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과 멋 그리고 성지순례] 수원교구 천진암성지 *
목자없이 태어난 한국 천주교회 '요람'
가톨릭 신자치고 천진암(天眞菴)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천진암이 어떤 성지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 같다. 과거에 분명히 가본 곳인데 다시 가려고 하니 '한국교회 시작과 관련된 성지'라는 막연한 생각 말고는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인터넷을 뒤졌더니 자료가 술술 나온다.
덕분에 많은 사실을 알게 됐다.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 다섯 분(이벽ㆍ권일신ㆍ권철신ㆍ이승훈ㆍ정약종)이 1779년부터 한국교회가 창립되는 1784년까지 강학회(講學會)를 열면서 한국교회의 출발을 잉태한 곳, 그리고 그 다섯 분이 묻히신 곳, 더불어 한국교회를 빛낸 평신도 지도자 성 정하상 바오로와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의 묘지가 있는 곳, 100년 계획으로 엄청난 규모의 대성당을 짓고 있는 곳….
개인적으로는 한국교회 시조 이승훈(베드로)이 공부했고, 같이 공부하던 이벽의 권유로 중국에 가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고, 또 죽어 묻힌 곳이라는 사실이 가장 뜻밖이었다.
천진암이 있는 경기도 광주시는 서울에서 지척이지만 중부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성지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깊은 산골짜기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꼬불꼬불 산길을 돌고돌아 가다가 막다른 골목에서 펼쳐진 너른 광장, 천진암성지 주차장에 다다랐다.
주차장에서 앵자봉 산기슭 성지 쪽을 바라볼 때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커다란 흰색 십자가다. 대형 십자가까지는 500m 정도 될까, 포장이 잘된 너른 길이지만 경사가 꽤 가파른 탓에 등산하는 기분이다.
십자가 동산에 올랐더니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광야 같이 너른 땅이 순례객을 맞는다. 천진암 대성당 터. 무려 5만여평이란다. 이 자리에 어떤 모습의 성당이 들어설지는 야외 제대를 중심으로 오른쪽과 왼쪽, 그리고 정면에 서 있는 철골조 문을 한바퀴 둘러 전시돼 있는 사진들을 보면 된다.
설명을 읽어 보니 이곳에 세워질 성당은 건평 8000여평에 3만석 규모라고 한다. 서울 명동성당이 430여평에 1500석. 그렇다면 명동성당보다 무려 스무배나 큰 성당이 아닌가. 쉽게 상상이 되질 않았다. 죽기 전에 완공되는 모습을 보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발걸음을 제대 오른쪽으로 난 산길로 돌렸다.
창립 선조 5위(位) 묘역으로 올라가는 산길.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맑고, 마른 단풍잎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초겨울 정취를 더한다. 손이 시릴만큼 바람이 차가웠지만 마음은 더없이 포근해졌다. 한적한 오솔길을 오가는 등산객이 눈에 많이 띄었다. 어떤 아름다움도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아름다움에는 비길 수 없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하는 길이다.
10분 정도 걸어 올라갔을까, 강학회 자리임를 알리는 표지석이 눈에 들어왔다. 다섯 선조가 강학회(요즘말로는 세미나)를 통해 당시 학문적 연구 영역에 머물던 천주학(天主學)을 신앙의 차원으로 승화시킨 곳.
다섯 선조는 강학회 터 뒤편에 있는 묘역에 나란히 묻혀 있다. 천주를 살아계신 하느님으로 받아들인 바로 그 자리에 묻힌 다섯 선조는 한국교회가 길이길이 기억하고 감사해야할 분들이 아닐 수 없다. 햇살 따스한 묘역에서 잠시 머리 숙여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정하상과 유진길 성인 묘소로 발길을 돌렸다. 입구 쪽으로 되돌아 나오다 마주치는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접어들면 된다. 거리 표지가 따로 나와 있지 않기에 대충 5위 묘역까지 가는 시간, 그러니까 10분 정도 걸리겠거니 생각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들어섰는데 걷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구비구비 오르막 산길에 표지판은 보이지 않고 땀만 뻘뻘 났다. 사실 먼 길도 아니었다. 삼거리에서 묘소까지 20분이나 걸렸을까, 평소 운동을 하지 않은 게 후회막급이다.
