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에서 남한강을 바라보며
경주 배광식 (서울대 치대 교수)
때이른 녹음이 여름의 문턱을 앞질러 넘어가고 있는 5월 초, 평생도반과 강변길을 따라 양평의 찻집에 이르렀다. 별일이 없는 주말이면 즐겨 찾는 곳이다.
언제나처럼 차 한 잔을 마시며, 유리창 너머로 잔잔한 남한강물을 바라본다. 북한강의 기세찬 물줄기보다는 유유한 남한강이 좋은 것을 보면 이제 청년은 아닌 모양이다.
창 앞의 은행나뭇잎이 미동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밖은 바람 한 점 없는 시간이다.
강물은 거울면처럼 평평하고, 정지해 있는 듯이 보인다. 저 강물이 흐르고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 때면, 이따금 북쪽으로 떠내려가는 나뭇조각이 남에서 북으로 강물이 흐르고 있음을 알려준다.
미동도 하지 않던 은행잎이 갑자기 살랑거리는 것을 보니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바람에 응해서 강물에 잔잔한 물결이 일어 북에서 남으로 파상지어간다.
바람 자던 때, 수면에 북으로 떠내려가는 나뭇조각의 지표가 없었다면, 깜빡 바람에 일은 물결의 남쪽을 향하는 파상방향에 속아, 강물의 흐름이 실제 흐름과 반대방향인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강물을 계속 바라보며, 오대산 골짜기를 굽이쳐 흐르는 골물을 떠올린다. 맑은 물이 졸졸 소리내며, 냇바닥의 조약돌과 바위 등을 타넘는 몸짓이 그대로 물표면에 드러나던 계곡변溪谷邊을 따라 상원사에 갔었던 기억의 한 단편이다. 얕은 물에서는 밑바닥의 평평하지 않음이 그대로 물표면까지 그 굴곡을 드러낸다.
반면에 이곳 남한강은 맑은 물임에도 강바닥의 조약돌과 높낮이가 들여다보이지도 않고, 그것을 타넘는 강물의 몸짓이 강물표면에 드러나지도 않는 것을 보면 강물이 꽤나 깊은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흐른다! 지금 큰바위를 무사히 넘어섰다!” 졸졸 소리내며 큰 몸짓으로 자랑하던 시냇물이 모이고 모여 큰 강물을 이루면, 흐른다는 겉모습 없이, 소리도 없이, 바닥의 깊은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그러나 흐름을 멈추지 않는 도도滔滔하면서도 진중한 모습이 된다.
어느 아지랑이 피던 봄날에 햇빛을 따사롭게 받으며, 하늘을 향한 그리움으로 수증기로 피어올랐던 물방울! 말라가던 냇바닥에서 숨가빠 하는 송사리떼를 마지막까지 품으려 했으나 작렬하는 태양의 이글거림을 이기지 못하고 마지못해 하늘로 솟아오른 물방울! 상수리 나뭇잎에 아침이슬로 맺혀있다가 미처 굴러떨어지지 않고 증발한 물방울! 꿩의 깃털을 적시고 있다가, 꿩의 체온을 안은 채 하늘로 날아오른 물방울!
가지가지의 기억을 지닌 이들 물방울들은 뿔뿔이 흩어져 하늘을 떠돌다가 하나에서 온 옛기억을 되살리고, 하나로 돌아가려는 성품性品에 따라 서로 모여 구름을 이루고, 하나로 돌아가려는 원력이 증장增長하면 비로 되어 다시 산과 들로 내려와, 이 골 저 골을 기웃거리다가 내에 모이고, 이 내 저 내에서 물풀과 물고기들과 노닐며, 모난 돌들을 무수히 쓰다듬어 둥글리다가, 이제 이 남한강에 모였고, 앞으로 바다를 향해 흘러 흘러 하나의 꿈을 이루어 갈 것이다.
모든 물방울들이 각자의 아리거나(고수苦受), 즐거웠거나(낙수樂受), 그저 그랬던(사수捨受) 기억들은 모두 접어둔 채, 손에 손잡고 고향인 바다를 향해 잠잠히 내관內觀을 하며 겸손함으로 아래로 아래로 흘러간다. 그래서 상선약수(上善若水:최상의 선은 물과 같느니)라 했던가?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과,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모터보트가, 지나간 기억들을 흔들어 깨우는 심술만 부리지 않는다면, 강물면은 파란 하늘과 한 점 흰구름을 여실如實히 받아들여 비추어준다.
강물에 멎은 시선을 들어 강건너 멀리 앞산을 바라본다.
