘천고였다.
이후 선린상고의 교명은 선린인터넷고로 바뀌었다. 그리고 남녀 공학이 됐다. 문현정, 윤희상 등이 나오기도 했지만 선린 야구는 서울에서도 중위권 팀이 돼 버렸다.
올드팬에게 선린상고라는 이름은...
성적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우승을 못했다고 해서 운동장에서 흘린 땀의 가치가 폄하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선린이 우승하는 것을 한번 보고 싶다. 선린 동문이 아니더라도, 올드 팬들 대부분은 선린이라는 이름에서 아련한 향수를 느낄 것이다. 80년대 중반 부터야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팀들도 꾸준히 성적을 냈지만, 70~80년대 지방팀, 특히 영남권 팀의 독주 속에서 꾸준히 좋은 성적을 올렸던 팀은 거의 선린상고가 유일하지 않았나 싶다. 또한 내가 야구를 처음 보기 시작했던 79년 이후 몇 년간은 고교 야구의 마지막 황금기였고, 그 중심에 선린야구가 있었기에 선린이라는 이름이 주는 느낌이 내게는 더욱 각별하다.
명해설가 박상규, 영남대 명감독 배성서, MBC 코치 김충, 한방있다 김태석, 재치있다 한동화
명투수 유남호, 안타까운 이별 이길환, 날다람쥐 김광수, 찬스에 강한 이선웅
왼손거포 박준영, 홈런왕 김우열, 쌕쌕이 이해창, 구원왕 윤석환, 해태 1대 유격수 조충열
스카우터 유지홍, 야구천재 박노준, 비운의 명투수 김건우, 서울 홈런왕 김상호
개그맨 이병훈, 미스터LG 송구홍, 사이클링히트 서용빈, 기교파 인현배
3할은 친다 이영우, 재기한다 이승호, 더 잘해라 경헌호, 새신랑 될 이재영
KO펀치의 K 권오준, 군복무중 손시헌
모두 동대문에서 만났던 선린 출신들이다.
이번 황금사자기에 선린도 출전했다. 동대문 야구장이 사라지기 전 선린이 다시 우승하는 것 봤으면 좋겠다. 꼭 한번 봤으면 좋겠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