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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의사의 고백 "나는 현대의학을 믿지 않는다"
로버트 S. 멘델스존
과도한 약물처방과 불필요한 수술에서부터 예방철학과 가정 출산까지 현재 제기되고 있는 모든 의학적 이슈들을 되짚어보는 의료 위기 시대에 읽어두어야 할 책
나는 현대의학을 믿지 않는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현대의학에 반대하는 현대의학의 이단자이다. 따라서 내가 이글을 쓰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현대의학의 주술에서 해방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처음부터 현대의학을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믿지 않기는 커녕, 오히려 열렬한 신자였다. 의과 대학생 시절 DES라는 여성 합성 호르몬제 연구가 활발했는데, 현대 의학을 믿고 있었던 나는 이 약에 대해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20년 후 임신 중에 이 약을 투여받은 여성이 낳은 아기들에게서 자궁경부암이나 생식기 이상이 지나치게 많이 발견되었다. 당시의 나로서는 꿈에도 생각치 못한 일이었다.
연구생 시절, 미숙아에 대한 산소요법이 최신의료설비를 자랑하는 큰 병원에서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 치료를 받은 약 90%의 미숙아에게서 약시나 실명 등 중증의 시력장애 (미숙아 망막증)가 발생했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병원은 치료법에서 원인을 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했다.
한편 의료수준이 열악한 근처 병원에서는 미숙아망막증 발생률이 10%미만이었다. 발생률이 왜 이토록 차이가 나는지 교수에게 묻자 그는 이런 대답을 하였다. "제대로 된 치료법을 쓰지 않은데다가 발생률도 정확하게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는 그 대답을 믿었다.
미숙아망막증이 고농도 산소의 투과로 인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안 것은 그로부터 1,2년 후의 일이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병원은 최신식의 고가 플라스틱제 보육기를 설치하였기 때문에 산소가 새지 않고 보육기 안에 그득하여 미숙아를 실명시켰지만, [수준미달의 병원]에서는 구식의, 틈이 많은 덮개가 달린 욕조같은 보육기를 사용해 산소가 많이 샜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미숙아를 실명으로부터 구해준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계속 현대의학을 믿었다.
그 후 나는 어느 연구 그룹에 참가해 과학 논문을 작성했다. 주제는 미숙아의 호흡기병에 테라마이신이라는 항생제를 사용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논문 안에서 우리는 '이 약에 대해선 부작용이 없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그 후의 연구에서 테라마이신을 비롯한 모든 항생제는 미숙아호흡기감염증에는 별로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테라마이신이 함유한 테트라사이클린계 항생제에 의해 수천명의 아이들이 치아가 황녹색으로 변했고, 뼈에 테트라사이클린 침착물이 생기는 것이 확인되었다. 부작용이 나타나기 전에 논문을 쓰면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현대의학에 대한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편도선, 흉선, 림프절에 방사선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이 치료법에 대해 교수들은 '방사선을 쬐는 것은 위험하지만 치료에 사용되는 정도의 방사선은 전혀 해가 없다'고 단언했기 때문에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그러나 '전혀 해가 없는' 방사선이라도 10~20년 후에는 갑상선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 그 후의 연구에서 판명되었다.
마침내 현대의학이 몰고 온 무수한 불행의 씨앗을 잘라낼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렇게 깨닫자마자, 내가 방사선으로 치료했던 환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 중 몇 명은 갑상선종을 치료하기 위해 나에게 다시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왜 다시 치료받으러 와야 하나? 그 고통의 원인의 제공자가 나인데!
나는 더 이상 현대의학을 믿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첨단 의료란 멋진 것이고, 그 기술을 가진 名醫에게 치료를 받으면 건강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의료행위의 당사자인 의사들이야말로 건강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대의학에서 행하는 치료는 효과가 없는 경우가 많다. 효과는 커녕 치료받은 후에 오히려 더 위험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게다가 병이 없었던 환자라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 치료부터 하려 들기 때문에 그 위험성은 점점 커진다.