앞산의 두 봉우리 사이를 타고 넘는, 흰 눈으로 덮였던 꼬부랑길은, 겨우내 산너머 길이 닿은 곳에 펼쳐질 정경에 대한 호기심만을 키운 채, 이제 무성한 나뭇잎에 가려 겨우 그 초입을 간신히 식별識別할 수 있을 뿐이다.
꽃을 피워 씨앗을 잉태하고, 공기와 햇빛을 바라는 열망으로 잎을 피우고, 또 하나의 ‘나’가 될 씨와 열매를 맺은 후, 무성한 잎들을 땅으로 돌려보낸 무욕無慾의 세월에는 선명히 보이던 길이, 이제 새로 움튼 욕망의 소산들인 무성한 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보아놓은 길이기에, 언제나 눈여겨 두었던 길이기에, 언젠가는 넘어가기로 작정한 길이기에 그 초입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다.
하늘을 날기를 포기하고 강변에 정착한 채, 동체를 파란색으로 물들여 하늘에 대한 잔잔한 그리움을 달래는, 은퇴하여 찻집으로 쓰이는 비행기 너머에 그 길은 있다.
삼만 피트 상공과 땅을 수시로 오갔을 비행기! 천변만화千變萬化의 날씨 속에서 구름 위로, 아래로, 구름 속으로, 또는 윗구름 층과 아랫구름 층 사이로 누비던 수없는 항행의 기억, 도움닫기로 땅을 박차고 오르던 씩씩한 기상, 최대한 가볍게 땅에 사뿐히 내려앉던 날렵함은 모두 블랙박스의 일지로 감춘 채, 은퇴하여 내부로 내부로 침잠하는 비행기는, 찻집 안에 몸을 숨긴 나와 함께 그 길 초입을 지켜보고 있다.
사람이 지나다니면 인도人道가 생기고, 성인이 지나다니면 성도聖道가 생긴다. 부처님께서 지나가는 동안 만들어진 길[불도佛道]을 정통조사正統祖師들께서 지키고 넓혀오셨고, 큰스님께서 다시 한 번 몸소 펼쳐보이셨다.
문도 따로이 없는 넓은 길이고[대도무문大道無門], 이정표가 잘 정비된 길인데도, 길가의 구경거리에 팔려 멈칫거리다가 앞장서 걸으시던 큰스님께서 산모롱 너머 멀리 앞서가셔서 이제 그 육성이 들리지 않을 만큼 거리가 떨어졌으니, 새삼 나태한 세월이 안타깝고 부끄러워진다.
잃어버린 소발자욱을 찾는 목동인 양, 선서善逝의 발자욱이나마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동행하던 도반들은 어느만큼 있는 것일까? 아니 모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데, 단지 내가 무명無明으로 가리워 동행하는 듯 착각하였던 것인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스스로에게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 하셨는데, 나는 큰스승께서 열반하신 지금, 의지할 만한 ‘스스로’이고, 의지할 만큼 진리에 눈 떠 있는가?
부처님 열반시에 슬피 울던 제자들을 ‘공부[부처님이 누누이 강조하신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도리에 대한 공부]가 그만큼 밖에 안되었을까?’라고 의심하던 나는 왜 자꾸 슬퍼지고 눈물이 나는 것일까?
큰스님의 출가의 동기가 되었다는 ‘수릉엄삼매도’를 나는 얼마나 관심觀心을 가지고 천착穿鑿하였던가? 계시는 동안은 정진이 게을러 의문이 없었고, 이제 갑자기 몰려오는 의문들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은 많은 제자들이 상호보충하며 법신사리法身舍利를 이루었고, 금타 대선사의 가르침은 청화 큰스님께서 법신사리法身舍利를 이루었는데, 큰스님의 법신사리는 누가 이루도록 할 것인가?
큰스님께서 못갚고 가신 은혜를 누가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을 것인가?
도처에서 큰스님 가신 후 길을 잃고 헤매며, 망연자실茫然自失한 선남자 선여인들에게 누가 용기를 북돋아주고, 안내도案內圖를 건네 줄 것인가?
아미타불을 지성으로 관觀하고 념念하오니 길을 열어주소서!
이 소리를 살펴주소서!
삼계화택三界火宅의 생사生死를 여읜 저 언덕에 건너갈 지혜를 갖추게 하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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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왜 나는 슬퍼지고 눈물이 나는 것일까.. 큰스님의 법신사리는 누가 이루도록 할 것인가.. 그러셨군요. _()_
나무아미타불! _()_
평소에 말씀 중에도 잔잔한 바다 같이 고요한 경계에 노니시다가도 어쩌다 큰스님 이야기만 나오면 울컥하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글을 보니 거사님의 절절한 큰스님 그리워하심이 또 한번 깊이 느껴집니다. _()_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마하반야바라밀!!...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큰스님의 법신사리는 누가 이루도록 할 것인가.나무아미타불..((()))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