그래도 막상 정하상ㆍ유진길 성인 묘소에 도착하니 상쾌했다. 아담한 묘소가 아주 단정하다. 뒤돌아서는 발걸음이 오랜 만에 성묘하고 돌아가는 것처럼 가벼웠다.
천진암을 찾았을 때 한번 꼭 들러볼 데가 대성당 터 왼편에 있는 성모경당이다. 1000명은 들어갈 수 있는 큰 성당인데, 다섯 선조와 관련된 자료와 유품들을 두루 볼 수 있는 박물관을 겸하고 있다. 이승훈과 이벽 성조의 유해(상투)를 바라보고 있자니 감회가 남다르다. 성모경당은 평소 닫혀 있지만 성지 안내소(031-764-5994)에 말하면 문을 열어준다.
성모경당 위쪽에는 내년 6월께 1000평 규모의 박물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내년 여름에 천진암을 찾는 순례객은 5위 선조들과 관련된 자료들을 가지런히 정리한 산뜻한 박물관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천진암성지는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순례객을 맞이하게 될까. 정영철(천진암성지 전담) 신부는 먼저 대성당 건립과 관련해 "부지 매입은 거의 다 끝난 상태로, 2010년까지 골조 공사를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 신부는 이어 "지금까지 천진암은 신자들이 쉴만한 마땅한 곳이 없는 황량한 성지라는 인상이 강했다"면서 "앞으로는 신자들이 편안히 머물 수 있고, 자연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 포근한 성지로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대성당 골조가 위용을 드러낼 때쯤, 먼 훗날 대성당이 완공되는 것을 보게 될 어린 아들과 함께 다시 한번 이곳을 찾으리라 다짐하며 천진암을 떠났다.
글ㆍ사진=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맛집/우산식당>>
천진암 성지 사무실 뒤편 마을에 있는 우산식당(대표 임기숙 마리아, 천진암본당) 된장찌개는 가족을 위한 밥상이다. 손님을 가족처럼 대하는 임씨의 정성이 가득 담겼기 때문이다.
5000원짜리 된장찌개에 따라나오는 반찬이 버섯, 고사리, 총각김치, 참나물, 삭힌 고추, 무말랭이 등 10가지가 넘는데, 어느 것 하나 맛깔스럽지 않은 게 없다. 된장이나 고추장은 물론 웬만한 채소는 직접 집에서 기른 것을 쓴다. 조미료 대신 주로 야채로 우려낸 육수를 사용한다는 것이 우산식당의 자랑. 자극적 조미료에 길든 사람 입맛에는 다소 심심할지 모르지만 그만큼 담백하고 몸에 좋은 것이다.
정영철 신부는 "집에서 먹는 밥, 반찬과 다르지 않아 아무리 자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며 우산식당을 적극 추천했다.
손님들이 가장 많이 찾는 된장찌개 외에도 산채비빔밥과 도토리묵, 오리ㆍ토종닭 백숙, 매운탕 등 메뉴가 다양하다. 임기숙씨는 "음식을 만들 때 내 가족이 먹는 음식을 장만하듯 항상 최선을 다하고 손님 건강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의: 031-762-5866
평화신문 기자 pbc@pbc.co.kr
(사진설명)
1. 경기도 광주시 앵자봉 기슭에 있는 천진암성지 입구.
2. 100년 계획으로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천진암 대성당 조감도.
3.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 이벽ㆍ권일신ㆍ권철신ㆍ이승훈ㆍ정약종 묘역.
오른쪽 작은 사진은 이승훈 선조 묘지석.
[평화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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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이곳에서 밥먹었던 생각이 납니다. 잠실에서 멀지 않기에...!
하느님(天)의 진리(眞)를 깨우친 곳 "천진암(天眞庵)"이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라니...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의 상징인 물고기 어(魚)자가 있는 주어사(走魚寺)가 최초의 강학(천학의 연구)이 열린 곳 이라니.....주님!!~~진정 이곳에 우리교회를 주님의 뜻대로 세우셨나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