현대의학을 구성하는 의사, 병원, 약, 의료기구의 90%가 사라지면 현대인의 건강은 당장 좋아질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현대의학은 언제나 과잉진료에 몰두하고 있으며,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중증의 환자에게만 하도록 되어있는 특수한 치료를 가벼운 증상의 환자에겓 당연히 행하고 있다. 일례를 들어보자. [클리브랜드의 멋진 의료 현장]이라는 제목의 기관지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병원의 심장병 치료센타의 지난 1년간의 업적이 자랑스러운 듯 게재되어 있다.
* 총 임상 검사 1,300,000회
* 심전도 검사 73,000회
* CT검사 7,770회
* X-ray검사 210,378회
* 흉부 개심 수술 2,980회
* 총 수술 건수 24,368회
이 모든 처치가 건강의 유지 또는 개선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누구도 증명하지 못한다.
이 기사는 차라리 '의료 흥행 기록' 이라고 부르는 편이 어울릴 것이다. 수많은 환자들에게 고액 처치 한 것을 자랑하고 있을 뿐, 이 '업적'에 의해 도움을 받은 환자가 있는지에 대해선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왜일까?
그것은 이처럼 '의료공장'이 되어버린 병원에서 건강을 되찾은 환자가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이 공장에서는 환자를 병을 고치러 온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저 의료 공장의 경영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재료로 간주할 뿐이다. 이는 의료공장의 현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임산부는 병원에 가지 않는 것이 좋다. 환자로 취급받을 뿐이다. 의사에게 있어 임신과 출산은 9~10개월에 걸친 '병'이고 임산부는 환자일 뿐이다. 정맥주사와 태아감시장치 (fetalmonitor), 각종약물, 거기다가 필요 없는 회음절개 같은 치료를 받고 나면, 마지막에는 의료공장의 단골상품인 제왕절개가 기다리고 있다.
감기에 걸린 사람도 병원에 안 가는 것이 좋다. 의사는 대부분 항생제를 투여하지만, 항생제는 감기나 인플루엔자에 거의 효과가 없으며 오히려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감기를 악화시킬 뿐이다.
산만한 아이가 선생님을 귀찮게 한다 해서 병원에 데려가면 큰일 난다. 지나친 약물투여가 반복되어 결국에는 아이들을 약물중독자로 만들어버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신생아가 꼬박 하루 동안 우유를 안 먹었다고, 혹은 육아 책에 쓰여진대로 체중이 증가하지 않았다고 해서 의사의 말대로 할 필요는 없다. 의사는 모유의 자연적인 분비를 억제하는 약을 줄지도 모른다. 모유가 잘 안 나오게 된 엄마는 아기를 분유로 키우라는 지시를 받게 되고, 결국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건강 검진은 의미 없는 행사다. 접수할 때부터 함부로 취급받다가 정작 의사에게 진찰을 받을 때에는 긴장하여 혈압이 평소보다 올라가게 되고, 결국 혈압을 내리기 위해 대량의 혈압강하제를 맞고 돌아오는데 이렇게 해서 성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임포텐스는 심리적인 원인보다 이러한 약물 부작용이 더 많다.
나이가 들어서 임종을 맞이할 때 병원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하루에 200달러의 입원비를 내면, 최신의 의료기기가 완비된 병원에서 의료진들이 당신의 유언을 들어줍니다. 안심하십시오." 라고 할 것이다. 결국 의료진이란 가족을 대신해 노인의 임종을 지켜봐주는 임금 노동자에 불과하다. 최후의 순간에 가족이 아닌 남에게 유언을 남기고 싶은 사람은 없으며, 그 유언은 심전도 모니터가 내는 신호음 정도로 적을 것이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둘도 없는 소중한 가족 사이를 왜 갈라놓는단 말인가?
의료공장인 병원에게 환자의 가족은 병원비를 내 주는 소중한 존재일 뿐이다.
"의사 선생님은 무서워서 싫어요."
