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1) 1924 ~ 2015 고흥
대한민국 근.현대 여성작가들 중 경매 시장에서 가장 최고가로 팔리는 화가로는 천경자 화백입니다. 그 뒤를 재불화가 이성자 화백, 보리밭으로 유명한 이숙자 화백, 청바지 화가 최소영, 설치미술가 이불 작가가 뒤를 잇고 있습니다. '영혼의 화가'로 불렸던 천경자 화백의 작품 세계와 그녀가 절필하도록 만들었던 위작 사건까지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천경자 화백은 1923년 전라남도 고흥군 성주마을 외가에서 태어났습니다. 호적에 1년 늦게 실려 1924년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경자의 원래 본명은 '옥자'였고, ‘경자’라는 이름은 소녀시절 재미삼아 지어 붙인 이름입니다.
고흥군청 관리인 천성욱은 박옥자와 결혼하여 장녀 천경자 등 1남 2녀를 낳았습니다. 보통학교 시절 그의 그림 소질을 발견해준 이는 다나까라는 선생이었습니다. 전남여고에 진학한 천경자는 미술과목은 늘 최고 점수를 받았습니다.
다른 과목은 겨우 낙제를 면할 정도였습니다. 물리시험에서 펌프원리를 설명하라는 문제의 답안에 펌프물 깃는 여인 그림을 그려서 제출한 적도 있었습니다. 좋지 않은 성적표를 가지고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에게 혼이 나기도 했습니다.
일본유학을 가겠다고 하자, 아버지의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가난한 집안형편에 유학은 사실상 무리였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마침 읍내에 실성한 청년이 실없이 웃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하루는 저녁도 안 먹은 채, 울다가 웃다가 정신 나간 흉내를 냈습니다.
다음날 아버지의 승낙을 받게 되어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서양화가 체질에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좀더 곱고 미세한 일본화를 택했습니다. 일본화과 1년 선배에 우향 박래현이 있었습니다.
1학년 여름방학때 귀국하여 반신불수의 외조부의 모습을 그려서 이듬해인 42년 22회 조선전람회에 <조부상>이라는 작품으로 입선을 하게 되었습니다. 3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면서 졸업작품으로 외할머니를 그린 <노부>는 43년 제 23회 선전에서 입선해서 힘들었던 유학생활의 보람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 두 작품의 입선으로 화가로서 당당한 교두보를 마련하였습니다.
졸업하던 해에 역에 표를 구하러 갔다가 만난 이가 바로 첫 남편이었던 이철식이었습니다. 일본대 경제학과를 다니고 있던 두 살 많은 이철식의 도움으로 어렵게 표를 구해 부산을 거쳐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이철식의 편지가 계속 집으로 날아왔고 서서히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운명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첫 실수였습니다. 집안끼리 인사를 나누고 초라한 초가집에서 혼례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시누이가 마침 결혼하는 그 해에 사망하여 신행은 다음으로 미루어지고 신혼 초부터 별거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딸을 낳고 몸조리도 제대로 못한 상태에서 모교 전남여고에 미술교사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철식은 직업도 없이 친구집, 친척집을 전전하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해방 후 이념대립이 심각해지면서 그쪽에만 신경을 쓰고 돈 한 푼 벌어다 주지 못했습니다. 23살이 되던 46년에 처음으로 모교에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이때 전시회에 기자들이 초대되었는데, 두 번째 남편이었던 호남신문 김남중 기자도 끼여 있었습니다.
49년 6월에는 서울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처음 이화여대에 미술과가 생겨 학생들의 단체관람을 하는 등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박래현 등과 함께 <여류화가 5인전>을 동화 화랑에서 가졌습니다. 이렇게 40년대는 바로 천경자와 박래현이 등장하여 한국 여류화단의 거목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림이 다 팔리자, 광주로 내려와 조선대에 강사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팔촌 외조카를 데리고 뱀장사 집을 찾아다니며 본격적인 뱀을 소재로 하는 그림을 스케치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모교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기자들에 대한 답례로 초라한 셋방으로 초대해서 식사대접을 했던 김남중과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어느 지인이 시청앞 건물을 사용하라고 해서 처음으로 작업실을 꾸며 그곳에서 <생태: 세번째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이 그림 속의 서른다섯 마리의 뱀은 당시 김남중의 나이였습니다.
천경자는 부산에서 열린 대한미협전에 <개구리><닭><생태> 3점을 출품하였습니다. <생태>는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전시회가 열린 부산 칠성다방의 주방에 숨겨두었습니다. 그러나 공초 오상순시인이 주방에 들어가 그 그림을 보고 소문내는 바람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다시 그 해 6월에 부산 외교구락부에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전시회는 <생태>가 큰 인기를 끌어 그림도 모두 팔렸습니다. 끝나고 축하연을 하는데, 군복차림의 한 청년이 테이블 위에 올라가 탭댄스를 추면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 청년이 바로 한국화단의 이단아 이중섭이었습니다.
천경자는 척박한 채색화의 큰 한줄기를 이루어낸 화가입니다. 천경자의 작품세계는 1942년부터 세계여행을 시작하는 1969년까지를 전기, 그리고 1970년 서초동 시절부터 1990년대까지를 후기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전기에는 주로 현실의 삶과 일상에서 느낀 체험을 바탕으로 삶과 죽음 등 자신의 내면적 갈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