아이들의 이런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그들의 맑은 감성은 위험을 느껴 의사가 무서운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어떤가? 공포감은 그렇게 간단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른들도 실지로 의사가 무섭지만 그런 사실을 남에게 말하지 않으며 자기 스스로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른들은 의사에게서 관심을 돌려, 이상이 있다고 느껴지는 자신의 몸 상태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무서운 일이 있으면 피하고, 무시하고, 도망가고, 애써 대단한 것이 아닐거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 적당한 사람을 찾아 위로받으려 한다. 환자의 이러한 성향이 결국 의사로 하여금 주도권을 쥐게 만드는 것이다.
환자는 의사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
"선생님 제 몸 상태가 어떻습니까? 이제 스스로 건강을 관리할 수 없으니 선생님께 맡기겠습니다. 선생님께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조치를 취해 주십시오."
그러면 의사는 '필요하다고 느끼는 조치'를 취할 것이다.
약의 부작용에 대해 설명하지 않은 것은 이렇게 변명한다.
"만일 제대로 설명하면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가 나빠집니다."
그러니 환자는 의사가 신뢰에 바탕을 두지 않고 자신을 대한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의사는 신뢰에 바탕을 두기는 커녕 환자의 이런 마음을 악용하고 있다. 환자의 신뢰를 잃으면 의사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만일 환자의 신뢰를 배신한다면 의료행위 중 적어도 90%는 불필요한 것이고, 그 불필요한 의료행위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위험성마저 있다는 사실이 공개될 것이다. 더군다나 현대의학은 사람의 병을 고쳐주는 의술과 과학이 아니라 일종의 종교이기 때문에 환자의 신뢰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종교란, 인간의 정신세계 혹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불가해하고 신비로운 형상에 조직을 총동원하여 대처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現代醫學敎'는 삶과 죽음에 따르는 모든 육체적인 생리변화라는 가장 불가해하고 신비로운 현상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인류학자인 제임스 프레이저는 '황금가지'에서 종교를 '자연 본연의 모습과 인간의 삶의 방식에 방향을 부여하여 관리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을 초월하는 힘에 의지하려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에 따르면 현대인은 삶의 방식에 방향을 잡아 관리하는 힘에 의지하려고, 현대의학교에 연간 수천억 달러에 이르는 거금의 '헌금'을 내고 있는 것이다. 의료비라고 불리는 이 막대한 헌금은 뭔가 특별한 목적으로 쓰여 져야 하지 않을까?
모든 종교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인간의 오감을 초월하는 것이 있다고 가르친다. 현대의학교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 가르침에 따라 "왜"라는 질문을 의사에게 던져야 한다.
" 왜 이약을 먹어야 하는가? "
" 왜 이 수술을 받아야 하는가? "
" 왜, 이 치료가 필요한가? "
건강 검진은 일종의 의식이다.
병에 대한 자각 증상이 없다면 굳이 건강 검진을 받을 필요가 없다. 설사 자각 증상이 있다 하더라도 건강 검진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건강 검진이란 진찰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처방전이나 전문인에게 의뢰하는 소개장을 받아 진찰실을 나올 때까지 그 모든 것이 정해진 순서대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의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의사에게 몸을 맡긴 채 의사의 지시에 따르는 것은 그 나름대로는 좋은 일이다. 검사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 검사가 철저하면 철저할 수록 몸은 좋아질테니 말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의사의 진찰은 절대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되기 때문에 한 번쯤 의심을 가져봐야 한다. 진찰에는 늘 위험이 동반되고,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몸에 해를 끼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진찰에 사용되는 도구는 그 자체에 이미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
예를 들면, 청진기는 의사가 성직자 흉내를 내기에 좋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피부에 직접 닿는 그 청진기에 의해 감염되는 경우도 있다.
정말 심각한 병이라면 청진기를 대지 않고 육안으로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선천성 심장병을 가진 신생아인 경우, 피부가 푸르스름하기에 한 눈에 알 수 있고, 또 다른 심장병의 경우에도 몇 군데 진맥만 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대동맥축착증 : 동맥이 좁아지는 현상이면 서혜부 : 불두덩 오목한 곳에 있는 대퇴동맥의 맥박 수가 감소하기 때문에 청진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촉진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청진기로 들을 수 있는 것은 환자의 가슴에 귀를 대면 다 들을 수 있다. 청진기를 사용하는 것은 좀 더 그럴듯하게 보이려는 제스처일 뿐이다. 따라서 삽입부(이어폰)는 귀에 꽂지도 않고 집음부를 환자의 가슴에 대는 의사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전에는 이러한 작태를 너무 심하다고 느꼈지만, 최근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환자측에서도 청진기에 특별한 기대를 하지 않는데다가 병원에 오면 당연히 치뤄야 하는 의식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의사는 환자의 이러한 마음을 임상 현장에서 민감하게 느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청진기에 의한 진찰은 결과적으로 환자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위험한 것이 엄마가 아이를 정기 검진에 데려갈 때이다. 아이의 경우, 청진기에 의한 진찰에서 심장잡음이 확인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은 심장의 맥박에 잡음이 섞이는 현상으로, 어린 아이들 3명 중에 1명꼴로 이러한 증상이 나타난다.
그것을 발견하면 의사는 부모에게 알릴지 말지를 결정하여야 한다. 이 전 같으면 의사만 알도록 진료기록에 간단히 표시만 해두면 그만이었지만, 최근에 와서는 환자에게 정보를 공개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어서 사실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언뜻 보면 의사가 환자의 알 권리를 존중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나중에라도 다른 의사가 이러한 증상을 발견해 자기보다 먼저 부모에게 알린다면 먼저 진료한 의사로서 입장에서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의사는 부모에게 심장잡음에 대해 일러주게 된다. 그때 " 별거 아닌 현상이므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고 부모를 안심시키려 해도 소용이 없다. 부모도 아이도 몹시 놀라 당황하기 때문이다. 이때의 놀라움과 불안은 그 부모와 아이에게 있어서는 일생을 따라다니는 걱정거리가 될 수도 있다. 병을 철저하게 규명하기 위해 부모는 심장학에 정통한 소아과 의사를 찾아다니며 아이에게 심전도 검사와 흉부 엑스레이를 여러 차례 받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심장 카테테르검사 : 가늘고 긴 플라스틱 관을 혈관에 찔러 넣어 심장 속까지 통과시켜 심혈간의 혈압과 혈액의 성분을 측정하는 심장병 검사를 의뢰하게 된다.
몇 가지 연구에 의하면, 아이에게서 심장잡음이 들린다는 말을 들은 부모는 그 후 아이에게 운동을 제한하고 영양섭취에만 신경을 써서 이전보다 많이 먹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 결과 운동부족과 과식으로 아니는 비만이 되고 정말로 심장에 이상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심전도를 기록하는 심전계는 청진기에 비하면 훨씬 더 첨단의료 기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것도 전기장치를 이용한 고가의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같은 검사를 두 전문가에게 판독시켰더니 20%나 다른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동일한 검사 결과를 한 번 더 판독시켰더니 오차가 20%나 더 확대되었다고 한다.
심전도의 결과는 검사 당시의 활동 상황과 시간대 등 심장 이외의 많은 요인에 의해 변한다.
심근경색증 환자의 심전도 검사에 관한 연구에서 심장에 이상이 있다고 인정되는 정확한 진단은 불과 25%밖에 되지 않았다. 전체의 50%는 정상인지 이상이 있는지 확실하지 않은 애매한 결과밖에 얻지 못했고, 나머지 25%는 '전혀 이상 없음'이라는 잘못된 결과가 나왔다. 건강하고 정상인 사람의 심전도 기록의 과반수를 '중증'이라고 오독했다는 보고마저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의사를 비롯한 의료 종사자들이 심장병을 진단할 때 심전도 검사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의존도가 점점 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이런 상상을 하곤 한다.
심장발작을 일으킨 환자가 관상동맥질환 집중 치료실에 누워있다. 지금 이 환자는 매우 안정되고 차분한 상태이다. 그런 그에게 주사기를 든 간호사가 다가온다. 그것을 본 환자는 매우 놀라 당황한다.
간호사는 말한다.
"심전도에 이상이 나타난 응급처치를 시행하겠습니다."
이 간호사는 심전도에 종종 오차가 생기는 것과 심전도의 누전에 의해 심전도가 이상을 나타내는 경우를 지적하는 연구보고가 여러 차례 발표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환자는 필사적으로 호소한다.
"간호사님 부탁합니다. 나는 정상입니다. 맥을 짚어보면 알겁니다."
그러나 간호사는 아무런 동요 없이 이렇게 대답한다.
"맥을 짚어 봐도 소용없습니다. 심전도가 가장 정확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간호사는 환자의 팔에 주사를 놓는다.
이것은 공상이 아니다.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관상동맥질환 집중 치료실에 설치되어 있는 심전계는 전기 충격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환자의 고동을 자동적으로 조정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조정이 불필요한 예도 실지로 수없이 많이 있다.
뇌파계를 사용하여 이루어지는 뇌파 검사는 몇몇 종류의 간질과 경련의 진단, 특히 뇌종양의 진단과 위치 측정에는 그 효과가 인정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뇌파 검사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이런 보고가 있었다. 간질 진단을 받은 환자의 20%가 뇌파도에 전혀 이상을 나타내지 않는 반면 , 정상인의 15~20%가 이상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뇌의 활동 상태를 측정하는 수단으로 뇌파 검사를 신뢰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어떤 연구자가 마네킹의 머리에 젤리를 넣어 뇌파계를 접속시켜 보았다. 그랬더니 '살아있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이렇듯 오진의 가능성이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뇌파 검사는 아이들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장애를 조사하는 주요한 임상 검사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기질성 학습 장애와 가벼운 뇌 손상, 주의 결함, 다동성장애 외에 아직 확실하게 정의 되지 않은 20~30 종류의 다른 증상에 대해서도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논문에 쫓긴 소아정신과 의사들은 모두 입을 모아 뇌파검사의 중요성을 지적하지만, 뇌파도의 수치와 아이들의 행동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되지 않고 있다. 과학적인 근거가 이 정도로 결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뇌파계의 보급율은 급속하게 늘고 있고 뇌파 검사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의식적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최근에는 의사, 교사, 그리고 학부모까지 모두 하나가 되어 아이들의 문제 행동을 의학적으로만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대체로 이러한 패턴을 따른다. 먼저, 아이는 선생으로부터 면담을 요청받아 부모에게 보여준다. 면담에 나선 부모는 선생으로부터 " 이 아이는 기질성 뇌장애나 가벼운 뇌 손상, 주의결함, 다동성장애가 의심됩니다." 라는 얘기를 듣는다. 그러면 부모는 서둘러 아이를 의사에게 데려가 뇌파 검사를 받게 한다. 의사는 100% 신뢰할 수도 없는 뇌파검사에 의존해 진단을 내리고, 또 선생은 가장 관리하기 쉬운 주형에 맞춰 넣기 위해 아이에게 '다동아'와 '학습장애아'라는 낙인을 찍는다. 그 결과 그 아이는 약물에 찌들어 버린다.
의사가 다루는 여러 가지 의료기구 중에서 가장 많이 보급되어 있으면서도, 위험도에 있어 다른 것에 비할 수 없는 것으로 엑스레이 장치를 들 수 있다. 대단히 위험하지만 그것이 종교적인 의의가 매우 크기 때문에 의사에게 있어서 엑스레이 장치와 연을 끊는 것은 아마 가장 괴로운 이별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엑스레이는 의사 자신이 볼 수 없는 환자의 몸속을 투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탓에 의사들은 여드름의 원인에서부터 태아 성장의 신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검사에 엑스레이 장치를 마구 이용하고 있다.
소아 백혈병이 태아 때의 치료, 피폭, 즉 엑스레이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 이미 실증되었지만, 의사들은 그러한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다.
2, 30년 전에 머리, 목, 가슴의 상부에 방사선을 맞은 사람들 중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에게서 갑상선 질환이 발생하였다.
갑상선암은 치과 의사에게 엑스레이 검사를 10회 정도 받는 방사선 양보다도 적은 양의 피폭으로도 발생할 수 있다.
이미 몇 명의 과학자가 미국 의회에서 이렇게 경고한 바 있다.
"아무리 적은 양의 방사선이라도 인체에 비추게 되면 유전자를 손상시키고, 현세대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여러 세대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 엑스레이는 당뇨병, 심장병, 뇌졸증, 고혈압, 백내장 같은 나이가 들수록 걸리기 쉬운 병의 원인이 된다.
암이나 혈액의 이상, 중추신경계 종양의 원인이 방사선에 있다고 지적하는 연구보고는 이외에도 얼마든지 있다.
병원이나 진료소, 치과에서 받은 의료 피폭이 직접적인 사인으로 보이는 사망자의 수가 매년 4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사망과 병에 의한 고통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의과 대학생이었던 1950년에도, 이미 흉부 엑스레이 검사는 사실상 치료에는 별 의미가 없다고 배웠다. 비교적 최근의 조사에서도 이것은 변함이 없다. 맘모그라피: 유방엑스레이 촬영법 라는 유방암 검사의 진단이 정확도가 부족하다는 것은, 실습을 받은 의사도 그렇지 않은 의사도 하나같이 동의하고 있는 사실이다.
방사선 기사가 중증 환자의 흉부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진단한 결과에 대해 어느 조사 보고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24%가 다른 진단을 내렸고, 같은 다시 진단했더니 31%가 다른 진단을 내렸다."
다른 연구에서는 폐에 뚜렷한 이상이 나타나는 사진을 정상으로 오독한 경우가 32%에 이른다고 한다. 전문가의 30%가 진단에 의한 견해가 일치하지 않았고, 20%가 첫 번째와 두 번째 진단의 판정이 달랐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하버드 대학의 연구팀은 방사선 기사에 따라 진단 결과가 다르게 나올 확률이 무려 20% 이상이라고 보고 했다.
그러나 그 위험성과 부정확함이 아무리 지적되어도, 대부분의 진찰실에서 엑스레이 검사는 여전히 성스러운 검사로 숭배 받고 있는 실정이다.
매년 10만명의 여성들이 흉부 엑스레이 검사를 받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맘모그라피가 유방암을 발견하는 것 이상으로 유방암을 일으키고 있다는 과학적 증거가 활자화되어 빈번히 출판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피폭의 의식'이라고 칭할만한 이러한 의료행위는 지금도 많은 곳에서 행해지고 있다. 연중행사가 되어버린 정기 건강 검진과 취업, 입학 때의 집단 건강 검진이 그것이다. 나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나 편지로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신은 매우 건강하지만,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엑스레이 검사를 받아 놓으세요." 라고 권하는 의사가 많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헤르니아(탈장) 수술을 받으러 흉부엑스레이 사진을 여섯 장이나 찍었다고 한다. 그는 방사선 기사들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을 대상으로 조사선 양을 시험한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치과 의사에게 보철 치료를 하러 가서는 무려 서른 장의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환자가 원하니까 어쩔 수 없다' 라든지 '환자가 기대하고 있으니까' 라는 이유로 의사는 엑스레이 사용을 정당화하지만, 환자가 그 정도로 엑스레이를 원한다면 의사는 외관과 소리가 실제의 것과 똑같은 장치를 준비해 촬영하는 흉내만 내면 될 것이다. 그것이 의사로서 할 일이다. 그렇게 하면 병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